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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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미 니 카 !

도미니카 공화국이란 지명은 내게 생소하기보단 오히려 친근한 쪽에 가깝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도미니카 공화국을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잠깐 취미를 붙인 우표수집 때문에, 사실 자의적인 것은 아니었고, 아버지의 취미를 물려받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가진 우표첩엔 육영수 여사의 초상이 그려진 우표라든가, ‘둘만 낳아 잘 기르자’에서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시리즈까지, 새마을 운동 포스터가 그려진 처음 보는 우표들이 많이 꼽혀있었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차별성을 갖기 위해 세계 우표 수집에 더욱 열을 올렸다. 친구들과 참고서를 산다든가, 뭔가 필요한 걸 사러 시내에 나갈 때마다 조그만 우표수집상 가게를 찾았고, 주인아저씨가 자랑스레 촥.촥.촥. 늘어놓는 세계의 우표들 중, 내가 마음에 들어 콕 집어 들고 ‘이거요’ 하며 내미는 화려하고 이국적인 우표들은, 대개 도미니카 공화국의 것이었다. 우표가 하나둘 늘어갈수록 어쩐지 친근했고 아름다운 나라일 것 같았다. 도.미.니.카. 공.화.국. 하다못해 나라 이름까지도 예쁘다고 생각하며 마구마구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던 1990년의 내가 있었던 방으로부터, 2011년의 내가 위치한 방까지의 물리적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일까, 한때 소중히 간직하던 우표첩은 대체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엔 팔뚝에 오스스 소름까지 돋아있었다.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도미니카 공화국에 대한 혼자만의 오해를 계속해 온 나 자신에 대한 화끈거림이기도 하고, 같은 여성으로서 우라니아에게 느끼는 감정 때문이기도 하고,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작가로서의 재능에 감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그 우표첩은 대체 언제, 어디로 여행을 떠난 걸까? 난 그걸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세상의 모든 상처들도 그렇게 물리적 시간의 어디쯤으로 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다. 언제 떠났는지 느끼지도 못하게 꽁무니를 빼며 달아나버렸으면... 언젠가 상처를 바로 보아도 아프지 않아도 될 나에게 비로소 찾아오는 건 괜찮겠지, 그땐 상처의 기억마저도 정다운 우정으로 나눌 수 있을 테니, 우라니아를 위해서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어떤 속도로 어딘가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을 내 우표첩에 대해 생각했다.
 

물리적,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도미니카’ 

염소의 축제 속 이야기는 총 세 개의 층위로 진행되는데, 그 구성방식이 무척 흥미롭다. 간단히 설명하면, 벽에 풍경화가 걸려있다(풍경화처럼 보인다). 한 여자가 몇 걸음 떨어져서 그 그림을 보다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 결국엔 허리를 숙인 채 풍경 속의 세세한 디테일들을 살피기 시작한다. 풍경 속의 거대한 한 남자를 찾아낸다. 자신이 세상의 전부라 믿는 어리석은 남자, 그리고 그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볼 수 있는,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암살자들이 하나 둘 셋 넷... 숨은 그림처럼 숨어 있다가 찾아내지고, 그리고 마침내 여자가 허리를 펴려할 때 그림 속 모퉁이의 한 구석에서 흐릿하게 지워지기 직전인 듯한 소녀를 가까스로 찾아낸다. 그림 속의 소녀는 어느새 그림 밖의 여자와 똑같은 얼굴로 선명하게 존재한다. 이건 풍경화일까, 풍경사진일까?

시간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오래전 어떤 과학자의 말을 통해 기억하고 있다.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결국 공간의 다른 말일 것이다. 언제나 우린 어떤 공간에 위치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도미니카라는 특수한 물리적 사회적 공간의 곳곳에, 시차를 두고 배치된 각 인물들의 이야기이며, 특수한 시공간의 특수한 상황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를, 작가는 보여주고자 했음이리라.

이야기의 문을 여는 주인공은 49세의 여성, 우라니아다. 미국 뉴욕에 살던 그녀는, 조국인 도미니카의 땅을 막 밟은 참이다. 하버드 로스쿨을 수료하고 세계은행의 법률전문가로 활동하는 엘리트 여성이기도 한 그녀가, 도미니카의 땅을 다시 밟기까지 35년이 걸렸다고 한다. 대체 왜? 그녀는 우리의 의문에 답하기 위해 그 키(key)를 쥐고 있는 인물에게 우리를 안내한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그녀의 옛날 집, 한때는 분명 아름다웠을 테지만 이젠 쇠락해 흉물처럼 변해버린 낡은 추억의 장소인 그곳에, 그녀의 아버지 아구스틴 카브랄이, 그의 공간처럼 흉물스럽게 늙어가고 있었다. 

35년간 닫혀있던 부녀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반드시 불러내야만 했을 도미니카의 어두운 과거. 두 번째 이야기는 1930년 부정선거를 통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처음 당선된 뒤부터 61년 5월 30일 암살되기까지 31년간이나 도미니카를 독재의 공포로 몰아넣은 인물, 트루히요의 마지막 나날에 대한 것이다. 31년간 도미니카의 역사는 곧 트루히요의 역사였고 조국 도미니카는 곧 트루히요였다. 도미니카의 건물, 거리, 공공기관, 사업장, 문화, 예술, 어디에나 트루히요가 있었다. 조국이란 공간과 자신을 동일시한 독재자의 나라에서 이성과 자유의지가 마비된 채 살아가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우라니아와 그녀의 아버지 아구스틴 카브랄과의 사이에 생성된 물리적 거리(distance)엔, 분명 트루히요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음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던 트루히요 암살자들의 이야기.
트루히요가 종종 타락의 축제를 벌이는 공간인, 산크리스토발의 ‘마호가니의 집’으로 가는 길목의 말레콘 앞에 시보레 차량을 주차해놓고 기다리는 모습으로 그들은 등장한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그날, 61년 5월 30일에 그들은 트루히요의 반동자로서 위치하지만, 사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트루히요의 열렬한 주동자로 위치하던 사람들이었다. 일단 그들의 물리적 현재 위치를 점검해보면, 뒷좌석에 터키인 살바도르 에스트레야 사드알라가, 그의 옆에 아마디토 가르시아 게레로 중위가, 운전석엔 터키인과 가장 친한 안토니오 임베르트가, 조수석엔 안토니오 델라 마사가, 그리고 그들로부터 2킬로미터 앞에 페드로 리비오 세데뇨와 우아스카르 테헤다 피멘텔이, 거기서부터 또 1킬로미터 앞에 로베르토 파스토리사 네헤트가, 그리고 또 다른 가스쿠에의 집에서는 후안 토마스 디아스 장군이 그들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루히요가 축제를 향해 움직이길 기다리면서...

 31년하고도 4년이 더 걸린 35년만의 재회에서 우라니아는 계속해 아버지에게 묻는다. 그가 알아듣는 것인지 확인조차 할 수 없으며 더더욱 대답조차 들을 수 없는 상태인 그에게 던지는 질문이란 이미 우라니아 스스로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 질문들을 소리 내 묻는 것은 어쩌면 선언적 의미처럼 보인다. 비로소 공포에서 해방된 사람이 더듬더듬 이런 일이 있었으며 저런 일이 있었던 것을 비로소 바로 확인해보고 자기를 납득시키는 순간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라니아는 자신의 상처를 증언하기 위해 다른 증인들이 위치한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곳은 아델리나 고모로 대변되는 도미니카의 과거와 마리아니타로 대변되는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독재자답게 트루히요는 도미니카에서 가장 많은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는 자선가이며 총통이자 실질적인 대통령이었으며 국군 통수권자였으며 국가 기관 산업의 이익을 독점하는 상인이었으며 종종 하느님과 비견되는 절대자의 모습으로 우상화되었다. 가장 끔찍한 건 그가 각료의 아내, 딸들과 잠자리를 했다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각료의 아내와 더 오랫동안 지내기 위해 남편을 외교관으로 파견하고, 도착하는 곳에서 마다 해괴한 미션을 주어 세계를 돌아다니게 만드는 에피소드는 정말 황당하고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아내를 마음껏 취함으로써 가장으로서 가정에서의 그들의 위치를 무력화시키는 무자비한 파괴자는그들 각자의 가정에서조차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으로 권력을 영속시켰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도 단하나 제어하지 못하는 게 있었으니, 바로 그의 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권력이 통하지 않는 단 하나의 공간이 바로 그의 몸이었던 것이다. 처녀를 파괴하지 못한 노쇠한 몸에 절망해 손가락으로 처녀를 망가뜨린 그 밤 이후, 그는 그 말라깽이 여자애가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왔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불행을 희망으로 덮어버릴 새로운 축제를 향해 가다가 영원한 죽음을 맞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랑스러워야 할, 염소를 죽인 사람들의 이야기.
작가의 목소리가 가장 뚜렷하게 반영돼있는 부분이 바로 암살자들의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조국 도미니카에서 소위 엘리트로, 지배층의 수혜를 많이 받은 쪽에 속한다. 밑바닥에서의 봉기가 아닌, 결국 사회지도층의 배신으로 독재자가 몰락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터키인 살바도르 에스트레야 사드알라는 트루히요 소유의 건설회사에 속해있었고, 아마디토 가르시아 게레로는 트루히요 경호부대의 중위로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분이다. 안토니오 임베르트는 한때 투에르토 플라타 지방의 주지사였으며, 안토니오 델라마사 또한 한때는 트루히요의 경호원이었다가 전역해 지금은 트루히요의 제재소를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날 밤 염소가 분명히 올 것이라고 재확인해주고 간 조력자, 미겔 앙헬 바에스 디아스는 심지어 도미니카 당의 부총재이다. 가스쿠에의 집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후안 토마스 디아스 장군도 1940년대엔 트루히요의 광적인 추종자였다. 물론 그들을 주동자의 위치에서 반동자로 변화시킨 데는, 어떤 계기들이 있었다. 살바도르 에스트레야 사드알라는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콘스탄사, 마이몬 그리고 에스테로 온도가 군사침략을 당했던 날, 트루히요와 싸우기로 결심했다. 아마디토 가르시아 게레로는 루이사 힐과 결혼하려했지만 그녀의 남동생이 반란군의 하나라는 이유로 결혼을 거부당하고, 충성 시험의 일환으로 그녀의 남동생을 죽이는 일까지 자신에게 시켰던, 권력자에게 복수를 원했다. 안토니오 임베르트는 1949년 그가 주지사로 재임하고 있던 투에르토 플라타 지방의 루페론 해변에 트루히요 반대자들이 상륙했을 때, 그들의 군사원정이 완전히 실패로 끝나며 모든 침략자들이 체포되었지만, 트루히요는 체포된 사람들을 모두 사면했고 자신의 관용을 과시하기 위해 망명을 허락하는 연극을 벌였다. 반면 주지사였던 토니오 임베르트와 그의 동생이자 그 지방 사령관이었던 세군도 임베르트는 직위해제당한 뒤, 감옥에 갇혀 구타당했다. 그래서 그는 트루히요의 시체를 보고 싶어 했다. 안토니오 델라마사는 그의 동생 옥타비오가 트루히요에 의해 살해당한 것도 모자라, 그들이 꾸며낸 끔찍한 거짓말로 실상 두 번이나 죽음을 당한 것에 대해 복수를 맹세했다. 그는 4년 전에도 트루히요를 살해할 계기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결단력과 이성과 자유의지가 잠들어버린 마비상태였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미라발 자매와 그들의 운전사가 살해된 사건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하는 페드로 리비오 세데뇨와 우아스카르 테헤다 피멘텔같은 인물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만일 그들의 그런 사적인 계기들이 없었더라면 체제의 변화가 가능했을까, 하는 것이다. 순수한 동기가 행동의 변화가 된 인물이 몇몇 없진 않지만, 트루히요 정권의 가장 중심부에 속하는 엘리트들의 배신이 없었다면, 그들이 과연 고급정보를 얻고 행동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이다. 사실 그들의 가족들은 구성원의 일부가 체제의 반역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몰랐으며 오히려 체제에 순응하며 윤택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되묻게 된다, 그들은 과연 자랑스러워해야 하는가? 라고...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그는 염소의 죽음 이후, 푸포 로만 같은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명백하게 동의하는 부분이다. 염소의 죽음 이후에 그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곧바로 자신이 선점했어야 할 새로운 위치, 공간을 시간을 끌며 연기하다가 영영 잃어버리던 그 인물이야 말로 독재의 잔재가 한 인간의 정신에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있는지 그대로 증언하는 바에 다름 아니다. 이미 앞에서 안토니오 델라마사가 증언했듯, 결단력과 이성과 자유의지가 잠들어버린 그야말로 마비상태인 것이다. 염소의 죽음 이후 찾아온 혼란기에 자신의 물리적, 사회적 공간 좌표를 잘 정리한 발라게르 같은 인물이 끝까지 살아남아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희망이 될 수도 있지만, 역사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헨리 치리노스 같은 인물을 다시 등용해야만 하는 현실 앞에선 쓴 웃음이 나올 뿐이다. 이미 본 듯한 이 기시감이란...

그리고 상처받은 우라니아의 마지막 고백.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가 합의해버린, 독재자의 손가락이 그녀의 처녀성을 파괴한 뒤, 우라니아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공간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우라니아에게 남은 건 세계은행의 법률 전문가라는 사회적 공간뿐이다. 일그러진 도미니카의 역사처럼 우라니아 또한 정신적 상처로 얼룩 진 육체를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던 과거세대로서의 아델리아 고모는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절망을 드러내고, 마리아니타는 폐허 같은 우라니아에게 슬픔과 연민을 느낀다.
누군가 말하길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로 정리해 말할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상처는 아물기 시작한다고 했다. 우라니아가 35년 만에 상실의 공간인 조국에 반드시 돌아와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의 상처를 과거와 미래 앞에 증언하고 어두운 역사가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다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지...그럼으로써 그녀도 마음의 평온을 찾게 되길...

역사적 사실+마술적 사실주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바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특징들이 아닐까 싶다. 흔히 붐 소설로 비유되곤 하는데. 세계의 변방에 머물던 문학이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마치, 폭탄이 터지듯 세계문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붙여진 표현이라고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로 대표되는 초기 세대의 작가들로부터, 비교적 그 진화의 마지막 주자라 할 수 있는,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에서 페루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까지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일단, 라틴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리얼리즘 소설 양식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합의된 역사적 사실에 제한받지 않고 상상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며내면서, 이야기의 즐거움을 회복하려는 사조가 소설의 죽음에 호흡을 불어넣었고, 이런 현상이 전 세계 문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마술적 사실주의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염소의 축제 같은 실재 독재자가 등장하는 역사소설이야말로 마술적 사실주의를 가장 영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역시나 소설의 내용이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마술적 사실주의의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첫 번째 특징은 허구와 현실을 적절히 뒤섞어 놓는 것이다. 트루히요는 실재했던 인물이지만 우라니아는 작가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트루히요의 이야기를 보며 풍경사진이구나 생각했던 독자들에게 우라니아라는 가상의 물감으로 덧칠해버리니 이게 풍경화인지, 풍경 사진인지 아리송하게 만드는 것이다. 도미니카의 역사적 현실에 바탕을 둔 역사소설이지만 우라니아를 통해 그 공간을 상상의 공간으로 대치시키는 것이다. 역사가들이 역사왜곡이라며 공격하는 지점이 바로 이런 곳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의 의무와 소설가의 의무는 분명 다른 것이니까.
두 번째 특징이라면 등장인물을 우화하는 점이다. 우스꽝스런 별명들이 그 예다. 자선가, 염소, 검둥이, 꼬마, 면도칼, 지식인, 터키인, 주정뱅이 입헌의원, 걸어 다니는 오물, 원숭이 킨타나 등등 다소 무거울 수 있는 배경과 이야기를 펼치는 역사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한번 비튼 뒤 가볍게 만들어줘 생동감을 획득하는 장치로 사용한다. 이런 세세한 디테일 한 글자, 한 글자에서 리얼리즘과 거리를 두려했던 작가의 섬세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세 번째 특징이라면 시점이 모호하고 서술자가 다양하다는 점이다. 3인칭 시점에서 ‘그’나 ‘그녀’에 대해 서술하다가 갑자기 시점이 바뀌며 서술의 주인공이 ‘너’가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아델리아 고모의 집을 찾은 우라니아가 상처를 고백하려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우라니아는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일을 그들 앞에 고백하는 방식으로 서술하기 시작하고, 또 하나의 목소리가 끼어들며 ‘너’ 라는 느닷없는 2인칭 시점의 서술방식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지점에서 나는 내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논리적인 전개방식이라든가, 고정된 시점 같은 정형화된 소설 쓰기의 방식을 거부하며 소설의 형식에서 조차 기존의 것에 대항하고 반항하는, 작가의 저항의지가 담겨있는 소설이라고 말이다. 물론, 갑자기 두 명의 화자가 등장하고, 화자 1의 서술 중에 갑자기 화자 2의 플래시백으로 점프한다던가하는 호흡에선, 읽다가 깜짝 놀라는 순간도 물론 있지만, 오히려 그런 생동감 넘치는 형식미야말로 라틴 문학의 정수가 아닌가 싶다. 기존의 소설에 익숙해있던 독자라면 처음엔 좀 어려울 수 있겠지만 충분히 읽기의 즐거움으로 상쇄하고 다양성을 흡수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소설의 마지막 장은 이미 덮었지만 조만간 꼭 다시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난 뒤엔 분명 받을만한 작가에게 노벨상이 갔구나, 확신이 들었지만 그 기쁜 소식을 좀 더 가까이에서 체감하게 되는 날은 언제쯤 오려는지, 2011년의 첫 달에 이런 좋은 책으로 독서를 시작했으니 올해엔 좀 좋은 일이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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