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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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최소한 잊지는 말아야겠기에...



곰곰이 생각해본다. 내가 하루 중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하는 시간이 대체 얼마나 되는 거지? 그리고 거기에 거의 하루종일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 팔뚝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더랬다. 먹는 시간, 씻고 자는 시간, 더 보태보면, 뭐 재미있는 텔레비전 드라마 한 두 개 정도 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보내는 일상의 대부분을 인터넷과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많은 시간을 인터넷과 보내는 구나, 하고 내 현실을 깨닫긴 했지만, 또 그게 뭐 그렇게 나쁜 걸까? 싶었다. 나는 그동안 인터넷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편이었다. 사실 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원하는 정도에 따라 인터넷 서핑의 분량과 시간도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누구나 세상의 지식,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그 편리성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나야말로 인터넷의 편리성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부류중의 하나였다. 인터넷으로 얕은 지식들을 검색하고, 인터넷으로 신문 기사를 제목 위주로 읽어댔으며, 집안에 필요한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며, 심지어 식품 종류도 인터넷으로 쇼핑하는 일이 많았다. 이렇듯 인터넷의 바다에 깊숙히 빠져 그 달디 단 편리성에 허우적대고 있었으니 나의 현실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기회를 갖지 못한 건 당연했다. 그저 인터넷의 부정적인 영향이라면 전자파가 몸에 나쁘다니까, 컴퓨터 근처에 전자파 흡수에 용이하다는 선인장을 놓아두는 정도? 그 수준에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점점 책읽기가 힘들다거나, 뭔가에 집중하는 일이 힘들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노화의 탓이거니, 나도 이제 다 됐구나.. 그저 세월을 탓하며, 푸념을 늘어놓곤 했었다. 사실 오래도록 그렇게 오해하고 살았더라면 내 인생이 그냥저냥 편했을 거란 생각은 든다. 나는 어쩌자고 이 책을 읽어버린 걸까?

기억을 아웃소싱하는 시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저자는 선형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선형적 사고란 생각의 흐름이 일정한 체계성을 갖는 것을 말하는 데, 그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책읽기와 같은 활동은 일정한 체계로 진행되는 책의 논리를 통해 선형적 사고가 가능하게 하므로 사고력 증진에 효과적이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얻는 지식의 경우, 쉽게 말하면 우리가 필요한 부분만 뚝뚝 끊어서 보게 되기 때문에 그 지식의 앞뒤좌우에 대해 충분히 살펴볼 수 없고 그 논리의 체계를 간과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이 유용하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한 기준을, 예전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로 보았다면, 한발 더 나아가,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얻은 그 지식을 얼마나 오랫동안 잘 기억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검증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은 마치 암기가 시간낭비인 것처럼 적재적소에 훌륭한 정보를 쌓아두고 언제 어느 때라도 와서 보라고 너그러운 듯 웃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진정한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을지는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뇌가 지식을 저장하지 못하고 쉽게 잊어버린다면, 다시 돌아가 찾아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게 진정한 나의 지식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함이 있는 게 아닐까?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습득하는 지식들은 처음엔 단기 기억으로 임시 저장돼 있다가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치는데, 선형적 사고를 거친 기억이 좀 더 장기 기억으로 우리의 뇌 속에 잘 저장된다고 한다.

그 장기기억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정체성이 바로, 그가 가진 장기기억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책속에서 저자는, 인간이 경험해온 것들과 그 경험들 중 어떤 것들이 장기기억으로 남느냐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진다고 했다. 나 역시 충분히 동의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억하는 일을 이렇게 홀대해선 안되는 게 아닐까? 매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 중, 더 좋은 경험을 더 오래 간직할수록 우리가 더 좋은 사람에 가까워진다는 얘기이므로.., 우리는 언제나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걸 꿈꾸지 않나?

기억을 인터넷에 아웃소싱한 채, 쉽게 휘발되는 정보만을 쫓아 살아간다는 건, 결국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비로소 내가 깨닫게 된 사실은, 나의 정체성을 결정할 소중한 기억들은 온전히 자신만의 몫이란 것이다.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온전히 내 힘으로 기억하고 보존해야하는 소중한 것!

인터넷이 현대사회에 끼친 긍정적 영향을 모두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조금 속도를 줄여보는 것도 충분할거란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더라도 귀찮은 것, 불편한 것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노력, 기억을 지키려는 노력, 그 작은 부분에서부터 더 좋은 사람, 더 좋은 세상에 가까워지는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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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한쪽 눈을 뜨다 문학동네 청소년 7
은이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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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을 읽으며 오랜만에 나의 소녀시절을 떠올렸다가 얼굴이 화끈거려, 후다닥 기억들을 고이고이 접어 가슴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아직도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청소년기의 비행의 경험, 다른 사람들도 있을까?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유독 청소년기의 비행 정도는 모두가 눈감아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육체적 정신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는 걸 배려해주기 때문이겠지. 어쨌거나 그 시절 나의 비행 종목은 사기였다. 그날은 당시 우리 지역 체육관에 인기절정이던 농구단의 중요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우리 모두 그들의 엄청난 팬이었다) 아이들 중 하나가 놀랍게도 황당한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냈는데, 아무래도 지역에서 화제가 되는 경기인 만큼 가짜 방송반 행세를 해서 그들을 인터뷰하러 가자는 것이었다. 어느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고, 일은 착착 진행되어 가짜 인터뷰지 작성에, 녹음기 준비 등 손발을 착착 맞추며 우린 참 신나했었다. 훌륭했던 농구경기가 끝나고 우린 선수단 매니저를 찾아가 우리가 @@여고 방송반인데 선수들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교지에 실을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매니저는 처음엔 좀 귀찮은 표정이었지만, 경기도 이기고 했으니 꼬맹이들 소원 하나 못 들어주랴 싶었는지 순순히 인터뷰를 허락했다. 우린 황송하게도 매니저의 차를 타고 선수단 숙소 앞에서 내렸다. 도착해보니 역시나 선수단 숙소를 교복차림의 여고생들이 거의 에워싸다시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매니저와 함께 숙소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려하자 아이들이 와글와글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는데, 쟤네들은 뭔데 막 들어가냐는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자 매니저는 얘들은 학교 방송반이라 인터뷰 온 거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때 무리들 중엔 우리 학교 여학생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우리를 발견하곤 ‘쟤네들 방송반 아니에요’, 거의 울듯이 억울하게 외쳐댔다. 가슴이 마구 뛰고 두려움을 느끼긴 했지만 일의 실패에 대한 우려였지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어쨌거나 매니저는 약속했던 인터뷰 시간을 배정해주었고 우린 차례차례 선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인도 듬뿍 받고...그때 만났던 농구 선수들이 전희철, 양희승, 우지원, 현주엽 등등...

그때 우리에겐 그저 한 가지 목표만 보였고 그 목표의 달성만이 윤리였다. 그때 그렇게 당당했던 건 아마도 무지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나를 더더욱 부끄럽게 하는 건 매니저가 몰라서 속은 게 아니라 알고도 속아주지 않았을까 하는.. 아, 다시 부끄럽다.

청소년 소설을 읽으며 오랜만에 부끄럽지만 소중했던 경험들을 떠올려보았다. 청소년기의 추억들은 아마도 다 그렇지 않을까, 미숙하고 서툴러서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창피하고 미안한 기억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위태로운 시기를 어떻게 견뎌왔을까 신기할 만큼 아득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꼭 그만큼 낯설게 우리 청소년의 현실이 다가왔다. 교육현장에 오랜 시간 몸담아온 교사가 쓴 소설이라기에 그 충격이 더한 것 같다. 지금 우리 청소년의 현재가 이토록 절망적이란 말인가, 그냥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릴걸, 아프고 고독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왜 난 외면하지 못한 걸까, 살짝 후회가 되었다.

목소리의 중요성
이야기의 주공간인 교실은 영섭의 목소리대로라면 사바나의 세상이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그 세상은 모든 것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세상이고 그래서 강자 앞에 약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야 마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그곳에 지적장애를 가진 소년 영섭과, 겉보기엔 모범생이지만 성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심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반장 태준, 그리고 그들을 모두 아우르는 지도자로서의 담임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중 처음 만나게 되는 영섭은 이 사바나의 먹이사슬에서 가장 아래쪽에 위치하는 인물로, 황라사마귀에서 좀벌레를 거쳐 아프리카 맹꽁이 등으로 심리적 변신을 거듭하면서 되도록 강자의 눈에 띄지 않게 이 약육강식의 사바나에서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다. 만일 이 이야기가 영섭의 목소리로 일관되게 진행되었더라면 우리는 중학교 2학년 교실 내에서 벌어지는 집단 따돌림 문제에 대해 피해자의 일방적인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 두 번째, 세 번째 목소리를 중첩시켜 이야기에 입체감을 불어넣고 우리가 그들의 교실을 조금 멀리에서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도록 감정적 여유를 허락한다. 영섭의 목소리가 끝나면 태준의 목소리가, 또 담임의 목소리가 이어지기 때문에 같은 사건이지만 바라보는 입장이 다른 인물들의 진술을 통해 일방적이지 않은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이야기의 층위를 완성하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 학급의 반장을 막 떠맡게 된 태준은, 성적도 상위권이고 교우관계도 원만한 듯 보이는 전형적인 모범생 타입으로 교실과 교무실의 경계,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에 있는 즉 회색인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태준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반장이란 직책이 공부 좀 하는 아이들에게선 의외로 기피의 대상인가 보다, 왜냐하면 자잘하게 시간을 빼앗길 일이 많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반장이라는 역할을 피해가려한다는 것, 그에 반해 부반장 자리에 대한 반 아이들의 관심은 대단했는데 왜냐하면 부반장은 반장의 형식적인 보조역할만 해주면 되는데 반해 반장과 똑같은 점수를 받기 때문이다. 태준은 그런 이유로 반장이 되는 순간부터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게다가 주위의 과도한 기대에 대해 부담감을 갖고 더욱 더 도피처를 찾아 몰두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성이다.
어쨌거나 교실이라는 사바나는 어른에게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고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유일한 어른으로서 담임의 시점은 꼭 필요했던 것 같다. 과거에 시집을 냈었고 현재도 가끔 시를 읽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참담한 교육현실을 바로 보기엔 사실, 너무 이상적이다. ‘방심과 게으름, 괜찮겠지, 잘하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이라고 본인 스스로 표현했듯, 학생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면서도(-경계인 입장의 반장을 통해 약자와 강자가 공존하는 교실에 대한 꿈을 태준을 통해 이루려는 욕망이 있다-), 정작 자신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는 우유부단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이 많은데, 그래서일까, 유독 자기변명성격의 진술이 많은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렇게 우리 어른들의 모습을 꼬집고 싶었던 걸까?

그들이 속한 세계
어떤 사람이 속한 세계의 모습을 자세히 보기 위해선,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까?
그들의 삶에 돋보기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그들이 애착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옆모습이나마 살짝 엿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영섭의 세계는 그가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바나에 사는 동물들>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태준의 세계는 야동과 자위의 세계이며, 담임의 세계는 시를 꿈꾸지만 더 이상 시의 가치에 대해 알아주지 않는 입시중심의 교육현실이다. 안타깝게도 이들이 애착하는 것은 (영섭의)절대 소통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이며, (태준의)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금기시하는 세계이며, (담임의)성적 위주의 교육현실에서 멀찌감치 내던져진 어떤 진정성에 대한 향수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 세 목소리를 모두 모아놓은 교실은 해소되지 않은 어떤 욕망들이 가득 고인 채 썩어가는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지적장애를 가진 영섭은 일반 중학교 교육보다는 그에게 맞는 특수 교육을 받아야하겠지만 어쩌면 부모의 일방적인 욕심에 의해 또는 부족한 특수교육 인프라로 인해 자의반 타의반 맞지 않는 교육의 옷을 입고 있는 게 현실이다. 원시성이 가득한 사바나의 세계가 영섭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기준이라면, 고도로 문명화된 호모 사피엔스의 교실, 한없이 진화하는 지식의 향연이야말로 영섭을 더더욱 고립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악어나 하이에나의 따돌림보다도 교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영섭이란 인물을 따돌리고 있다는 데 생각이 멈추자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영섭에게 영어책, 수학책을 쥐어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일지라도, 그래도... 시스템이 원하는 졸업장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이 부모의 싸움이 이토록 처절하게 와 닿을 수가 없다.
한편, 태준이 속한 세계는 온통 성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 해소되지 않는 욕망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혼돈의 세계이다. 게다가 소년이 속한 ‘바로 여기’는 약자에 대한 폭력이 행해지는 공간이기에, 그래서 자신 앞의 약자에 대한 어떤, 태도가 요구되는 지점이고, 아마도 성장(사회적)이란 정확히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작가는 말하려했던 것 같다. 이전에도 누누히 담임은 태준에게 좀 더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길 요청해왔고 사실 그것은 소년의 영역이라기 보단 어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경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관을 정하는 일이 어른이 되는 일이란 걸 굳이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닌지... 마찬가지로 영섭의 ‘바로 지금’은 언제나 그랬듯 폭력이 행해지는 순간이며 본인 자신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의 불가해한 한 순간이기도 하다. 영섭에게 성장의 지점은 ‘바로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자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 것이다.
살아남아야 하는 영섭의 절실함과, 살아가는 태준의 위태로운 균형, 언제나 일이 벌어진 뒤 한발 늦게야 도착하는 담임 등 그 세계에 속한 목소리들은 교실이라는 우주 속 제각각 다른 행성에 다름 아니다.

소년들의 눈에 비친 어른의 모습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무래도 소년들이 주인공이니까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겠구나, 내심 예상하면서 읽어내려 갔다. 하지만 소년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법한 어른 남자 즉 아버지란 존재는 이야기 속에서 극히 존재감이 미미한 조연 중에 조연으로 머물고 있었다. 영섭의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에서 성희롱을 당한 뒤, 가해자들이 집에 와 용서를 비는 날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오는 것으로 처음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태준의 아버지 또한 야동 문제로 엄마와 태준이 갈등을 일으키는 순간, 중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잠시 등장했을 뿐, 게다가 태준의 아버지는 그 갈등의 내용조차 알지 못하고 퇴장한다. 한편 태석의 아버지는 아무데서나 아이에게 손찌검을 휘두르는 폭력적인 가장으로 그려지고 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란 어떤 의미일까,
세상사에 찌든 모습으로 등장하는 아버지, 어쩌면 있어도 없는 투명인간 같아진 슬픈 존재, 혹은 과한 폭력성을 드러내는 아버지 등, 이토록 처참하게 시들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이란...
결국, 이야기 속 소년들의 성장통이 유달리 힘들게 그려지는 것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아버지상에서 오는 소통의 부재, 그로부터 이어진 고립감, 두려움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소년의 고독을 이해하는 키워드, 성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성에 대한 관심이 가장 활발했던 때가 바로 청소년기였던 것 같다. 성의 특성상 막상 드러내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 시기엔 무조건 감추려고만 하다 보니 더더욱 집착과 공상을 불렀던 것 같다. 언젠가 성에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나는데, 한국의 성인 남자가 야동을 보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혹시 내가 남과 다를 지도 모른다는 공포, 결국 내가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을 위해 야동을 본다니, 우리 사회에서 성이 얼마나 폐쇄적인 영역에 속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었다.
이야기 속 태준 스스로도 지나치게 성에 집착하는 자신이 혹, 괴물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궁금해 하고 한편으론 혐오하며 혼자만의 갈등을 지속하는데, 그때 담임이 ‘성생활’ 이라는 개인의 고유한 영역에 대해 정확히 짚어주며 조언을 해준다. 그 사건을 통해, 태준은 자신의 일부에 너무 무관심했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좀 더 편안하게 자신의 욕구를 들여다보게 된다. 청소년기에 혼자 끙끙 앓고 있던 문제들이란 사실 꺼내놓고 보면 ‘너도 그래? 나도 그래!’ 식의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소통할 시간, 공간, 채널이 부족하다보니 그 두려움과 공포가,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그것이 실제로 내면에서 괴물로 키워지고 마는 것이다. 관심이 우리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아주 작은 진리조차 잊고 사는 세상이 되버린 걸까? 사실, 성에 가까워진다는 건 상징적으로 열심히 잘 성장(육체적)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한데, 성에 대한 두려움의 내면에는,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두려움도 깔려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처음으로 몽정을 겪은 영섭이 뭔가 평소와 다른 기운을 느꼈으면서도 본능적으로 그것이 아주 사적인 영역이라는 것을 깨닫고 엄마에게 비밀로 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
성장이란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도움을 받을 수도 없으며 오직 혼자 겪어내야 하므로,
열심히 성장통을 앓고 있는 소년들이 안쓰럽고 대견했다. 그래서 고독한 소년의 싸움, 그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의 끝에서 희망적인 세계와 만나게 되길 응원했었다.

역할 바꾸기
이 청소년 소설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작가가 폭력을 바라보는 시각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 소설이 이뤄낸 가장 큰 성취가 이 부분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전혀 계몽적이지 않으면서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독자를 논리적으로 잘 설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폭력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갈 수밖에 없는지, 우리는 좀 더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교실 내 따돌림을 주도하는 패거리에서도 가장 상위 포식자인 태석은 너무 약한 어머니와 너무 폭력적인 아버지라는 최악의 조합인 가정에 속해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식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휘두르기도 하고, 며칠씩 결석한 뒤엔 볼이 퉁퉁 부어 나타났다는 걸로 봐선 가정 내 폭력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학급의 소년들 사이에선 강자이지만 가정 내에선 그 또한 약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 가정폭력이란 것이 아주 미묘해서 우리나라 정서상 함부로 개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담임 또한 태석의 폭력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면서도 개입하지 못하고 그저 침묵할 뿐이다. 그렇게 모두가 무관심한 사이, 가정 내 폭력이 학교로 이어지고 학교에서 비행을 일삼던 태석은 자신보다 더 큰 형들과 어울리며 이전보다 더 큰 폭력집단으로 편입된다. 중요한 것은 폭력이 학습 형태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는 사실이다. 피해자의 학대받았던 경험이 고스란히 폭력에 대한 학습화 되어 새로운 폭력의 사슬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언제나 괴롭힘을 당할 줄 알았던 영섭이 정진의 책상에 소변테러를 하고, 교실에서 불장난을 하는 것은 물론, 교실을 벗어난 다른 공간에서 취하는 행동은 이 저주받은 순환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여줄 뿐이다. 침을 뱉다가, 물총을 준비하고, 심지어 주먹만 한 돌멩이를 집어 드는 모습은 학교폭력의 문제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이 교실 내 폭력이란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심리적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다. 정진과 영섭이 각서를 두고 서로 다투는 장면에서 문구사 아저씨가 나와 두 아이를 보며 누가 누구냐고 묻는 장면은 그 핵심을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집단 따돌림 문제는 단순히 힘이 약하냐 강하냐의 문제를 초월해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학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전철에서 혼자 있는 아이를 너무 쉽게 괴롭히는 영섭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게다가 가장 충격적인 건 위태롭게나마 경계를 지키던 반장이 경계를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영원한 피해자도 영원한 가해자도 영원한 경계인도 없다. 폭력과 강압의 에너지는 마치 살아있는 듯 언제나 그 세력을 불릴 숙주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독가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
결국, 독가시를 선택한 소년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고 있으면 아무도 다가오지 못할 텐데, 결국 점점 더 외롭고 쓸쓸해질 텐데...
안타까운 결말을 접하고 나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대화에 서투른지, 우리가 얼마나 소통의 어려움 속에서 헤매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결국 이야기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일이 마음껏 사랑하고 지켜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소년들에겐 관심이 필요하고 대화와 사랑이 필요하다. 고슴도치도 주인이 쓰다듬을 땐 날카로운 가시로 공격하지 않으니까, 아직 희망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사랑스런 고슴도치들을 보드라운 장미꽃잎처럼 품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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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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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없음’ 과 ‘있음’ 그사이 어디쯤


이야기는, 어느 푸른 여름날, 소년 연우가 유일한 가족인 엄마와 다른 동네로 이사 갈 준비를 하면서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타인의 눈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는 사실은 ‘없음’ 이다. 그 집엔 아버지란 존재가 없고, 화분이나 액자도 없다. 하지만 금세 또 깨닫게 되는 사실은 옷상자와 의자, 양초박스처럼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물건들은 또 보통이상으로 있다는 것. 이 두 가지의 대비에서도 알 수 있듯 이 가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범’이란 단어에서 조금 빗겨나 있다. 화분이나 액자가 전통적인 가족상을 상징한다면 신민아 씨가 선택한 의자나 양초, 고양이는 어쩌면 혁신에 가까워 보인다. 게다가 그녀의 의자들은 자신들의 원래 목적 말고도 다양한 기능을 담당해내고 있는 그야말로 멀티 플레이어이며, 그녀의 연하 남자친구 재욱도, 같은 관점으로 본다면 양초나 의자 그사이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사 때마다 물음표를 유발시키는 신민아씨의 옷상자는 사실 그녀의 직업과 관련된 것이다. 신민아씨는 옷 칼럼니스트다. 옷의 역사에서부터 옷에 얽힌 모든 이야기들을 글로 풀어낸다. 그녀의 남자친구 재욱은 문화평론가다. 두 사람 모두 글을 갖고 있다. 세대를 초월해 두사람이 소통할 수 있는 것도 아마 그때문일 것이다. 자신만의 언어로 소통하는 법을 알고 있는, 그야말로 어른이기 때문에.., 하지만 소년 연우에게는 아직 자신만의 ‘언어’가 없다. 연우의 세계에서 화분과 액자가 ‘없음’ 이었다면, 어른들의 세계에서 연우는 아직 ‘없음’ 이다. 중간에 끼인 세대로서 신민아 씨의 표현을 빌자면, 미완성의 기계로서, 완벽하게 있다고도 또 없다고도 얘기할 수 없는 소년이란 존재이기에...


책표지 뒷면의 어느 짧은 소개글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소년이 그토록 ‘파란’ 단어인줄은 나 역시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으므로... 



      

슬픔이라고 쓰고, 가정의 진정한 리얼리티라고 읽는다.
나는 진정한 슬픔이란 여름날의 눈꽃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희귀하고, 공감하기 어려우며, 쉽게 잊을 수 없는... 그래서 진정한 슬픔을 겪은 인간이야말로 더 완전해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거라고... 슬픔은 아름다움을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슬픔과 같은 말인 것 같다. 
소년이란 단어처럼... 


2. 우주와 연결되는 수많은 창(窓)


어렸을 때 나는 거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았다. 나를 비추는 큰 거울은 언제나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했고, 어쩌면 거울이 창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좁은 방이라도 거울과 함께 있으면 심심하지 않았고 언젠가는 내 거울이 그 창을 열어 다른 우주로 나를 들여보내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었다.



연우가 새로운 집, 새로운 자신의 방에서 제일 처음으로 한 일도 바로 자신의 거울을 거는 일이었다. 사실, 거울이란 자신만의 우주를 비추는 비밀스런 창(窓)과 충분히 같은 말이다. 예전 거울이 있던 자리에 자신의 거울이 맞춘 듯 꼭 들어맞는 것을 보며 이전 방의 주인도 자신과 같은 우주를 가졌던 걸까, 호기심을 갖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고독은 학교 숙제처럼 혼자 해결해야하는 것이지만 슬픔은 함께 견디는 거야. 평상시에 우린 각기 이기적으로 살수밖에 없는데, 그건 비상시가 닥치지 않았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개인의 권리이고, 그리고 비상이라는 건, 지금과 같은 극진한 슬픔의 발생이라고. 엄마가 나의 슬픔을 비슷하게라도 함께 느낄 수 있는 건 우리 둘이 가족이기 때문인데, 그것은 이 세상에 몇 안 되는, 가정식 백반에는 없는, 가정의 진정한 리얼리티라고. - 19p. 

 

그리고 열린 창 아래, 정확히 바로 자신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던 소녀, 채영
신민아 씨의 설명에 의하면 어제까지 그 방은 의젓하고 수영과 인사도 잘하고 또 교지편집부원이면서 반장이기도 한, 연우보다 한 학년 위인 어느 고등학생이 쓰던 방이었다. 그러니까 소녀의 시선은 엄밀히 말하면 과거를 향해있는 것이었다. 소녀의 시선을 통해, 소녀가 보고 싶어 하던 거울 속의 주인을 생각하던 연우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이 더욱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 ‘있는’ 존재가 되고픈 강렬한 욕망 또한 갖게 된다.


고독도 방학숙제처럼 혼자 해결해야하듯, 연우 자신에 관련된 일은 언제나 연우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므로 학교를 배정받기 위해 전학추첨관리교에 가는 일도 연우 몫이었다. 그곳에 보호자 없이 온 사람은 연우와 다른 아이 태수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처음부터 연우를 알아봐주고 호감으로 다가오는 아이, 연우는 태수를 통해 힙합이라는 새로운 창(窓)을 만나게 된다.


태수의 MP3를 통해 흘러나오는 멋진 신세계같은 음악의 주인공은 고등학생 래퍼 G. 그리핀이라고 한다. 그리핀? 전설의 새인가... 자신의 방 거울 맞은편 벽에서도 흐릿한 날개 낙서를 발견했던 연우, 채영의 엽서에도 그리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상하게 겹치는 이미지들. 어쨌거나 상처받기 쉬운 소년의 내면을 노래하는 고등학생 래퍼라니, 연우는 자신의 목소리로 마음껏 노래 부른다. 그가 좋아지려한다.




엄마의 남자친구들 중 가장 친절한 건 아니지만 가장 친밀한 존재인, 재욱 형
신민아 씨는 키 크는데 좋다며 재욱형과의 달리기를 추천한다. 글이 마음의 언어라면, 달리기는 몸의 언어랄까. 오래 잘 달리기 위해선 호흡의 완급조절이 필수인 달리기라는 운동에서 테크니션으로 조련돼가는 연우. 달리기라는 자신만의 언어를 습득해간다.




함께 있어도 늘 먼 곳을 보는 듯 아득한 시선을 가진 채영
다분히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가진 채영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가 인용하는 카프카를 읽기 시작한다. 카프카부터 시작했다지만, 생전 관심조차 갖지 않던 다른 이의 글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신민아씨의 칼럼에서, 재욱 형의 칼럼까지, 글을 통해 이전엔 보지 못했던 타인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로운 시선을 갖게 된다. 



3. 삼각형의 꼭대기, G. 그리핀



소년은 우주로 나 있는 수많은 창(窓)을 통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간다.



난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서 있던 그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안녕. 미안
Goodbye Boy-

 

연우를 둘러싼 소년들의 욕망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는 존재가 G. 그리핀이다.
욕망이 스스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복제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전제하에 욕망의 대리자가 존재한다면, 연우는 태수를 통해 G. 그리핀을 알게 되었고, G. 그리핀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존재가 되기를 욕망한다.
                                                  
 G. 그리핀 
  △ 
  연우태수


그리고 연우가 좋아하게 된 소녀 채영, 
처음에 채영은 그저 이름 없는 창밖의 소녀였지만 채영이란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녀가 바라보는 사람이 이전 방의 주인인 민기훈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연우가 채영에게 호기심을 가지면서 연우는 채영의 시선을 통해 이전 거울의 주인에게까지 평범한 관심 이상을 갖게 되었고, 채영을 좋아하게 되면서 그녀에게서 민기훈 같은 존재, 그 같은 위치에 서고자하는 욕망을 갖게 된다  

      민기훈 
  △
  연우  채영


그리고 흩어져있던 수많은 퍼즐 조각들이 하나로 완성된 순간,
민기훈과 G. 그리핀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G. 그리핀                         민기훈
 △↖      =     
연우  태수             연우   채영  


자신이 진정 원하던 인물이 채영의 민기훈인지, 태수의 G.그리핀인지, 아니면 날개 낙서의 주인 민기훈인지, 또 채영의 자신에 대한 감정은 무엇이었는지, 지금까지 굳게 믿었던 모든 진실들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순간을 겪으며 어쩔 수 없이 소년은 한 뼘 더 성장하게 된다.
새가 알을 깨고 나가려면 이전의 세계를 파괴하는 고통을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처럼
연우를 둘러싸고 있던 하나의 세계가 깨어지는 고통은 오로지 소년 혼자만의 몫이었다.




4. ‘단자’로 홀로서기


라이프니츠는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실재의 최소단위로 ‘단자’라는 말을 썼다. 
나는 미셀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 에서 ‘단자’로 돌아가고자 했던 중년의 브뤼노의 슬픈 회한을 기억한다. 우리는 때때로 관계의 옷이 너무 무거울 때 그것을 훌훌 벗어버리고 우주의 개인으로 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하지만 대개는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가능한 일이 됐는지 잊어버린 것 같다. 그건 옷이 아니라 이미 나의 뼈와 살이 되었으므로...
살면서 우리는 몇 순간이나 ‘단자’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 안의 ‘소년’이 그렇게 아픈 것은 우리가 바로 그 몇 순간을 ‘소년’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오늘, 이제 막 시작하려는 소년 연우를 통해 우주의 고독한 개인으로서 홀로 서있어야 할 소년의 두려움을 부러움 가득한 두 눈으로 응원해주고 싶다. 쪼개지고 부서지고 나눠지다가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고유의 존재 단위로 우주에 홀로 서있을 소년의 외로움과 두려움, 슬픔이 오롯이 전해져온다.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렴,


5. 봄눈 지나 다시, 여름

우리가 ‘단자’로 홀로 서야 하는 건, 궁극적으로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오롯이 혼자 설 수 있어야 둘도 행복해진다는 불변의 진리.
‘없음’ 에서 ‘채워짐’ 으로 ‘채워짐’에서 무수한 ‘분리’의 과정을 거쳐 ‘단자’ 로 홀로 선 뒤,
두 팔 벌려 채영을 맞이할 수 있게 된 연우가 신기하고 자랑스럽다.
봄눈이 지나면 다시, 여름. 이제 정말로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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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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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미 니 카 !

도미니카 공화국이란 지명은 내게 생소하기보단 오히려 친근한 쪽에 가깝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도미니카 공화국을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잠깐 취미를 붙인 우표수집 때문에, 사실 자의적인 것은 아니었고, 아버지의 취미를 물려받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가진 우표첩엔 육영수 여사의 초상이 그려진 우표라든가, ‘둘만 낳아 잘 기르자’에서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시리즈까지, 새마을 운동 포스터가 그려진 처음 보는 우표들이 많이 꼽혀있었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차별성을 갖기 위해 세계 우표 수집에 더욱 열을 올렸다. 친구들과 참고서를 산다든가, 뭔가 필요한 걸 사러 시내에 나갈 때마다 조그만 우표수집상 가게를 찾았고, 주인아저씨가 자랑스레 촥.촥.촥. 늘어놓는 세계의 우표들 중, 내가 마음에 들어 콕 집어 들고 ‘이거요’ 하며 내미는 화려하고 이국적인 우표들은, 대개 도미니카 공화국의 것이었다. 우표가 하나둘 늘어갈수록 어쩐지 친근했고 아름다운 나라일 것 같았다. 도.미.니.카. 공.화.국. 하다못해 나라 이름까지도 예쁘다고 생각하며 마구마구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던 1990년의 내가 있었던 방으로부터, 2011년의 내가 위치한 방까지의 물리적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일까, 한때 소중히 간직하던 우표첩은 대체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엔 팔뚝에 오스스 소름까지 돋아있었다.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도미니카 공화국에 대한 혼자만의 오해를 계속해 온 나 자신에 대한 화끈거림이기도 하고, 같은 여성으로서 우라니아에게 느끼는 감정 때문이기도 하고,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작가로서의 재능에 감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그 우표첩은 대체 언제, 어디로 여행을 떠난 걸까? 난 그걸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세상의 모든 상처들도 그렇게 물리적 시간의 어디쯤으로 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다. 언제 떠났는지 느끼지도 못하게 꽁무니를 빼며 달아나버렸으면... 언젠가 상처를 바로 보아도 아프지 않아도 될 나에게 비로소 찾아오는 건 괜찮겠지, 그땐 상처의 기억마저도 정다운 우정으로 나눌 수 있을 테니, 우라니아를 위해서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어떤 속도로 어딘가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을 내 우표첩에 대해 생각했다.
 

물리적,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도미니카’ 

염소의 축제 속 이야기는 총 세 개의 층위로 진행되는데, 그 구성방식이 무척 흥미롭다. 간단히 설명하면, 벽에 풍경화가 걸려있다(풍경화처럼 보인다). 한 여자가 몇 걸음 떨어져서 그 그림을 보다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 결국엔 허리를 숙인 채 풍경 속의 세세한 디테일들을 살피기 시작한다. 풍경 속의 거대한 한 남자를 찾아낸다. 자신이 세상의 전부라 믿는 어리석은 남자, 그리고 그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볼 수 있는,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암살자들이 하나 둘 셋 넷... 숨은 그림처럼 숨어 있다가 찾아내지고, 그리고 마침내 여자가 허리를 펴려할 때 그림 속 모퉁이의 한 구석에서 흐릿하게 지워지기 직전인 듯한 소녀를 가까스로 찾아낸다. 그림 속의 소녀는 어느새 그림 밖의 여자와 똑같은 얼굴로 선명하게 존재한다. 이건 풍경화일까, 풍경사진일까?

시간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오래전 어떤 과학자의 말을 통해 기억하고 있다.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결국 공간의 다른 말일 것이다. 언제나 우린 어떤 공간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도미니카라는 특수한 물리적 사회적 공간의 곳곳에, 시차를 두고 배치된 각 인물들의 이야기이며, 특수한 시공간의 특수한 상황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를, 작가는 보여주고자 했음이리라.

이야기의 문을 여는 주인공은 49세의 여성, 우라니아다. 미국 뉴욕에 살던 그녀는, 조국인 도미니카의 땅을 막 밟은 참이다. 하버드 로스쿨을 수료하고 세계은행의 법률전문가로 활동하는 엘리트 여성이기도 한 그녀가, 도미니카의 땅을 다시 밟기까지 35년이 걸렸다고 한다. 대체 왜? 그녀는 우리의 의문에 답하기 위해 그 키(key)를 쥐고 있는 인물에게 우리를 안내한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그녀의 옛날 집, 한때는 분명 아름다웠을 테지만 이젠 쇠락해 흉물처럼 변해버린 낡은 추억의 장소인 그곳에, 그녀의 아버지 아구스틴 카브랄이, 그의 공간처럼 흉물스럽게 늙어가고 있었다. 

35년간 닫혀있던 부녀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반드시 불러내야만 했을 도미니카의 어두운 과거. 두 번째 이야기는 1930년 부정선거를 통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처음 당선된 뒤부터 61년 5월 30일 암살되기까지 31년간이나 도미니카를 독재의 공포로 몰아넣은 인물, 트루히요의 마지막 나날에 대한 것이다. 31년간 도미니카의 역사는 곧 트루히요의 역사였고 조국 도미니카는 곧 트루히요였다. 도미니카의 건물, 거리, 공공기관, 사업장, 문화, 예술, 어디에나 트루히요가 있었다. 조국이란 공간과 자신을 동일시한 독재자의 나라에서 이성과 자유의지가 마비된 채 살아가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우라니아와 그녀의 아버지 아구스틴 카브랄과의 사이에 생성된 물리적 거리(distance)엔, 분명 트루히요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음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던 트루히요 암살자들의 이야기.
트루히요가 종종 타락의 축제를 벌이는 공간인, 산크리스토발의 ‘마호가니의 집’으로 가는 길목의 말레콘 앞에 시보레 차량을 주차해놓고 기다리는 모습으로 그들은 등장한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그날, 61년 5월 30일에 그들은 트루히요의 반동자로서 위치하지만, 사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트루히요의 열렬한 주동자로 위치하던 사람들이었다. 일단 그들의 물리적 현재 위치를 점검해보면, 뒷좌석에 터키인 살바도르 에스트레야 사드알라가, 그의 옆에 아마디토 가르시아 게레로 중위가, 운전석엔 터키인과 가장 친한 안토니오 임베르트가, 조수석엔 안토니오 델라 마사가, 그리고 그들로부터 2킬로미터 앞에 페드로 리비오 세데뇨와 우아스카르 테헤다 피멘텔이, 거기서부터 또 1킬로미터 앞에 로베르토 파스토리사 네헤트가, 그리고 또 다른 가스쿠에의 집에서는 후안 토마스 디아스 장군이 그들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루히요가 축제를 향해 움직이길 기다리면서...

 31년하고도 4년이 더 걸린 35년만의 재회에서 우라니아는 계속해 아버지에게 묻는다. 그가 알아듣는 것인지 확인조차 할 수 없으며 더더욱 대답조차 들을 수 없는 상태인 그에게 던지는 질문이란 이미 우라니아 스스로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 질문들을 소리 내 묻는 것은 어쩌면 선언적 의미처럼 보인다. 비로소 공포에서 해방된 사람이 더듬더듬 이런 일이 있었으며 저런 일이 있었던 것을 비로소 바로 확인해보고 자기를 납득시키는 순간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라니아는 자신의 상처를 증언하기 위해 다른 증인들이 위치한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곳은 아델리나 고모로 대변되는 도미니카의 과거와 마리아니타로 대변되는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독재자답게 트루히요는 도미니카에서 가장 많은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는 자선가이며 총통이자 실질적인 대통령이었으며 국군 통수권자였으며 국가 기관 산업의 이익을 독점하는 상인이었으며 종종 하느님과 비견되는 절대자의 모습으로 우상화되었다. 가장 끔찍한 건 그가 각료의 아내, 딸들과 잠자리를 했다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각료의 아내와 더 오랫동안 지내기 위해 남편을 외교관으로 파견하고, 도착하는 곳에서 마다 해괴한 미션을 주어 세계를 돌아다니게 만드는 에피소드는 정말 황당하고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아내를 마음껏 취함으로써 가장으로서 가정에서의 그들의 위치를 무력화시키는 무자비한 파괴자는그들 각자의 가정에서조차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으로 권력을 영속시켰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도 단하나 제어하지 못하는 게 있었으니, 바로 그의 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권력이 통하지 않는 단 하나의 공간이 바로 그의 몸이었던 것이다. 처녀를 파괴하지 못한 노쇠한 몸에 절망해 손가락으로 처녀를 망가뜨린 그 밤 이후, 그는 그 말라깽이 여자애가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왔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불행을 희망으로 덮어버릴 새로운 축제를 향해 가다가 영원한 죽음을 맞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랑스러워야 할, 염소를 죽인 사람들의 이야기.
작가의 목소리가 가장 뚜렷하게 반영돼있는 부분이 바로 암살자들의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조국 도미니카에서 소위 엘리트로, 지배층의 수혜를 많이 받은 쪽에 속한다. 밑바닥에서의 봉기가 아닌, 결국 사회지도층의 배신으로 독재자가 몰락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터키인 살바도르 에스트레야 사드알라는 트루히요 소유의 건설회사에 속해있었고, 아마디토 가르시아 게레로는 트루히요 경호부대의 중위로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분이다. 안토니오 임베르트는 한때 투에르토 플라타 지방의 주지사였으며, 안토니오 델라마사 또한 한때는 트루히요의 경호원이었다가 전역해 지금은 트루히요의 제재소를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날 밤 염소가 분명히 올 것이라고 재확인해주고 간 조력자, 미겔 앙헬 바에스 디아스는 심지어 도미니카 당의 부총재이다. 가스쿠에의 집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후안 토마스 디아스 장군도 1940년대엔 트루히요의 광적인 추종자였다. 물론 그들을 주동자의 위치에서 반동자로 변화시킨 데는, 어떤 계기들이 있었다. 살바도르 에스트레야 사드알라는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콘스탄사, 마이몬 그리고 에스테로 온도가 군사침략을 당했던 날, 트루히요와 싸우기로 결심했다. 아마디토 가르시아 게레로는 루이사 힐과 결혼하려했지만 그녀의 남동생이 반란군의 하나라는 이유로 결혼을 거부당하고, 충성 시험의 일환으로 그녀의 남동생을 죽이는 일까지 자신에게 시켰던, 권력자에게 복수를 원했다. 안토니오 임베르트는 1949년 그가 주지사로 재임하고 있던 투에르토 플라타 지방의 루페론 해변에 트루히요 반대자들이 상륙했을 때, 그들의 군사원정이 완전히 실패로 끝나며 모든 침략자들이 체포되었지만, 트루히요는 체포된 사람들을 모두 사면했고 자신의 관용을 과시하기 위해 망명을 허락하는 연극을 벌였다. 반면 주지사였던 토니오 임베르트와 그의 동생이자 그 지방 사령관이었던 세군도 임베르트는 직위해제당한 뒤, 감옥에 갇혀 구타당했다. 그래서 그는 트루히요의 시체를 보고 싶어 했다. 안토니오 델라마사는 그의 동생 옥타비오가 트루히요에 의해 살해당한 것도 모자라, 그들이 꾸며낸 끔찍한 거짓말로 실상 두 번이나 죽음을 당한 것에 대해 복수를 맹세했다. 그는 4년 전에도 트루히요를 살해할 계기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결단력과 이성과 자유의지가 잠들어버린 마비상태였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미라발 자매와 그들의 운전사가 살해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하는 페드로 리비오 세데뇨와 우아스카르 테헤다 피멘텔같은 인물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만일 그들의 그런 사적인 계기들이 없었더라면 체제의 변화가 가능했을까, 하는 것이다. 순수한 동기가 행동의 변화가 된 인물이 몇몇 없진 않지만, 트루히요 정권의 가장 중심부에 속하는 엘리트들의 배신이 없었다면, 그들이 과연 고급정보를 얻고 행동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이다. 사실 그들의 가족들은 구성원의 일부가 체제의 반역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몰랐으며 오히려 체제에 순응하며 윤택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되묻게 된다, 그들은 과연 자랑스러워해야 하는가? 라고...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그는 염소의 죽음 이후, 푸포 로만 같은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명백하게 동의하는 부분이다. 염소의 죽음 이후에 그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곧바로 자신이 선점했어야 할 새로운 위치, 공간을 시간을 끌며 연기하다가 영영 잃어버리던 그 인물이야 말로 독재의 잔재가 한 인간의 정신에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있는지 그대로 증언하는 바에 다름 아니다. 이미 앞에서 안토니오 델라마사가 증언했듯, 결단력과 이성과 자유의지가 잠들어버린 그야말로 마비상태인 것이다. 염소의 죽음 이후 찾아온 혼란기에 자신의 물리적, 사회적 공간 좌표를 잘 정리한 발라게르 같은 인물이 끝까지 살아남아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희망이 될 수도 있지만, 역사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헨리 치리노스 같은 인물을 다시 등용해야만 하는 현실 앞에선 쓴 웃음이 나올 뿐이다. 이미 본 듯한 이 기시감이란...

그리고 상처받은 우라니아의 마지막 고백.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가 합의해버린, 독재자의 손가락이 그녀의 처녀성을 파괴한 뒤, 우라니아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공간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우라니아에게 남은 건 세계은행의 법률 전문가라는 사회적 공간뿐이다. 일그러진 도미니카의 역사처럼 우라니아 또한 정신적 상처로 얼룩 진 육체를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던 과거세대로서의 아델리아 고모는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절망을 드러내고, 마리아니타는 폐허 같은 우라니아에게 슬픔과 연민을 느낀다.
누군가 말하길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로 정리해 말할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상처는 아물기 시작한다고 했다. 우라니아가 35년 만에 상실의 공간인 조국에 반드시 돌아와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의 상처를 과거와 미래 앞에 증언하고 어두운 역사가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다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지...그럼으로써 그녀도 마음의 평온을 찾게 되길...

역사적 사실+마술적 사실주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바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특징들이 아닐까 싶다. 흔히 붐 소설로 비유되곤 하는데. 세계의 변방에 머물던 문학이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마치, 폭탄이 터지듯 세계문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붙여진 표현이라고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로 대표되는 초기 세대의 작가들로부터, 비교적 그 진화의 마지막 주자라 할 수 있는,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에서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까지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일단, 라틴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리얼리즘 소설 양식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합의된 역사적 사실에 제한받지 않고 상상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며내면서, 이야기의 즐거움을 회복하려는 사조가 소설의 죽음에 호흡을 불어넣었고, 이런 현상이 전 세계 문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마술적 사실주의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염소의 축제 같은 실재 독재자가 등장하는 역사소설이야말로 마술적 사실주의를 가장 영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역시나 소설의 내용이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마술적 사실주의의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첫 번째 특징은 허구와 현실을 적절히 뒤섞어 놓는 것이다. 트루히요는 실재했던 인물이지만 우라니아는 작가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트루히요의 이야기를 보며 풍경사진이구나 생각했던 독자들에게 우라니아라는 가상의 물감으로 덧칠해버리니 이게 풍경화인지, 풍경 사진인지 아리송하게 만드는 것이다. 도미니카의 역사적 현실에 바탕을 둔 역사소설이지만 우라니아를 통해 그 공간을 상상의 공간으로 대치시키는 것이다. 역사가들이 역사왜곡이라며 공격하는 지점이 바로 이런 곳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의 의무와 소설가의 의무는 분명 다른 것이니까.
두 번째 특징이라면 등장인물을 우화하는 점이다. 우스꽝스런 별명들이 그 예다. 자선가, 염소, 검둥이, 꼬마, 면도칼, 지식인, 터키인, 주정뱅이 입헌의원, 걸어 다니는 오물, 원숭이 킨타나 등등 다소 무거울 수 있는 배경과 이야기를 펼치는 역사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한번 비튼 뒤 가볍게 만들어줘 생동감을 획득하는 장치로 사용한다. 이런 세세한 디테일 한 글자, 한 글자에서 리얼리즘과 거리를 두려했던 작가의 섬세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세 번째 특징이라면 시점이 모호하고 서술자가 다양하다는 점이다. 3인칭 시점에서 ‘그’나 ‘그녀’에 대해 서술하다가 갑자기 시점이 바뀌며 서술의 주인공이 ‘너’가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아델리아 고모의 집을 찾은 우라니아가 상처를 고백하려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우라니아는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일을 그들 앞에 고백하는 방식으로 서술하기 시작하고, 또 하나의 목소리가 끼어들며 ‘너’ 라는 느닷없는 2인칭 시점의 서술방식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지점에서 나는 내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논리적인 전개방식이라든가, 고정된 시점 같은 정형화된 소설 쓰기의 방식을 거부하며 소설의 형식에서 조차 기존의 것에 대항하고 반항하는, 작가의 저항의지가 담겨있는 소설이라고 말이다. 물론, 갑자기 두 명의 화자가 등장하고, 화자 1의 서술 중에 갑자기 화자 2의 플래시백으로 점프한다던가하는 호흡에선, 읽다가 깜짝 놀라는 순간도 물론 있지만, 오히려 그런 생동감 넘치는 형식미야말로 라틴 문학의 정수가 아닌가 싶다. 기존의 소설에 익숙해있던 독자라면 처음엔 좀 어려울 수 있겠지만 충분히 읽기의 즐거움으로 상쇄하고 다양성을 흡수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소설의 마지막 장은 이미 덮었지만 조만간 꼭 다시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난 뒤엔 분명 받을만한 작가에게 노벨상이 갔구나, 확신이 들었지만 그 기쁜 소식을 좀 더 가까이에서 체감하게 되는 날은 언제쯤 오려는지, 2011년의 첫 달에 이런 좋은 책으로 독서를 시작했으니 올해엔 좀 좋은 일이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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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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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참 재미가 없다. 

아침에 일어나 내가 맨 처음 하는 일은 물 한 컵을 마시는 일이고, 마지막에 하는 일은 화장실에 들르는 일이다. 그리곤 집을 나서, 이젠 단련이 된 지옥철을 견뎌내고 무사히 일터에 입성하면, 째깍째깍.. 시계침은 참 부지런하게도 어느새 퇴근시간에 가닿아 있다.'아, 오늘도 밥값은 벌었구나' 발걸음도 가볍게 마트로 직행, 저녁 식탁에 놓을 먹을거리를 둘러보는 것도 잠시, 금세 가라앉은 마음에, 무거워진 장바구니들과 함께, 묵직하게 부은 얼굴로 되돌이표를 찍듯 돌아오는 게, 나의 하루의 대부분이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갑작스런 기시감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면, 세상에! 사는 게 참 재미가 없구나. 한숨이 절로 새어져 나오는 것이다. 결국 나란 인간은 먹고 싸는 생물학적 기계요, 돈을 벌고 쓰는 경제적 기계에 다름 아닌지, 되도 않는 철학적 물음까지 무한히 뻗어가다 보니 어떤 생각하나가 빼꼼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어릴 땐 참 재미있었다는 거... 어릴 땐 뭐가 달라서? 그땐 뭐가 있었지? 장난감? 불량식품? 아니, 생각해보면 그땐 항상... 이야기가 있었다.  

 

하루키의 인공호흡을 받다. 

20대의 필독서라 불리던 ‘상실의 시대’ 이후, 하루키의 최신작을 다시 읽을 기회는 어느날 그렇게 화들짝 놀람과 깨달음이 한바탕 지나간 뒤에야 찾아왔다.

“택시 라디오에서는 FM방송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토록 차분하고 주의 깊은 첫 문장이라니, 그 묘한 설렘이 좋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는지 모르겠다. 짬이 나는 대로 책을 펼치고 하루키의 인공호흡을 만끽하면서, 조금씩 이야기에 동화돼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 주인공 덴고의 생애 첫 기억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내게도 첫 기억이 있었는지, 언제, 어떤 내용이었나를 떠올리며 기억을 환기하는 순간이 찾아왔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첫 기억은 무얼까, 대체로 무심했던 타인에게까지 관심이 생기면서 지금의 삶이 놀랍도록 다르게 보이는 순간과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변화는 1Q84를 읽고 있던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가 보다. 자연스레 요즘 빠져있던 하루키에 대해, 서로의 첫 기억에 대해 얘기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찾아왔고, 별로 친하지 않던 동료조차 눈만 마주치면 과장된 얼굴로 “달이 두 개라며?” 묻고 다녀서 이미 여러 사람을, 기어코 깔깔거리며 웃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나의 시간은 2010년의 레일을 벗어나 이미 2Q10년의 레일 위에 있는 걸지도...

   

1Q84의 인물들을 관통하는 상실과 결핍

1Q84를 존재하게 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외롭고 쓸쓸하고 비어 있다.
인간이 기억함으로써 존재한다면, 덴고의 생애 첫 기억은, 자기 존재의 근원부터 회의하게 만드는, 잔인한 트라우마 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이유로, 가정이든 학교든 어느 곳에서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을 아오마메 또한, 상처는 필연이다. 결국 반쪽자리 가족을 버리고 자립하지만, 성인이 된 뒤 가진 직업마저 프리랜서 형태인걸 보니, 관계의 온기를 한 번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을 아오마메가 안타깝고. 생의 시작점부터 존재의 상처를 안고 달려왔을 덴고는 측은하기까지 하다.

결과적으로 덴고와 아오마메가 만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우시카와 역시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유별난 외모는 비호감의 전형이며, 변호사라는 안정된 직함을 갖고 있었으나 실수로 면허를 상실하고, 한때나마 완벽한 가정을 꾸렸었으나, 그 마저도 지금은 잃어버린 상태다. 아오마메를 지원하는 노부인도 딸을 가정폭력으로 잃은 상처를 갖고 있고 덴고와 공기번데기 소설의 공동 작업을 하는 후카에리 또한 어릴 때부터 속해있었던 선구라는 종교집단을 나와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신세다. 모두가 단절의 경험이 있고 상실된 것이 있으며 마음에 상처가 남았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결핍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 훌륭한 동력이기 때문, 아닐까?

복원에의 의지, 관계 맺기

가정폭력으로 딸을 잃은 노부인은 같은 상황에 처한 여성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아오마메는 그 과정에서 노부인과 다마루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상처를 극복해간다. 덴고 역시 문자를 통해 존재의 빈 공간을 복원하려한다. 쓰기를 통해 자신도 미처 몰랐던 가장 간절하게 원하던 무언가를 찾게 되고, 뜻하지 않게 자신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그 순간 철로의 레일이 방향을 바꾸고 아오마메가 탄 기차는 덴고가 있는 1Q84의 세계로 질주한다. 처음부터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온전하게 촉감(손)으로 전해졌던 관계의 온기를,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두 사람이 잊지 못했던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만남의 횟수 같은 것도, 그 완벽한 소통 앞에선, 아무 의미가 없었으리라.



달걀프라이는 달걀은 될 수 없지만...

1Q84의 세계를 떠나기 위해 수도 고속도로 비상계단 아래 서있던 아오마메와 덴고도 이미 이전의 아오마메와 덴고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퍼시버와 리시버, 마더와 도터,
한 세계를 창조하기에 완벽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때문에 계단을 거슬러 올라가 당도한 세계의 밤하늘에 달이 하나인지 세 개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을 것 같다. 달걀프라이는 다시 달걀로 되돌아갈 순 없지만 샐러드나 볶음밥을 만나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덴고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니까, 그들이 창조해나갈 전혀 다른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일지... 다음 이야기가 또 나올까?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간 이야기

처음엔 액자소설인가 생각했다가 하루키만의 새로운 형식에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이야기 자체를 이야기의 소재로 쓰다니... 아마도 하루키가 단단히 벼르고 별러서 쓴 소설 같다. 세상에 이야기의 힘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믿는 것이 리얼을 만들어요.
사실이 진실이 되는 게 아니라, 믿음이 진실을 만드는 겁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힘을 지닌 게 이야기랍니다. 사실 요 몇 달간 책을 읽으면서 내 삶에 조그만 이야기들이 생겨나는 체험을 했다. 이젠 정말 이야기를 멀리하지 말아야지. 이야기를 만들고 즐길 줄 아는 인간으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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