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비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정미경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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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1 ...그래, 사람이란 자기 자리를 택해 태어날 수 없다. 허나 그러하므로 더욱 살아야한다. 더욱 맹렬하게 살아서 자기 자리를 열어야 한다. 사람이라면 갖고 태어나는, 자기답게 살 힘을 꽃피워야 한다. 자기답게 살 힘을 맺게 해야 한다.


제13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큰 비>나무옆의자를 통해서 만나 본다.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 숙종 때 무녀 원향과 여환, 그리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미륵'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한양으로 향하는 며칠간의 여정을 담고 있다. 정미경 작가는 이 이야기의 모티브를 한 편의 논문에서 찾았다고 한다. 논문 속에서 읽은 경기도 양주의 무당 무리들이 도성으로 입성하여 미륵의 세상을 맞이하려 했다는 역모 사건을 바탕으로 흥미로운 장편소설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야기는 큰 비가 내려 세상을 바꾼다는 '대우경탕설'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나 성경에서도 볼 수 있는 큰 비와 그 큰 비의 피해를 면할 수 있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이야기의 흐름은 낯설지 않다. 지금도 세계 어디에선 가는 이야기되고 있을 '예수재림설'를 보고 있는 듯했다. 물론 이야기 속 인물들은 예수 재림이 아닌 '미륵'의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 온전히 '미륵'의 힘만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는 순수한 이들도 있지만 그들을 등에 업고 칼로써 세상을 바꾸려 하는 불온한 이들도 있다. 불온하다고는 하지만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는 어느 쪽이 더 강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너무나 힘들고 지친 민초들이 '미륵'이라는 힘에 의지해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한양으로 입성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도성에 입성한 그들이 새로운 세상을 마지 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초자연적인 힘이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의 힘이나 의지가 아닌 누군가의 힘을 빌려 세상을 바꾸려 한 까닭일지 모르겠다. 또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민초들의 강한 의지만큼 그들의 수장들이 보여주는 의지는 강하지 않은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번이 아니면 다음을 염두에 두고 도성을 향한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간절히 바라는 민초들은 다음은 없다. 자기들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던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만큼은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한다. 그래서 죽음으로 이르는 여러 갈래 길 중에서 이 길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의 우리 현실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국민들의 간절한 희망을 진심으로 자신의 희망으로 품은 지도자가 몇이나 될까? 아마도 작가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 '미륵'의 힘보다는 지도자의 의지라고 말하려 한듯하다.


작가가 페미니스트 저널의 편집장으로 일한 경력이 있어서 인지 이야기 속에는 여성들이 여자이기에 당해야 했던 많은 아픔들이 보인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중심인 큰 비를 발현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도 여성인 원향이 맡는다. 도성으로 향하는 무리 속에 홍일점인 것이다. 하지만 민초들의 모든 희망을 한 몸에 짊어져야 하는 지도자 원향은 마지막 순간 민초들의 희망을 저버리고 만다. 여성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도 또는 무녀이기 이전에 사람이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지도자의 선택으로서는 조금 아쉬운 대목이었다. 신성한 목표[이성]와 인간 본연의 심성[감성]의 다툼에서 본성이 승리를 거두고 만 것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 순간에는 원향처럼 행동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은밀하고 긴박한 역모를 다룬 소설치고는 이야기에 긴장감이나 역동적인 내용은 좀 드물다. 하지만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내면을 표현하는 문장들이 너무나 섬세하고, 한양으로 향하는 여정 속 배경의 묘사는 너무나 아름답다. 미륵의 세상은 지금도 도래하지 않았지만 작가와 우리가 꿈꾸고 조금씩 바꾸어 간다면 꼭 미륵의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원향이 이루지 못했던 큰 비를 우리들의 힘으로 내리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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