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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한쪽 눈을 뜨다 ㅣ 문학동네 청소년 7
은이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청소년 소설을 읽으며 오랜만에 나의 소녀시절을 떠올렸다가 얼굴이 화끈거려, 후다닥 기억들을 고이고이 접어 가슴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아직도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청소년기의 비행의 경험, 다른 사람들도 있을까?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유독 청소년기의 비행 정도는 모두가 눈감아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육체적 정신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는 걸 배려해주기 때문이겠지. 어쨌거나 그 시절 나의 비행 종목은 사기였다. 그날은 당시 우리 지역 체육관에 인기절정이던 농구단의 중요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우리 모두 그들의 엄청난 팬이었다) 아이들 중 하나가 놀랍게도 황당한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냈는데, 아무래도 지역에서 화제가 되는 경기인 만큼 가짜 방송반 행세를 해서 그들을 인터뷰하러 가자는 것이었다. 어느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고, 일은 착착 진행되어 가짜 인터뷰지 작성에, 녹음기 준비 등 손발을 착착 맞추며 우린 참 신나했었다. 훌륭했던 농구경기가 끝나고 우린 선수단 매니저를 찾아가 우리가 @@여고 방송반인데 선수들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교지에 실을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매니저는 처음엔 좀 귀찮은 표정이었지만, 경기도 이기고 했으니 꼬맹이들 소원 하나 못 들어주랴 싶었는지 순순히 인터뷰를 허락했다. 우린 황송하게도 매니저의 차를 타고 선수단 숙소 앞에서 내렸다. 도착해보니 역시나 선수단 숙소를 교복차림의 여고생들이 거의 에워싸다시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매니저와 함께 숙소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려하자 아이들이 와글와글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는데, 쟤네들은 뭔데 막 들어가냐는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자 매니저는 얘들은 학교 방송반이라 인터뷰 온 거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때 무리들 중엔 우리 학교 여학생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우리를 발견하곤 ‘쟤네들 방송반 아니에요’, 거의 울듯이 억울하게 외쳐댔다. 가슴이 마구 뛰고 두려움을 느끼긴 했지만 일의 실패에 대한 우려였지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어쨌거나 매니저는 약속했던 인터뷰 시간을 배정해주었고 우린 차례차례 선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인도 듬뿍 받고...그때 만났던 농구 선수들이 전희철, 양희승, 우지원, 현주엽 등등...
그때 우리에겐 그저 한 가지 목표만 보였고 그 목표의 달성만이 윤리였다. 그때 그렇게 당당했던 건 아마도 무지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나를 더더욱 부끄럽게 하는 건 매니저가 몰라서 속은 게 아니라 알고도 속아주지 않았을까 하는.. 아, 다시 부끄럽다.
청소년 소설을 읽으며 오랜만에 부끄럽지만 소중했던 경험들을 떠올려보았다. 청소년기의 추억들은 아마도 다 그렇지 않을까, 미숙하고 서툴러서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창피하고 미안한 기억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위태로운 시기를 어떻게 견뎌왔을까 신기할 만큼 아득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꼭 그만큼 낯설게 우리 청소년의 현실이 다가왔다. 교육현장에 오랜 시간 몸담아온 교사가 쓴 소설이라기에 그 충격이 더한 것 같다. 지금 우리 청소년의 현재가 이토록 절망적이란 말인가, 그냥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릴걸, 아프고 고독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왜 난 외면하지 못한 걸까, 살짝 후회가 되었다.
목소리의 중요성
이야기의 주공간인 교실은 영섭의 목소리대로라면 사바나의 세상이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그 세상은 모든 것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세상이고 그래서 강자 앞에 약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야 마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그곳에 지적장애를 가진 소년 영섭과, 겉보기엔 모범생이지만 성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심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반장 태준, 그리고 그들을 모두 아우르는 지도자로서의 담임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중 처음 만나게 되는 영섭은 이 사바나의 먹이사슬에서 가장 아래쪽에 위치하는 인물로, 황라사마귀에서 좀벌레를 거쳐 아프리카 맹꽁이 등으로 심리적 변신을 거듭하면서 되도록 강자의 눈에 띄지 않게 이 약육강식의 사바나에서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다. 만일 이 이야기가 영섭의 목소리로 일관되게 진행되었더라면 우리는 중학교 2학년 교실 내에서 벌어지는 집단 따돌림 문제에 대해 피해자의 일방적인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 두 번째, 세 번째 목소리를 중첩시켜 이야기에 입체감을 불어넣고 우리가 그들의 교실을 조금 멀리에서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도록 감정적 여유를 허락한다. 영섭의 목소리가 끝나면 태준의 목소리가, 또 담임의 목소리가 이어지기 때문에 같은 사건이지만 바라보는 입장이 다른 인물들의 진술을 통해 일방적이지 않은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이야기의 층위를 완성하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 학급의 반장을 막 떠맡게 된 태준은, 성적도 상위권이고 교우관계도 원만한 듯 보이는 전형적인 모범생 타입으로 교실과 교무실의 경계,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에 있는 즉 회색인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태준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반장이란 직책이 공부 좀 하는 아이들에게선 의외로 기피의 대상인가 보다, 왜냐하면 자잘하게 시간을 빼앗길 일이 많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반장이라는 역할을 피해가려한다는 것, 그에 반해 부반장 자리에 대한 반 아이들의 관심은 대단했는데 왜냐하면 부반장은 반장의 형식적인 보조역할만 해주면 되는데 반해 반장과 똑같은 점수를 받기 때문이다. 태준은 그런 이유로 반장이 되는 순간부터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게다가 주위의 과도한 기대에 대해 부담감을 갖고 더욱 더 도피처를 찾아 몰두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성이다.
어쨌거나 교실이라는 사바나는 어른에게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고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유일한 어른으로서 담임의 시점은 꼭 필요했던 것 같다. 과거에 시집을 냈었고 현재도 가끔 시를 읽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참담한 교육현실을 바로 보기엔 사실, 너무 이상적이다. ‘방심과 게으름, 괜찮겠지, 잘하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이라고 본인 스스로 표현했듯, 학생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면서도(-경계인 입장의 반장을 통해 약자와 강자가 공존하는 교실에 대한 꿈을 태준을 통해 이루려는 욕망이 있다-), 정작 자신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는 우유부단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이 많은데, 그래서일까, 유독 자기변명성격의 진술이 많은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렇게 우리 어른들의 모습을 꼬집고 싶었던 걸까?
그들이 속한 세계
어떤 사람이 속한 세계의 모습을 자세히 보기 위해선,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까?
그들의 삶에 돋보기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그들이 애착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옆모습이나마 살짝 엿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영섭의 세계는 그가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바나에 사는 동물들>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태준의 세계는 야동과 자위의 세계이며, 담임의 세계는 시를 꿈꾸지만 더 이상 시의 가치에 대해 알아주지 않는 입시중심의 교육현실이다. 안타깝게도 이들이 애착하는 것은 (영섭의)절대 소통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이며, (태준의)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금기시하는 세계이며, (담임의)성적 위주의 교육현실에서 멀찌감치 내던져진 어떤 진정성에 대한 향수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 세 목소리를 모두 모아놓은 교실은 해소되지 않은 어떤 욕망들이 가득 고인 채 썩어가는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지적장애를 가진 영섭은 일반 중학교 교육보다는 그에게 맞는 특수 교육을 받아야하겠지만 어쩌면 부모의 일방적인 욕심에 의해 또는 부족한 특수교육 인프라로 인해 자의반 타의반 맞지 않는 교육의 옷을 입고 있는 게 현실이다. 원시성이 가득한 사바나의 세계가 영섭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기준이라면, 고도로 문명화된 호모 사피엔스의 교실, 한없이 진화하는 지식의 향연이야말로 영섭을 더더욱 고립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악어나 하이에나의 따돌림보다도 교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영섭이란 인물을 따돌리고 있다는 데 생각이 멈추자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영섭에게 영어책, 수학책을 쥐어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일지라도, 그래도... 시스템이 원하는 졸업장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이 부모의 싸움이 이토록 처절하게 와 닿을 수가 없다.
한편, 태준이 속한 세계는 온통 성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 해소되지 않는 욕망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혼돈의 세계이다. 게다가 소년이 속한 ‘바로 여기’는 약자에 대한 폭력이 행해지는 공간이기에, 그래서 자신 앞의 약자에 대한 어떤, 태도가 요구되는 지점이고, 아마도 성장(사회적)이란 정확히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작가는 말하려했던 것 같다. 이전에도 누누히 담임은 태준에게 좀 더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길 요청해왔고 사실 그것은 소년의 영역이라기 보단 어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경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관을 정하는 일이 어른이 되는 일이란 걸 굳이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닌지... 마찬가지로 영섭의 ‘바로 지금’은 언제나 그랬듯 폭력이 행해지는 순간이며 본인 자신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의 불가해한 한 순간이기도 하다. 영섭에게 성장의 지점은 ‘바로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자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 것이다.
살아남아야 하는 영섭의 절실함과, 살아가는 태준의 위태로운 균형, 언제나 일이 벌어진 뒤 한발 늦게야 도착하는 담임 등 그 세계에 속한 목소리들은 교실이라는 우주 속 제각각 다른 행성에 다름 아니다.
소년들의 눈에 비친 어른의 모습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무래도 소년들이 주인공이니까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겠구나, 내심 예상하면서 읽어내려 갔다. 하지만 소년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법한 어른 남자 즉 아버지란 존재는 이야기 속에서 극히 존재감이 미미한 조연 중에 조연으로 머물고 있었다. 영섭의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에서 성희롱을 당한 뒤, 가해자들이 집에 와 용서를 비는 날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오는 것으로 처음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태준의 아버지 또한 야동 문제로 엄마와 태준이 갈등을 일으키는 순간, 중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잠시 등장했을 뿐, 게다가 태준의 아버지는 그 갈등의 내용조차 알지 못하고 퇴장한다. 한편 태석의 아버지는 아무데서나 아이에게 손찌검을 휘두르는 폭력적인 가장으로 그려지고 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란 어떤 의미일까,
세상사에 찌든 모습으로 등장하는 아버지, 어쩌면 있어도 없는 투명인간 같아진 슬픈 존재, 혹은 과한 폭력성을 드러내는 아버지 등, 이토록 처참하게 시들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이란...
결국, 이야기 속 소년들의 성장통이 유달리 힘들게 그려지는 것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아버지상에서 오는 소통의 부재, 그로부터 이어진 고립감, 두려움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소년의 고독을 이해하는 키워드, 성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성에 대한 관심이 가장 활발했던 때가 바로 청소년기였던 것 같다. 성의 특성상 막상 드러내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 시기엔 무조건 감추려고만 하다 보니 더더욱 집착과 공상을 불렀던 것 같다. 언젠가 성에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나는데, 한국의 성인 남자가 야동을 보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혹시 내가 남과 다를 지도 모른다는 공포, 결국 내가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을 위해 야동을 본다니, 우리 사회에서 성이 얼마나 폐쇄적인 영역에 속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었다.
이야기 속 태준 스스로도 지나치게 성에 집착하는 자신이 혹, 괴물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궁금해 하고 한편으론 혐오하며 혼자만의 갈등을 지속하는데, 그때 담임이 ‘성생활’ 이라는 개인의 고유한 영역에 대해 정확히 짚어주며 조언을 해준다. 그 사건을 통해, 태준은 자신의 일부에 너무 무관심했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좀 더 편안하게 자신의 욕구를 들여다보게 된다. 청소년기에 혼자 끙끙 앓고 있던 문제들이란 사실 꺼내놓고 보면 ‘너도 그래? 나도 그래!’ 식의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소통할 시간, 공간, 채널이 부족하다보니 그 두려움과 공포가,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그것이 실제로 내면에서 괴물로 키워지고 마는 것이다. 관심이 우리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아주 작은 진리조차 잊고 사는 세상이 되버린 걸까? 사실, 성에 가까워진다는 건 상징적으로 열심히 잘 성장(육체적)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한데, 성에 대한 두려움의 내면에는,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두려움도 깔려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처음으로 몽정을 겪은 영섭이 뭔가 평소와 다른 기운을 느꼈으면서도 본능적으로 그것이 아주 사적인 영역이라는 것을 깨닫고 엄마에게 비밀로 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
성장이란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도움을 받을 수도 없으며 오직 혼자 겪어내야 하므로,
열심히 성장통을 앓고 있는 소년들이 안쓰럽고 대견했다. 그래서 고독한 소년의 싸움, 그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의 끝에서 희망적인 세계와 만나게 되길 응원했었다.
역할 바꾸기
이 청소년 소설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작가가 폭력을 바라보는 시각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 소설이 이뤄낸 가장 큰 성취가 이 부분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전혀 계몽적이지 않으면서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독자를 논리적으로 잘 설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폭력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갈 수밖에 없는지, 우리는 좀 더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교실 내 따돌림을 주도하는 패거리에서도 가장 상위 포식자인 태석은 너무 약한 어머니와 너무 폭력적인 아버지라는 최악의 조합인 가정에 속해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식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휘두르기도 하고, 며칠씩 결석한 뒤엔 볼이 퉁퉁 부어 나타났다는 걸로 봐선 가정 내 폭력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학급의 소년들 사이에선 강자이지만 가정 내에선 그 또한 약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 가정폭력이란 것이 아주 미묘해서 우리나라 정서상 함부로 개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담임 또한 태석의 폭력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면서도 개입하지 못하고 그저 침묵할 뿐이다. 그렇게 모두가 무관심한 사이, 가정 내 폭력이 학교로 이어지고 학교에서 비행을 일삼던 태석은 자신보다 더 큰 형들과 어울리며 이전보다 더 큰 폭력집단으로 편입된다. 중요한 것은 폭력이 학습 형태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는 사실이다. 피해자의 학대받았던 경험이 고스란히 폭력에 대한 학습화 되어 새로운 폭력의 사슬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언제나 괴롭힘을 당할 줄 알았던 영섭이 정진의 책상에 소변테러를 하고, 교실에서 불장난을 하는 것은 물론, 교실을 벗어난 다른 공간에서 취하는 행동은 이 저주받은 순환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여줄 뿐이다. 침을 뱉다가, 물총을 준비하고, 심지어 주먹만 한 돌멩이를 집어 드는 모습은 학교폭력의 문제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이 교실 내 폭력이란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심리적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다. 정진과 영섭이 각서를 두고 서로 다투는 장면에서 문구사 아저씨가 나와 두 아이를 보며 누가 누구냐고 묻는 장면은 그 핵심을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집단 따돌림 문제는 단순히 힘이 약하냐 강하냐의 문제를 초월해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학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전철에서 혼자 있는 아이를 너무 쉽게 괴롭히는 영섭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게다가 가장 충격적인 건 위태롭게나마 경계를 지키던 반장이 경계를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영원한 피해자도 영원한 가해자도 영원한 경계인도 없다. 폭력과 강압의 에너지는 마치 살아있는 듯 언제나 그 세력을 불릴 숙주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독가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
결국, 독가시를 선택한 소년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고 있으면 아무도 다가오지 못할 텐데, 결국 점점 더 외롭고 쓸쓸해질 텐데...
안타까운 결말을 접하고 나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대화에 서투른지, 우리가 얼마나 소통의 어려움 속에서 헤매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결국 이야기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일이 마음껏 사랑하고 지켜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소년들에겐 관심이 필요하고 대화와 사랑이 필요하다. 고슴도치도 주인이 쓰다듬을 땐 날카로운 가시로 공격하지 않으니까, 아직 희망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사랑스런 고슴도치들을 보드라운 장미꽃잎처럼 품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