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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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이곳저곳으로 이끈 달콤쌉쌀한 우연들이 출신이다.(p.89)

사람들과 아무 상관 없는 소속감이 곧 출신이다.(p.89)

어디 출신이든 잘못된 출신은 없었다.(p.133)

일도서상 2019 수상작 <출신>을 만나보았다. 보스니아 출신 작가 사샤 스타니시치의 자전적 소설이다. 유고연방의 해체와 함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국을 탈출한 난민 가족이 독일에 정착하기까지의 아픔과 고난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작가 사샤 스타니시치의 자전적 이야기와 함께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가 조화를 이루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난민으로서, 소수민족으로서 겪어야 했던 아픔과 슬픔을 담백하게 풀어가고 있다.

 

그런데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둡지 않다. 아마도 치매에 걸려 아픈 과거를 조금씩 상실해가는 크리스티나 할머니의 유쾌한 일상이 위트 있게 그려진 까닭인듯하다. 이 이야기는 기억이 소멸되는 시점에서, 짧은 시간에 사라져버린 한마을에서, 망자들의 현존에서 시작되었다.(p.40) 소설은 주인공 사샤가 어느 순간 크리스티나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잊고 지내던 자신의 '출신'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찾아가면서 시작한다. 조부모와 외조부모 그리고 증조부모까지 자신의 기억 속에 없는 이야기들을 크리스티나 할머니를 통해서 접근한다. 하지만 문제는 조금씩 심해지는 할머니의 치매다. 그래서 이야기가 진실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다. 그 점이 이 소설을 더 재미나게 접할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사샤는 독일에서 작가의 길을 걷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남보다 더 치열한 삶을 살려니 자연스럽게 가족에 신경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 부모님의 희생에 대한, 고생에 대한 고마움을 크리스티나 할머니와의 과거 여행에서 되찾게 된다. 자신의 조국에서는 대학 교육까지 받은 엘리트였지만 독일에서는 노동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은 자신의 '출신'에 대한 생각을 더 깊게 만든다. 사샤 자신의 경험담과 자신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소설이라기보다는 편안한 자전적 에세이를 보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오가는 까닭에 긴장감은 잠시도 놓을 수 없었다. 편안함 속에 묘한 긴장감이 숨어있다.

 

유고 연방의 해체 과정에서 인종, 종교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내전으로 이어지고 결국 많은 아픔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 중심에 있었던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서 시대적인 아픔과 사회적인 고통을 보여주고 있다. 사샤가 자신의 '출신'을 알아가는 동안 할머니는 조금씩 자신의 '출신'을 잃어버린다. 사샤의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지만 다른 이들의 이야기도 들려주고 있어서 한 편의 소설이 아니라 여러 편의 소설을 만나 본 듯한 느낌을 준다. 겪어보지 못한 난민이라는 '출신'의 아픔과 슬픔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감동적인 책이다.

잔잔한 흐름의 끝에 또 다른 이야기「용의 보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또 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이 소설의 결말을 다양한 버전으로 만날 수 있는 재미난 '선택'이다. 크리스티나 할머니와의 만남이 아쉬워서 였을까? 작가 사샤는 주인공 사샤와 함께 독자가 결말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내가 사샤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 선택에 따라 정말 다양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우연한 선택도 작가가 말하는 '출신'일듯싶다. 우연한 선택이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출신'을 만나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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