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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흐드러지다 1 ㅣ 흐드러지다 1
여은우 / 로코코 / 2018년 4월
평점 :
미래의 황제를 낳아줄 딸을 고대해 온 연나라 재상 민무영은 쌍생의 탄생에 경악한다. 대신녀 자야는 두 아이 중 하나라도 죽이는 날에는 큰 재앙이 덮칠 것이며, 달을 타고 난 한 아이는 황후가 될 것이나 흑성의 그림자를 안고 태어난 나머지 아이가 그림자가 되어야 둘 모두 온전히 살 수 있을 것이라 신탁을 내린다. 그리고 이십 년, 불운의 상징으로 쌍영채에 가둬져 자라던 혜아는 황후로 간택되어 입궁해야 할 여은이 신열로 쓰러지자 '내 딸 여은'의 대용품이 되라며 아비에게 끌려 나오는데…….
동양풍 시대물이라서 구입한 책. 초반부터 악역으로 보이는 민무영의 캐릭터가 대단하다. 혜아를 만나보지도, 이름을 물어보지도 않고 협박하려 몸종부터 죽이는 친부. 사실 이 아버지가 참 소름끼치게 잔인하다면 여은과 분위기가 전혀 다른 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 이씨 부인도 무심함으로 한 획을 긋는다. 여주의 가족이 여주의 제일 큰 적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초반부였다.
여은을 대신하는 혜아가 여러모로 허술한 게 당연한데도 민무영의 딸이므로 누구도 뭐라 말을 못 한다. 그야말로 절대권력자. 그리고 그 절대권력자와 대칭점이 될 수 있을, 황제, 여은을 간택했으나 혜아와 혼인할 남주, 연제윤이 등장한다. 민무영이라는 이름에 발작한 태후와의 대면에서다. 황제는 민무영의 꼭두각시라 우매하다는 소문이었지만, 태후를 위로하는 황제는 전혀 나약하지 않고 오히려 총명했다.
"살려 주세요, 황후. 짐은 죽고 싶지 않습니다."
(……)
혜아는 깨달았다. 황제에게는 가면이 있었다.
무영의 힘 앞에서 몸을 사리느라 궁에 들어온 지 이레밖에 되지 않은 여인에게 살려달라 청할 만큼 우매해 보이는 우황(愚皇)의 가면이.
혜아가 황제를 읽은 만큼, 황제도 혜아를 읽었다. '죽음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자의 눈'.
혜아가 태어나면서부터 민무영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겼다면, 제윤은 별안간 민무영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겼다. 아내와 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아비를 자결로 내몰고, 그 명예를 짓밟아 아들을 멍청한 꼭두각시로 부리는 원수. 여주도 충격적이지만, 남주 역시 충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과거사였다.
남주와 여주는 같은 사람을 적으로 두고 있지만, 아직 여주의 입장이 애매하고 남주는 여주의 입장을 모른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하지만 서로 기본적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치열하기 그지없는 정쟁에서 사람을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을 리 없다. 기본적으로 둘 다 서로 본래 성격, 입장 등을 숨기고 있는 입장이다보니 탐색전이 꽤 길다. 서로 같은 사람을 적으로 두고 있지만 그 사실을 확신은 할 수 없으며, 적의 적이라 하여 안심할 수도 없어 답답하다. 그리고 무영의 행패가 더해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제윤이 오래도록 갈아 온 칼을 설핏 비침과 동시에, 혜아의 정체에도 한 발짝 다가가는데…… 어떻게 보면 이제야. 여주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대역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진실이니 장편의 절반에서 밝혀지는 게 분량으로는 적절하다 하는데 대체 언제 밝혀지나 한 독자는 드디어! 하고... 2권으로.
혜아가 쥐고 있는 패가 '다름'이라면, 그래서 스스로를 제물 삼아 무영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것이라면, 제윤은 혜아를 살리며 무영만을 없앨 수 있었다. 제윤의 모든 것을 걸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