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48 카사 로마 '언덕 위의 집'.
p.166 도쿄 카와고에
p.194 마드리드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의 지하 무덤과 대성당
p.39 결국은 다 그런 게 아닐까. 수없이 많은 닮음 속에서도 그 나라만이, 그 도시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장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낯섦을 찾아 나서는 게 여행의 여정이자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p.44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다 자기만의 특색과 순서와 가치관이 있다. 그런 수많은 보기 중에서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엇이 상위이고 무엇이 하위인지, 무엇이 우아하고 무엇이 촌스러운지 정할 권리 또한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온전히 자신이 내린 선택에 귀속되어 있다. 물론 의지가 되는 가족들, 친구들의 충고에 그 방향이 조금씩 조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의 삶을 살아내는 것은 인생의 주인공인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그 모든 결정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단단한지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 하나 다른 이의 삶을 멋대로 재단하고,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고, 멸시하고 비웃을 수 없다.
p.46 기회는 위기라는 가면을 쓰고 온다는 옛 중국의 격언처럼 그때 나는 힘겨운 하루하루를 나 자신을 단단하게 수련해나가는 하나의 성장 과정이라고 생각했고, 고되고 긴 등반의 시간이 없으면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광경 또한 없다고 믿었다. 그 맹랑하지만 순수한 믿음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으며, 그 긴 시간 동안 앞만 보고 묵묵히 걸어나갈 수 있게 해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p.71 여행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자랑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험을 하든 그 순간이 자신에게 최고로 남을만한 기억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어떨 때는 단순하고 정답 같은 여행이 특별하게 다가올 때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베이징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p.78 하지만 즐거워하는 것도 나 자신이고, 후회하는 것도 나 자신이라면 결국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구 상의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과 가치관을 재단하고 점수를 매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내 삶은 온전히 내 자신에게만 귀속되어 있고, 내 인생의 페이지를 채워나가는 것도 언제나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오늘을 마치 지구에서 보내는 마지막 하루처럼 보내자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대비 없이 마음대로 살 수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기 위해서는, 그리고 여행하고 싶은 곳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는 것도 분명 필요했다. 나아가 아무리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곳, 갈 수 없는 때, 갈 수 없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도 납득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저 '나중에', '다음에'라는 흐린 말들만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싶지도 않았다.
p.93 20년 후 당신은,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로 인해 더 실망할 것이다. - 마크 트웨인
p.95 막상 해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처음 한발을 내딛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 생각해보면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이란 것도 그런 상황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이 될 수도, 즐겁고 편안한 상황이 될 수 있다. 삶은 의외로 단순하고 직선적이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때 깨달았다.
p.97 인생이 경험해보지 않은 것과 경험해본 것들 사이에서의 줄다리기 같은 것이라면, 적어도 나는 경험해본 것들이 더 많은 편에서 살고 싶다.
p.100 '조금만 더 배려하고 신경 쓸 걸.' 함께 한 여행에서 내가 느낀 후회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살지만, 삶이란 것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것 같다. 내게는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떠올려보면 철저하게 혼자라고 믿었던 여행 중에서도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배려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낯선 이들의 친절이 없었다면 내 여행은 아마 훨씬 더 퍽퍽하고 무미건조했을 것이다.
p.117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의 세상은 내가 떠난 뒤 멈춰진 상태 그대로이다. 어질러진 방도, 밀린 과제도, 여전하다.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떠남'은 항상 큰 위안이 된다. 모든 것이 그대로라고 해도 결국 나 자신만큼은 어떻게든 변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끝낸 내가 어제의 나와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다면, 한층 더 성숙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하다. 어디를, 얼마 동안 떠나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잊고 지냈던 수많은 나와 마주치는 순간들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행자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p.123 우리는 여행을 다닐 때마다 낯설고 어리숙한 이방인이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의 그 설렘. 여행은 그래서 더 겸손해야 하고, 그래서 더 무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처음처럼 익숙하지 않아야 하고, 당황스러워야 하며, 놀라워야 한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도 그 작은 경이로움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여행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방콕과 하노이는 내게 여행의 설렘을 일깨워준 고마운 장소였다.
p.126 '후회할 것 같은가?' 라는 다소 철학적인 명제였다. 나는 목적지든, 비행기 표든, 숙소든 할 것 없이 일단 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꼭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예를 들면 런던 아이 같은 경우다. 나는 원래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하며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감에 젖는 사람이라서, 대체로 다른 부수적인 것에는 돈을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더군다나 그저 한 바퀴 천천히 돌기만 하는 게 전부인 관람차에 4만 원 가까이 돈을 쓸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런던 여행의 마지막 날 런던 아이에 탑승하는 표를 끊고 그 안으로 올라탔다. 내가 생각해도 의외의 선택이었지만 답은 간단했다. 타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수도 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가볼 것인가? 그럴 때마다 나는 더 가고 싶은 길, 가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길을 선택했다. 그것은 여행지를 선택할 때도, 그리고 그 외 세부적인 여행의 내용들을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p.155 최고의 날은 아직 살아보지 않은 날들이라는 터키의 혁명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말처럼, 그리고 언니가 내게 늘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그날 내 삶과 운명, 그리고 불안한 미래까지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잔잔했던 저녁, 지금은 별이 된 언니가 내게 해주었던 이야기와 니체의 명언을 가슴속 깊이 담았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p.182 하지만 인생에서 찍어나가야 하는 수많은 마침표들은 책을 출판하는 것과도 같아서, 책이 완성되어 나오고 나면 어떤 오류나 실수가 있어도 수정할 수 없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런 불완전한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아쉽고 후회스러운 감정을 전부 다 그 한 권의 책에 고스란히 담아두되, 자주 펼쳐보지 않기로 다짐했다. 나는 이제 막 두 번째 챕터의 첫 문장을 적어나가려던 참이었고, 새로운 미래가 내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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