영조 시대의 조선 01. 영조의 정통성을 묻다 : 이광좌의 난에 대한 이야기.
연잉군 지지 노론 VS 소론 : 김일경 등 강경파 소론(급소) 대리청정 반대, 노론 핵심인사 제거 → 신임옥사
경종 급사, 영조 즉위 : 소론 강경파 핵심 김일경, 남인 강경파 목호룡 처형 → 급소, 남인 모반준비
정미환국 : 이광좌를 중심으로 한 소론이 정국주도 → 급소와 남인 일부가 무신란 일으킴 → 소론 당국자 병판 오명항, 박문수 종사관 무신란 진압
윤지의 나주 괘서 사건과 심정연의 시권 사건 : 1755 을해옥사 → 천의소감 반포

영조 시대의 조선 02. 밭 가는 영조와 누에 치는 정순왕후 : 친경과 친잠에 대한 이야기.
농업신 신농과 곡식의 신 후직에게 드리는 선농제와 친경이 결합되고, 인간에게 처음 누에치는 법을 가르쳤던 서능씨에게 제사하는 선잠제와 왕비의 친잠이 결합되었다(p.18). 친경은 왕이 농사의 시범을 보이는 동시에 종묘의 제수를 마련, 친잠은 제사 때 입을 제복을 마련한다. (p.32)
영조는 1767년(영조 74/정순왕후 23/세손 16) 중전과 세손 모두를 부각시키고 양자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백성을 위해 시행한다는 명분이 충분한 친경·친잠 의식을 시행했다. 특히 친잠은 광해군 이래 200년만으로(p.119) 공식행사에서 철저한 위계질서를 표현함으로써 주관자인 중궁이 만민의 국모라는 의식을 부각시켰다(p.155).
친경과 친잠이 시행되는 과정 뿐만 아니라 친경을 위한 왕의 행렬을 구경하는 것이 백성들에게는 큰 볼거리였고 축제였는데, 이 축제적 성격에 대한 비판으로 성종 이후에는 중종 대에는 가요(歌謠 기로와 유생, 교방의 여기 등이 바침)와 결채(結綵 궁궐문, 도로, 다리 등을 색종이와 색 천으로 화려하게 장식함)를 없애는 방식이 되었지만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다. 숙종 이후 축제적 분위기가 거의 사그라들고, 영조의 친경·친잠에서는 축제적 성격을 배제시켰다. 영조 이후는 고1871년(고종 8)의 사례밖에 없다.
+ 선농제와 설렁탕에 대한 잘못된 인식
조선 시대 처음으로 선농제를 지낸 왕은 9대 성종이며, 선농제에 제물로 썼던 소를 이용하여 국밥을 만들었다는 역사적 자료는 없다.(p.24) 즉 설렁탕이 세종의 선농단 친제에서 유래되었다는 대중적 설명은 정확히 고증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