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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번의 팔월
최문희 지음 / 문이당 / 2025년 1월
평점 :
어떤 일은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다. 때로 의식적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그 일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때, 인생의 목적이 될 때 쉽게 떨쳐버릴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끝을 내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과거의 한 지점에 멈춰 서 있다. 이미 떠나왔다고 이곳은 그곳이 아니라고 부인해도 여전히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후회와 분노, 미련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점점 부풀기만 한다.
월간문학 「돌무지」로 등단한 저자는 여러 편의 장편소설로 국민일보 문학상, 작가세계 문학상, 혼불 문학상 등 유수의 상을 받은 소설가다. 오랫동안 작가로 활동한 이력이 생동감 있는 인물들을 창조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저자와 같은 문인들의 세계가 배경이니 한층 현실감이 있다. ‘강산문방’동아리의 여섯 명의 모임원은 제각기 시인, 소설가, 영문학 교수, 출판사 대표 등 글을 쓰고 글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창작을 하는 사람 특유의 냉소적인 분위기가 그들을 에워싸고 있다. 서로 질투하고 선망하고 애증한다. 명예, 권력, 재력, 사랑.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세속적이다. 문학을 하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지만 그 둘은 불가분의 관계다. 불현듯 찾아오는 영감의 세계를 유지해 주고, 자신의 불안한 영혼을 붙잡아주는 매개체이다. 어떤 예술이든 지속 가능해야 한다.
강산문방을 제공한 교수 문혁은 아버지가 그토록 싫어하는 동아리 모임원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신춘 문예에 당선됐지만 어느새 대필작가라는 꼬리표 떼기가 목표가 되어버린 경인과 가장 친하다. 두 사람 사이에 조안이 끼어들며 균열이 생긴다. 두 사람이 동시에 조안에게 빠져든 것은 운명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기시감이 느껴진다. 16년 전에도 그랬듯이 문혁과 경인은 시작도 끝도 함께다.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해 주면서도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날, 그일에 대한 회한이다. 비밀을 먼저 발설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때때로 조안은 방황하는 그들을 보며 연민하고 다음 감정으로 한발 더 나아갈 뻔하기도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만둘 수 없다. 딱히 무슨 행동을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존재 자체만으로 두 사람을 한꺼번에 허물어버린 것 같다. ‘육체의 도살은 잠깐이지만 영혼의 착즙은 갈기갈기 찢거나 부수뜨리기 때문이다.’ 라는 저자의 말처럼 말이다.
인생에 만약은 소용없다. 하루도 한 번이다.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들의 진짜 잘못은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죄책감은 어떤 감정보다 강하다. 조안의 등장은 도화선에 불과하다. 독하다는 말을 듣는 조안의 긴 여정이 부질없어 보인다. 마지막도 허무하기만 하다. 온갖 종류의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용서와 사랑, 공평한 어떤 것에 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