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애보 4
권교정 외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 스포일러 주의


순애보. 여러 작가진의 멋진 단편이 돋보이는 이 앤솔로지가 어느새 네 번째다. 이번 주제는 '나이차 사랑', 권교정, 임주연, 아이반, 김세영, 이시영, 유시진 작가가 참여했다.

권교정 <염소치는 사람들>.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알까? 세상에 존재하는 중 가장 강력한 마나의 덩어리를 쥐고도 아무 반응이 없다는 게!" 마법이 사라진 대마법사 투게와 염소치는 사람 얀달의 이야기다. 마법이 사라진 투게는 얀달에게 이끌려 산중턱으로 들어오고,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생활을 조금씩 배워나간다. 얀달의 어머니는 얀달을 혼자 두고 떠나지 않게 되어, 얀달은 혼자 어머니를 보내지 않게 되어 투게에게 감사한다. 투게의 마법은 다시 돌아오지만 투게는 마법사로 돌아가지 않고, 얀달과 함께 여전히 염소치는 사람(인두린)으로 살아간다. 대마법사였다가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니게 된 남자가 전혀 다른 처지였던 사람을 만나 그와 함께 살아가며 다른 삶의 방법을 배우고 조금씩 서툰 걸음짓을 하는 모습이 좋다. 소박한 일상이 훈훈하다.

임주연 <천년도 당신 눈에는>. "아무도 니 머리에 이래라저래라 못하는 나이가 되면 결혼하자." 시아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온, 십 년도 넘게 안 늙는 동안의 노아. "그런데 너를 만나면서 점점 네 생각밖에 못하겠더라. 눈앞에 있을 때도,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평범한 커플의 이야기 같지만, 초반이 지나면 스케일의 확 바뀐다. 시아에게는 우주 밖의, 엄청나게 느린 시간이 깃들어 그녀의 시간에 지구가 말려들면 흔적도 없이 멸망하게 된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죽이고자 했고, 노아는 꿈으로 그녀에게 접근해 죽이기 위해 태어나 자란 것. 소재는 멋지고 SF의 분위기도 좋았지만 그뿐이다. 단편의 지면에 담아내기에는 너무 복잡한 이야기라 산만하고... 부분부분의 장면은 인상적이지만 전체적인 스토리가 너무 산만하다. 장편까지는 아니라도 반 권즈음의 중편이나 단권으로 만나봤으면 더 좋았을 걸.

아이반 <신부>. 중국풍의 배경. 스무 살에 결혼했다가 아이를 못 가져 쫓겨난 신부와, 지역 유지의 병약한 넷째 아들이 주인공이다. "내가 좀더 나이가 들었다면…. 내가 좀더 건강했다면…." "그랬다면 서방님은 만나지 못했겠죠." 어느 쪽도 기구한 팔자의 두 사람이다. 총각귀신으로 죽게 할 수는 없어 결혼을 시켰고, 병으로 죽으면 부인이 독살했다고 의심해 같이 관에 넣어 장사지내는 가문의 관습이 있기 때문에 가한이 죽으면 소도 죽게 된다. 아픈 몸으로 늘 혼자였던 가한이 소를 밀어내고, 받아들이고, 그녀를 위해 건강해지려 하지만… 소라도 살리고자 힘든 길을 택한 가한의 모습이 애틋했다.

김세영 <달콤하고 달콤하도다…> "나로 말하자면―. 이 나약해보이고 까탈스런 남자를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랑하고 말았다." 마을 외곽의 낡은 저택에 이사온 이안, 그를 보고 첫눈에 반한 어린 소년 카이. 강렬함을 따지자면 최고다. 결말도 반전이 멋지고. 잔인한 카이의 행동에 야위어가는 이안과, 그가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보며 아프고 달콤하다며 더욱 몰아붙이는 카이. 두 캐릭터 모두 인상적이다. 카이는 정말 '어렸고' 이안은 과감하고 이기적이며 정말 '어른다웠다'.

이시영 <너는 나의 달빛> 1950년대 뉴욕. 늙은 교수 샘 브릭, 석탄 같은 눈의 학생 유진 워커. 옛사랑 루시 에반스에게서 샘 브릭에게 연락이 온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 샘은 마이애미의 바다로 간다. 그 곳에서의 새해, 특이한 학생이라고 느꼈던 유진 워커가 루시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남편을 떠나보낸 루시에게 샘은 청혼한다. "별도 달도 없는 어둠의 그 공간을 슬며시 비집고 들어오는 녀석의 눈빛. 그것은 너무도 따뜻하고… 따뜻해서 순간 깜깜한 이 공간에 혼자 남은 것은 아니라고 느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반전. 뱀파이어의 분위기는 꽤 어울렸지만... 그다지 취향은 아니었다.

유시진 <황금나선의 경로> 옛 애인 나영우에게 그녀의 현 애인 김신혁의 소재를 파악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기예모. 영우의 아들이고 한때 함께 살았던 보우를 만난다. 아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어머니, 머리가 좋아 학교 수업을 지루해하며 ADHD로 의심받는 보우에게 신경써 준 것은 예모였다. 유령을 볼 수 있고 미심쩍은 리딩 능력이 있는 예모는 자신의 능력으로 김신혁을 찾아내고, 보우에게 선물받은 유리 앵무조개를 쥐고 어떤 것을 읽어냈다. "…나이가 제일 큰 문제였어?" "네가 당시 애인 아들이었단 거하고 남자라는 것 외에? 그래,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그 중 두 개는 해결이 됐고… 하나는 바꿀 방법은 없지만, 당신한테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봤는데, 맞아?" 영우와 신혁, 예모와 보우라는 두 커플, 잔잔하면서 꽉 차도록 엮어낸 이야기가 좋았다. 어린 소년이 성장하여 바라보던 사람의 키를 따라잡는다-라는, 이 나이차 사랑의 단편 가운데서 가장 정석적인 게 이 단편 같다. (<천년도 당신 눈에는>은 설정상 조금 변칙적이고 <달콤하고 달콤하도다>는 소년 쪽이 몸만 컸달까;)

앤솔로지는 언제나 도박하는 기분으로 펼친다. 각자 다른 개성을 지닌 작가들이 다른 필치로 그려낸 작품들이 앤솔로지라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때로는 감상에 득이 되지만 때로는 실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순애보 4권. 원래 알고 있던 작가도 이번에 처음 접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았다. 굳이 꼽자면, 임주연님 단편을 기대했는데 조금 실망했고(소재며 요소요소는 정말 좋은데;), 유시진님 단편은 더하고 뺄 것 걸리는 것 등은 전혀 없이 만족! 정말 좋았다. 순애보 5권도 다양한 작가진의 멋진 주제로 발매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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