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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의 흔들림 - 영혼을 담은 붓글씨로 마음을 전달하는 필경사
미우라 시온 지음, 임희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2월
평점 :
텍스트힙이 열풍이다. 함께 책을 읽고 필사를 하고 감상평을 써서 SNS에 공유하는 문화를 말하는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이 시발점인 것 같다. 물론 그전에도 독서 모임이나 필사 모임은 있었겠지만, 부쩍 늘어난 것 같다. 당장 지인이 필사책을 구입하는 걸 보면 실감이 난다.
와중에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와서 읽어볼 참에 지금 추세와 비슷한 내용인 듯 해서 시기적절하다고까지 느껴진다. 붓글씨로 대필을 해주는 소설이라니 제목부터 흥미진진하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이 풍긴다. 저자 대부분의 책이 그런 성향이다. 꾸준한 장인(匠人)정신과 성장이 어우러져 있다.
내가 초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한문 과목이 있다 보니 붓글씨를 자주 썼다. 말 그대로 벼루에 먹을 갈아서 온 얼굴과 손에 묻혀가며 집중해서 쓰던 기억이 생생하다. 책의 주인공도 서예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도다 가오루는 전형적인 서예 선생과는 달리 젊고 느긋하고 자유분방하다. 굳이 연륜이나 권위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근무하는 호텔에서 여는 송별회 초대장에 써야 할 손 글씨를 부탁하러 온 스즈키 지카라는 당혹스럽다. 거기다가 첫 만남에 다짜고짜 편지 대필을 부탁하니 어이가 없다. 하지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멀리 전학을 가게 되니 진심이 담긴 편지를 전달하고픈 초등학생의 마음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원래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면 더 말할 수 없는 법이다. 글도 마찬가지고. 문장을 잘 쓰지 못해서 대필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도다도 글씨는 비슷하게 쓸 수 있어도 그 마음까지 흉내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편지 대필에서 제일 중요한 점은 의뢰한 사람의 이야기에 얼마나 열심히 귀를 기울이느냐에 달렸다.” 쉽게 말할 수 없는 과거를 가진 도다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글씨는 쓸 수 있어도 타인의 감정에 이입한 글을 쓸 수는 없다. 따뜻한 가정에서 무난한 인생을 살아온 스즈키는 그 반대다. 연인과 헤어지고 싶어 하는 대필을 의뢰받았을 때도, 부모님께 용돈을 인상해 달라는 대필을 의뢰받았을 때도 이미 그 시절을 잘 겪어온 스즈키는 그들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느닷없이 이제 찾아오지 말라는 도다의 진심까지 알아차릴 정도다.
글씨와 문장이 한 몸 같아도 사실은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천재는 악필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의 경우에는 소심한 성격에 비해 글씨는 현재보다 미래의 나를 투영해서 큼직하고 날카롭게, 문장은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는 후회와 미련, 아쉬움이 짙은 글을 많이 쓰는 듯하다.
도다와 쓰즈키가 완벽한 대필 파트너로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