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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세계사 - 거꾸로읽는책 3 거꾸로 읽는 책 3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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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 시작하기 전 인간에게 개인 간 다툼은 있었을지언정 잔인한 전쟁이나 복잡한 이해관계는 없었다. 군집생활을 하고 국가를 형성하고 문명생활을 하면서 굵직한 이해관계가 생기고 전쟁이 시작한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전쟁의 규모도 점점 커진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인류문명은 획기적으로 전환한다. 문명이 전환하는 만큼 국가 간 이해관계는 더욱 첨예해지고 전쟁은 악랄해져 그 시대 인류는 팔자 센 세상을 산다. 특히 힘없고 약한 국가들은 강대국의 배를 불리는 먹잇감으로 전락해 갖은 고초를 겪는다.

이 책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는 사연 많고 곡절 많던 그 시절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유럽사회가 유태인을 어떤 시선을 바라봤는지 여실히 보여준 드레프쉬 사건. 러시아 차르(황제) 정권이 민중을 외면하고 지독한 독재를 일관하더니 마침내 썩은 문짝 쓰러지듯이 무너지고, 레닌이 사회주의체제를 수립한 볼세비키 혁명.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 자본주의체제의 맹점을 여실히 드러낸 대공황.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의 공산당 토벌, 일본의 중국 침략을 이겨내고 세운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 순식간에 독일 국민의 마음을 휘어잡은 뒤 무자비한 만행을 저지른 히틀러.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난 아랍민족과 이스라엘의 분쟁. 이승만 독재체제에 맞선 4ㆍ19혁명. 베트남 전쟁. 흑백분리운동을 벌인 말콤 X. 일본의 역사왜곡. 독일의 갑작스런 통일. 

책은 역사를 싸고 있던 막을 걷어낸다.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생각해 보지 않았던 점에 초점을 맞춘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자본주의의 배를 채울 식민지가 필요했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후, 유럽세계에서는 노동자들의 피땀을 딛고 하루가 다르게 산업이 발달했다. 산업원료가 필요했다. 열강들은 저마다 목표물을 찍어두었다. 20세기 초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청년이 상상도 못한 곳으로 불똥이 튀었다. 그 당시 발칸반도를 집어삼키려는 열강들이 그 사건을 빌미로 들고 일어난 것이다. 자국과 이해관계가 맞으면 손을 잡고 이해관계가 엇갈리면 총부리를 겨누었다. 그렇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평화가 둥지를 틀기도 전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역사를 돌리는 힘 중에는 개인의 이익, 국가의 이익이 큰 몫을 차지하는 것 같다. 개인의 이익은 개인 간의 다툼으로 뺏고 뺏긴다. 국가의 이익은 국가 간의 전쟁으로 뺏고 뺏긴다. 물론 정상적인 거래나 무역으로 이익을 채우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지고지순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자본주의를 만나, 전 세계는 상식과 도리를 무참히 짓밟고 오로지 개인의 이익, 국가의 이익만이 난립했다. 개인의 이익을 채워주겠다고 큰소리치며 정권을 잡은 권력자는 약소국가들을 쥐어짜 자신의 권력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다지려 했다. 자신의 이익, 자국의 이익에 따라 서로 손을 잡기도 하고, 총부리를 겨누기도 했다. 서로 대화하고 타협해 함께 살아가려는 의지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유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뒤죽박죽 섞여 서로 자신의 모순을 자랑했다. 더 크려고 성장통을 심하게 앓았다. 
 

인류는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아니, 성숙은 없을 것이다. 성숙으로 가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퇴보해서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의 혼돈을 겪지 않고 성장하려면, 우리는 자신과 다른 의견과 생각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고 더 나은 세계로 진보할 수 없다. 20세기 후반 독일이 통일을 했다. 통일 후 독일 사회는 안정을 찾은 것이 아니라 수많은 불평불만과 문제들로 몸살을 앓았다. 낙후한 동독 경제를 흡수하면서 서독은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부었다. 서독 국민은 세금을 더 많이 내는데 전보다 혜택이 못하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동독 국민도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해 불만이 쌓여갔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은 서로 다른 주장과 요구를 묵살하지 않았다. 끈기 있게 대화해서 의견차를 좁히고 대안을 찾았다. 오늘날 독일이 국민복지제도를 잘 갖추고 선진경제를 이끌어 가는 데는 대화와 존중으로 모순을 극복한 태도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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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 마르크스 : 역사를 움직이는 힘 지식인마을 24
손철성 지음 / 김영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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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마을 시리즈 중 세 번째로 읽은 책이다.  

 

역사, 철학―귀가 따갑도록 듣고 한번쯤 입에 올린 말이다. 그렇다면 역사와 철학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가? 십중팔구 대답은 ‘아니다’일 게다. 너무도 복잡한 영역이라서 그저 모호한 이미지만으로 역사와 철학을 떠올리거나, 아니면 빙산의 한 조각만 보고 단순하게 떠올리지 않은가 싶다. 역사를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많은 역사가도 주장이 엇갈리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역사가 인간에게 보여준 모습은 다양했다. 역사는 규칙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역사가 지나온 긴 길만큼이나 역사를 보는 시각도 참으로 다양하다. 많은 역사가, 철학가, 사상가가 평생을 기울여 나름의 역사철학을 펼쳐왔다. 이러한 역사철학이 흘러가는 물길을 크게 한번 돌린 철학자가 있으니, 헤겔과 마르크스다. 고등학교 때 윤리공부를 깊이 있게 하지 않아 확신할 순 없지만 헤겔은 변증법을 내세운 사람으로 배운 기억이 있는데 마르크스는 전혀 기억이 없다. 마르크스 사상이 철학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든지, 자본주의 교과과정에 싣기에는 사상이 급진적이든지, 둘 중 하나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그런데 마르크스 사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는지, 역사에 얼마나 큰 획을 그었는지 감안해 보면 철학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 게다. 20세기 초중반, 마르크스의 사상은 세계를 두 부류로 나눌 만큼 맹위를 떨쳤지 않았는가. 지금은 실패한 사상이 되어 있긴 하지만.

『헤겔 & 마르크스―역사를 움직이는 힘』에는 이성의 틀로 역사를 바라봤던 칸트, 칸트가 내세운 이성을 바탕으로 모든 것은 변화하면서 발전한다는 변증법적 관념론으로 역사를 바라봤던 헤겔, 헤겔의 변증법은 받아들이지만 관념론은 비판해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역사를 바라봤던 마르크스가 나온다. 책은 칸트 철학으로 글머리를 열고 헤겔 철학으로 글을 전개하고 마르크스 사상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마르크스의 역사철학에 대해 얘기해 보자. 마르크스는 역사는 정해진 길을 따라 움직인다고 본다. 원시 공동체,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 공산주의로 진보해 나간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살던 당시 유럽사회는 부르조아 혁명으로 중세 봉건제를 타파하고 자본가 계급이 세력을 과시한 근대 자본주의 시대였다. 자본가 계급은 대량생산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대량생산은 노동자의 피땀 위해서 가능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한계가 여기 있다고 본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더 많은 노동을 시켜 더 많은 생산을 해서 더 많은 부를 축적한다. 노동자는 더 많은 노동을 하지만 자신이 생산한 부를 제대로 분배받지 못한다. 노동을 팔아 생활을 영위하는 노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소비할 여력이 모자라 소비를 점점 줄이게 된다. 따라서 생산물은 재고가 쌓이기 시작한다. 자본가들 중에서도 경쟁력이 떨어지는 자본가들은 파산해 노동자의 지위로 추락한다. 부는 극소수의 계층에게만 쌓이고 가난은 사회 전반을 덮친다. 결국 공황으로 치닫게 된다.

자본주의체제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 두 계급이 있다. 두 계급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할 때 노동자 계급은 혁명으로 새로운 체제를 세워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그것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트리는 혁명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거대한 자본주의에 짓밟혀 빛을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혁명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체제가 바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이다.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폐지한, 공동소유, 공동분배를 말한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높은 생산력을 달았다. 높은 생산력이 없으면 결국 분배할 토대가 빈약해지고 쪼들리는 분배는 결국 사람들을 고통으로 내몰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공동소유를 바탕으로 하는 공산주의는 무엇으로 생산력을 높이 끌어 올릴 단 말인가? 이 책에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마르크스도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이 책에서 다루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마르크스가 인간정신을 너무 높이 평가한 것은 아닐까. 많은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관심이 있다. 반대로 말하면 자신의 이익이 아닌 일에는 관심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사유재산이 없는 공산주의가 높은 생산력을 하겠다는 것은 물과 기름을 한데 섞으려는 시도는 아닐는지.

자본주의의 많은 잘못을 비판하고 자본주의가 흉내 내지 못할 완벽한 사상을 내세운 공산주의가 불같이 번졌지만 100년도 가지 못하고 깃발을 내린 것은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닐까. 불완전한 인간에게 너무 완벽한 사상을 들이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마치 초등학생에게 미적분을 열광적으로 가르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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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 - 거꾸로 읽는 책 25 거꾸로 읽는 책 25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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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는 참 복잡하다. 얽히고 설키고 뒤엉킨 실 뭉치를, 다른 실 뭉치와 또 한 번 엉클어 놓은 것. 이것이 세상의 모습 아닐까. 그 속에도 얽히고 설켜 서로 연결하는 원칙이 있을까. 이렇게 복잡한 세상이 수천수만 년을 흘러왔다. 수많은 시간 속에 뿌려진 흔적들, 그것을 사람들은 역사라 부른다. 

우리는 친구의 진심을 오해하고, 애인의 진실한 사랑을 의심하기도 한다. 공부에만 전념하는 줄 알았던 자식이 엉뚱한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걸 알고 놀라기도 한다. 그렇다. 같은 시대를 사는, 가까운 사람들이 하는 일, 품고 있는 속마음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해 속기도 하고 오해하기도 한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진실은 파묻힐 때가 많다.

하물며 100년, 1000년 전에 일어난 일이야 오죽할까. 그 옛날에 일어난 혁명, 전쟁, 반란 등 갖가지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올바로 인식하는 걸까. 그 많은 시간이 지나오는 동안 수많은 역사가들은 역사를 꾸밈없이 기록하고 바르게 해석한 것인가.

이런 시각으로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유시민 저)는 역사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많은 역사적 사실을 다소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그리고 이 삐딱한 시선은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제일 강렬하게 꽂힌다. 제일 못난 역사책이라고 못 박는다.

이 책을 만난 것은 알라딘에서 『후불제 민주주의』를 살펴보면서다. 책 소개와 함께 저자와 독자의 만남 영상이 있었다. 그 영상에는, 냉정하고 날카로워만 보이던 정치인 유시민이 아니라 따뜻한 생각을 하고 옆집 아저씨 같이 소박한 웃음을 짓는 유시민이 있었다. 유시민이 하는 생각을 좀 더 알고 싶었다. 자연히 이 사람이 쓴 책에 관심이 갔다. 몇 가지 책제목을 머릿속에 넣고 도서관에 갔다. 이미 대출해 가버려 책이 별로 없었다. 겨우 찾은 것이 이 책이다. 대한민국 대표  진보 논객답게, 지금은 아니지만 대표 진보 정치인답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악습과 폐단을 끊임없이 들추어낸다. 불완전함과 미완성을 참지 못한다. 그것이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한 진보를 만들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유시민의 진보적 사고는 이 책에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역사관부터 따지고 든다. 승자의 눈이 아닌 패자의 눈으로 본 역사도 중시한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역사가들을 독려한다.

지배자의 역사뿐 아니라 일반 민중의 삶도 소중하게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를 칭찬한다. 실증주의의 틀로 역사를 인식한 콩트, 원래 있었던 사실을 중시한 랑케, 계급 간에 대립과 투쟁으로 역사는 굴러간다고 하는 마르크스 등 굵직한 역사가들의 역사관을 곁들이며 역사를 논하기도 한다.  

 

사상이든, 과학이든, 학문이든, 어느날 생뚱맞게 나타나는 것은 없다. 이미 나와 있는 것을 비판하기도 하고, 계승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 역사가들이 역사의 개념을 정의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계몽사상가와 실증주의 역사가들을 정면으로 반박한 랑케, 실증주의 역사가들이 찾으려 했던 '역사 법칙'을 자신의 방식으로 세우고 노동자 계급에서 보는 '정치적 당파성'과 과학적 역사를 조화시킨 마르크스.   

 

역사에서도 따지고 비판할 것은 해서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잘못을 돌아보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사는 사람에게 희망이 없듯, 과오를 살피지 않는 역사에도 진보, 발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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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 이븐 루시드 : 자연철학의 조각그림 맞추기 지식인마을 17
김태호 지음 / 김영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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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 이븐 루시드-자연철학의 조각그림 맞추기


지식인 마을 시리즈 중 두 번째로 손에 든 책이다. 처음 읽은 『아우구스티누스 & 아퀴나스』에서, 중세 신학자 아퀴나스가 신학의 황당무계함을 논리화하는 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을 이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름만 지극히 귀에 익숙했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에 대해선 지극히도 아는 게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철학사상을 제시했는지 알고픈 욕구로 이 책을 주문했다. 이븐 루시드는 이름조차 처음 듣는 사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어떤 관계가 있길래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묶어서 책 내용을 구성했을까. 궁금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장을 열었다. 사실 나는 철학이란 말의 뜻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철학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인지 먼저 아는 게 순서일 것이다. 그래서 백과사전을 찾아보았다. 사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철학(哲學)의 '哲'이라는 글자도 '賢' 또는 '知'와 같은 뜻이다. 이와 같이 철학이란 그 자의(字義)로 보아서도 단순히 지를 사랑한다는 것일 뿐, 그것만으로는 아직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인지 알 수 없다. 철학 이외의 학문 가운데 그 이름을 듣고 그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는 학문은 드물다. 경제학이라고 하면 경제현상에 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고, 물리학이라고 하면 물리현상에 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경제학이나 물리학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그것이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인지 대략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철학의 경우는 그 이름만 듣고는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이 학문의 대상이 결코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한마디로 철학이 다루는 대상은 모든 것이다. 지금껏 나는 철학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 어떤 정신자세로 살면 되는지 연구하는 학문 정도로 나름 흐릿한 정의를 하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조금 실망한 것도 이런 내 나름의 정의 때문이었다. 이 책은 인간 내면의 모습을 철학으로 풀어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말하지 않는다. 이븐 루시드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프로필에는 과학도로서 걸어온 내력이 적혀 있었다. 그랬다. 이 책은 자연현상을 철학으로 풀어낸 아리스토텔레스, 그로부터 1,000년 뒤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물에 주석을 붙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계승해 발전시킨 이븐 루시드를 말하고 있었다.



밀물과 썰물이 일어나는 원리, 태양과 달이 뜨고 지는 원리, 높은 곳에서 물체를 놓으면 아래로 떨어지는 원리 등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의 관점이 아닌 ‘논리’의 관점에서 풀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물론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케플러가 타원궤도법칙을 밝혀낸 지도 이미 몇 백 년이나 지난 지금 보면 우스울지 모른다. 그러나 최초로 자연현상을 논리적으로 파헤쳐 중세를 거쳐 근대 과학문명으로 가는 출발점이 된 데 큰 의의가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지중해의 패권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 문명에서 로마 문명으로, 로마 문명에서 이슬람  문명으로 넘어간다. 이슬람 세력들은 그리스와 로마에서 싹튼 문명을 뭉개지 않고 그 토양 위에 자신들의 문명을 꽃피워 나갔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의 저작물들을 소중히 연구하고 아랍어로 번역했다. 이븐 루시드는 이슬람의 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물들에 주석을 달며 자신의 사상을 펼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사상은 중세 이슬람 학자 이븐 루시드를 만나 다시 살아나서 전보다 더욱 강건해진다. 이는 중세의 암흑기를 지나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우는 데도 크게 이바지한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말한다. 순수한 그리스 철학은 없고, 순수한 이슬람 문명도 없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룩한 문화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문명만 있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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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 아퀴나스 : 신앙과 이성사이에서 지식인마을 26
신재식 지음 / 김영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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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종일 빈둥대다가 결국 허무주의에 빠져 허우적댔다.

일요일 오후, 공허한 연기로 가득찬 가슴속에 환풍기를 들이댄다. 연기를 걷어내며 자리를 박찬다. ‘무얼 좀 해볼까?’ 하고 둘러본다. 마음의 양식으로 연기가 지나간 자리를 채우면 포만을 느낄 수 있을까? 동네에 있는 도서관으로 간다. 커피를 마시고 ‘새로 들어온 책’ 코너에서 별 기대하는 마음 없이 삐딱한 자세로 서서 책들을 째려본다. 몇 권을 들어보고 표지와 제목에 눈도장만 찍고 돌려놓는다.

네 번째로 손에 잡힌 책이었다.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아우구스티누스 & 아퀴나스”. 제목을 보아 하니 흔하디흔한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의 관계를 말할 듯싶었다. 표지에 쓰인 작은 글자들을 읽어나간다. 왠지 말이 멋있게 다가온다. 책장을 넘긴다. 머리말을 읽어본다. 딱딱하고 어려운 말로 잔뜩 폼을 잡을 줄 알았는데 가볍지만 생각을 하게 하는 글들이 호기심 한 자락을 잡아끈다. 책을 들고 책상으로 간다. 자연스레 손은 책장을 하나씩 넘겨간다. 평소 정신세계에 관심이 있었다. 철학, 심리학 등에 관심이 있었지만 이런 학문은 인내심과 싸워야 할 것 같은 선입견이 있었다. 이번에 제대로 된 인연을 만난 듯싶다.

책날개에 저자의 사진과 간단한 소개가 실려 있다.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저자는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푸근한 인상에 입이 귀에까지 걸릴 만큼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여행을 좋아한다고 소개한 글을 다시 한 번 주지라도 하려는 듯 머리글에서도 여행 얘기로 시작한다. 자신이 머물고 살고픈 마을을 밝힌다. 그러면서 이 책 시리즈의 컨셉인 지식인 마을을 소개한다. 이야기는 그 마을에 사는 중세 초기 인물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와 중세 중기 인물 토머스 아퀴나스에 초점을 맞춘다.

사실 나는 두 사람의 이름조차 들어본 기억이 없는 듯하다. 기억 아득한 곳에서 간질간질 뭔가가 비집고 올라올 듯하긴 해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 초기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세계에 이성의 논리를 도입한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고 하나님의 절대성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인간의 이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렇다고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파헤치거나 신앙의 실타래를 풀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는 이른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는 명제다. 일단 하나님의 존재와 신앙을 믿고 나면 이성적으로도 우주만물의 탄생과 하나님의 실재성 등도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다.

아우구스티누스 시기로부터 약 400년 뒤 토머스 아퀴나스도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세계에 이성의 잣대를 들이댄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을 계승해 이성의 역할에 무게를 더욱 싣는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하나님의 실재성과 신앙을 막연히 신적인, 영적인 세계로만 두지 않고 이성으로 이해해야 함을 설파한다. 아우구스티누스보다 이성을 더욱 강조한 이른바 ‘믿기 위해 이해한다’는 명제를 내세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영향을 받고 스콜라철학에 관심을 둔다. 이성의 학문이라 할 수 있는 철학으로 하나님 존재를 증명하고 신앙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중세 두 학자의 특징은 하나님과 신앙을 막연히 믿거나 계시에 의존한 고대 사유의 틀에서 벗어난다는 점이다. 이성의 잣대를 들이대 고대보다 합리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신앙생활을 영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성의 개념을 도입하고 발전시켰다고 해도, 두 학자 모두 이성으로 신앙을 밟고 올라서지는 않았다.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중세가 지나고 근대에 이르러 이성에 근거한 사유는 더욱 불꽃을 발한다. 신앙의 원리로, 하나님의 계시로 세상사를 이해하고 끌고 나가려 하지 않는다. 이 책에선 이성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 데카르트를 예로 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의 생각, 즉 인간의 이성으로 우주만물과 세상사를 이해하려 든다. 이런 철학과 사상이 꿈틀꿈틀 용솟음치면서 그에 대한 화답으로 과학이 불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아파트, 인스턴트식품, 등...... 과학의 이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과학은 몸을 편하게 해준다. 과학은 눈에 보여 명확하다. 그래서 애써 사유하지 않아도 된다. 중세까지만 해도 철학은 이성의 영역이었는데, 이제는 철학도 영적 영역이 아닌 듯싶다. 그만큼 명확하고 화려하게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아 철학도 이젠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닌지......

이 책은 중세 그리스도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두 명의 학자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중세의 사상을 이야기하면서 고대 사상을 끌어와 붙이고, 근대와 현대의 사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열어주고 있다. 볼륨이 크지 않고 많은 얘기가 주저리주저리 널부러져 있지도 않다. 고도의 사상적, 철학적 개념과 고급 전문용어를 남발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과학의 문명에 눌려 사는, 사유하는 데 서투른 나는 이 책에서 끌리는 뭔가를 느꼈다.

‘지식인마을 시리즈’ 를 기획한 사람이 기특하다. 이 시리즈 마음에 든다. 그래서 지식인 마을을 한 집씩 점령해 볼 생각이다.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 읽자마자 두 권 주문했다. 이번엔 아퀴나스 사상에 영향을 준 아리스토텔레스와 근대 이성 철학의 거장 데카르트를 살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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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1-11-20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구스티누스가 354년에 태어났고 아퀴나스가 1225년 경에 태어났다고 하니, 시대가 900년 가까운 차이가 납니다. 그냥 사실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서 댓글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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