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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우린 열일곱 ㅣ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2
이옥수 지음 / 비룡소 / 2010년 3월
평점 :
어쩌자고 우린 열일곱
이옥수/비룡소
표지는 5월의 싱그러운 잔디밭이다. 키 작은 풀들 사이로 마가렛처럼 희고 가냘픈 두 송이 꽃이 피어 있다. 맑고 상쾌한 날씨, 청바지에 깨끗한 티셔츠를 입은 아이들이 풀밭에 앉아 ‘어쩌자고 우린 열일곱이라니~! 연애도 마음대로 못하는...’ 재잘재잘 떠드는 푸념처럼 가벼운 소녀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무언가에 홀린 듯 이야기를 읽다보니 어느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봉제공장의 기숙사 화재 사고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어갔구나. 꽃처럼 활짝 피어날 수 있었던 아이들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짓밟혔구나. 5월의 풀 같은 이 아이들의 모습을 오래 오래 기억하고 싶어 이 책을 썼구나.
전 세계가 우리나라를 주목하던 88올림픽이 열리던 시기는 우리 사회도 경제도 여러모로 상한가를 치던 시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갈 곳 없는 이십대가 넘쳐나는 요즘과 달리 그 때는 대졸 출신자들에게는 황금의 시간이었다. 서울의 웬만한 대학 이공계를 나온 사람들은 직장을 정말 골라서 갔다. 입사해서도 진급에 있어 조금 부당하다거나 더 나은 조건의 회사가 나타나거나, 창업의 기회가 있으면 주저 없이 사표를 내던지곤 했었다. 갈 곳이 있으니까. 좋은 시절에 웬만한 집에서 태어나 대학교육을 받았던 그들에게는 그렇게 도처에 기회가 널려있었던 반면, 이렇게 고등학교도 꿈꾸기 어려웠던 아이들도 있었다.
원래 그렇지만 그래도 어쩌자고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한 건지...
작은 시골 마을에서 부모님처럼 농사지어 하루하루 먹고 살기 얼마나 팍팍한지 잘 아는 이 아이들은 돈 좀 벌어서 집안에 보태보겠다고 서울로 취직하러 간다. 명절이면 옷도 사 입고, 선물도 사고 한껏 멋 부리고 택시를 타고 등장하지만 서울로 돌아간 이 아이들의 삶은 안쓰러워 못 볼 지경이다. 오줌 누러 가는 것도 눈치 보이고, 조장이 되려면 아마 몸까지 바쳐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끼고 잠 안자고 공부 좀 해 보겠다고, 사람답게 살아보겠다고 한껏 희망을 키워가던 아이들이 한순간의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자기도 대학만 간다면 자신이 사모하고 우러러보는 오빠에게 당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행복에 부풀어 있던 아이는 한 순간에 동고동락하던 친구들을 잃고 만다. 그 후로 그 아이는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깡새, 꿍새, 꼼새 같은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살만한 세상이 되었을까. 가진 게 없어도, 시골출신이라도 노력만 하면 보다 나은 삶으로 한 발자국 내딛을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세상이든 저절로 변하는 세상은 없으니까. 누군가는 길이 없는 곳에 희미하게나마, 길을 닦았고 그 길을 사람들이 뒤따르다 보니 길이 된 것이다. 얼마 전 읽은 책 <한국의 보노보들>에서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이 만든 사회적 기업이 생각난다. 이들처럼 누군가는 그렇게 길을 만들고 있다. 생생하고 열정적으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작가도 이 길을 만드는 사람이다. 이 책은 가슴 아픈 이야기를 넘어 아름다운 도전, 순박한 마음과 우정, 진지한 삶에의 열정 등 많은 감동을 줄 것이다. 삶이 단하고 힘든 아이들에게도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어른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