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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가는 길 - 고3 아들과 쉰 살 아버지가 함께한 9일간의 도보여행
송언 지음, 김의규 그림 / 우리교육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사람에게는 그 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어린아이가 엄마품에서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크는 일,
세상 근심 없이 마음껏 뛰어노는 일,
배워야 할 때 배우는 일,
여러가지 것들이 많겠지만
가족이 꼭 해야할 일은 가족이기에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많은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함께 웃고, 함께 자고, 함께 아름다운 많은 일들을 경험한 가족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풍성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고3을 앞둔 아들이 어느 날 불쑥 국토순례을 하겠다고 하자
작가는 충격속에 쌍수를 들고 반대한다.
너의 지금 상황이 어떤데 국토순례이냐,
대학가서 해도 충분히 늦지 않다.
사람에게는 꼭 그 시간에 할 일이 있는데 지금 국토순례를 떠나는 것은
너의 직무유기다. 뭐 이런 말로 어르고 달랬지만
꿋꿋하게 꺽이지 않는 의지의 아들을 보며 작가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래, 도대체 누구랑 배낭 여행을 갈건데? 내가 믿을 만한 친구들이랑 가는 지 알아야겠다 하면서,
아들이 입에서 나온 한 마디에 이제 아빠는 치밀어오르는 희열과 흥분을 애써 감쓰느라 표정관리가 힘들다.
"아빠랑 갈건데..."
"아니, 이 녀석아, 그럼 진작 말을 해야지, 난 또 ..."
"아니 내가 길도 모르고 돈도 없고, 세상물정도 모르는데 그럼 아빠랑 가지, 누구랑 가"
부모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자식이라는 말처럼
작가 역시 자식의 순진하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생각에 홀딱 빠져버렸다.
서울인 집에서 땅끝 마을 해남까지 국토순례를 목표로 하루에 한 두 시간씩
며칠간의 걷기 연습을 한 후 한 해의 마지막 날 아들과 함께 드디어 집을 나섰다.
걷고, 밥 먹고, 자고, 걷고, 밥 먹고, 자는 고된 시간이지만
그 고됨은 아들과 함께 하는 동행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히 보생이 되고도 남는다.
작가의 친구들은 작가가 아들과 국토순례를 떠난다고 하자
대뜸 세월좋다느니, 부럽다느니, 은근한 시샘의 눈총을 던진다.
이들이 들어가는 밥집의 주인이나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흐뭇한 격려와 따뜻한 시선으로 두 부자를 응원한다.
고3이란 전쟁보다 더 한 전쟁을 온 몸으로 뚫고 나가야 할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이제 곧 닥칠 입시에 대한 막막한 두려움에 정면대항할 태세를 갖추고 배낭을 멘 아들, 각박한 세상에서 정 많고 용감한 두 부자의 여행길을 따라가면 어느덧 마음이 따뜻하게 데워진다.
종일 걷다가 찾아 들어간 시골 마을 입구의 허름한 밥집의 이런 저런 사연 깊어보이는 나이든 아버지와 어린 딸의 이야기, 예산 수덕사 아래의 수덕여관과 고암 이응로 화백의 가슴 아픈 이야기, 백담사와 만회 한용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이야기, 서천 비인이 고향인 소리꾼 김창진 명창의 이야기 등 지역에 얽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솔솔하다.
언제 또 아들과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동행할 시간이 있을까?
언제 또 아들의 발톱을 깍아주며 아들의 묵직한 다리에 짓눌리며
잠을 깰 일이 있을까?
교사이면서 작가인 저자가 최근 가장 잘한 일이 아들과 함께 한 9일의 국토순례와 그것을 이렇게 책으로 펴낸 일이라는데 작가 덕분에 이 땅의 많은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들이 오붓한 동행의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
사람에게는 그 때가 지나가버리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는데
그 소중한 것들이 다른 목적과 야망에 가려져 무시되고 사라져버리는
요즘 세상에서 깊은 산속 옹달샘 같은 시원함을 전해주는 이 책을
이 땅의 많은 아버지와 아들들이 읽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