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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빛 - 검은 그림자의 전설 ㅣ 안개 3부작 1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송병선 옮김 / 살림 / 2010년 1월
평점 :
2010년 2월 26일
9월의 빛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살림/283p./2010년1월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수준 낮은 독서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성장과 결혼, 직업 등 치열한 세상사에 치이다 보면 한가하게 소설 나부랭이나 읽고 있을 여유가 없다. 문학 말고도 읽을 게 너무나 많다. 시나 소설, 수필 말고도 재테크, 자녀교육, 업무 관련 분야 등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자신에게 진저리가 쳐진다. 자신과 이웃, 세상에 대한 배려 없이 목표만 보고 정신없이 살아가다보니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책이 문학인 것 같다. 일상적인 책 말고 영혼의 깊은 곳을 건드리는 문학에 요즘 목말라 있다. 깊은 우물에서 막 퍼낸 시원한 한 바가지 물 같은 책을 만나 만사를 제쳐두고 읽고 싶다. 스페인 출신으로 광고계에 종사하다 영화 시나리오를 작업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 후 발표한 소설마다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는 루이스 사폰의 소설, 처음 만나는 이 책이 어떤 울림으로 다가올지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다.
검은 밤바다와 가느다란 한 줄기 등대의 빛, 서글픈 비밀을 간직한 오래된 대저택이 쓸쓸한 서 있는 표지는 앞으로 전개될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파리에서 꽤 떨어진 바닷가의 한적한 시골 마을, 영국인의 해변, 파란 만, 외딴섬, 사람이 살지 않는 등대에서 ‘9월의 빛’의 전설이 전해지는 이곳은 노르망디 해변이다. 남편의 사업 실패와 사망으로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시몬의 가족은 지인의 도움으로 이 해변의 대저택에서 일을 하게 된다. 바다가 보이는 아늑한 곶의 집에서 살며 괜찮은 보수까지 보장된 일자리에 시몬과 두 아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장난감 제작업자이며 병든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대저택의 주인은 친절하며 너그럽지만 그의 초대로 방문하게 된 대저택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예고하듯 수많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들을 맞는다.
어느 날 대저택에서 일 하던 한나가 갑자기 죽은 채 근처 숲에서 발견되는데 그녀의 죽음으로 시몬 가족과 미스터리한 대저택의 주인이자 장난감 제조업자의 비밀이 서서히 드러나는데...
등장인물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천사의 얼굴로 가난한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나누어주는 너그러운 자선사업가, 그 얼굴의 이면에는 그들을 사로잡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그들의 영혼과 사랑까지도 통제하려고 하는 악마의 얼굴이 함께 공존한다. 부모에게 외면당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학대당한 유년 시절을 보낸 남자의 외로운 영혼,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긴 후 뒤늦게 찾아온 사랑을 지키기 위한 그의 고독한 싸움은 처절하다. 일그러진 한 인간의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그가 겪었을 고통에 공감하며 그 내면의 치열한 선과 악의 싸움에 때론 의혹의 눈초리로, 때론 소리 없는 박수로 그를 응원했다. 이 책엔 생각만큼 개성 있는 인물들이 많지는 않지만 의연하고, 용감하고 아름다운 시몬의 딸 이레네와 고독하고 매력적인 바다 사나이, 이스마엘의 사랑은 서늘한 공포를 밝히는 환한 오렌지 색 등불 같았다. 출판되자마자 폭발적인 독자들의 반응 속에 3부 연작 소설들을 발표한 작가의 다른 책들에도 눈을 돌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