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는 우울한 아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일찍 재혼하고, 혼자 살면서 아이들과도 좀체 어울리지 못한다. 그에게 다가왔던 목사의 딸 소망이가 그나마 하나 있는 친구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소망이를 따라 대학교까지 진학하지만, 소망이와 멀어지고 과 생활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 데다 금전적인 어려움까지 겹친 성우가 휴학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오후 다섯 시의 외계인>은 명랑한 외계인과 성우가 함께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며, 성우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에는 훌쩍 자라나 있다.

 

착한 사람이라며 성우를 대뜸 고용하는 FBI 사장님과 카페를 핸드백 가게라고 말하는 사장님의 동생 사모님, 투덜거리면서 사모님의 시중을 드는 집사, 옆 가게의 주인과 알바생이며 커피를 내리고 초콜릿을 팔고 타로점을 치는 점쟁이와 영희, 남쪽으로 오는 북극곰, 명랑한 외계인 용관이. 유쾌한 캐릭터들의 대사에 깃든 개그며,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는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어 보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초반에는 엄청난 적인 듯 보이던 FBI조차 나중에는 외계인과 교류하게 되는 것이나(이 부분은 좀 뜬금없는 느낌. 무거운 현실이 갑작스레 가벼운 환상으로 끌려내려졌다고 해야 하나. 지속적이지 않는 잠시의 환상이면 나중에는 더 무거운 짐으로 되돌아 올텐데?) 눈물이 전염되고, 눈물로 체내의 수분을 다 흘려냈다간 생명이 위험해져서 울면 안 된다는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답게 '그리고 모두 행복해졌습니다'라는 엔딩이 잘 어울리는 책이다.

 

멀리 일억 년 후에는 지금의 힘겨움은 존재하지도 않은 가벼움이 될 것이다……라는 말은 멋지지만, 환상적이랄 수 있는 분위기와 맞물려 자칫 현실에서 등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필로그 같은 '포크의 사용법'에서 나온 이야기도 성우가 발 디딘 장소는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고. 반대로 환상을 꿈꾸지 않으면 현실은 마냥 무겁고 힘들기만 한 것인가? 라는 생각도 슬쩍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은 던져두고, 재미있었다. 성우는 이제 오후 다섯 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


"나는 슬픈 일이 있으면 일억 년 후의 바다를 상상해요."
벌써 효과가 있는지 용관이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지구는 일억 년이 지나도 지금이랑 기후가 비슷할 거래. 여전히 생물이 살기 좋고 물도 많을 거래요. 하지만 지금 있는 동물들이 일억 년 후에도 남을지는 모른대. 사람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일억 년 후에는 지구만 있고 나머지는 다 바뀌는 거예요."
"그래?"
외계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다니 신기한 일이다. 용관이는 어디서 들었을까?
"해도 똑같이 뜨고 지고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똑같은데 다른 건 모두 처음 보는 신기한 거로 바뀌는 거예요. 내가 보여 줄게."
용관이는 제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얹었다.
(중략)
일억 년 후의 바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지구에서 인간은 사라지고 인간이 만든 문명도 사라진 후다. 나를 미워한 사람, 내가 미워한 사람, 우리가 주고받은 슬픈 말, 눈물, 한숨, 분노까지 모든 것이 사라진 후다.
나는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 놓인 돌멩이다.
나는 슬픔도 기쁨도 느끼지 않는다. 따뜻한 바닷물이 가끔 나를 적셔 주지만 돌멩이인 나는 느끼지 못한다. 그 자리에서 조용히 바다를 바라볼 뿐이다. 바다에서 반복되는 일출과 일몰을 바라볼 뿐이다.
나는 혼자지만 외롭지 않다.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이 혼자니까. - p.170

/1004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