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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103 ㅣ 소설Y
유이제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평점 :
《터널 103》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유이제의 장편소설을 가제본으로 만나보았다. 첫 페이지의 '검은과부거미섬' 지도는 또 다른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블랙 위도우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 것이다. 블랙 위도우(black widow)는 미국 마블 영화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유명하지만 교미 후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독거미(검은 과부거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블랙 위도우는 마블 시리즈의 여전사에 가깝다. 물론 그들이 살고 있는 섬의 모양이 거미 모양이기도 하다.
'진정한' 어른들은 모두 조직을, 마을을 위해 죽고 '한심한'어른들만 남은 것 같은 터널 속 마을이 시작을 연다. 어둡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40년 넘게 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터널 속 마을의 기원을 알아갈 때쯤 이제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바닷물의 유입으로 식수가 오염되기 시작한 까닭이다. 이제 마을 촌장 황필규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어린 소녀 다형에게 마을을 위해 섬을 빠져나간 뒤 내륙 쪽에서 터널로 들어와 차폐문을 열기를 제안한다. 마을을 구한 영웅이 되란다. 미친 어른이다.
다형이 마을 사람들을, 엄마와 동생을 구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 목숨을 건 모험에 나서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형의 모험에 키는 성인 남성의 두 배에 육박하고 피부가 없는 탓에 근육, 힘줄, 인대, 뼈 등이 고스란히 밖에 드러나 있으며, 눈꺼풀이 없어 안구가 그대로 돌출되어 있는 무피귀無皮鬼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40년 전 파괴된 항구에 망가지지 않은 배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역시 얼마 가지도 못하고 무피귀들과 맞닥뜨린다. 그렇게 승하를 만난다.
둘의 만남은 잊힌 세상을 살던 아이들의 만남이라는 점이 특별했다.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아가는 과정이 펼쳐지며 이야기의 또 다른 흐름을 보여준다. 이제 둘의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무피귀의 비밀을 알게된 다형과 승하의 모험은 어디에서 끝을 맺을까? 터널 안에서의 삶이 전부였던 다형과 바리섬에서의 삶이 전부였던 승하의 만남은 두 마을에 어떤 효과를 가져올까?
이 소설의 가장 큰 갈등 요소는 인간과 무피귀인 것처럼 보이지만 터널을 들러싼 인간들 간의 갈등도 만만치 않게 크게 느껴진다. 정말 인간이길 포기한 인간들의 다수 등장한다. 그런데 무피귀보다 더 무시무시한 녀석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또 다른 흐름을 보인다. 무피귀보다 크고 힘이 센 네피림은 인간에게 탈출할 수 없다는 절망을 상기시켜주는 듯하다. 승하와 다형은 양쪽 마을 사람들을 터널로부터, 절망으로부터 탈출 시킬 수 있을까?
p.41. "이루어질 수도 있지. 중요한 건 꿈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기회를 준다는 거야."
터널이라는 어둠보다 자신의 욕망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어둠이 더 짙고 깊었다. 자신 만을 위하는 인간들의 욕심이 만들어 놓은 덫을 풀어내는 아이들의 용기와 지혜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창비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