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실험 -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을 실험한 어느 괴짜 과학자의 이야기
딜런 에번스 지음, 나현영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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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9. 문명은 모래 늪과도 같다. 벗어나려 애를 쓸수록 더 깊이 빨아들여 규칙과 규제로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이 실험복을 입은 알랭 드 보통이라 표현했다는 색다른 이력을 가진 딜런 에번스<유토피아 실험>을 만나본다. 철학에서 말하는 유토피아를 과학적으로 실험한다는 제목부터 독특한 이 책은 영국의 한 대학교수가 자신의 모든 것(, 직장 등)을 포기하고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상을 실험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 유토피아라는 자급자족 공동체를 만들고 활동했던 일을 기록한 논픽션이다.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 그리고 기후 변화 등의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인류의 멸망을 조금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한 과학자의 실험정신이 담겨있다. 그런데 그 실험이라는 것이 문명이 만들어낸 기계를 사용할 수 없게 된 이후의 삶을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저자 자신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왜 집까지 팔아가며 18개월까지라는 시한부 실험에 자신의 경력까지 내팽개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장 인류의 멸망이 닥친 것도 아닌데 실험이 끝난 후의 일은 생각지 않았다는 점이 철학에 과학까지 공부해서 지성으로 뭉쳐졌을 것 같은 저자에게 의아심을 품게 했다.

 

이 책에는 저자가 모집한 지원자들과 함께 자급자족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과 그 속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삶이 너무나 솔직하게 담백한 글로 표현되어있다. 과학자가 쓴 글이 아니라 철학자가 쓴 글에 더 가깝다. 저자가 철학을 전공한 까닭도 있겠지만 공동체에서 생활하며 느끼고 경험한 삶의 지혜와 깊이 있는 생각이 담겨있어서 그런 듯하다.

P.178. 오븐을 예열하는 일에 몽땅 시간을 쏟지 않았다면 내 두뇌는 더 재밌는 생각을 하고 더 재밌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

 

P.207. 그러니 종말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대비하려고 애쓰지 말고 재난이 닥쳤을 때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운에 맡기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아름답고 공기 좋은 농촌도 외갓집에 갔을 때나 좋은 것이다. 직접 그 안에서 생활하다 보면 프라이버시는 가볍게 무시되는 무신경과 경험해 보지 못했던 노동량에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물론 저자가 경험한 생활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힘든 시간들을 공동체 안의 구성원들은 어떻게 버텨나갈까? 아마도 그런 과정을 지켜보고 연구하는 것이 저자가 생각했던 실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 재산을 투자해서 시작했던 자급자족 공동체생활은 많은 문제점들을 돌출하며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18개월이라는 기간을 정한 실험이었지만 그 기간을 채우기도 벅차 보였다. 여기에 이 책의 재미가 있다. 무엇 때문에 너무나 흥미로운 실험이 끝날지도 모르는 위험에 다다르게 된 걸까?

 

이 책이 주는 또 다른 재미는 인류 문명의 멸망이라는 주제로 한 책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명이 사라진 후의 세상을 긍정적인 유토피아로 그린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을 비롯해서 디스토피아로 그린 매카시의 로드등 많은 흥미로운 작품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심리학 이론들도 들려주고 있다. 이 책에서 과학적인 실험을 찾는다면 이 책의 등장하는 누구처럼 실패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인류 문명의 멸망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찾는다면 정말 유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들어 있어서 조금은 안타까웠다. 그런데 아픈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자꾸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를 띠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저자가 솔직한 마음으로 자신을 전달한 데서 느껴지는 깊은 공감이 아닐까 싶다. 공감력 100%의 순도 높은 이야기를 원한다면 지금 바로 만나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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