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두는 여자
베르티나 헨릭스 지음, 이수지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체스 두는 여자
베르티나 헨릭스 지음/다른 세상

아주 가끔씩 전혀 나답지 않은 일을 저지를 때가 있다. 아무 일도 없는 평온한 일상인데 그 평온함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스스로, 또는 가장 가까운 누군가가 일상의 평온함에 금이 갈 어떤 일로 나를 자극할 때 그런 일을 한다. 일 이 년 만에 한 번씩 혹은 몇 년 만에 한번 씩 그럴 수도 있다. 갑자기 전혀 생각지 않은 쇼핑을 하고, 어딘가로 꽤 비용이 드는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때론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무언가를 배우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일상의 우울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가끔은 어떤 문제 앞에서 조금 더 심사숙고해서 그 문제의 핵심과 해결방법에 본질적으로 다가갔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는 그것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때론 시간이 필요하거나, 때론 포기하거나, 기다리거나, 맞서거나, 나를 바꾸거나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이런 방법들이 분명 더 나았다. 책 속의 엘레니처럼 더 이상 젊지도,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중년 여성들의 내면을 민감하게 담은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체스 두는 여자>는 내 나이 때의 누가 읽어도 ‘딱 나야’, ‘내 말이 이 말이야.’ 하며 공감할 수 있는 책이다. 혼자서는 평생 섬 밖을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중년의 엘레니, 그녀는 정비소를 하는 남편과 두 아이의 엄마로 지중해에 있는 작은 섬의 한 호텔에서 룸 메이드로 일한다. 그녀의 외모는 저 여인에게도 내면의 은밀한 욕망과 삶의 도전과 희열이 숨어있을까 싶은 그저 그런 여자로 보인다. 하지만 룸메이드로 호텔의 각 방을 청소하는 엘레니의 모습을 묘사한 몇 장만 읽다보면 그녀의 매력을 알아차릴 수 있다. 여성들이 매일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며 느끼는 삶의 이런 저런 면을 작가는 여성만이 알아챌 수 있는 은밀한 문장으로 독자를 즐겁게 한다.

엘레니는 어느 날 프랑스인 관광객이 머무는 호텔방에서 우연히 두다 만 체스판을 발견한다. 그 순간, 그녀 안에 숨어있던 열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체스는 그녀가 평소 동경하던 머나먼 미지의 세계, 프랑스와 우아하고 매력적인 프랑스인들의 삶으로 그녀를 이끌 것이다. 남편의 생일날 체스판을 선물하고 남편과 자신이 나란히 앉아 체스를 두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체스판을 구입하기까지는 주저하고, 망설이고, 갈등했지만, 수줍은 그녀의 연약함 들보다 숨은 열정이 조금 더 힘이 셌다. 누군가 엉뚱한 짓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힘겹게 체스판을 구입하고 남편에게 선물한 엘레니, 그 체스판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훨씬 더 그녀의 삶을 역동적으로 바꾸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때론 생각지도 않았던 어떤 일에 자신이 잘 맞는다는 것을 알 때는 경이로운 기분이 든다. 수영, 자전거 타기, 바이올린, 탁구, 어학, 새로운 사람 사귀기, 사랑하기 등, 어떤 일이 나에게 잘 맞을까 생각하고 고민하기 보다는 직접 한번 해 보면 어떨까? 해보다 안 맞으면 그만 두면 되니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험한 일이거나, 인생이 좌지우지되는 그런 중대한 일이 아니라면 ‘체스’쯤이야, 우리도 엘레니처럼 용기를 한번 내 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체스를 통해 겉으로는 아름답고 평온해 보이나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지는 인생을 잘 보여준다. 분명한 상대가 존재하는 체스판에서 상대를 맞아 싸우는 법을 알려준다. 쉽게 굴복하지 않는 법, 자신을 조절하고 이기기 위한 전략을 짜는 법, 자신과 세상과 적과 맞서는 방법 등을 배우다 보면 인생 역시 고요함을 가상한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는 체스판과 같다. 아름다운 지중해 연안의 한 섬에서 체스를 두는 어떤 여인의 로맨틱한 이야기를 생각한 내게 이 책은 잔잔하지만 강한 충격을 주었다. 이 책은 현재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이들에게 위안이 될 것이고 더불어 작은 지혜와 한 걸음 내 디딜 수 있는 용기를 안겨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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