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미초 이야기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가스미초 이야기
아사다 지로/ 바움/2009년/ 269p.

가스미초 이야기는 딱 요즘처럼 은행나무 가로수가 짙은 노랑으로 물들어가는 10월을 위한 소설이다. 자고 나면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는 잎들은 비라도 내리고 난 다음 날 아침에는 우수수 떨어져 인도와 벤치를 덮는다. 봄날의 투명하고 환한 개나리나 산수유 꽃보다 더 노랗고 더 짙은 그 색은 서서히 오는 춥고 긴 겨울을 위해 가을이 마련한 작은 선물과 같다. 가을과 겨울의 추위가 오면 사라져 버린 한 여름의 강렬한 태양빛을 그리워하듯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 거리와 사람들을 추억하는 오래된 앨범 같은 책이다.

첫 소설집 <철도원>으로 이름을 알린 아사다 지로는 이 책으로 지금은 사라진 도쿄의 중심부 어딘가에 있었던 마을, 가스미초(안개 마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학입시를 앞 두고 있는 머리 좋고 방탕한 고등학생이었던 주인공과 사진관을 운영하는 할아버지, 돌아가셨지만 주인공의 기억 속에 늘 아름답게 기억되는 할머니, 데릴사위인 아버지 그리고 친구들과의 이런 저런 일들이 8편의 이야기에 담겨 있다.

할아버지는 이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중학생 때부터 인물사진을 찍어온 사진사이다. 사진사란 직업에 평생 긍지를 갖고 살아온 할아버지는 사진에 삶의 가치를 담으려 했던 장인이었다. 할아버지는 게이샤였던 할머니를 기적에서 빼내기 위해 많은 돈을 모으고 또 빌려서 할머니와 결혼했고,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니 돌아가신 후에도 평생 한 여자를 사랑하고 지켰으며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니었던 아들까지도 말할 수 없이 사랑했던 남자다. 할아버지의 삶을 주인공은 잘 이해할 수도 없고 쉽게 내색하지도 않지만 할아버지의 사랑과 사진에 대한 열정을 존경한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시간들을 옆을 지키며 함께 하는 손자는 할아버지를 마음 깊이 이해하는 속 깊은 친구 같기도 하다.

당시 도쿄의 문화가 그랬는지, 머리 좋고 공부 잘 해서 명문대 진학 추천서를 무리 없이 받아내는 멀쩡한 고등학생들이 밤이면 스포츠카에 여자들을 태우고 나이트 클럽에서 흥청망청 밤을 보내는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우리나라의 전쟁 전후 퇴폐적인 명동의 밤거리와 그곳을 활보 했던 미끈하고 돈 많은 대학생들처럼 고등학생이었던 주인공과 그 친구들은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함께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등교를 한다. 그런 분위기가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나 보다. 방탕한 손자를 , 아들을 어른들은 그리 크게 야단치지 않는다. 전쟁 후 옛날의 전통이 급격히 사라져가고 새로운 삶의 방식이 교차하는 과도기 일본인들의 방황이 그렇게 표현되었을까.
손주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늘 아름다운 모습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헌신적인 사랑을 동시에 받은 여인이다. 동시에 두 남자에게 사랑받았던 비밀을 간직한 여인, 주인공은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할머니를 닮은 평지꽃을 관에 넣어 드리려고 온 동네를 돌아다닌다.

특별히 재능을 인정받지도 못한 평범한 제자였다가 어느 날 스승의 데릴사위가 되어 조용히 사진으로 자신의 또 다른 삶을 살아간 주인공의 아버지, 때론 대립하기도 하고, 때론 사랑하고, 존경하며 스승의 열정을 알아준 제자는 ‘노스승’이란 한 장의 사진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세상에 내 놓았다.

가스미초라는 사라진 지명처럼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신 분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이 책은 지나온 시간들의 소중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그립다고 꼭 말해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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