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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편지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평점 :
P.184.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
구름이나
새,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
사람으로
태어나느니 차라리 돌멩이로 태어나고 싶다.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인 작가 김숨이 들려주는
생명에 대한 소중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생명은 언제 어디에서나 존중받아야 하고 그것은
의무도 도덕도 아닌 인간의 본성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심연에 자리 잡은 '심성'이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고, '도리'라는 인간의 당연한
도덕이 생명의 존엄성을 지킵니다. 즉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언제나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생명이고 그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곳이 한 곳 있다면 아마도
전쟁에 휘말려
다른 이의 '생명'을 담보로 하루하루를 버텨야 하는 전쟁터일
것입니다. 전쟁터에서는
다른 이의 인간의
존엄성보다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안위가 더
소중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잠시 뒤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생명 보존에 관한 것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본이
전쟁에서 저지른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명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구를 위해서 우리들의 힘없는 어린 소녀들을 성적 노리개로
전락시킨 일본 이란 나라가 더
안타까운 것은 용서받을 마음도 없고 그저 진정성 없는 언행들만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안부. 과거의
잘못으로 묻어두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잘못입니다. 그런 위안부의 삶을 이제 곧 엄마가 될지도 모르는 열다섯 소녀를 통해서 들려주고 있는
<흐르는
편지>에서 작가 김숨
은
'지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명 사람들이
사는 곳인 데 생명이 있는, 존엄성이 있는 인간은 찾을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죽지 못해서 생명을
연장해가는 위안부들과 그들을 밤마다 찾아와 자신들의 욕구를 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군인들이 있는 위안소
인 듯합니다.
이곳이 지옥보다
못하다는 사실은 책장을
넘기는 내내 어린 소녀들이 보여주는 육체적 고통과 내면적인 아픔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다섯 소녀가 또래의 소녀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지옥의
이름은 '낙원'입니다. 낙원 위안소. 공장에서
일하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서, 일본 군인에게 납치당해서, 그리고 누군가가 팔아넘겨서 위안부가 된 어린 소녀들이 지옥보다 못한 이곳 '낙원'에
오기까지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제발 그저
슬픈 소설이기를, 아픈 허구 이 기를
바랐습니다. 너무나 아프고
슬픈 이야기들이 넘치고 넘쳐서 책장을 넘길수록 슬픔과 아픔에 무뎌지는 듯했습니다. 마치 열세 살에 위안부가
되고 열다섯에 누구의 아이인 줄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금자가 죽음에 무감각해지듯이 말입니다.
작품의 시작은
열다섯 소녀가 어머니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편지로 알리면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 소녀는 글을 모릅니다. 그러니 편지를 쓸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글을 쓸 줄 안다고 해도 아마 편지는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녀는 흐르는 강물에 편지를 씁니다. 그렇게 강물에 편지를 쓰면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봅니다. 죽은 아이를
낳은 위안부, 갓 태어난 아기를 중국인에게 주고 밤마다 우는 위안부, 그리고 임심한 채로 죽은 위안부 등을 통해서
지옥으로 찾아온 새로운 생명의 운명을 보게됩니다. 그러니 어떤 엄마가 아이의 탄생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나 생명은 존중되어야
하고 이유나 까닭
없이 당연한
것이기에 작품의 끝에 금자는 어머니께 편지를 씁니다. 어머니, 오늘 밤 나는
아기를 낳을지도 몰라요. 닭띠 아기를요.(P.291)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얻게
된 금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금자와 함께 있던 우리들의 할머니들은 어떻게 되셨을까요?
작품 속 어린
임신부 금자는 자신을 짐승보다 못하게 대한 일본군의 아이를 죽이지 못합니다. 아니 죽이지 않습니다. 일본군들이 위안부들의 존엄성을 짓밟는
동안에도 우리들의 할머니 금자는 너무나 커다란 아픔 속에서도 생명의 소중함을 지켜냅니다. 열다섯 소녀가 지옥보다 더 못한 낙원에서 생명을
지켜내는 모습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습니다. 모성의 숭고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포츠에서 한일전을 꼭 이기고 싶은 심정이 왜 자연스럽게 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
8월 14일은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아픔과 슬픔은 영원히
기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슬픔이나 아픔에 빠져있지 말고 어린 소녀들이 지켜낸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일본에 끝없이 이야기할 때인
것 같습니다.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있다고 해도 절대 용서 못 할 만행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했던 이들이라서 아직도 인간계로 돌아올 생각을 못 하고 있는 일부
일본인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