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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문
폴 알테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시공사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네 번째 문
폴 알테르/시공사/313p./2009년
오래간만에 정통추리소설을 읽었다. 역시 추리소설은 단숨에 읽어 제켜야 제 맛이다. 잘 쓴 추리소설은 형태를 알 수 없는 온갖 모양을 하나하나 맞추어 어느 순간 잘 짜인 선명한 그림이 드러나는 퍼즐과 같다. 덕분에 무디고 녹슨 머리를 회전하느라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다른 직장인보다 퇴근이 비교적 빠른 나는 이른 저녁을 먹고 첫 등장인물 제임스처럼 책이나 읽다 자려고 일찌감치 침대로 올라왔다. 그리고 자정 무렵이 돼서야 요 며칠 감기기운으로 뻑뻑하고 충혈 된 눈과 독서로 인해 점점 심해지는 두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1/5 뒷부분을 남겨두고 책을 덮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과 광기, 원한이 사무친 영혼들이 절규하는 복잡한 스토리를 한 밤중에 읽어댄 탓인지 약간 악몽에 시달리다 아침을 맞았다. 그리고 캄캄한 어둠이 깔린 복도 끝, 희미한 오렌지색 불빛을 뿜어내며 살짝 열려진 ‘네 번째 방’의 유혹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근무 중 약간의 틈을 타 얼른 나머지를 읽어버렸다.
간결하고 단정한 문장에 살짝 비꼬는 유머가 일품인 작가의 글 솜씨는 단번에 독자를 끌어당긴다. 연극의 무대처럼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조명이 살그머니 켜지고 숨죽인 관중들이 바라보는 긴장감 속에 어여쁜 18살의 처녀가 오빠의 방문을 노크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안락한 방에서 연애상담을 하고 있는 오누이의 천연덕스러운 대화, 이들의 따뜻하고 유쾌한 대화는 앞으로 펼쳐질 연쇄적인 살인 사건의 등장을 한층 더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영국의 옥스퍼드 근처의 한적한 작은 마을, 마을 끝 외진 곳에 세 채의 집이 있다. 동생의 연애상담을 해 주고 있는 제임스와 제임스의 절친한 친구, 헨리와 존의 집이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이 된다.
이 조용한 시골마을의 여느 집처럼 사랑하는 젊은 부부, 장난기 많은 아들,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던 존의 가정에 어느 날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아름답고 상냥한 아내가 어느 날 그 집의 꼭대기 층 복도 끝 네 번째 방에서 방문이 안으로 모두 잠긴 채 온 몸이 칼에 찔리고 양손의 정맥이 끊겨 죽은 모습으로 발견된다. 모든 방문은 안으로 잠겨있고 살인자의 어떤 흔적도 없기에 그녀의 죽음은 자살로 마무리되고 그 사건으로 남편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어려울 정도의 충격에 휩싸인다. 그 후 2,3층을 임대한 세입자들은 원인모를 공포에 시달리다 몇 달도 채 살지 못한 채 떠나버렸고 그 후 그 집은 ‘폭풍의 언덕’으로 불리며 무시무시한 폐허가 되어간다. 어느 날 의문의 부부가 나타나 그 집에 세 들어 살게 되면서 네 번째 다락방과 그 주변에서 실마리를 잡을 수 없는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소설은 살인, 미스터리, 심령술 등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요소들로 채워져 있지만 그렇게 잔혹하지는 않다. 문장은 담백하고 유머가 담겼으며 등장인물들은 그리 냉혹하지 않다. 도대체 누가 범인일까?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머리는 복잡하지만 그것은 아무 때고 무시무시한 공포의 칼을 휘둘러대는 사이코패스 같은 광기나 한 밤중 귀가길이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막연한 공포감은 아니다. 살인자의 행동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동정심을 이끌어내기도 하는 선량한 캐릭터라고나 할까? 한 군데 나름 충격을 받은 장면이 있기는 한데 그것은 새댁이 잡고 있었던 ‘그 차가운 손!’ 이다. 남편의 손인 줄 알고 내내 잡고 있었던 그 차가운 손은 대체 누구의 것일까? 작가는 흥미로운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행적을 통해 여기저기 그럴듯한 단서를 뿌려놓았다. 작가가 흘린 그 단서들을 붙잡고 도대체 누가 범인일까?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즐거운 고문이었다. 마지막 문단까지 반전을 놓지 않는 작가의 솜씨와 추리소설다운 산뜻한 결말까지 꽤 괜찮았다. 또 롤랑 라쿠르브의 <후디니와 그의 전설>에 등장하는 시대적인 마법사, ‘후디니’의 이야기도 메인 요리 속의 또 다른 요리를 맛보듯 색다른 맛이었다. 복잡하고 정성스레 만들어진 정통 프랑스 요리를 맛있게 먹고 냅킨으로 입가를 훔치는 포만감과 우아한 느낌을 선물해준 잘생긴 작가에게 감사를 보낸다.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하지 않는 것은 음식을 먹으면서 소화를 시키지 않는 것만큼이나 바보짓이다.” ---2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