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 브로드 1
팻 콘로이 지음, 안진환 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삶의 고난에 무릎 꿇지 않도록 격려하는 책
사우스 브로드
팻 콘로이 지음, 안진환, 황혜숙 옮김/ 생각의 나무/ 512, 472p. 2009. 10

가슴 벅찬 아름다운 문장과 방대한 스토리,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뛰어난 소설을 만났다. 500페이지 분량의 상하로 된 이 책은 한 자리에 북 박혀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운 스팩터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주말 내내 나의 엉덩이를 침대위에 붙들어 두었다. 그렇게 금요일 저녁부터 읽기 시작해 일요일 밤에 끝장을 보았다. 그리고 팻 콘로이에게 ‘벤허’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감동과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웅장함에 뒤지지 않는 현대 소설의 거장이라는 정의를 내려주었다. 이 책을 읽다보니 그동안 읽었던 여러 소설들이 떠오른다. 그러면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일까? 인생의 다양한 요소들, 기쁨과 슬픔, 선과 악, 사랑과 미움과 용서라는 인간 내면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인들을 보여주며 인생에서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비극과 고난에 무릎 꿇지 않도록 독자를 위로하는 이 책 같은 소설이 아닐까.

미국의 뛰어난 작가 팻 콘로이는 1945년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출생했다. 엄격한 군인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열여덟 살 이전에 스물세 번이나 이사를 했고 청년시절에는 교사로 잠시 근무하기도 했었다. 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교사로서의 경험은 그의 작품 속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손으로 묘사하고 있는 책의 배경인 미국 남부 사우스 캐롤나이나 찰스턴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미국 남동부에 속한 대서양 연안의 도시, 애슐리 강과 쿠퍼 강이 양쪽으로 흐르는 오랜 역사와 많은 사연을 가진 찰스턴은 우리나라의 남도를 떠올릴 만큼 짙은 정서와 색채를 가졌다. 미국 노예제도, 인종차별과 남북전쟁이 시작된 곳이라는 독특한 남부의 역사와 정서를 간직한 그 곳은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연과 추억을 품고 지금도 그들의 후손이 살아가고 있는 땅이다.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처럼 아버지의 깊고 넓은 사랑처럼 마르지 않고 도도하게 흐르는 강과 찰스턴의 유서 깊은 마을들은 이 책 속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에 한층 더 몰입하게 만든다.

어린 시절 너무나 사랑했던 형이 목욕탕에서 손과 목을 칼로 그어 자살한 사건을 목격한 레오는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정신병원 입원과 퇴원, 계속되는 정신과 치료를 감당해 오던 레오는 어느 날 갑작스런 마약 소지죄까지 덮어 쓰게 된다. 누가 봐도 레오가 소지했을 리 없는 상당한 분량의 마약을 그의 호주머니에 집어넣은 범인의 이름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오랜 기간의 사회봉사명령을 묵묵히 수행하는 레오, 그것은 알 수 없는 비극으로 자신을 짓눌러온 운명에 대한 저항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오면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의 행동을 취한다. 그것은 피하는 것과 맞서는 것이다. 피하는 방법 중 가장 극단적인 방법은 아마 자살일 것이다. 가난이나, 성적 학대나, 알코올 중독 부모를 가졌다거나 백인이 증오하는 깜둥이로 태어났다거나 ,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고아원을 전전한 인디언의 후손이거나, 아이들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생존의 위기에서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어떤 삶을 선택했을까?
누구라도 사랑하고 감탄해마지 않았던 눈부신 외모와 재능으로 빛났던 사춘기의
소년은 왜 목욕탕에서 손목을 그어 생을 마감해야 했을까?

레오는 새벽마다 자전거의 페달을 밟아 집집마다 신문을 배달한다. 나중에 그 자신이 칼럼을 쓰게 되는 그 신물은 찰스턴의 모든 변호사와 사업가와 유력인사들이 구독하는 중요한 신문이다. 그리고 사회봉사명령으로 수업을 마친 후 몸이 불편하고 지독한 독설가인 지역의 독거노인을 돌보거나 앞집에 새로 이사 온 남매에게 쿠키를 구워 찾아가거나 인근 고아원의 고아를 새 학교에 정착하도록 돕기도 한다. 그 자신도 아직 치유되지 못한, 아니 언제 치유될지 모르는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던 레오는 상처 입은 아이들과 친구가 된다. 희대의 살인마와 알코올중독 어머니를 둔 미친 미모와 음악적 재능을 가진 남매, 인디언 혈통인 고아 남매, 깜둥이 풋볼 선수, 명문 귀족가문의 인종차별주의자 백인 아이들, 그들은 서로 주먹을 휘두르고, 세상에 반항하고, 상대를 불신했지만 어느덧 믿고 의지하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뜨거운 관계로 변화되었다. 어떤 아이들은 이유 없이 닥치는 지옥의 폭력 앞에서 자신의 삶마저 지옥으로 몰아넣을 뻔 했지만 용케 그 지옥을 벗어나 세상의 빛이 되었으며, 어떤 아이들은 하나님도, 친구도, 연인이 내민 손도 잡을 힘이 없어 그 나락의 구렁덩이에 빠져 침몰해 가기도 했다.

삶이란 때로는 태풍과 한편이 되어 게르니카처럼 인생을 처참하게 파괴하는 강물 같기도 하고, 때로는 아침 햇살 같은 눈부심, 저녁노을 같은 황금빛으로 기쁨과 환희로 빛나는 애슐리강 같기도 하다. 누군가는 내게 예리하고 섬뜩한 칼날을 들이대고 누군가는 원치 않는 고통의 나락으로 나를 쳐 넣기도 한다. 누군가는 한평생 감옥에서 썩어 마땅한 인간이기도 하며 누군가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기도 하다. 또 누군가는 매일 환한 불을 밝혀도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사랑을, 누군가는 사랑의 환희를, 누군가는 인생의 공정함과 엄격함을, 누군가는 언제나 변치 않는 배려와 헌신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본질적으로 따듯한 마음과 지옥 같은 삶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유머라는 강력한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책은 저자의 말처럼 ‘인생에는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담담히 이야기한다. 나는 인생의 고난에 남자답게 당당하게 맞서는 아이들을 보며 기뻤고 인간의 약함에 무관심하거나 냉혹하지 않고 그 약함을 향해 손 내밀도록 가르치는 어른들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 인내하며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랑에 감탄했고,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인간과 신에게 다가가는 여러 가지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영어로 된 작가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우리말로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번역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러한 번역자들이 없었다면 명작을 즐겁게 읽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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