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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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0. 그 생활에는 생각할 자유, 잘못 생각할 자유, 생각을 거의 하지 않을 자유, 스스로 내 삶을 선택하고 나를 나 자신으로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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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적인 작가들을 이야기할 때 랭보만큼이나 자주 언급되는 작가가 사강인듯하다. 18세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탄생을 알린 데뷔작이 <슬픔이여 안녕>이다. 18세의 어린 작가가 쓴 작품이기에 순수함과 대중성을 함께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숙한 어른도 아닌 18세의 작가가 만들어낸 주인공, 순수한 어른이 되기 위한 고민을 달고 사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17세의 소녀 세실의 흥미로운 휴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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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부속의 기숙 여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세실은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 남부 해안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게 된다. 그 여행에는 아버지의 젊은 연인 엘자도 동행하게 된다. 자유로운 삶을 사랑하는 세 사람은 정말 신나는 휴가를 보낸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아버지와 세실은 둘만의 세상에서 즐거웠고 내일보다는 오늘을 즐겼다. 그리고 엘자도 그 즐거움을 함께했다. 죽은 엄마의 친구 안이 오기 전까지는. 안의 등장은 주인공 세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쾌락적인 오늘을 살 것인가 아니면 절제된 계획으로 내일을 살 것이가.


p.159.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무엇보다도 권태가, 고요가 두려웠다.


즐거움과 쾌락으로 단순한 삶을 살고 있던 세실 부녀는 절제된 계획적인 삶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세실은 어느 날은 안과의 지적인 미래를 꿈꾸고 어느 날은 시릴과의 쾌락적인 오늘을 즐긴다. 오늘의 즐거움과 미래의 고통이 세실을 혼란에 빠뜨리고 세실은 미래의 고통을 잠재우려 재미난 계획을 실행한다. 하지만 그 재미난 계획의 결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지적인 안과 관능적인 엘자. 세실은 이지적인 안과의 대화를 통해서 안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이중적인 자아를 만나게 된다. 이제 세실은 대부분의 사실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즐거움과 쾌락에 빠져살던 부녀에게 절제된 계획적인 삶의 필요성을 가르쳐주는 안을 통해서 세실은 사랑과 삶의 새로운 방식을 배우게 된다. 안의 지적인 모습을 동경하던 세실은 바닷가에서 만난 청년 시릴과 지적이고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세실은 쾌락에 빠진 사랑을 즐기면서도 절제된, 성숙한 안의 사랑을 동경한다. 이런 이중적인 세실의 사고는 안의 우아함을 존경하면서도 미워하게 만든다. 이런 이중적인 느낌이 이야기를 접하는 동안 다양한 결말을 그려보게 한다. 세실은  어떤 결말을 선택하게 될 것인가? 짧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단한 작품이다. 왜 18세의 사강이 쓴 <슬픔이여 안녕>이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작품 41위에 올랐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쉽고 편안하게 읽은 짧은 이야기가 머릿속에 계속해서 머무는 신기한 경험을 갖게 하는 소설이다.


이중적인 사고로 혼란스러워하던 세실은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번 사고의 경계에 서게 된다. 지적이고 절제된 삶을 한번 맛보았던 세실은 사고의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 넘어가게 될까? 쾌락이 있는 오늘의 자유로운 삶일까? 미래가 있는 절제된 계획적인 삶일까? 세실의 선택이 어떤 삶이 되었던 세실은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인'슬픔'을 만나게 된다. 책의 제목에서는 세실이 슬픔에게 만났을 때의 인사(Bonjour 봉주르)를 건네지만 어쩌면 세실은 슬픔과 이별의 인사(Adieu 아듀)를 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세실은 슬픔과의 만남과 이별의 경계에서 또 다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1954년 발표된 이 이야기가 아직도 사랑받고 있는 까닭은 아직도 우리가 두가지 삶의 방식의 경계에 서있기 때문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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