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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송아리
진주 지음 / 신영미디어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연재글로 읽었기에, 책으로는 퍽 늦게 접했다. 담박한 한지무늬에 붓으로 쓴 듯한 제목의 서체, 연재글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있는 표지를 펼쳐 한 편 한 편 읽었던 글을 한달음에 읽어내려갔다.
조선의 종친으로서 굴레에 묶여 살아가는 해평군 서와 유민의 딸로 아비에게 팔리려던 차 서에게 구해진 연. 서는 연의 미소를 보며 위안을 얻고, 연은 서를 만나 (그녀의 자매가 걸어온 길을 보면, 연은 분명 행운이었던 것이다) 인생이 변화한다. 서로에게 애틋한 연심을 품지만, 종친의 불안한 삶이기에 연을 붙잡을 수 없는 서, 신분차 때문에 감히 마음을 내보이지 못하는 연. 이윽고 둘은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함께하게 되지만, 여전히 종친이며 그 종친의 첩밖에는 되지 못했다. 결국 위태로운 정국에 휘말려 두 사람 모두에게 위기가 찾아드는데…….
조선 정조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른바 정석적인 역사적 인물들과, 작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가상 인물들이 어우러진 가운데, 시대의 물결에 휩쓸릴 수밖에 없으나 그만큼 아름다운 사랑이 있다. 서와 연이 주인공이지만 서의 어머니 세대부터, 서의 친우 윤겸과 서와 연 모두와 기막힌 인연으로 이어져있었던 도혜, 눈물밖에 남지 못했으나 불꽃같았던 사랑을 한 온경... 하나하나가 솔직히 사랑하여 제 길을 걸었다. 시대물이지만, 움직이는 인물들은 현대와 다를 것 없었다. 사랑하였노라, 그 말만 남았다.
장미의 정원, 은월연가, 문 플라워, 바람이 분다, 어루만지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진주님 소설을 몇 권이나 읽었다. 은은하니 고요하며 반듯한 소설들. 조선판 사사생이라는 말답게 꽃송아리에서 묘사되는 녹음 한 켠에선 남우와 이현을 떠올렸다. 사사생과 꽃송아리를, 남우와 이현·서와 연을 나란히 꽂아두고 언제고 눈 아리도록 진초록 담담함이 필요할 때 펼쳐보려 한다.
죽음도 삶도 함께하자 굳은 약조하였으니
당신의 손을 잡고서 당신과 해로하리라. - 시경 격고 4장 중에서, p.325
"세상과 맞설 힘이 제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중한 이들을 지켜 낼 수 있는 힘이…… 그런 힘이 제게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때문에 (……). 헌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는, 저는 어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비를 그치게 할 수는 없으나 그 비를 피하지 않는 사람이, 무수한 정한을 가슴에 묻고도 기꺼이 세상의 무게를 견디는 사람이 바로 강한 사람이다. 너는 그런 사람이다, 연아. 허니 어떤 순간이 와도 네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약조해 줄 수 있겠느냐?" - p.525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남아도 해가 될 뿐이며
부귀의 지극함도 거짓되고 수고로우니
어찌 산속 조용한 밤
향 피우고 조용히 앉아 소나무 소리 들음만 하리오. - 단원 김홍도, 산거만음, p.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