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도를 봤습니다.
사실, 옴니버스라는 말이 무색한...
그저 단일 주제로 엮인 다섯편의 단편집이라는 게 더 가까울 듯하더군요,
다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한 프레임 안에 슬쩍 얼굴만 비추는 정도가
옴니버스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장르 영화의 실험성 부분에서는 많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His Concern 각본, 감독 -변혁
주홍글씨 이후로 작품 활동을 하지 않던 그가 오랜만에 만든 작품이라 가장 궁금했었죠.
처음 만난 남녀가 '섹스'라는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관계맺기의 외연과 내연을 보여준달까요?
남자는 부산출장 길, ktx 앞좌석의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하고 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어떤 말을 걸어야 좋을 지 부터, 이미 내뱉은 말에 대한 후회들까지...
남자의 모든 감각은 그녀를 향해 열려있고, 머릿속은 그녀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들어차게 되죠.
급기야, 형의 집 식탁에서 형수의 모습에 그 여자의 모습을 대입해 바라보는 장면을 보면서,
보고싶은 것만 보는 남자의 천성이랄까요... 풋, 한번 웃어주고요..,
결국 남자는 여자와 다시 만나게 되고, 운좋게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햇살이 가득 들어차는 아침, 여자의 작업실 침대에서 자고 있는 남자...그는 평온하더군요.
다만, 그를 바라보며 이젠 여자의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섹스 이전의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요...ㅋ
남녀관계에서 '섹스'라는 지점이 갖는 함의랄까요...?
위트있는 접근이었단 생각이 들었어요.
나, 여기 있어요 각본, 감독 -허진호
어떻게 생각해보면
에로스라는 주제에 가장 안어울리는 생뚱맞은 작품이기도 하고요,
다르게 생각하면 에로스에 대한 가장 제대로 된 접근이었단 생각도 들고요...
대부분의 의견은 전자 쪽에 집중되는 듯하지만... 글쎄요,
신혼부부의 이야기랍니다.
퇴근해 집에 들어온 남편은 마치 숨바꼭질처럼 아내를 찾기 시작합니다.
아내는 늘 숨어있다가 남편이 찾지 못하는 곳에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죠.
남편이 자신을 열심히 찾아주길 바라며 꼭꼭 숨어있던 아내는,
남편이 너무 쉽게 포기해버린 뒤엔 '나 이제, 안 찾을 거에요? ' 투정을 부리기도 합니다.
숨고, 찾고.. 부부의 행위에 관객이 호기심을 품을 무렵,
부부의 비밀은 침대에서 비로소 드러납니다.
'오늘 끝까지 하고 싶어' 갈구하는 아내를 남편은 애써 떨쳐내며 말합니다,
'병원에서 하지 말랬잖아'
아내의 병으로 인해, 부부는 에로스적 욕망을 완성하지 못하는 관계였던 거죠.
결국 서로를 찾아 숨바꼭질을 하는 부부란,
어디에나 있지만, 사실은 어디에도 없는 에로스를 찾아 헤매는
인간 심리의 은유가 아닐까요?
아내의 수술을 위해 나란히 외출했던 부부는 결국 남편 혼자 돌아와
집안의 등을 켜는 것으로 아내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남편에게 남겨진 것은 아내의 향수, 그녀의 체취가 남아있는 옷가지들...
존재의 흔적으로 온전히 의지할 건 허약한 기억뿐...이죠.
영혼이 된 아내는 여전히 혼자 남겨진 남편의 주위를 떠돌고
남편은 찾을 수 없는 아내를 그리워합니다.
타나토스로 치환된 에로스, 혹은 타나토스로 완성된 에로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결국엔 같다는 걸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끝과 시작 각본, 감독 -민규동
오감도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이 작품을 꼽겠어요. ^^
한 여자가 강에 재를 뿌리고 있습니다.
여자의 남편은 그녀 후배와 차안에서 정사를 벌이다
어이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죠.
여자는 남편을 보낸 뒤에도 어쩔 수 없이 집안에 남아있는 남편의 환영과
때론 대화하고 투닥거리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날 여자에게 알 수 없는 우편물이 도착해있죠.
도마뱀 두 마리가 서로 머리와 꼬리가 얽혀 한몸인 양 양각돼있는 카드 뒤엔
'물을 주면 필요한 것이 자랍니다' 란 수수께끼같은 메모가 적혀있습니다.
여자가 처음으로 도마뱀에 물을 주고 잠든 밤,
여자의 후배가 찾아와 같이 있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죠.
내치고 다시 내치길 반복하다가
결국 여자와 후배는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 사이의 공통 분모로 놓인 그녀 남편과의 추억을 공유하며
두사람은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죠.
죽은 남편의 생일을 맞아, 두 사람은 재를 뿌린 강가를 함께 찾게 되는데요,
후배는 처음부터 그녀만을 사랑했음을,
이미 그녀 또한 오래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음을 말로써 상기시킵니다.
그녀는 애써 외면하려하지만요...,
여기에서 첫번째 관계의 전복이 이뤄집니다.
삼각관계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는 줄 알았던 남편의 위치는
숨어있던 두 사람의 관계로 인해 역삼각형의 꼭지점으로 추락해 재배치 되는거죠.
남편
여자 △ 후배 ⇒ 여자 ▽ 후배
남편
그렇게 감정을 확인한 뒤 하룻밤의 꿈결같은 에로스
후배는 꿈같은 시간 속에서 '아직도 모르겠어? 난, 너야! '란 말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지고,
다음날 다시 나타난 죽은 남편에게 그녀가 묻습니다.
'당신도 알고 있었어?'
남편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여기서 두번째, 관계의 전복은, 다른 사람으로 믿었던 두 사람이 사실은 하나였다는 것,
아마도 에고(ego)와 이드(id) 정도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음날 아침, 그녀가 물을 줬던 카드 위엔 마치 희망처럼 연둣빛 새싹이 돋아있습니다.
결국, 진정한 에로스란 자아의 발견, 각성을 통해서라는 게 감독의 메시지가 아닐 지...
남편과의 분리, 후배(나)와의 화합, 분리의 과정이란
결국 끊임없이 이어지는 끝과 시작의 다른 말이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린 자아와 본능의 맨얼굴과 마주할 수 있을테니까요.
33번째 남자 각본, 감독 -유영식
처음엔 이게 공포버전이었던가... 하다가 깜짝 놀랐던,
공포에서 코미디로의 장르의 변주가 생동감있게 그려졌는데, 그건 좋았어요.
하지만 여배우에 대한 은유로서 뱀파이어를 차용한 건 좀 기대 이하... 너무 쉽게 간 느낌이랄까요?
크레딧이 올라갈 때 보니 오감도 전체기획자가 유영식 감독이던데, 아쉽습니다.
순간을 믿어요 각본, 감독 -오기환
커플간의 스와핑 실험으로 사랑을 확인한다는 내용이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랑은 확인하고, 깊어지고, 어긋나버리구요.
스와핑이란 소재나, 주인공들의 신분이 고교생이란 걸 빼면 그다지 도발적이지 않은...
전개 양상이라든가 사고방식은 오히려 더 클래식하게 느껴지니...오히려 언밸런스한 느낌?
감독이 좀 머뭇거린 느낌이 드는데,
차라리, 더 발칙하게 그렸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기대치에 가장 못 미치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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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무난, 그 이하.., 가벼운 소품집같은 느낌이네요.
아무래도 노출 마케팅 때문에 더 욕을 먹고있는 것 같은데,
저 다섯 감독... 오래 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