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 이븐 루시드-자연철학의 조각그림 맞추기
지식인 마을 시리즈 중 두 번째로 손에 든 책이다. 처음 읽은 『아우구스티누스 & 아퀴나스』에서, 중세 신학자 아퀴나스가 신학의 황당무계함을 논리화하는 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을 이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름만 지극히 귀에 익숙했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에 대해선 지극히도 아는 게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철학사상을 제시했는지 알고픈 욕구로 이 책을 주문했다. 이븐 루시드는 이름조차 처음 듣는 사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어떤 관계가 있길래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묶어서 책 내용을 구성했을까. 궁금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장을 열었다. 사실 나는 철학이란 말의 뜻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철학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인지 먼저 아는 게 순서일 것이다. 그래서 백과사전을 찾아보았다. 사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철학(哲學)의 '哲'이라는 글자도 '賢' 또는 '知'와 같은 뜻이다. 이와 같이 철학이란 그 자의(字義)로 보아서도 단순히 지를 사랑한다는 것일 뿐, 그것만으로는 아직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인지 알 수 없다. 철학 이외의 학문 가운데 그 이름을 듣고 그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는 학문은 드물다. 경제학이라고 하면 경제현상에 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고, 물리학이라고 하면 물리현상에 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경제학이나 물리학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그것이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인지 대략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철학의 경우는 그 이름만 듣고는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이 학문의 대상이 결코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한마디로 철학이 다루는 대상은 모든 것이다. 지금껏 나는 철학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 어떤 정신자세로 살면 되는지 연구하는 학문 정도로 나름 흐릿한 정의를 하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조금 실망한 것도 이런 내 나름의 정의 때문이었다. 이 책은 인간 내면의 모습을 철학으로 풀어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말하지 않는다. 이븐 루시드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프로필에는 과학도로서 걸어온 내력이 적혀 있었다. 그랬다. 이 책은 자연현상을 철학으로 풀어낸 아리스토텔레스, 그로부터 1,000년 뒤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물에 주석을 붙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계승해 발전시킨 이븐 루시드를 말하고 있었다.
밀물과 썰물이 일어나는 원리, 태양과 달이 뜨고 지는 원리, 높은 곳에서 물체를 놓으면 아래로 떨어지는 원리 등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의 관점이 아닌 ‘논리’의 관점에서 풀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물론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케플러가 타원궤도법칙을 밝혀낸 지도 이미 몇 백 년이나 지난 지금 보면 우스울지 모른다. 그러나 최초로 자연현상을 논리적으로 파헤쳐 중세를 거쳐 근대 과학문명으로 가는 출발점이 된 데 큰 의의가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지중해의 패권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 문명에서 로마 문명으로, 로마 문명에서 이슬람 문명으로 넘어간다. 이슬람 세력들은 그리스와 로마에서 싹튼 문명을 뭉개지 않고 그 토양 위에 자신들의 문명을 꽃피워 나갔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의 저작물들을 소중히 연구하고 아랍어로 번역했다. 이븐 루시드는 이슬람의 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물들에 주석을 달며 자신의 사상을 펼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사상은 중세 이슬람 학자 이븐 루시드를 만나 다시 살아나서 전보다 더욱 강건해진다. 이는 중세의 암흑기를 지나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우는 데도 크게 이바지한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말한다. 순수한 그리스 철학은 없고, 순수한 이슬람 문명도 없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룩한 문화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문명만 있을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