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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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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최소한 잊지는 말아야겠기에...



곰곰이 생각해본다. 내가 하루 중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하는 시간이 대체 얼마나 되는 거지? 그리고 거기에 거의 하루종일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 팔뚝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더랬다. 먹는 시간, 씻고 자는 시간, 더 보태보면, 뭐 재미있는 텔레비전 드라마 한 두 개 정도 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보내는 일상의 대부분을 인터넷과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많은 시간을 인터넷과 보내는 구나, 하고 내 현실을 깨닫긴 했지만, 또 그게 뭐 그렇게 나쁜 걸까? 싶었다. 나는 그동안 인터넷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편이었다. 사실 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원하는 정도에 따라 인터넷 서핑의 분량과 시간도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누구나 세상의 지식,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그 편리성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나야말로 인터넷의 편리성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부류중의 하나였다. 인터넷으로 얕은 지식들을 검색하고, 인터넷으로 신문 기사를 제목 위주로 읽어댔으며, 집안에 필요한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며, 심지어 식품 종류도 인터넷으로 쇼핑하는 일이 많았다. 이렇듯 인터넷의 바다에 깊숙히 빠져 그 달디 단 편리성에 허우적대고 있었으니 나의 현실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기회를 갖지 못한 건 당연했다. 그저 인터넷의 부정적인 영향이라면 전자파가 몸에 나쁘다니까, 컴퓨터 근처에 전자파 흡수에 용이하다는 선인장을 놓아두는 정도? 그 수준에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점점 책읽기가 힘들다거나, 뭔가에 집중하는 일이 힘들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노화의 탓이거니, 나도 이제 다 됐구나.. 그저 세월을 탓하며, 푸념을 늘어놓곤 했었다. 사실 오래도록 그렇게 오해하고 살았더라면 내 인생이 그냥저냥 편했을 거란 생각은 든다. 나는 어쩌자고 이 책을 읽어버린 걸까?

기억을 아웃소싱하는 시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저자는 선형적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선형적 사고란 생각의 흐름이 일정한 체계성을 갖는 것을 말하는 데, 그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책읽기와 같은 활동은 일정한 체계로 진행되는 책의 논리를 통해 선형적 사고가 가능하게 하므로 사고력 증진에 효과적이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얻는 지식의 경우, 쉽게 말하면 우리가 필요한 부분만 뚝뚝 끊어서 보게 되기 때문에 그 지식의 앞뒤좌우에 대해 충분히 살펴볼 수 없고 그 논리의 체계를 간과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이 유용하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한 기준을, 예전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로 보았다면, 한발 더 나아가,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얻은 그 지식을 얼마나 오랫동안 잘 기억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검증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은 마치 암기가 시간낭비인 것처럼 적재적소에 훌륭한 정보를 쌓아두고 언제 어느 때라도 와서 보라고 너그러운 듯 웃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진정한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을지는 의심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뇌가 지식을 저장하지 못하고 쉽게 잊어버린다면, 다시 돌아가 찾아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게 진정한 나의 지식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함이 있는 게 아닐까?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습득하는 지식들은 처음엔 단기 기억으로 임시 저장돼 있다가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치는데, 선형적 사고를 거친 기억이 좀 더 장기 기억으로 우리의 뇌 속에 잘 저장된다고 한다.

그 장기기억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정체성이 바로, 그가 가진 장기기억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책속에서 저자는, 인간이 경험해온 것들과 그 경험들 중 어떤 것들이 장기기억으로 남느냐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진다고 했다. 나 역시 충분히 동의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억하는 일을 이렇게 홀대해선 안되는 게 아닐까? 매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 중, 더 좋은 경험을 더 오래 간직할수록 우리가 더 좋은 사람에 가까워진다는 얘기이므로.., 우리는 언제나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걸 꿈꾸지 않나?

기억을 인터넷에 아웃소싱한 채, 쉽게 휘발되는 정보만을 쫓아 살아간다는 건, 결국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비로소 내가 깨닫게 된 사실은, 나의 정체성을 결정할 소중한 기억들은 온전히 자신만의 몫이란 것이다.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온전히 내 힘으로 기억하고 보존해야하는 소중한 것!

인터넷이 현대사회에 끼친 긍정적 영향을 모두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조금 속도를 줄여보는 것도 충분할거란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더라도 귀찮은 것, 불편한 것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노력, 기억을 지키려는 노력, 그 작은 부분에서부터 더 좋은 사람, 더 좋은 세상에 가까워지는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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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한쪽 눈을 뜨다 문학동네 청소년 7
은이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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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을 읽으며 오랜만에 나의 소녀시절을 떠올렸다가 얼굴이 화끈거려, 후다닥 기억들을 고이고이 접어 가슴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아직도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청소년기의 비행의 경험, 다른 사람들도 있을까?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유독 청소년기의 비행 정도는 모두가 눈감아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육체적 정신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는 걸 배려해주기 때문이겠지. 어쨌거나 그 시절 나의 비행 종목은 사기였다. 그날은 당시 우리 지역 체육관에 인기절정이던 농구단의 중요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우리 모두 그들의 엄청난 팬이었다) 아이들 중 하나가 놀랍게도 황당한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냈는데, 아무래도 지역에서 화제가 되는 경기인 만큼 가짜 방송반 행세를 해서 그들을 인터뷰하러 가자는 것이었다. 어느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고, 일은 착착 진행되어 가짜 인터뷰지 작성에, 녹음기 준비 등 손발을 착착 맞추며 우린 참 신나했었다. 훌륭했던 농구경기가 끝나고 우린 선수단 매니저를 찾아가 우리가 @@여고 방송반인데 선수들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교지에 실을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매니저는 처음엔 좀 귀찮은 표정이었지만, 경기도 이기고 했으니 꼬맹이들 소원 하나 못 들어주랴 싶었는지 순순히 인터뷰를 허락했다. 우린 황송하게도 매니저의 차를 타고 선수단 숙소 앞에서 내렸다. 도착해보니 역시나 선수단 숙소를 교복차림의 여고생들이 거의 에워싸다시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매니저와 함께 숙소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려하자 아이들이 와글와글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는데, 쟤네들은 뭔데 막 들어가냐는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자 매니저는 얘들은 학교 방송반이라 인터뷰 온 거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때 무리들 중엔 우리 학교 여학생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우리를 발견하곤 ‘쟤네들 방송반 아니에요’, 거의 울듯이 억울하게 외쳐댔다. 가슴이 마구 뛰고 두려움을 느끼긴 했지만 일의 실패에 대한 우려였지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어쨌거나 매니저는 약속했던 인터뷰 시간을 배정해주었고 우린 차례차례 선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인도 듬뿍 받고...그때 만났던 농구 선수들이 전희철, 양희승, 우지원, 현주엽 등등...

그때 우리에겐 그저 한 가지 목표만 보였고 그 목표의 달성만이 윤리였다. 그때 그렇게 당당했던 건 아마도 무지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나를 더더욱 부끄럽게 하는 건 매니저가 몰라서 속은 게 아니라 알고도 속아주지 않았을까 하는.. 아, 다시 부끄럽다.

청소년 소설을 읽으며 오랜만에 부끄럽지만 소중했던 경험들을 떠올려보았다. 청소년기의 추억들은 아마도 다 그렇지 않을까, 미숙하고 서툴러서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창피하고 미안한 기억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위태로운 시기를 어떻게 견뎌왔을까 신기할 만큼 아득하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꼭 그만큼 낯설게 우리 청소년의 현실이 다가왔다. 교육현장에 오랜 시간 몸담아온 교사가 쓴 소설이라기에 그 충격이 더한 것 같다. 지금 우리 청소년의 현재가 이토록 절망적이란 말인가, 그냥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릴걸, 아프고 고독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왜 난 외면하지 못한 걸까, 살짝 후회가 되었다.

목소리의 중요성
이야기의 주공간인 교실은 영섭의 목소리대로라면 사바나의 세상이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그 세상은 모든 것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세상이고 그래서 강자 앞에 약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야 마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그곳에 지적장애를 가진 소년 영섭과, 겉보기엔 모범생이지만 성에 대한 과도한 관심으로 심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반장 태준, 그리고 그들을 모두 아우르는 지도자로서의 담임이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중 처음 만나게 되는 영섭은 이 사바나의 먹이사슬에서 가장 아래쪽에 위치하는 인물로, 황라사마귀에서 좀벌레를 거쳐 아프리카 맹꽁이 등으로 심리적 변신을 거듭하면서 되도록 강자의 눈에 띄지 않게 이 약육강식의 사바나에서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다. 만일 이 이야기가 영섭의 목소리로 일관되게 진행되었더라면 우리는 중학교 2학년 교실 내에서 벌어지는 집단 따돌림 문제에 대해 피해자의 일방적인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 두 번째, 세 번째 목소리를 중첩시켜 이야기에 입체감을 불어넣고 우리가 그들의 교실을 조금 멀리에서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도록 감정적 여유를 허락한다. 영섭의 목소리가 끝나면 태준의 목소리가, 또 담임의 목소리가 이어지기 때문에 같은 사건이지만 바라보는 입장이 다른 인물들의 진술을 통해 일방적이지 않은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이야기의 층위를 완성하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 학급의 반장을 막 떠맡게 된 태준은, 성적도 상위권이고 교우관계도 원만한 듯 보이는 전형적인 모범생 타입으로 교실과 교무실의 경계,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에 있는 즉 회색인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태준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반장이란 직책이 공부 좀 하는 아이들에게선 의외로 기피의 대상인가 보다, 왜냐하면 자잘하게 시간을 빼앗길 일이 많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반장이라는 역할을 피해가려한다는 것, 그에 반해 부반장 자리에 대한 반 아이들의 관심은 대단했는데 왜냐하면 부반장은 반장의 형식적인 보조역할만 해주면 되는데 반해 반장과 똑같은 점수를 받기 때문이다. 태준은 그런 이유로 반장이 되는 순간부터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게다가 주위의 과도한 기대에 대해 부담감을 갖고 더욱 더 도피처를 찾아 몰두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성이다.
어쨌거나 교실이라는 사바나는 어른에게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고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유일한 어른으로서 담임의 시점은 꼭 필요했던 것 같다. 과거에 시집을 냈었고 현재도 가끔 시를 읽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참담한 교육현실을 바로 보기엔 사실, 너무 이상적이다. ‘방심과 게으름, 괜찮겠지, 잘하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이라고 본인 스스로 표현했듯, 학생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면서도(-경계인 입장의 반장을 통해 약자와 강자가 공존하는 교실에 대한 꿈을 태준을 통해 이루려는 욕망이 있다-), 정작 자신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는 우유부단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이 많은데, 그래서일까, 유독 자기변명성격의 진술이 많은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렇게 우리 어른들의 모습을 꼬집고 싶었던 걸까?

그들이 속한 세계
어떤 사람이 속한 세계의 모습을 자세히 보기 위해선,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까?
그들의 삶에 돋보기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그들이 애착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옆모습이나마 살짝 엿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영섭의 세계는 그가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바나에 사는 동물들>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태준의 세계는 야동과 자위의 세계이며, 담임의 세계는 시를 꿈꾸지만 더 이상 시의 가치에 대해 알아주지 않는 입시중심의 교육현실이다. 안타깝게도 이들이 애착하는 것은 (영섭의)절대 소통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이며, (태준의)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금기시하는 세계이며, (담임의)성적 위주의 교육현실에서 멀찌감치 내던져진 어떤 진정성에 대한 향수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 세 목소리를 모두 모아놓은 교실은 해소되지 않은 어떤 욕망들이 가득 고인 채 썩어가는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지적장애를 가진 영섭은 일반 중학교 교육보다는 그에게 맞는 특수 교육을 받아야하겠지만 어쩌면 부모의 일방적인 욕심에 의해 또는 부족한 특수교육 인프라로 인해 자의반 타의반 맞지 않는 교육의 옷을 입고 있는 게 현실이다. 원시성이 가득한 사바나의 세계가 영섭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기준이라면, 고도로 문명화된 호모 사피엔스의 교실, 한없이 진화하는 지식의 향연이야말로 영섭을 더더욱 고립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악어나 하이에나의 따돌림보다도 교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영섭이란 인물을 따돌리고 있다는 데 생각이 멈추자 팔뚝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영섭에게 영어책, 수학책을 쥐어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일지라도, 그래도... 시스템이 원하는 졸업장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이 부모의 싸움이 이토록 처절하게 와 닿을 수가 없다.
한편, 태준이 속한 세계는 온통 성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 해소되지 않는 욕망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혼돈의 세계이다. 게다가 소년이 속한 ‘바로 여기’는 약자에 대한 폭력이 행해지는 공간이기에, 그래서 자신 앞의 약자에 대한 어떤, 태도가 요구되는 지점이고, 아마도 성장(사회적)이란 정확히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작가는 말하려했던 것 같다. 이전에도 누누히 담임은 태준에게 좀 더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길 요청해왔고 사실 그것은 소년의 영역이라기 보단 어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경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관을 정하는 일이 어른이 되는 일이란 걸 굳이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닌지... 마찬가지로 영섭의 ‘바로 지금’은 언제나 그랬듯 폭력이 행해지는 순간이며 본인 자신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의 불가해한 한 순간이기도 하다. 영섭에게 성장의 지점은 ‘바로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자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 것이다.
살아남아야 하는 영섭의 절실함과, 살아가는 태준의 위태로운 균형, 언제나 일이 벌어진 뒤 한발 늦게야 도착하는 담임 등 그 세계에 속한 목소리들은 교실이라는 우주 속 제각각 다른 행성에 다름 아니다.

소년들의 눈에 비친 어른의 모습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무래도 소년들이 주인공이니까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겠구나, 내심 예상하면서 읽어내려 갔다. 하지만 소년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법한 어른 남자 즉 아버지란 존재는 이야기 속에서 극히 존재감이 미미한 조연 중에 조연으로 머물고 있었다. 영섭의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에서 성희롱을 당한 뒤, 가해자들이 집에 와 용서를 비는 날 평소보다 일찍 집에 들어오는 것으로 처음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태준의 아버지 또한 야동 문제로 엄마와 태준이 갈등을 일으키는 순간, 중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잠시 등장했을 뿐, 게다가 태준의 아버지는 그 갈등의 내용조차 알지 못하고 퇴장한다. 한편 태석의 아버지는 아무데서나 아이에게 손찌검을 휘두르는 폭력적인 가장으로 그려지고 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란 어떤 의미일까,
세상사에 찌든 모습으로 등장하는 아버지, 어쩌면 있어도 없는 투명인간 같아진 슬픈 존재, 혹은 과한 폭력성을 드러내는 아버지 등, 이토록 처참하게 시들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이란...
결국, 이야기 속 소년들의 성장통이 유달리 힘들게 그려지는 것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아버지상에서 오는 소통의 부재, 그로부터 이어진 고립감, 두려움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소년의 고독을 이해하는 키워드, 성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성에 대한 관심이 가장 활발했던 때가 바로 청소년기였던 것 같다. 성의 특성상 막상 드러내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 시기엔 무조건 감추려고만 하다 보니 더더욱 집착과 공상을 불렀던 것 같다. 언젠가 성에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나는데, 한국의 성인 남자가 야동을 보는 이유의 상당 부분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혹시 내가 남과 다를 지도 모른다는 공포, 결국 내가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을 위해 야동을 본다니, 우리 사회에서 성이 얼마나 폐쇄적인 영역에 속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었다.
이야기 속 태준 스스로도 지나치게 성에 집착하는 자신이 혹, 괴물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궁금해 하고 한편으론 혐오하며 혼자만의 갈등을 지속하는데, 그때 담임이 ‘성생활’ 이라는 개인의 고유한 영역에 대해 정확히 짚어주며 조언을 해준다. 그 사건을 통해, 태준은 자신의 일부에 너무 무관심했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좀 더 편안하게 자신의 욕구를 들여다보게 된다. 청소년기에 혼자 끙끙 앓고 있던 문제들이란 사실 꺼내놓고 보면 ‘너도 그래? 나도 그래!’ 식의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소통할 시간, 공간, 채널이 부족하다보니 그 두려움과 공포가,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그것이 실제로 내면에서 괴물로 키워지고 마는 것이다. 관심이 우리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아주 작은 진리조차 잊고 사는 세상이 되버린 걸까? 사실, 성에 가까워진다는 건 상징적으로 열심히 잘 성장(육체적)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한데, 성에 대한 두려움의 내면에는,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두려움도 깔려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처음으로 몽정을 겪은 영섭이 뭔가 평소와 다른 기운을 느꼈으면서도 본능적으로 그것이 아주 사적인 영역이라는 것을 깨닫고 엄마에게 비밀로 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
성장이란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도움을 받을 수도 없으며 오직 혼자 겪어내야 하므로,
열심히 성장통을 앓고 있는 소년들이 안쓰럽고 대견했다. 그래서 고독한 소년의 싸움, 그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의 끝에서 희망적인 세계와 만나게 되길 응원했었다.

역할 바꾸기
이 청소년 소설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작가가 폭력을 바라보는 시각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 소설이 이뤄낸 가장 큰 성취가 이 부분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전혀 계몽적이지 않으면서 섬세하고 현실적으로 독자를 논리적으로 잘 설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폭력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갈 수밖에 없는지, 우리는 좀 더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교실 내 따돌림을 주도하는 패거리에서도 가장 상위 포식자인 태석은 너무 약한 어머니와 너무 폭력적인 아버지라는 최악의 조합인 가정에 속해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식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휘두르기도 하고, 며칠씩 결석한 뒤엔 볼이 퉁퉁 부어 나타났다는 걸로 봐선 가정 내 폭력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학급의 소년들 사이에선 강자이지만 가정 내에선 그 또한 약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 가정폭력이란 것이 아주 미묘해서 우리나라 정서상 함부로 개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담임 또한 태석의 폭력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면서도 개입하지 못하고 그저 침묵할 뿐이다. 그렇게 모두가 무관심한 사이, 가정 내 폭력이 학교로 이어지고 학교에서 비행을 일삼던 태석은 자신보다 더 큰 형들과 어울리며 이전보다 더 큰 폭력집단으로 편입된다. 중요한 것은 폭력이 학습 형태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는 사실이다. 피해자의 학대받았던 경험이 고스란히 폭력에 대한 학습화 되어 새로운 폭력의 사슬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언제나 괴롭힘을 당할 줄 알았던 영섭이 정진의 책상에 소변테러를 하고, 교실에서 불장난을 하는 것은 물론, 교실을 벗어난 다른 공간에서 취하는 행동은 이 저주받은 순환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여줄 뿐이다. 침을 뱉다가, 물총을 준비하고, 심지어 주먹만 한 돌멩이를 집어 드는 모습은 학교폭력의 문제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이 교실 내 폭력이란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심리적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다. 정진과 영섭이 각서를 두고 서로 다투는 장면에서 문구사 아저씨가 나와 두 아이를 보며 누가 누구냐고 묻는 장면은 그 핵심을 제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집단 따돌림 문제는 단순히 힘이 약하냐 강하냐의 문제를 초월해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학대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전철에서 혼자 있는 아이를 너무 쉽게 괴롭히는 영섭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게다가 가장 충격적인 건 위태롭게나마 경계를 지키던 반장이 경계를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영원한 피해자도 영원한 가해자도 영원한 경계인도 없다. 폭력과 강압의 에너지는 마치 살아있는 듯 언제나 그 세력을 불릴 숙주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독가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
결국, 독가시를 선택한 소년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고 있으면 아무도 다가오지 못할 텐데, 결국 점점 더 외롭고 쓸쓸해질 텐데...
안타까운 결말을 접하고 나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대화에 서투른지, 우리가 얼마나 소통의 어려움 속에서 헤매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결국 이야기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일이 마음껏 사랑하고 지켜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소년들에겐 관심이 필요하고 대화와 사랑이 필요하다. 고슴도치도 주인이 쓰다듬을 땐 날카로운 가시로 공격하지 않으니까, 아직 희망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사랑스런 고슴도치들을 보드라운 장미꽃잎처럼 품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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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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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없음’ 과 ‘있음’ 그사이 어디쯤


이야기는, 어느 푸른 여름날, 소년 연우가 유일한 가족인 엄마와 다른 동네로 이사 갈 준비를 하면서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타인의 눈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는 사실은 ‘없음’ 이다. 그 집엔 아버지란 존재가 없고, 화분이나 액자도 없다. 하지만 금세 또 깨닫게 되는 사실은 옷상자와 의자, 양초박스처럼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물건들은 또 보통이상으로 있다는 것. 이 두 가지의 대비에서도 알 수 있듯 이 가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범’이란 단어에서 조금 빗겨나 있다. 화분이나 액자가 전통적인 가족상을 상징한다면 신민아 씨가 선택한 의자나 양초, 고양이는 어쩌면 혁신에 가까워 보인다. 게다가 그녀의 의자들은 자신들의 원래 목적 말고도 다양한 기능을 담당해내고 있는 그야말로 멀티 플레이어이며, 그녀의 연하 남자친구 재욱도, 같은 관점으로 본다면 양초나 의자 그사이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사 때마다 물음표를 유발시키는 신민아씨의 옷상자는 사실 그녀의 직업과 관련된 것이다. 신민아씨는 옷 칼럼니스트다. 옷의 역사에서부터 옷에 얽힌 모든 이야기들을 글로 풀어낸다. 그녀의 남자친구 재욱은 문화평론가다. 두 사람 모두 글을 갖고 있다. 세대를 초월해 두사람이 소통할 수 있는 것도 아마 그때문일 것이다. 자신만의 언어로 소통하는 법을 알고 있는, 그야말로 어른이기 때문에.., 하지만 소년 연우에게는 아직 자신만의 ‘언어’가 없다. 연우의 세계에서 화분과 액자가 ‘없음’ 이었다면, 어른들의 세계에서 연우는 아직 ‘없음’ 이다. 중간에 끼인 세대로서 신민아 씨의 표현을 빌자면, 미완성의 기계로서, 완벽하게 있다고도 또 없다고도 얘기할 수 없는 소년이란 존재이기에...


책표지 뒷면의 어느 짧은 소개글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소년이 그토록 ‘파란’ 단어인줄은 나 역시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으므로... 



      

슬픔이라고 쓰고, 가정의 진정한 리얼리티라고 읽는다.
나는 진정한 슬픔이란 여름날의 눈꽃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희귀하고, 공감하기 어려우며, 쉽게 잊을 수 없는... 그래서 진정한 슬픔을 겪은 인간이야말로 더 완전해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거라고... 슬픔은 아름다움을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슬픔과 같은 말인 것 같다. 
소년이란 단어처럼... 


2. 우주와 연결되는 수많은 창(窓)


어렸을 때 나는 거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았다. 나를 비추는 큰 거울은 언제나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했고, 어쩌면 거울이 창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좁은 방이라도 거울과 함께 있으면 심심하지 않았고 언젠가는 내 거울이 그 창을 열어 다른 우주로 나를 들여보내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었다.



연우가 새로운 집, 새로운 자신의 방에서 제일 처음으로 한 일도 바로 자신의 거울을 거는 일이었다. 사실, 거울이란 자신만의 우주를 비추는 비밀스런 창(窓)과 충분히 같은 말이다. 예전 거울이 있던 자리에 자신의 거울이 맞춘 듯 꼭 들어맞는 것을 보며 이전 방의 주인도 자신과 같은 우주를 가졌던 걸까, 호기심을 갖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고독은 학교 숙제처럼 혼자 해결해야하는 것이지만 슬픔은 함께 견디는 거야. 평상시에 우린 각기 이기적으로 살수밖에 없는데, 그건 비상시가 닥치지 않았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개인의 권리이고, 그리고 비상이라는 건, 지금과 같은 극진한 슬픔의 발생이라고. 엄마가 나의 슬픔을 비슷하게라도 함께 느낄 수 있는 건 우리 둘이 가족이기 때문인데, 그것은 이 세상에 몇 안 되는, 가정식 백반에는 없는, 가정의 진정한 리얼리티라고. - 19p. 

 

그리고 열린 창 아래, 정확히 바로 자신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던 소녀, 채영
신민아 씨의 설명에 의하면 어제까지 그 방은 의젓하고 수영과 인사도 잘하고 또 교지편집부원이면서 반장이기도 한, 연우보다 한 학년 위인 어느 고등학생이 쓰던 방이었다. 그러니까 소녀의 시선은 엄밀히 말하면 과거를 향해있는 것이었다. 소녀의 시선을 통해, 소녀가 보고 싶어 하던 거울 속의 주인을 생각하던 연우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이 더욱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더욱 ‘있는’ 존재가 되고픈 강렬한 욕망 또한 갖게 된다.


고독도 방학숙제처럼 혼자 해결해야하듯, 연우 자신에 관련된 일은 언제나 연우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므로 학교를 배정받기 위해 전학추첨관리교에 가는 일도 연우 몫이었다. 그곳에 보호자 없이 온 사람은 연우와 다른 아이 태수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처음부터 연우를 알아봐주고 호감으로 다가오는 아이, 연우는 태수를 통해 힙합이라는 새로운 창(窓)을 만나게 된다.


태수의 MP3를 통해 흘러나오는 멋진 신세계같은 음악의 주인공은 고등학생 래퍼 G. 그리핀이라고 한다. 그리핀? 전설의 새인가... 자신의 방 거울 맞은편 벽에서도 흐릿한 날개 낙서를 발견했던 연우, 채영의 엽서에도 그리핀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상하게 겹치는 이미지들. 어쨌거나 상처받기 쉬운 소년의 내면을 노래하는 고등학생 래퍼라니, 연우는 자신의 목소리로 마음껏 노래 부른다. 그가 좋아지려한다.




엄마의 남자친구들 중 가장 친절한 건 아니지만 가장 친밀한 존재인, 재욱 형
신민아 씨는 키 크는데 좋다며 재욱형과의 달리기를 추천한다. 글이 마음의 언어라면, 달리기는 몸의 언어랄까. 오래 잘 달리기 위해선 호흡의 완급조절이 필수인 달리기라는 운동에서 테크니션으로 조련돼가는 연우. 달리기라는 자신만의 언어를 습득해간다.




함께 있어도 늘 먼 곳을 보는 듯 아득한 시선을 가진 채영
다분히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가진 채영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가 인용하는 카프카를 읽기 시작한다. 카프카부터 시작했다지만, 생전 관심조차 갖지 않던 다른 이의 글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신민아씨의 칼럼에서, 재욱 형의 칼럼까지, 글을 통해 이전엔 보지 못했던 타인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로운 시선을 갖게 된다. 



3. 삼각형의 꼭대기, G. 그리핀



소년은 우주로 나 있는 수많은 창(窓)을 통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간다.



난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서 있던 그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안녕. 미안
Goodbye Boy-

 

연우를 둘러싼 소년들의 욕망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는 존재가 G. 그리핀이다.
욕망이 스스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복제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전제하에 욕망의 대리자가 존재한다면, 연우는 태수를 통해 G. 그리핀을 알게 되었고, G. 그리핀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존재가 되기를 욕망한다.
                                                  
 G. 그리핀 
  △ 
  연우태수


그리고 연우가 좋아하게 된 소녀 채영, 
처음에 채영은 그저 이름 없는 창밖의 소녀였지만 채영이란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녀가 바라보는 사람이 이전 방의 주인인 민기훈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연우가 채영에게 호기심을 가지면서 연우는 채영의 시선을 통해 이전 거울의 주인에게까지 평범한 관심 이상을 갖게 되었고, 채영을 좋아하게 되면서 그녀에게서 민기훈 같은 존재, 그 같은 위치에 서고자하는 욕망을 갖게 된다  

      민기훈 
  △
  연우  채영


그리고 흩어져있던 수많은 퍼즐 조각들이 하나로 완성된 순간,
민기훈과 G. 그리핀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G. 그리핀                         민기훈
 △↖      =     
연우  태수             연우   채영  


자신이 진정 원하던 인물이 채영의 민기훈인지, 태수의 G.그리핀인지, 아니면 날개 낙서의 주인 민기훈인지, 또 채영의 자신에 대한 감정은 무엇이었는지, 지금까지 굳게 믿었던 모든 진실들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순간을 겪으며 어쩔 수 없이 소년은 한 뼘 더 성장하게 된다.
새가 알을 깨고 나가려면 이전의 세계를 파괴하는 고통을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처럼
연우를 둘러싸고 있던 하나의 세계가 깨어지는 고통은 오로지 소년 혼자만의 몫이었다.




4. ‘단자’로 홀로서기


라이프니츠는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실재의 최소단위로 ‘단자’라는 말을 썼다. 
나는 미셀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 에서 ‘단자’로 돌아가고자 했던 중년의 브뤼노의 슬픈 회한을 기억한다. 우리는 때때로 관계의 옷이 너무 무거울 때 그것을 훌훌 벗어버리고 우주의 개인으로 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하지만 대개는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가능한 일이 됐는지 잊어버린 것 같다. 그건 옷이 아니라 이미 나의 뼈와 살이 되었으므로...
살면서 우리는 몇 순간이나 ‘단자’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 안의 ‘소년’이 그렇게 아픈 것은 우리가 바로 그 몇 순간을 ‘소년’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오늘, 이제 막 시작하려는 소년 연우를 통해 우주의 고독한 개인으로서 홀로 서있어야 할 소년의 두려움을 부러움 가득한 두 눈으로 응원해주고 싶다. 쪼개지고 부서지고 나눠지다가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고유의 존재 단위로 우주에 홀로 서있을 소년의 외로움과 두려움, 슬픔이 오롯이 전해져온다.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렴,


5. 봄눈 지나 다시, 여름

우리가 ‘단자’로 홀로 서야 하는 건, 궁극적으로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오롯이 혼자 설 수 있어야 둘도 행복해진다는 불변의 진리.
‘없음’ 에서 ‘채워짐’ 으로 ‘채워짐’에서 무수한 ‘분리’의 과정을 거쳐 ‘단자’ 로 홀로 선 뒤,
두 팔 벌려 채영을 맞이할 수 있게 된 연우가 신기하고 자랑스럽다.
봄눈이 지나면 다시, 여름. 이제 정말로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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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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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도를 봤습니다.

사실, 옴니버스라는 말이 무색한...

그저 단일 주제로 엮인 다섯편의 단편집이라는 게 더 가까울 듯하더군요,

다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한 프레임 안에 슬쩍 얼굴만 비추는 정도가

옴니버스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장르 영화의 실험성 부분에서는 많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His Concern         각본, 감독 -변혁

 

주홍글씨 이후로 작품 활동을 하지 않던 그가 오랜만에 만든 작품이라 가장 궁금했었죠.

 

 

처음 만난 남녀가 '섹스'라는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관계맺기의 외연과 내연을 보여준달까요?

남자는 부산출장 길, ktx 앞좌석의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하고 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어떤 말을 걸어야 좋을 지 부터, 이미 내뱉은 말에 대한 후회들까지...

남자의 모든 감각은 그녀를 향해 열려있고, 머릿속은 그녀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들어차게 되죠.

급기야, 형의 집 식탁에서 형수의 모습에 그 여자의 모습을 대입해 바라보는 장면을 보면서,

보고싶은 것만 보는 남자의 천성이랄까요... 풋, 한번 웃어주고요..,

결국 남자는 여자와 다시 만나게 되고, 운좋게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햇살이 가득 들어차는 아침, 여자의 작업실 침대에서 자고 있는 남자...그는 평온하더군요.

다만, 그를 바라보며 이젠 여자의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섹스 이전의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요...ㅋ

남녀관계에서 '섹스'라는 지점이 갖는 함의랄까요...?

위트있는 접근이었단 생각이 들었어요.

 

 

 

나, 여기 있어요     각본, 감독 -허진호

 

어떻게 생각해보면

에로스라는 주제에 가장 안어울리는 생뚱맞은 작품이기도 하고요,

다르게 생각하면 에로스에 대한 가장 제대로 된 접근이었단 생각도 들고요...

대부분의 의견은 전자 쪽에 집중되는 듯하지만... 글쎄요,

 

신혼부부의 이야기랍니다.

퇴근해 집에 들어온 남편은 마치 숨바꼭질처럼 아내를 찾기 시작합니다.

아내는 늘 숨어있다가 남편이 찾지 못하는 곳에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죠.

남편이 자신을 열심히 찾아주길 바라며 꼭꼭 숨어있던 아내는,

남편이 너무 쉽게 포기해버린 뒤엔 '나 이제, 안 찾을 거에요? ' 투정을 부리기도 합니다.

숨고, 찾고.. 부부의 행위에 관객이 호기심을 품을 무렵, 

부부의 비밀은 침대에서 비로소 드러납니다. 

'오늘 끝까지 하고 싶어' 갈구하는 아내를 남편은 애써 떨쳐내며 말합니다,

'병원에서 하지 말랬잖아' 

아내의 병으로 인해, 부부는 에로스적 욕망을 완성하지 못하는 관계였던 거죠.

결국 서로를 찾아 숨바꼭질을 하는 부부란,

어디에나 있지만, 사실은 어디에도 없는 에로스를 찾아 헤매는

인간 심리의 은유가 아닐까요?

아내의 수술을 위해 나란히 외출했던 부부는 결국 남편 혼자 돌아와

집안의 등을 켜는 것으로 아내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남편에게 남겨진 것은 아내의 향수, 그녀의 체취가 남아있는 옷가지들...

존재의 흔적으로 온전히 의지할 건 허약한 기억뿐...이죠.

영혼이 된 아내는 여전히 혼자 남겨진 남편의 주위를 떠돌고

남편은 찾을 수 없는 아내를 그리워합니다.

타나토스로 치환된 에로스,  혹은 타나토스로 완성된 에로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결국엔 같다는 걸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끝과 시작            각본, 감독 -민규동

  

오감도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이 작품을 꼽겠어요. ^^

 

한 여자가 강에 재를 뿌리고 있습니다.

여자의 남편은 그녀 후배와 차안에서 정사를 벌이다

어이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죠.

여자는 남편을 보낸 뒤에도 어쩔 수 없이 집안에 남아있는 남편의 환영과

때론 대화하고 투닥거리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날 여자에게 알 수 없는 우편물이 도착해있죠. 

도마뱀 두 마리가 서로 머리와 꼬리가 얽혀 한몸인 양 양각돼있는 카드 뒤엔

'물을 주면 필요한 것이 자랍니다'  란 수수께끼같은 메모가 적혀있습니다.

여자가 처음으로 도마뱀에 물을 주고 잠든 밤,

여자의 후배가 찾아와 같이 있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죠.

내치고 다시 내치길 반복하다가

결국 여자와 후배는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 사이의 공통 분모로 놓인 그녀 남편과의 추억을 공유하며

두사람은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죠.

죽은 남편의 생일을 맞아, 두 사람은 재를 뿌린 강가를 함께 찾게 되는데요, 

후배는 처음부터 그녀만을 사랑했음을,

이미 그녀 또한 오래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음을 말로써 상기시킵니다.

그녀는 애써 외면하려하지만요...,

여기에서 첫번째 관계의 전복이 이뤄집니다.

삼각관계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는 줄 알았던 남편의 위치는

숨어있던 두 사람의 관계로 인해 역삼각형의 꼭지점으로 추락해 재배치 되는거죠.

  

           남편

여자   △     후배          ⇒          여자     ▽        후배

                                                                           남편

 

그렇게 감정을 확인한 뒤 하룻밤의 꿈결같은 에로스

후배는 꿈같은 시간 속에서 '아직도 모르겠어? 난, 너야! '란 말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지고,

다음날 다시 나타난 죽은 남편에게 그녀가 묻습니다.

'당신도 알고 있었어?'  

남편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여기서 두번째, 관계의 전복은, 다른 사람으로 믿었던 두 사람이 사실은 하나였다는 것,

아마도 에고(ego)와 이드(id) 정도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음날 아침, 그녀가 물을 줬던 카드 위엔 마치 희망처럼 연둣빛 새싹이 돋아있습니다.



결국, 진정한 에로스란 자아의 발견, 각성을 통해서라는 게 감독의 메시지가 아닐 지...

남편과의 분리, 후배(나)와의 화합, 분리의 과정이란

결국 끊임없이 이어지는 끝과 시작의 다른 말이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린 자아와 본능의 맨얼굴과 마주할 수 있을테니까요.

 

 

33번째 남자        각본, 감독 -유영식

 

처음엔 이게 공포버전이었던가... 하다가 깜짝 놀랐던,

공포에서 코미디로의 장르의 변주가 생동감있게 그려졌는데, 그건 좋았어요.

하지만 여배우에 대한 은유로서 뱀파이어를 차용한 건 좀 기대 이하... 너무 쉽게 간 느낌이랄까요?

크레딧이 올라갈 때 보니 오감도 전체기획자가 유영식 감독이던데, 아쉽습니다.

 

 

 

순간을 믿어요        각본, 감독 -오기환

 

커플간의 스와핑 실험으로 사랑을 확인한다는 내용이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랑은 확인하고, 깊어지고, 어긋나버리구요.

 

스와핑이란 소재나, 주인공들의 신분이 고교생이란 걸 빼면 그다지 도발적이지 않은...

전개 양상이라든가 사고방식은 오히려 더 클래식하게 느껴지니...오히려 언밸런스한 느낌?

감독이 좀 머뭇거린 느낌이 드는데,

차라리, 더 발칙하게 그렸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기대치에 가장 못 미치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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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무난, 그 이하.., 가벼운 소품집같은 느낌이네요.

아무래도 노출 마케팅 때문에 더 욕을 먹고있는 것 같은데,

저 다섯 감독... 오래 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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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 The Read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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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언어인 몸과

세상을 이해하는 이중의 기호(기표+기의)로서의 책(소설책-보고서-자서전-법-테이프화 된 책)

 

 

여러분은 문자를 기록하고 해독할 줄 아시죠?

이 질문에선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얼마전 한 신문 기사를 보니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의 문맹률이 0% 라고 당당히 밝히는 걸 보니 말이죠.

(그럼 워낭소리의 할아버지는 뭐지?)

 

그렇다면 좀 더 나아가 이번엔 

세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기호체계에 대해

여러분이 올바른 해독을 할 수 있는 지 묻고싶습니다.

여기서도 대부분의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요?

 

기호에 대한 올바른 해독이 필요한 건,

대부분 겉으로 드러나는 내용과 실제의 요구가 다른 이중성을 갖고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보험회사의 보험금 신청 조정인이라는 직책의 드러난 기호는

'고객이 필요한 때에 도움을 주기 위해' 서죠.

그러나 실제의 요구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 서랍니다.

만일 이 직책의 누군가가 겉으로 드러난 기호만을 직역해서

고객의 이익을 위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다면 그는 실직하게 되겟죠.

요즘같은 세상에선 아마 거액의 소송을 당할 지도 모르구요.

그래서 우린 이 세상을 지배하는 다중의 기호체계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합니다.

까딱 잘못 코드를 오역했다간

이 복잡한 기호체계의 세상에서 희생양이 되고 말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 속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가 바로  '한나' 입니다.

'한나' 야 말로 경비원이라는 직책의 드러난 기호만을 직역했다가

뒤바뀐 세상, 뒤바뀐 가치관 속에서 결국 법의 희생양이 되는 인물이니까요,

게다가 그녀가 법정에서 형을 받는 장면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법보더 더 복잡한 다중의 기호를 가진 텍스트가 또 있을까요?

중요한 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라 법을 어겼는가, 아닌가, 라는 교수의 말이

무척이나 상징적으로 들렸습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발상이 시작된 지점이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원작자가 독일대 법대 교수였다는 점에서 제 맘대로 막 추측해보기도 하고 말이죠...ㅋㅋ

 

간단히 줄거리를 살펴보면,

10대 소년 마이클은 귀가길 열병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30대 여인 한나의 도움을 받습니다.

병이 나은 뒤 감사인사를 하러 찾아갔다가

그녀에게 강한 이성의 끌림을 느끼고 둘은 연인이 됩니다.

학생인 마이클과 전차 검표원인 한나는 일과 후 대부분의 시간을

한나의 침대에서 보냅니다.

실질적으로 한나는 마이클에게 섹스를 가르치고,

어느날부턴가는 사랑을 나누기 전 책을 읽어달라고 하죠.

그 첫번째가 오딧세이,

작가는 수업시간 중 교사의 입을 빌어

첫작품이 왜 오딧세이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얘기합니다.

"흔히들 오딧세이가 귀향에 대한 내용이라고 생각들 하는데,

실은 여정에 대한 내용입니다." 라고요.

영화의 맺음, 결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년 마이클과 여인 한나의

수십년을 뛰어넘도록 이어지는 생의 여정인거죠.

그리고 그 여정 사이에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바로 2차 대전입니다.

 

둘만의 꿈같은 자전거 여행 중

성가대 합창소리에 이끌리듯 들어간 성당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던 한나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세대로 대표되는 '한나'와 그 전후 세대로 대표되는

 '마이클'의 길고 긴 인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이클의 시선을 통해 보여지는데요,

그래서일까요, 후 세대가  전 세대를 바라보는 복잡미묘한 심리를

효과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완전히 포용할 수도 없으며 또 완전히 내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입장이랄까요..

이 지점에서 영화는 묘한 힘의 균형을 갖게 되죠.

성에 원숙한 여인과 호기심에 다분히 충동적이었던 미숙한 소년 사이에

다소 불평등한 관계로 시작했던 둘 사이의 힘의 균형은

한나가 형을 받고 감옥에서 복역하면서 마이클에게 온전히 의지해

글을 깨우치는 과정에서 묘하게 균형을 갖게 됩니다.

한나가 처음에 사랑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듯, 마이클이 책을 읽어보내는 행위도

사랑이라기 보단 연민에서 비롯된 인간애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집니다.

 

영화 속에서 문자가 갖는 의미와 문자로 기록된 책(소설책-보고서-법-테이프화 된 책)을

통해 힘의 균형이 옮겨가는 걸 보는 것도 흥미로운데요,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소녀가 그 실상을 폭로하고 나치 전범을 법정에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문자, 책을 통해서였고, 시간이 흐른 뒤 마이클이 찾아갔을 때

그녀의 호화로운 아파트(재산을 돌려받은 걸 수도 있지만) 또한 정말 아이러니 했습니다.

그녀가 한나와 다른 점은 문자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는 거 아닐까요...

 

오프라 윈프리가 “한 권의 책이 이렇게나 많은 감정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라고 극찬했으며, 

어느 평론가는 아예 대놓고 '이건 멜러가 아니다' 라고 선언까지 했던...ㅋㅋ

어떤 세계관을 갖고있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달리 읽히는,

담론의 장을 넓힐 수 있는 열린 텍스트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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