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 찌질한 수컷의 리얼성장담
마르크스와 나의 여친 | 블레이크 넬슨 글, 서해문집
2015.08.01
20대에 마르크스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면 바보이고, 40대에 마르크스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해도 바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젠 이 유명한 문장에도 먼지가 내려앉고 이끼가 끼어가는 시대에 17살 소년이 제일 좋아하는 책이 《공산당 선언》이고 또 ‘마르크스’를 숭상한다면 우리는 이 소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특이한 뉴스 소재로 소비되거나 사람들에게 ‘관심종자’로 비웃음 사지 않으면 다행이다.
소설 《마르크스와 나의 여친》의 주인공 제임스가 바로 그다. ‘자동차를 모두 없애라!’라는 제목의 그의 작문부터 보자.
“나는 쉴 새 없이 자동차를 몰고 상점에 가서 쓸데없는 쓰레기를 무한히 사는 것이 소비사회의 본질이라는 것을 안다. … 자동차 때문에 지금의 정치체제가 유지되고 바뀌지 않는 것이다. 차 때문에 하층민들은 계속 전쟁에 나가야 한다. 덕분에 부유층은 대저택에 살고 개인용 비행기를 띄운다.”
어찌 보면 단순한 논리지만 조금은 과격한 그의 작문은 사안의 핵심을 제대로 집어낸다. 작문 과제와 일기를 교차하며 보여주는 이 소설은 작문 과제를 통해서는 그를 둘러싼 세상과 주변을 바라보는 제임스의 관점을, 일기를 통해서는 여타 다른 청소년들이 겪는 이성에 대한 관심, 가족과의 문제, 친구와의 관계 등을 보여준다.
소설은 청소년의 탈을 쓴 어른이 등장하여 훈계와 교훈을 나열하지 않는다. 솔직하면서도 저자의 촌철살인 위트와 풍자로 인해 읽는 내내 통쾌하면서도 깨달음을 준다.
문명 붕괴를 은근히 꿈꾸며 ‘자동차를 모두 없애라!’라고 부르짖는 일명 ‘급진파’제임스가 사랑하는 또 다른 인물은 17살 소녀 세이디 키넬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자주 찾았던 연못을 보호하기 위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서명을 받아내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통조림을 모으고, 학교 동아리에서 환경 포스터를 만드는, 제임스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체제 안에서 분투하는’ 온건파이다. 평소라면 그런 온건파들을 마구 비웃어 주던 제임스는 막상 그녀 앞에만 서면 당장이라도 세상을 갈아 엎을 것 같던 한껏 발기된 뇌는 급격히 쪼그라들어 어설프고 찌질한 수컷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첫사랑이었던 그녀와 한 번의 이별 뒤에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지만 그야말로 하루하루 다르게 변화하고 성장하는 그들에게 자유에 대한 갈망은 눈앞의 사랑보다 더 크다. 앞으로 펼쳐질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세상 밖 경험들을 위해 세이디는 결국 제임스에게 또 다시 이별을 선언한다. 또 남겨진 사람이 그 시간을 묵묵히 통과해 나가는 것이 늘 성장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제임스와 세이디는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 사이를 여유롭게 넘나들고 탐험하면서 각자의 길을 스스로 열어간다.
그렇다면 다시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와 대한민국의 17살 제임스와 세이디는 어디에 있을까. 과연 존재하기는 한 걸까. 연애와 글쓰기 따위 집어치우고라도 그들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해 본 경험은 있을까. 오로지 성적으로 줄 세우는 대한민국의 현 교실에서 제임스처럼 허황(?)된 생각을 키워가고 또 그것을 작문으로 끄적거려도 읽어줄 선생님은 계실까. 현재의 교육환경을 무시하고 ‘오직 앞으로의 너 자신만의 성대한 꿈을 키우라’라고 말한다면 우린 모두 비겁하고 유약한 어른들일 뿐이다. 비바람이 들고 나갈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의 세례 속에서 선택과 결과를 스스로 겪어내고 넘어설 때, 그들은 진짜 어른이 된다. 소설 속 제임스와세이디처럼 말이다.
이 책은 저자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저자 블레이크 넬슨은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 태생으로 두 줄 기타로 고스음악을 만드는 괴짜이면서도 글쓰기에 열중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문장 구사와 독자들을 작중 인물에 강렬히 몰입시키게 만드는 저자 특유의 능력으로 인해 마치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하게 만드는 힘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각색되어 2007년 개봉되어 화제가 된 구스 반 산트의 영화 〈파라노이드파크〉는 이 사실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믿고 보는 청소년 소설 저자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이 땅의 모든 제임스와 세이디들에게 올 여름 이 소설의 일독을 권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