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라인
이채윤 지음 / 창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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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감사하게 읽고 주관적인 의견을 적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공기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파이프라인이 공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파이프라인은 보통 땅 속에 매립되어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파이프라인>이라는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내 관심 주제가 아니어서 무심코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목차를 살펴보던 중에 파이프라인에 얽힌 역사적 진실, 경제와 외교, 전쟁과 평화 등 흥미로운 이야기에 끌리게 되었다. 단순한 파이프라인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수 있는 거대한 서사를 보여준다. 단순한 강철관이 아니라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될 공기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필자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인류의 문명을 움직이는 핵심적인 본질을 '수송'의 관점에서 풀어낸다. 인류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보내는 기술, 바로 이 기술의 정점에 파이프라인이 있는 것이다. 수레와 배가 수행하던 수송을, 파이프라인을 이용하면서 약 90% 이상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니 획기적인 발명 중 하나임에는 틀림 없다.


파이프라인을 통해 어떤 것들이 이동하고 있을까? 우리가 매일 마셔야 하는 소중한 물, 연료로 쓰이는 석유와 천연가스, 그리고 각종 에너지가 이동하고 있다. 파이프라인에는 국가들간의 얽히고 얽힌 역사의 이야기가 존재하며, 파이프라인을 둘러싼 전쟁과 평화의 이야기도 스며있다. 특히 2006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가스 분쟁은 파이프라인의 중요성을 단면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필자는 책을 통해 파이프라인의 기술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파이프라인을 둘러싼 역사와 경제, 지정학과 미래를 이야기 한다. 파이프라인이라는 관을 둘러싼 세계의 흐름과 권력의 판세를 알려준다. 일반인들과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파이프라인에 대해 왜 알아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다. 두 나라가 전쟁을 하게되면 보통 양국의 통상적인 거래는 끊기는 것이 정상이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우크라이나를 가로질러 유럽으로 향하는 러시아산 가스관이 끊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직접 공격하는 정도의 피 튀기는 전쟁 한가운데에서조차 파이프라인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통행룔르 지급하고 있었다. 침공한 나라에 돈을 지불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땅속을 가로지르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으로 가스를 수출하고 있었다.


전쟁 중에도 러시아는 가스 공급을 포기할 수 없었고,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도 이 어마어마한 자금의 유혹을 쉽게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매년 수 십억 달러에 달하는 통행료는 우크라이나 국가의 재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을 것이다. 정말 아니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를 러시아의 계산된 모순이라고 분석한다. 전쟁을 감행한 초기부터 유럽을 흔들기 위한 심리전으로 택한 전략으로 본다. 유럽에 언제든지 밸브를 잠글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고, 동시에 완전히 차단하지 않음으로써 유럽 내부의 동요를 일으켰다. 러시아는 가스관 자체를 전쟁을 유리하게 만들어가는 전략 수단이었다. 결국 전쟁 중에도 가스관이 유지된 것은 철저한 경제 논리에 의한 것이다.


전쟁과 거래의 공존이라는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의 핵심에는 파이프라인이 있다. 이것이 필자가 파이프라인이 인간의 혈관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파이프라인이 모든 국가들에게 생명줄이면서도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국가간의 정치는 이렇게 불합리해 보이는 모순의 현장이다.


각 국가 간의 파이프라인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전쟁, 외교, 안보와 관련된 사례들, 경제와 비즈니스를 좌우한 파이프라인, 그리고 파이프라인이 바꾸어놓은 세계사, 앞으로 새롭게 생겨날 파이프라인의 미래와 그에 얽힌 정치, 경제적인 문제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는 진정한 지정학적 통찰을 가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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