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덟 번째 불빛이 붉게 타오르면 - 사르담호 살인 사건
스튜어트 터튼 지음, 한정훈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2월
평점 :
책을 읽으면서도 1634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는 사실을 거듭 상기시켜야 했다. 고딕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내용이 뒤죽박죽 섞여 있어 주변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7세기의 ‘명탐정’ 새미가 배 위에서의 괴이한 죽음에 대해 추리를 하면 현실감각이 느껴지고 그 외의 일련의 사건들과 상징들은 허무맹랑하게만 느껴져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마녀 사냥꾼이니 악의 저주니 하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사건들 속에서 눈앞에 보이는 증거와 납득할 수 있는 논리가 무기인 탐정으로서의 자질을 가진 새미의 등장은 객관적인 사고의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떠도는 섬이나 마찬가지인 배위에서의 집단적 성향에 이성(理性)이 중요한 것과 같다.
신사 17인회가 경영하는 동인도 회사의 무역선 사르담호가 비타비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귀환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첫 장면에서부터 새미는 이유도 모르고 얀 하안 총독의 명령에 따라 죄수의 신분이 되어 샤르담호에 승선하고, 친구 겸 조수인 아렌트도 그의 안전을 위해 따라 나선다. 배에는 총독의 아내와 딸, 정부와 그녀의 두 아이 등 가족과 총병들, 그 외의 승객들이 타는데 부두에 느닷없이 나타난 문둥병자는 그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
‘죄악과 파멸’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힐 만한 단어가 아닌가.
아렌트는 새미를 위해, 총독의 아내 사라는 딸 리아와 남편의 정부지만 친구이기도 한 크리지를 위해 저주가 내려진 배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공조를 펼친다.
함께 출항한 선단은 일곱 척인데 여덟 번째 불빛이 번쩍이면서 꼬리가 달린 눈, ‘올드 톰’이라 불리는 악마의 상징이 곳곳에 나타나고 사람들은 악마의 속삭임을 듣는다.
“그대는 무엇을 갈망하는가? 말해 봐, 그럼 내가 들어주겠어. 그러면 그대는 내게 무엇을 줄텐가?” 악마가 바라는 대가는 영혼, 곧 죽음인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공포는 삽시간에 퍼지고 살고 싶은 욕망도 필연적이라 반란은 내정되어 있는 수순이다.
어떤 곳이든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차별이 존재한다. 권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샤르담호는 위와 아래, 앞쪽과 뒤쪽으로 영역이 나뉜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귀족과 하층민의 객실이 구별되고, 돛대를 중심으로 앞쪽은 선원들, 뒤쪽은 승객들의 영역으로 또 나뉜다.
선장과 수석상인이 대립하고 일등항해사와 갑판장이 부딪히고 총병과 선원들이 서로 칼과 총을 겨눈다. 배 안에서는 자신이 머무는 곳이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 같다.
사라와 리사, 크리지 역시 그 시대 여성들의 지위나 대우가 일관적인데 ‘자유’를 갈망하는 사라의 활약성은 눈부시다. 뛰어난 손재주를 가진 영리한 리사가 ‘마녀’라는 허울을 쓰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엄마로써의 모성애가 어느 정도 힘을 보탰을지라도 그녀는 그 자체로 용감한 여성이다. 악마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심을 이용해 재물과 권력을 얻었지만 역으로 자신들도 실체가 없는 악에 쫓겨 파멸에 이르게 된 마지막은 새미의 이 한 마디로 귀결된다.
“악마 같은 건 없어. 아렌트. 하지만 언제나 거래할 수 있는 욕망들이 있지.”
배 안이라는 제한적인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할 틈이 없는 책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