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은 없다 - 2008 대표 에세이
김서령 외 41인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약산은 없다
김서령 외 41인/에세이스트사

회사 동료가 월간 <좋은 생각>을 구독해 보고 있어서 가끔 그녀의 책상 위에 놓인 책이 눈에 띠면 아무데나 펼쳐 한두 쪽씩 읽곤 한다.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슴 훈훈한 이야기들, 시인, 소설가, 과학자, 법조인 등 사회 각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이 들려주는 짤막한 이야기를 읽을 때면 빙그레 웃을 때도 있지만 주로 코끝이 찡해 온다. 일상의 한 순간을 진솔하게 들려주는 짧은 이야기들은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한 명문장이 아니어도, 심오하고 복잡한 내용, 치밀한 구성이 아니어도 자연스럽게 마음에 스며든다.

<약산은 없다>는 2008년 [에세이스트]지에 발표된 300편의 수필 중 수필작가들이 가려 뽑은 42편을 엮은 수필집이다. 5개의 큰 제목아래 몇 편씩의 글을 모아 실었고, 각 글의 말미에는 작가들의 간단한 약력이 기록되었다.
책 제목이면서 첫 번째 수필인 김서령의 '약산은 없다 '는 저자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서정적인 문장으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약산? 익숙한 이름이다. '약산의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 오리다' 라고 노래한 김소월의 시처럼
약산은 진달래꽃이 가득 핀 나지막한 야산일 것 같다.
내 어린 시절, 산 아래 바짝 붙어 있었다. 그 산도 봄이면 진달래가 가득 피어나
작가가 손에 잡힐 듯 그리는 약산은 내가 보고 자란 그 산의 모습과 겹쳐지곤 한다. 작가의 어머니도 기억 못하는, 그런 인물이 실제 있었는지 조차도 아슴푸레한 남자, 어린 시절 그 황씨가 들려준 묘향산과 작가가 기억하는 약산이 겹쳐지는 것처럼 내게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그런 이야기 한 두 편은 슬며시 떠오르곤 한다. 유년의 추억을 간직한 그 약산은 이미 댐으로 수몰되어 버렸다.
무섭지 않은 유일한 남자 어른, 든든한 산그늘 같은 황씨가 어른이 되거든 꼭 한번 가보라고 했던 묘향산은 오르고 싶어도 오를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래서 작가는 '지금도 산 밑에서 살지만 항상 산에 허기져 있다'고 한다.

'약산은 없다', '물소 문진', '사랑이 사랑을 버리다', '천 개의 구슬', '앉을 수 없는 사람들' 이들 다섯 꼭지의 제목은 그 아래 모인 글들 중 한 편에서 따왔다.
책의 목차를 보면서 추억, 사랑, 관계, 노년, 환경 등 어떤 주제로 묶지 않았을까 하고 각 글들을 자꾸 들여다보아도 꼭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저자의 나이와 삶의 환경이 각각 다르듯 글감도 다양하다. 대학 교수로 퇴직 후 결혼식장의 전문 주례사로 취직해 한동안 주례를 서 본 이야기, 글쓰기에 대한 단상, 그림그리는 도구인 물소 문진과 그림에 관한 이야기, 바쁜 생업의 굴레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물끄러미 일상을 바라보는 사색적인 글 등 가지각색이다.
어떤 글은 수필이야? 소설이야? 싶은 글도 있고 어떤 글은 지나친 심리묘사와 복잡한 수식에 선뜻 속내를 들여 내지 않는 모호한 사람을 보는 듯 답답하기도 한 것도 있었다.

그 중 재미있었던 글 중 한 편은 권창오님의 '너와 나 사이에 말이 있어 아름답다' 는 글이다. 세속의 찌꺼기들을 씻어버리고자 4일간의 단기 출가를 나선 수행자들, 수행중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수칙은 '묵언'이다. 정해진 규정대로 나름대로 열심히 정진하고 하산하는 순간.
"막걸리나 한 잔 하고 갑시다."
하는 말에 그동안의 고된 정진의 습관은 한 순간 씻은 듯 잊은 채 훈훈한 술잔이 오가며 왁자지껄한 말이 오감이 그렇게 인간적일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역시 속된듯 보여도 오가는 말 속에 인간미도 넘쳐 흐르는 것이리라.
여수의 향일암, 송광사, 송광암 등 익숙한 절 이름이 반갑기도 했던 글이었다.

또 한편은 '텐포족, 또 다른 나의 슬픈 자화상'이란 글이다.
텐포족이 뭘까? 도심의 서점으로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4시에 퇴근하는 양복을 입은 남자 퇴직자들을 말한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집에서 삼시 세끼를 해결하기도 민망해 회사로 출퇴근 하던 오랜 습관처럼 대형서점으로 향하는 중년의 남자들, 대형 서점은 대형이라는 이름답게 넘치는 책들과 넘치는 사람들로 이들을 사람들의 시선에서 이들을 가려준다. 지칠 때까지 책을 읽고 간단한 점심식사를 해결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 눈에 보일 듯 묘사하는 그들의 일상을 읽고 있자니 사막과 같은 팍팍한 세월의 한 가운데 존재하는 조그만 오아시스가 떠오른다.

인생을 계절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화사한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봄 보다는 가을에 더 어울리는 장르인 것 같다. 찬란한 젊음으로 가득 찬 시절에는 그것을 누리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지만 인생의 황혼기에는 살아온 날들에 저절로 눈길이 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 같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도로변이나 공원의 한 켠에 쌓여 있는 낙엽을 보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란 수필이 생각나고 '춘천'이란 지명에서는 피천득의 '인연'에 나오는 아사코가 생각난다. 삶이 어느 순간 쓸모없는 물건들로 넘쳐난다 싶으면 법정스님의 '무소유' 처럼 소유를 버리는 대신 여유를 얻는 삶을 살아야지 라는 작정도 해 본다.
이렇게 어렵지 않은 삶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 쓴 한 편의 수필은 시대를 거슬러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작가로, 교사로, 산업인으로 이런 저런 분야에서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42명의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 중에도 각자에게 다가오는 글들이 저마다 다를 것 이다.
일을 그만두고 어느 날 대형서점에서 책을 읽고 한두 권을 사서 나오다가 문득
언젠가 읽었던 '텐포족, ... 슬픈 자화상' 이런 제목의 글이 생각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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