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를 읽었다.
"버려지는 존재의 슬픔이 있는 한 오늘도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신화나 설화를 통해서 너무나도 익숙한 바리공주 이야기를 작가가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증과 함께 시작했는데, 단숨에 읽고야 말았다."
책 뒷표지에 더할 것 없는 감상을 느껴, 옮겨쓴다. 바리는 참 익숙한 이름인데, 문장도 참 예쁘고 이야기 곳곳이 꽉 찬 듯 느껴졌다. 바리를 소재로 한 동화책은 물론이고 다른 소설들도 있는데, 한 번쯤 읽어볼까 하고 추가해둔다. :-)
p.18 버려도 버릴 것이고 던져도 던질 것이니 바리공주라 지으라는 오구대왕의 마지막 말이 떨어지는 순간, 눈물로 낭자해진 길대부인의 얼굴이 체념으로 일그러지는가 싶었다. 마침내 고개를 떨군 채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일어서는 길대부인의 얼굴에서 살기가 이는 듯한 푸른 서슬에 돋는 것을 지켜보던 노老상궁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이십여 년 간 길대부인을 모셔왔으나 오구대왕 앞에서 저토록 싸늘한 서슬이 서는 것을 처음 보았다.
p.68 노을빛을 머금으며 초저녁 달빛이 익어갈 즈음 너럭바위로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앉은 바리공주가 손바닥에 놓인 동백나무 잎사귀 한 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피운 꽃을 모가지째 발밑에 떨구고 서있던 동백나무가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수미산 정상 만년설이 얼음 깨지는 소리를 내며 우릉, 울었다. 해토머리에 이르면 먼 산봉우리의 얼음 깨지는 소리는 한층 더 처연해지곤 했다. 바리공주가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동백나무 잎사귀의 가장자리를 가볍게 접어 입술에 갖다 대었다. 두 손으로 살풋 쥔 짙푸른 동백나무 잎사귀가 붉은 입술 사이를 칼끝처럼 가르는가 싶더니 구슬프고 비장한 소리를 뿜어 올렸다. 희디흰 만년설이 달빛을 튕겨 올리는 듯한 소리였다. 수미산의 만년설을 독대하며 불기 시작한 초적이라 그런 걸까. 바리공주의 초적 소리는 고독하고 단단했다.
p.71 똑같은 나뭇잎도 계절에 따라 소리의 질감이 달라졌다. 봄 잎들과 야들야들한 얇은 잎새를 지닌 것들이 날카롭고 맑은 음색을 주로 내는 데 비해 겨울 잎들과 두텁고 단단한 잎새를 지닌 것들은 선이 굵고 힘찬 소리를 주로 내었다. 바리공주가 특히 좋아하는 잎사귀는 몇 차례 눈보라를 맞으며 붉은 꽃을 매단 동백나무 잎사귀와 배꽃 질 무렵의 산배나무 잎사귀였다. 동백잎과 산배나무잎은 화려하고도 깊은 공명을 지니고 있었다.
p.95 버려졌기 떄문에 바리는 자신을 더욱 사랑했다. 한 번 버려졌으니 절대로 두 번은 버려지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더욱 사랑해줘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비럭공덕할멈과 할아범의 지극한 사랑은 바리를 그렇게 키웠다.
p.127 휘여, 불나국 내 아버지도 지옥불의 고통을 면치 못하겠구나. 남아에게 권좌를 전수하여 대통을 잇게 해야 한다는 법도는 대저 어디에서 왔으며 그 관습의 감옥에 갇혀 제 자식을 버린 우매한 영혼은 어찌 구제받을까나. 인간의 제도 자체가 악이라면 그 구렁텅이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생로병사가 애초에 고통일지라도 생로병사는 자연의 이치건만, 인간의 제도와 관습이 갖에하여 생긴 우매한 마음의 생로병사는 도대체 어찌 치유한단 말인가.
p.134 지옥을 건너오면서 눈물을 속으로 삼킨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수척하게 깊었다. 그간 무쇠 옷은 옷소매며 앞섶이 많이 닳아있었다. 손등이며 손가락 끝이 죄다 갈라터지고 얼굴의 살결도 거칠게 터서 외형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으나, 바리공주의 얼굴에선 단단하고 투명한 빛이 그윽하게 배어 나오고 있었다. 강하고 고독한 바리의 눈빛은 첫새벽 이슬을 그대로 얼려놓은 듯한 영롱함으로 가득했다. 목표를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가고자 매 순간 자기 자신과 맨얼굴로 만나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하고 환한 빛이 바리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p.167 어떤 때엔 반짝이는 은빛 억새꽃들이 물결치는 애기봉 산마루에서였고 어떤 때엔 핏물이 들 것 같은 철쭉밭에서였고 원추리 가득한 능선이거나 연둣빛 새 잎이 막 돋기 시작하는 산죽밭이거나 산목련이나 후박나무꽃이 지등처럼 어여쁜 꽃그늘을 만든 산비탈이기도 했다.
p.168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지극한 공경의 마음으로 오래 들여다볼 때 꽃의 빛깔과 향기가 매 순간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p.174 휘여…… 달이여…… 달의 물속에 핀 수천의 꽃이여……. 달 속으로 수천수만 장의 꽃잎이 흘러가는 밤이었다. 달의 즙이 지상의 아픈 나무들의 산도産道를 타고 흐르면서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p.195 "저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이 궁 안에 있지 않습니다. 어머니. 소녀는 이제 처처에 가득한 슬픔을 위로하고 억울한 혼령들을 쓰다듬어 씻기는 만신의 인로왕이 되겠나이다."
p.196 "세상에 하고많은 공덕이 있건만, 왜 하필 죽은 사람들을 이끄는 고된 일을 하려 하느냐?" 애처롭게 바리공주의 어깨를 붙안는 길대부인에게 따스한 목소리로 바리공주가 말하였다. "죽음은 삶과 한 쌍이더이다. 죽음이 죽음으로만 방치되면 재앙일 것이로되 사랑을 얻으면 삶이 되더이다. 갓 태어났을 때 이미 한 번 죽은 저를 어머님의 사랑이 살리셨고, 수미산에 버려져 다시 죽은 저를 비럭공덕할멈과 할아범의 사랑이 살리셨고, 버려진 존재라는 덫에 걸려 내가 누구인지 찾지 못한 채 헤매던 저를 약수지킴이 무장승의 사랑이 살렸습니다. 인생에는 매번 죽음의 순간이 닥치나 사랑이 없으면 죽음 앞에 엎어질 것이요 사랑이 존재한다면 삶이 되는 것이 생사의 이치임을 알았나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이 될 수 있도록 이끌고 인도하는 일이야말로 제가 세상에서 하고픈 일임을 생명수를 구해 오는 여정을 통해 깨달았사오니 어머님은 부디 통촉하시어 제가 행복한 길을 가도록 축원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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