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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래빗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P.306.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알쏭달쏭하군."
"인간의 역사는 늘 그래."
일본 최고 권위의 나오키상에 다섯 번이나 후보로 선정되고, 일본 서점 대상에 최초로 5년 연속 후보로 오르는 등 일본에서 가장 촉망받는 차세대 작가로 일컬어진다는 이사카 고타로의 <화이트 래빗>을 현대문학을 통해서 만나보았습니다. '반전'이라는 단어가 100% 어울리는 정말 놀라운 작품이었습니다. 소설을 읽었는데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했습니다. 책을 덮는 순간 많은 영상들이 떠오르는 신비한 작품입니다. 마치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한 번에 본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코믹에서 스릴러까지 정말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는 영화 같은 소설입니다.
이야기의 소재부터 획기적을 뛰어넘어 엽기적이기까지 하다고 느꼈습니다. 벤처기업을 다니는 우사기타는 어느 날 회사로부터 늘 자신이 담당해오던 일에 자신의 아내가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게 됩니다. 벤처기업의 정의가 이 기업에 해당되는지는 지금도 아리송하지만 작가 이사카 고타로는 이 기업을 벤처기업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유괴하고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요구하는 전문 유괴 기업. 그 기업에 다니면서 나름 행복한 삶을 영위하던 주인공 우사기타는 어이없는 회사의 통보로 인해 어설픈 인질극을 벌이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정말 평범한 인질극처럼 전개됩니다.
평범하게 전개되는 인질극에 등장한 좀도둑 구로사와로 인해 이야기는 점점 묘하게 흘러갑니다. 그 묘한 흐름에 인질극을 해결하게 위해 출동한 경찰 나쓰노메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절정의 신비함을 갖추는 데는 이상한 컨설턴트 오리오오리오가 큰 몫을 합니다.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별자리 이야기가 지루할 때쯤 정말 엄청난 이야기가 새로 시작됩니다. 정말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인질극의 원인이 된 조직의 돈을 가로챈 오리오오리오가 왜 형사들 앞에서 별자리 타령을 하는지 알게 되는 순간 반전의 광풍이 붑니다. 정말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의 강도의 짜릿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더욱 신기한 점은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 책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아내가 유괴되어 인질극까지 벌이는 유괴 전문가 우사기타인지, 작은 쪽지를 찾으러 들어간 집에서 인질이 되는 전문 좀도둑 구로사와인지, 가족을 잃은 아픔을 안고 사는 인질극 전문 형사 나쓰노메인지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누구를 주인공으로 보는 가에 따라 이 작품의 성격이 조금씩 바뀌는듯해서 <화이트 래빗>의 또 다른 매력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을 찾아보는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은 암호 같은 제목을 찾아보는 것이었습니다. '화이트 래빗' 무언가 모르게 커다란 비밀이 숨겨있을 것 같은 작품 제목의 의미를 알아낸 순간 또 다른 반전의 재미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을 만나보려는 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은 작가가 말하는 작은 단어 하나도 허투루 흘려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작품처럼 촘촘하게 짜인 빈틈없는 이야기는 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 물론 책을 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라는 탓도 있겠지만 책이나 영화 등을 통해서 만나오던 반전과는 전혀 색다른 반전과 촘촘한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건들과 등장인물들은 작은 틀안에 서로 모르는 사이 연결되어있습니다. 그 연결 고리를 따라가 하나씩 풀어보는 재미는 즐거움을 넘어 행복하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행복한 이야기가 웃기고도 슬프게 담겨있습니다.
때로는 웃기고 때로는 슬픈 이야기를 담은 <화이트 래빗>은 어설픈 인질극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투영되어 있어서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닌 사람 냄새나는 휴먼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또한 오리온 별자리의 슬프고 아픈 이야기를 만나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기다리고 있어서 오리온 별자리의 이야기는 아프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좀도둑 구로사와와 묘하게 오버랩되는 듯한 고전 '레 미제라블'의 글도 함께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딸을 잃고 살아가는 아니 버티고 있는 나쓰노메 형사의 이야기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아프고 슬플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가족과의 이별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특히 아직은 어린아이와의 이별이라면 더욱 슬플 것 같았습니다.
P.185. "바다보다도 장대한 광경이 있다. 그것은 하늘이다. 하늘보다도 장대한 광경이 있다. 그것은 사람에 깃든 혼의 내부."
P.186. 깊은 바다보다도 어두운 광경이 있다. 그것은 우주다. 우주보다도 어두운 광경이 있다. 그것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자에 깃든 혼의 내부다.
올봄에는 유난히 추리소설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작가들의 좋은 작품들을 다양하게 만나보았지만 가슴을 울리는 휴먼 드라마 같은 작품 <화이트 래빗>이 최고였습니다. 반전을 생각하고 <화이트 래빗>을 만난다면 100% 만족하실 겁니다. 이 작품은 엽기적 소재에서부터 등장인물, 그리고 제목에 이르기까지 반전이 아닌 것은 도대체가 찾아볼 수 없으니 말입니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을 명쾌하게 뚫어줄듯한 섬광이 번뜩이는 반전이 가득한 작품입니다. 최고의 이야기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한 봄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