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법 사전 - 문장의 달인을 위한 우리말 수사법의 모든 것
장하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글쓰기는 역시 쉽지 않다.
글씨를 깨우친 후 이십대 초반까지는 거의 매일 일기를 썼던 것 같다. 일 년에 공책 한두 권 이상은 너끈히 써서 아마 모아두었더라면 책꽂이 서너 칸은 차지했을 것이다. 지인들과 주고받은 책상 속 깊숙한 곳의 뭉툭한 편지묶음들, 일을 하면서는 직업과 관련된 글, 독서를 하고 나서 독서감상문,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 활동 등 그렇게 써 왔건만 글쓰기는 역시 어렵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는 작가는 하얀 빈 원고지를 마주 할 때 두려움이 엄습한다고 한다. 블로그나 워드 문서를 열고 그 빈 공간을 바라볼 때면 분명 목적을 갖고 그 자리에 왔건만 갑자기 세상이 정지된 듯하다. 그런데 그 순간의 막막함은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찾아온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인연처럼 회피할 수 없는 글쓰기, 그 관계에 어려움을 실감나게 느끼고 있을 때
'장하늘'선생님의 책 한 권을 만났다. 사전지식이 없는 이름인데 책의 저자 프로필을 참고로 인터넷을 뒤지니 내가 무식했을 뿐, 장하늘 선생님은 한국어 문장론의 집대성자라고 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다. 작년 6월 작고하시기 전까지 20여 년 간을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문장론을 가르치셨다. 한국문장론 연구가 빈약하고 제대로 된 문장론 관련 책이 없음을 한탄, '... 문법', '....문장',' .....한글' 같은 제목의 무수한 저서를 펴내셨다. 신문기사나 기사들의 블로그에서도 그의 이름이 쉽사리 검색될 만큼 전문 글쟁이들의 글쓰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셨는데, 그 글쟁이들 속엔 그가 가르친 제자들도 다수 포함된다.

한 블로거의 글 중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기사가 실려 있어 그 분을 겪어보지 않고도 그 깐깐한 글쓰기에 대한 성정을 알 것만 같다. 2002년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로 당시 중앙일보 편집국장에게 그의 중학교 때 은사인 장하늘 선생님께서 적나라한 질책이 담긴 편지를 보내셨다.
"나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찌 너는 그 따위로 글을 쓰느냐."
심지어 그의 기사를 확대복사해서 문장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비판하셨다.
그는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스승으로부터 난도질당한 2개의 칼럼을 공개하게 된 건 기자들의 글쓰기에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고 바래서였다."고 적고 있다.

우리 문장법 대가의 책이라니, 경외심이 발동하여 조심스럽게 머릿말부터 펼쳐 읽는데 <진도아리랑>의 구절로 시작되는 그의 글은 파격적이다. 완고하고 깐깐한 선생님의 이미지를 확 깨고 만다.



오동나무 열매는 감실감실
큰 애기 젖통은 몽실몽실

씨엄씨 잡년아 잠 깊이 들어라
문 밖에 섰는 낭군 밤이슬 맞는다

서방님 오까매이 깨벗고 잤더니
문풍지 바람에 설사가 났네

'섹스엔 도덕은 한갓 쓰레기! '
오까매이 - 올까봐, 깨벗고 등 노골적인 표현과 원색적인 사투리에 흠, 흠 헛기침이 나오려 한다. 처음엔 뭔 말인지 뜻이 가물가물하더니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 읽으며 저자의 해석을 보니 영화 속 한 장면인 듯 눈에 선하다.
고된 시집살이에 얼마나 맺힌 한이 많았으면 시어머니를 잡년이라고 할까. 남도의 퇴약볕에 아래서 종일 밭에서 일하랴, 빨래하랴, 밥 하랴, 부엌에서 종종거리며 눈치는 눈치대로 몸은 몸대로 썩어빠지게 일해야 하는 새파랗게 젊은 며느리의 휴식은 한 밤중 서방님과의 만남, 그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문장론 강의는 현학적 문장을 사용한 것도 문법적 법칙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어휘에 있다. 자, 다음의 낱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라.
말부림새, 검질긴, 비사치다, 노루막이, 생각의 곬, 갈닦아야, 허투루봄, 익숙꾼
모두 책의 머리말에만 등장한 낱말이다. 내가 보기엔 우리말 겨루기의 우리말 달인에 도전하는 문제의 수준 같은데 당신은 어떤가? 빨간 줄로 밑줄을 긋고 아래 풀이를 서너 차례 읽어서 생소한 낱말이 죽 깔리면 당황스럽다.

그러나 장애물을 넘어 목표를 향해 달리듯 한 번에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장하늘 선생님은 여러 수사법을 비슷한 범주끼리 묶어 범상치 않은 이름을 붙인다.
직유법, 은유법, 활유법 등의 비교법을 다룬 2장 뜻 바꾸기,
도치법, 설의법, 감탄법, 대조법 등을 다룬 3장 꼴 바꾸기
묵언법, 탈선법, 첨가법, 점층법, 패러디, 인용법 등 글의 틀을 바꿈으로써 표현과 전달의 효과를 노리는 4장 틀바꾸기,
아까 진도 아리랑 처럼 떡 하니 꺼내 놓기 어려운 노골적인 표현을 모나지 않는 온건한 표현으로 바꾸는 5장 에두르기, "읽혀야 문장이다." 는 말처럼 표현의 재미를 다루는 6장의 재미붙이기(풍유법, 역설법, 모순어법, 반어법..)
문장과 단락으로 이루어진 글에 통채로 생기를 불어넣는 기교인 7장 글짜기 이론 까지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었다.

순 우리말 낱말의 방해가 아니면 국어시간에 교과서에서 배운 익히 들어본 문법 용어들이다.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인 나의 국어 성적은 국어 1, 2 합쳐 2문제 빼곤 정답을 다 맞혔다. 그런데 더듬거리며 에두르기가 무언인가, 꼴바꾸기가 무엇인가 한자로 된 뜻을 읽고 나서야 금방 이해가 간다. 비록 누구의 잘못인지 모를, 우리말이 익숙하지 않은, 그렇다고 한문세대도 아닌 독자이지만, 곳곳에 인용된 한 시대의 뛰어난 작가들의 수려한 문장들은 여러 가지 난관을 뛰어넘어 독서의 재미를 더한다.
목가적 향수를 일으키는 박목월의 시 <산이 날 에워싸고>에서 '반복법이 사용되었다'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혼잣말 하든 읊고 반복한 구절이 이렇게 아름다운 시가 되는구나! 하는 느낌을 경험한다. 김영랑의 '오--매'란 감탄사가 연발 되는 싯구에서 붉은 단풍 같은 시인의 감성을 언어로 느끼는 게 중요한 것이다.
인용문 속에 또 인용된 글,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이 한 구절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독서의 즐거움이 아닐까?

<수사법 사전>은 제대로 된 수사법 관련 책의 부제를 한탄하며 간암 투병 중에도 이 책을 집필한 노학자의 아름다운 집념이 낳은 귀한 선물이다.
4월 산철쭉 꽃 같은 연 분홍 표지와 모란꽃 같은 진분홍 간지의 색으로 꾸민 책 모양도 참 아름답다.

적절한 수사법이 사용된 유려한 문장들과 그 사용법을 배우고 나니
어째 내 글쓰기가 더 험난한 고난의 시간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글쓰기로 밥 먹고 사는 전문 기자나 작가가 아닐지라도 바르고 아름다운 문장 쓰기는 평생을 갈고 닦아야 할, 고되지만 즐거운 숙제이겠지.
작가도 기자도 아닌 내가 글쓰기의 고됨을 견디며 즐겨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월만큼 희미해지는 소중한 기억의 순간들. 버리고 싶지 않은 가치,
무의식의 심층에서 자아가 자아에게, 세상에게 하고 싶은 말을 찾고 찾아 어렵사리 꿰어 세상에 내 놓을 때의 기쁨. 흩어져 있던 생각의 조각들이 적절히 자리를 찾아 들어가고 문장에 생기를 주는 한 낱말이 보석처럼 빛나는 기쁨. 얼마간의 쌓인 체증이 확 내려가는 어느 짧은 한 문장의 통괘함.
아직은 이런 것들이 내가 글쓰기에 끌리는 이유이다.

이미 고인이 되신 선생님께서 그분의 문장법 이론서를 읽고 쓴 내 글을 보신다면 뭐라고 평하실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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