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그대를 사랑하지만 슬픈 기억 속에서 너를 잊고 싶어
박경만 지음 / 더케이북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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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다정한 그대를 사랑하지만, 끝내 놓지 못하는 마음에 대하여

박경만 시인의 <다정한 그대를 사랑하지만 슬픈 기억 속에서 너를 잊고 싶어>는 제목부터가 한 편의 짧은 시 같습니다. 다정함과 슬픔, 사랑과 잊고 싶음이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였는데, 그 두 마음이 부딪치지 않고 묘하게 어울리더라고요.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받아 든 한 권을 며칠에 걸쳐 천천히 읽었습니다.

표지는 연한 살구빛이 부드러운 주황으로 번지는 그러데이션 한 장이 전부입니다. 단정하고 깨끗한 인상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표지에 가슴 한 켠이 시린 어떤 사람의 일러스트 한 점쯤 얹혀 있었더라면 시집의 정서가 더 또렷하게 전해졌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들었어요. 본문 사이에 흑백 사진이 몇 장 들어가 있긴 한데, 요즘 시집의 결을 생각하면 일러스트가 조금 더 어우러졌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분량은 가벼워서 얇고 가벼운 잡지 한 권을 챙기는 느낌으로 가방에 쏙 들어가요. 짧은 호흡으로 쓰인 시들이라 인스타그램의 글귀에 익숙한 분들에게도 부담이 적습니다. 읽다 보면 ‘아, 이 마음 알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행들이 곳곳에 있어, 시집을 거의 처음 펼치는 분께도 권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미’라는 시는 한 번 더 천천히 되짚어 읽게 됐어요.


매미가 뜨거운 여름에 소리 내어 우는 것은 더워서 우는 것이 아니라 넌출거리는 다정한 더위가 사라지는 게 싫어서 우는 게 아니라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해 못내 아쉬워 우는 것이다.

여름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마다 무심히 듣던 매미 소리가, 이 시를 읽고 난 뒤로는 조금 다르게 들릴 것 같습니다. 시인은 매미가 나무에 슬쩍 붙어 더없이 떨어지지 않는 까닭까지 사랑의 비유로 끌어와요. 햇살 부서지는 틈새로 사랑이 뒤엉키고 다시 합쳐져 ‘더 큰 사랑’으로 가기 위함이라는 해석은, 듣고 보니 참 따뜻한 시선이지요. 헤어짐을 끝이 아니라 더 깊은 사랑으로 가는 길목으로 본다는 것. 어느 나이쯤에 이르러 다시 곱씹어볼 만한 자세입니다.

표제 시 ‘마음으로 가는 길’은 이 시집의 심장 같은 자리예요. 마음으로 가는 멀고도 험한 길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해서, 새장 속에 갇힌 너를 이제 놓아주고 싶다는 고백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다정한 그대를 사랑하지만 슬픈 기억 속에서 너를 잊고 싶어. 잘 가요. 내 사랑!’이라는 한 문장이 나오는데, 묘한 행입니다. 잊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내 사랑’이라고 부르는 마음, 그 모순이야말로 사랑이 끝나가는 자리에서 사람이 짓는 가장 정직한 표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푸념’ 연작 앞에서는 살짝 웃었습니다. 솔직히 내가 너를 계속 지켜봤는데 한 번도 너는 먼저 만나자고 하질 않더라는 토로, 흐르지 않고 고여만 있어 결국 썩어버리는 물에 빗댄 권태로움까지. 시라기보다 누군가의 메모장에 남은 혼잣말 같은 결이지요. 사랑을 미화하지 않고, 일방적이었던 마음과 지쳐버린 마음을 그대로 인정해 버리는 솔직함이 좋았습니다. 그리움의 시집 한가운데에 이런 피로감이 함께 놓여 있다는 게, 오히려 이 책을 더 믿을 만하게 만들었어요.

후반부의 ‘그대 속은 너무 깊어’는 표제 시와 짝을 이룬다고 봐도 좋을 시예요.

기억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추억 속에서 차츰 사라지는 것 말 못할 나의 마음 아직도 내가 너를 놓지 못하고 있다는 게 슬프지. 그대 속은 너무 깊어

기억과 추억을 따로 떼어 놓는 시선이 인상적이었어요. 우리는 흔히 기억이 흐려진다고 말하지만,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기억은 추억이라는 더 큰 자리 안에서 천천히 옅어져 가는 것에 가깝습니다. 잊고 싶다고 말하던 화자가, 결국 ‘그대 속이 너무 깊어’ 끝내 놓지 못하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장면. 시집 전체가 이 모순 위에 서 있다는 걸 이 한 편이 또렷이 보여줍니다.


서평단으로 받은 책이라 어떤 마음으로 펼쳤을지를 떠올려 보면, 이 시집은 ‘열어 보는 일’이 어렵지 않았어요. 잘 정돈된 시어보다는 마음의 결을 그대로 옮긴 듯한 행들이 많아, 시를 평소 잘 안 읽는 분도 부담 없이 페이지를 넘기실 수 있을 거예요. 사랑의 끝자락을 지나오신 분이라면 ‘아 맞아, 이런 마음이었지’ 하고 가만히 끄덕이게 될 것이고, 지금 그 한가운데에서 흔들리고 계신 분이라면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하는 작은 안도감을 받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을 망설이는 사람을 위한 시집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가 빈말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초여름의 문턱입니다. 낮의 햇살은 차츰 두꺼워지고, 저녁 바람에는 아직 옅은 봄의 잔향이 남아 있는 계절. 손에 가볍게 들리는 이 한 권을 가방에 두고 다니며 짬짬이 한두 편씩 펼쳐 읽기에 잘 어울리는 시집입니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깊어지기 전, 이 시집의 ‘매미’ 한 편을 먼저 읽어 두는 것도 올여름을 다정하게 맞이하는 한 가지 방법일 거예요.


잊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마음 안에 들이고 사는, 그 모순의 정직함을 담은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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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탄생 - 의식은 혼돈에서 어떻게 태어날까?
오기 오거스.사이 개덤 지음, 김아림 옮김 / 진성북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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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의식의 탄생>을 받았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 든 생각은 솔직히 ‘무겁다’였어요. 두께도 두께지만, 표지부터 별자리 같은 점선과 뇌, 파리와 거북과 작은 생명체들이 그려져 있어서 가볍게 넘길 책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460쪽에 가까운 분량에, 전문 서적이나 교과서에 가까운 과학서라 읽어 나가는 데 힘든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어요. 학자들의 이름과 실험 설계가 빠르게 지나가는 대목에서는 한 번씩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고, 아예 낯선 대목은 빨리 넘어가자 마음먹고 평소보다 호흡을 빠르게 가져갔습니다. 그렇게 읽었는데도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장면들이 꽤 있었습니다.


저자인 오기 오거스와 사이 개덤은 보스턴대학교에서 신경과학을 공부한 학자들입니다. 두 사람은 의식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고세균과 아메바부터 물고기와 개구리, 침팬지와 인간,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낸 ‘슈퍼마인드’까지 4단계로 따라갑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주장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의식은 특별한 재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들의 특별한 배열에서 나온다는 것. 마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에 가깝다는 것. 그래서 30억 년 전 빛을 향해 1 cm 움직이던 고세균과 오늘 신호등을 보고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사이에 본질적으로 같은 원리가 흐른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이 비유가 과장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책을 따라가다 보니 정말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대장균 ‘에스카’ 이야기에서 “공간의 문제가 시간의 문제로 바뀌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작은 몸으로는 두 지점의 농도를 동시에 비교할 수 없으니, 조금 전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기억을 만들어 낸다는 설명이에요. 우리가 흔히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도 결국 시간으로 환산된 비교 작업이라는 사실이, 작은 세균의 이야기 안에 이미 들어 있었던 셈입니다.


3단계 ‘모듈적 마음’으로 넘어가면 스티븐 그로스버그라는 신경과학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살에 아버지를 잃은 그는 평생 마음의 작동 원리를 좇아 60년 동안 같은 질문을 다듬어 왔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시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마음의 구조 자체에 꿰매져 있다”라는 문장에서 한참 멈춰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마음을 만드는 재료 자체라는 말은, 시간을 ‘남는 것’과 ‘부족한 것’으로만 셈하던 감각을 조금 다르게 열어 줍니다.


12장 ‘공명’ 이야기도 오래 남았습니다. 의식은 어떤 표상에 ‘여분의 자유도’를 더해주는 일이고, 그것은 마치 중요한 메일에 깃발을 다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합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데 그중 어떤 것은 의식의 무대 위로 올라오고 어떤 것은 그냥 흘러갑니다. 그 차이가 결국 ‘공명’이라는 단어 하나로 정리되는 순간, 무엇에 깃발을 다는지가 결국 그 사람을 만든다는 사실이 조용히 다가옵니다.


18장 ‘자아’ 후반부의 한 장면도 인상 깊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개인의 이름이 왕도 장군도 영웅도 아닌, 곡식 장부에 적힌 회계 담당자 ‘쿠심’이었다는 대목이에요. 거창한 업적이 아니라 일상의 기록 속에 사람의 이름이 남는다는 사실이, 마음은 평범한 배열에서 비롯된다는 이 책의 주제와 정확히 포개진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마지막 19장 ‘슈퍼마인드’에서 저자는 의외로 따뜻한 결론을 내려놓습니다. 자유 의지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는 한에서만 존재한다고, 그러나 그것을 선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슈퍼마인드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고. “마음이 적응력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협력뿐이다”라는 문장에서 책장을 덮었습니다. AI를 둘러싼 논의가 매일 쏟아지는 시기에, 신경과학자가 쓴 책의 결론이 결국 협력과 사랑이라는 단어로 돌아온다는 점이 의외였고, 그래서 더 오래 남았습니다.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분량과 전문성 때문에 중간중간 호흡이 끊기는 구간이 있었고, 고유명사와 학자 이름이 빠르게 지나갈 때는 한 번 더 돌아와 읽어야 할 때도 있었어요. 그래도 모르는 부분을 가볍게 넘기면서 읽어도 큰 흐름은 잡힙니다. 오히려 이 책은 정독보다 멈추고 싶은 곳에 충분히 머무는 독법이 더 잘 어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I라는 단어 앞에서 마음이 자주 복잡해지는 요즘, 의식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같은 질문이 가끔 떠오르는 분이라면 이 책을 천천히 권하고 싶습니다. 두께에 한 번 놀라고 첫 장의 학술적인 결에 한 번 더 망설일 수 있지만, 고세균의 1 cm 이동에서 시작해 인간의 자유 의지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이 끝나갈 즈음에는 평소 보던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일 거예요. 좋은 책을 먼저 만나볼 기회를 준 북유럽 카페에도 고마운 마음을 적어 둡니다.


5월의 끝자락, 해가 길어진 저녁이 늘었습니다. 30억 년이라는 시간을 따라 걸었다는 감각이, 하루의 끝을 조금 천천히 닫게 해 주는 책이었습니다.


한 줄 요약 – 고세균에서 슈퍼마인드까지, 마음은 특별한 재료가 아니라 평범한 것들의 특별한 배열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천천히 일러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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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삶을 찾아서 - 거대한 도시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는 자립과 연대의 기록
윌리엄 제임스 도슨 지음, 오수민 옮김 / 빈티지하우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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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처음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두께감과 묵직한 무게감이었습니다. 평일 저녁마다 조금씩 쪼개 읽어야 하나 싶을 정도였는데, 표지의 ‘단순한 삶을 찾아서’라는 일곱 글자가 묘하게 시선을 붙드는 한 권이에요. 40대 후반, 가족과 회사 사이에서 분주한 가장에게는 그 한마디가 꽤 묵직하게 다가오는 제목입니다.


미색 바탕 위에 알록달록한 나무와 작은 새들이 흩어져 있는 표지는, 무겁고 단단한 사회비평서라기보다 숲 입구에 놓인 안내판 같은 인상이었어요. 그래서일까요, 막상 읽기 시작하니 부담스럽지 않게 페이지가 넘어갔습니다. 두께는 있어도 문장이 까다롭지 않아서, 마음 먹고 잡으면 꽤 빠르게 따라갈 수 있는 도서예요.


<단순한 삶을 찾아서>는 1903년 런던의 평범한 사무원이었던 윌리엄 제임스 도슨이, 복잡한 도시 생활과 만성적인 경제 불안에서 벗어나 영국 산악지대로 이주해 단순한 삶을 일궈가는 과정을 적은 자전 에세이이자 사회철학서입니다. 모건 하우절이 여러 인터뷰와 자신의 글에서 “금융 목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은 책”이라 고백하며 꾸준히 추천해온 한 권이기도 합니다. 한 세기 전에 쓰인 글인데, 차분히 따라 읽다 보면 이게 정말 1903년의 기록인지 의심하게 돼요. 오늘의 한국 직장인이 마주한 일상에 너무 정확하게 겹쳐 들어오니까요.


가장 마음을 흔드는 대목은 제3장 ‘생계를 꾸리는 일, 그리고 삶을 향유하는 일’입니다. 저자는 도시 사무원의 하루를 이렇게 그려요. 겨울 아침,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일어나 아침 식사는 형식적으로 끝내고, 반드시 타야 하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고. 그날 중 가장 여유로운 순간이 아이러니하게도 ‘달리는 기차 안의 짧은 시간’뿐이라는 묘사가 인상적이에요. 저자는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갑니다. 도시 사무원이 ‘집’이라 부르는 공간은 사실 잠만 자는 병영에 가깝다고. 가구 하나 직접 고른 적 없고, 장식 하나 선택한 적도 없이, 그저 청구서에 돈을 지불할 뿐이라는 진단입니다. 더 시린 대목은 그다음이에요.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식탁에서 고기 요리를 썰어 주는 낯선 남자’일 뿐이라는 문장. 아침에 나설 때는 아이들이 잠들어 있고, 밤에 돌아올 때도 이미 잠들어 있어서 사실상 아버지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진술이 따라옵니다. 당시 런던의 풍경이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평범한 가장의 하루와도 멀지 않아 보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분명한 원칙 하나를 세웁니다.


“이성적인 존재로서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생계를 꾸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는 것이며, 삶을 살아갈 힘을 희생하면서까지 삶의 수단을 확보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생계를 꾸리느라 정작 살아갈 힘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이 단순하고도 단호한 질문이, 책의 중심에 단단히 박혀 있는 듯합니다.


제5장 ‘건강과 경제’에서는 이 자각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저자는 정치권의 표현을 빌려, 런던이라는 도시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게임의 규칙’을 따르라 요구하는데 정작 자신은 그 규칙에 맞춰 게임을 하고 있지 않았다고 고백해요. 마음속 깊이 혐오하는 삶의 방식에 진심을 쏟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고, 그래서 늘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상태로’ 하루의 업무를 해나갔다고요. 직장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킨 듯한 기분이 들 대목입니다.


저자는 그 자각을 두 축으로 정리해요. 건강과 경제. 큰 병을 앓지는 않았지만 런던은 자신의 기운을 늘 정상 이하로 묶어두었고, 만성 두통과 우울감, 잔병치레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런던의 겨울 안개가 내려앉을 때면 영혼 위로도 견딜 수 없는 압박감이 내려앉았는데, 이건 기분 탓이 아니라 산소 부족에서 오는 물리적 현상이었다는 진단이 따라붙어요. 봄철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하며 외출을 망설이는 우리 현실과도 묘하게 겹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줄이 나옵니다. 건강이란 단순히 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생명력이 넘치는 상태, 활력이 높게 유지되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정의. 시골에서 보낸 며칠 만에 가족 모두에게 생기와 지적 명징함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저자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이 고귀한 선물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매길 것인가?”


병이 없다는 것과 활력이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사실을, 한 세기 전의 도시 노동자가 조용히 일러주고 있는 셈입니다.


제10장 ‘새로운 이웃’에 이르면 저자의 시선이 한층 넓어집니다. 시골로 옮겨간 사람이 처음 마주하는 것은 사실 평화가 아니라 ‘기묘한 상실감’이라는 솔직한 고백이 먼저 나와요. 자연의 흔들림 없는 무관심 앞에서 자기 존재가 작아지는 느낌, 그래서 도시로 도망쳐 기차역 짐꾼의 인사 한 번에 우쭐해지는 인간 본성의 모습까지 가감 없이 적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저자는 ‘우주의 거대한 질서 속에서 인간은 그저 하찮은 원자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인간은 분명 생각할 수 있는 원자’라고 적어요. 자연과 충분히 함께한 사람은 비로소 자기 존중을 되찾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새로운 이웃 관계가 열립니다. 둥지를 짓는 새는 집을 짓는 인간과 본질적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고, 매 순간의 호흡과 맥박은 자신을 파괴하려는 거대한 힘과 맞서 거두는 고귀한 승리라는 통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좁은 이웃을 넘어,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더 넓고 포용적인 관계가 가능해진다고 말합니다. 봄이 오면 보석처럼 빛나는 언덕 위에 ‘신의 예술학교’가 문을 열고, 초가지붕 아래에는 런던만큼이나 경이로운 대도시가 새롭게 건설되고 있다는 묘사 앞에서, 도시에 사는 동안 잊고 살았던 감각이 살짝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이 안내서가 매력적인 건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장 ‘미래의 도시’에서 저자는 단호하게 적어요. “선택지는 결코 도시와 자연, 둘 중 하나가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어리석음이라는 진단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내놓는 답은 협동과 공동체였어요. 부지 매입과 주택 건설, 시설 조성 비용까지 구체적인 숫자로 따져가며 ‘공동체적 삶을 실험하는 작은 도시는 언제라도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가 개인주의에서 협동으로, 개인의 이익에서 공공의 선으로 조금씩 방향을 바꾸어 갈수록 인간은 진정한 진보의 길 위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결말 앞에서, 이 도서가 단순한 귀촌 예찬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활발히 이야기되는 미니멀리즘과 파이어족, 협동조합과 귀촌·귀향이 사상적으로 이미 한 세기 전에 이렇게 정돈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고요. 서울·수도권의 주거 부담과 지방 소멸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현실 속에서도, 저자의 제안은 의외로 실용적인 결을 지니고 있습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아 든 한 권이었는데, 마감의 부담보다 위안이 더 크게 남는 도서였습니다. ‘지금 내가 사는 방식이 과연 최선의 나를 실현하는 삶일까’라는 오래된 질문이, 글의 곳곳에서 조용히 말을 걸어왔거든요. 두께감 때문에 처음에는 살짝 망설여졌지만, 막상 펼쳐 보니 문장이 어렵지 않아 빠른 속도로 따라갈 수 있었던 점도 고마운 부분이었습니다.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요즘, 저녁 공기가 한결 부드러워졌어요. 이런 계절에는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일과를 잠시 멈추고, 단순함이라는 단어를 천천히 곱씹어 보는 시간이 한 번쯤 필요한 듯합니다. 단순한 삶이란 결국 적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에 마음을 더 많이 쓰는 일이라는 사실을, 이번 한 권이 차분하게 일러주는 도서였습니다.


지금의 삶의 속도에 한 번쯤 ‘이대로 괜찮은가’ 멈칫해 본 직장인 분께 조용히 권하고 싶어요. 그리고 미니멀리즘이나 파이어족, 귀촌 같은 키워드에 마음이 끌리지만 아직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분께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습니다. 한 세기 전 런던에서 건너온 담담한 목소리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의외로 정확하게 가닿거든요.


생계를 꾸리는 일과 삶을 살아가는 일 사이에서 잠시 멈춰 서고 싶을 때, 곁에 두고 싶은 한 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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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동산에 가지 않고 SNS로 분양권을 산다
베리스 지음 / 모티브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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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부동산이라는 단어 앞에서 늘 한 발 물러서 있었어요. 청약, 분양권, 가점, 무순위 같은 말들이 뉴스에서 들릴 때마다 '언젠가 공부해야지' 하고 미뤄 두기만 했고요. 회사 다니면서 점심시간에 잠깐 부동산 기사를 들춰 봐도 용어부터 막히니까 금세 창을 닫게 되더라고요. 작년에 회사 후배가 청약에 당첨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한참 부러워하다가, 정작 제 일은 또 다음으로 미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나는 부동산에 가지 않고 SNS로 분양권을 산다>를 받아 들었어요.


표지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솔직히 '이런 게 가능한가' 싶은 의문이었습니다. 손에 쥔 스마트폰 화면 위에 채팅 앱과 링크 아이콘이 톡톡 떠 있는 일러스트가, 마치 모바일 안에서 옷이나 가전을 고르듯 분양권을 산다는 인상을 줬거든요. 표지 아래쪽에 적힌 '전직 떴다방이 알려주는 실전 분양권 투자 비법서'라는 한 줄도 호기심을 끌어당겼습니다. 이론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부딪힌 사람이 쓴 기록이라는 점이 가장 컸어요.


책을 펼치자마자 만난 문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초중고 12년 동안 같은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와서도 무언가를 배울 때 자연스럽게 정답부터 찾으려 한다는 지적이에요. 부동산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짚어요. '브역대신평초'라는 신조어를 예로 드는데, 브랜드·역세권·대로변·신축·평지·초등학교를 갖춘 아파트가 무조건 돈이 된다는 식의 공식이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춘 단지는 흔치 않아서, 결국 눈만 높아진 채 진짜 기회는 놓치게 된다는 거예요. 저자가 던지는 결론은 단순합니다. 부동산에는 정답이 없고, 정답은 '돈이 되는 부동산'일 뿐이라는 것. 평소에 회사에서 매뉴얼대로만 일을 처리해 왔던 제 모습이 살짝 겹쳐 보였습니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대목은 비주택 단타 청약을 다룬 챕터였어요. 오피스텔, 생활숙박시설, 민간임대 아파트처럼 '사면 삼대가 망한다'고 흔히 말하는 상품들을, 청약으로 분양권을 확보한 뒤 프리미엄을 받고 넘기는 구조로 다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해요. 청약통장을 쓰지 않아도 되고, 당첨되더라도 주택 수 제한 같은 불이익이 없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청약 점수가 낮다는 이유로 일찌감치 손을 놓아 온 사람에게 진입로가 하나 더 열리는 느낌이었어요.


정보의 통로를 짚어 주는 부분도 실용적이었습니다. 비주택 청약은 청약홈에 안 올라오는 경우가 많고, 지역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에 '○○ 지역에 민간임대 아파트 공급 예정' 같은 기사 한 줄만 나온 뒤 자체 홈페이지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해요. 저자 본인도 '청약 예정'이라는 단어를 매일 검색했다는 디테일이 인상 깊었습니다. 정보를 아는 사람만 몰래 가져가는 시장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같은 챕터에서 톤이 확 바뀌는 대목이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이야기예요. 저자는 단호하게 추천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합니다. 방장과 부방장, 분위기를 띄우는 바람잡이가 한 팀으로 움직이며 처음에는 진짜 단타 청약 정보를 몇 번 흘려 신뢰를 쌓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자기들이 분양하는 오피스텔을 '안전마진이 확보된 단타 청약'이라며 둔갑시킨다고요. 안전마진은 누가 정해 놓는 게 아니라 시장에서 결정되는 거라는 한 문장이 묵직하게 박혔습니다. 이어지는 '내 돈 넣는 순간, 그대로 물린다'라는 챕터 제목 자체가 경고문 같아요. "한 달만 지나면 2,000만 원까지 갈 것 같습니다. 제가 최고가에 팔아 드리겠습니다." 같은 말에 흔들려 자기 돈을 넣는 순간, 단타가 장기투자로 바뀌고 한 달 뒤 그 사람에게 전화하면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묘사가 뜨끔했어요. 방문판매법에 따라 14일 이내 계약을 철회할 수 있고, 본인이 지난 3년간 구독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계약을 철회시켰다는 실무적인 안내까지 들어 있어서 신뢰가 갔습니다.


표지에서 받은 첫인상과 가장 직접 맞물린 챕터는 '누가 분양권을 부동산에서 사?'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분양권은 부동산에서 사는 거라고 알고 있지만, 당첨자 발표 직후부터 정당계약 전까지는 모델하우스 주차장이나 주변 카페에서 떴다방을 통해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떴다방 사장님들이 단속을 피해 주변 큰 카페로 옮겨 다니는 동선까지 그려져요. 발표 시간에 맞춰 도착해 적어도 한 시간은 조용히 관찰하라는 조언, 거래가 성사되면 '나갔다', '출발했다', '입금됐다' 같은 단어가 오간다는 현장 언어, 그리고 물량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대화의 방향으로 판단한다는 표현은 직접 현장에 서 본 사람만 쓸 수 있는 문장이에요. 외부인은 알아듣지 못하도록 일부러 용어를 섞어 말한다는 디테일까지 더해지니까, 왜 제목이 'SNS로 산다'로 끝나는지 그제야 이해가 됐습니다.


저자가 매수할 때 어떤 사람을 찾는지도 인상 깊었어요. 그날 거래를 한 건도 성사시키지 못한 떴다방을 찾는다는 거예요. 조급한 사람이 가격을 낮춰 주거나 자기 수수료까지 깎아 첫 코를 뚫으려 하기 때문에, 매수자 입장에서는 그쪽이 가장 좋은 파트너가 된다는 설명입니다. 동료에게 신세 한탄을 하고 있거나 다른 업자와 계속 다투는 사람을 찾으면 된다는 묘사는, 부동산 시장의 '판'이 결국 사람으로 굴러간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했습니다. 가두기, 매물이 쌓이는 타이밍, 당첨자들이 모두 같은 시간에 같은 방식으로 무너지는 풍경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현장 르포를 옮겨 적은 듯한 장면이었어요. 챕터 끝에 놓인 "기회는 또 옵니다."라는 한 문장이 의외로 위로처럼 들렸습니다.


이 책이 단순한 단타 기술서로만 보이지 않은 건 후반부 공부법 챕터 덕분이에요. 부동산 시장을 읽으려면 특정 유튜버나 강사의 의견보다 한국은행, 통계청,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KDI, 금융위원회 같은 공식 자료를 먼저 보라는 안내가 나옵니다. 같은 숫자라도 누구는 위기로, 누구는 기회로 해석한다는 문장이 핵심이었어요. 데이터를 완벽하게 이해하려 하기보다 '누가 이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먼저 보라는 말, 답을 먼저 보고 풀이 과정을 거꾸로 따라가라는 비유가 회사에서 새로운 업무를 익힐 때 제가 자주 쓰는 방식과 비슷해서 반가웠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정보의 양이 아니라 정보를 해석할 수 있는 기준을 갖는 것이라는 마무리가 단단했어요.


읽고 나니 분양권 시장이라는 게 자본의 크기로만 굴러가는 곳이 아니라 정보와 타이밍, 그리고 사람의 심리가 얽혀 돌아가는 판이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직장 생활을 오래 하면서 매달 들어오는 월급에만 의지해 왔는데, 그 바깥에도 작게나마 들여다볼 만한 길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 권의 값은 충분했어요. 평소라면 손이 가지 않았을 분야의 안내서를 만나게 해 주는 게 서평단의 가장 큰 선물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고, 미뤄 둔 숙제 하나를 가볍게 시작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5월 말, 창밖으로 초여름 공기가 슬쩍 끼어드는 시기에 이 한 권을 읽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가로수가 부쩍 푸르러진 걸 보면서, 미뤄 둔 공부 하나쯤은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도 되겠구나 싶었어요. 부동산이 어렵고 멀게만 느껴져 첫 장조차 펼치지 못했던 분이라면 부담 없이 펼쳐 보시면 좋겠고요, 유튜브 강의만 떠돌다 정작 본인의 기준은 못 세웠다고 느끼는 분께도 조용히 건네 보고 싶은 안내서예요.


부동산은 자본이 아니라 정보와 타이밍의 게임이라는 말을, 책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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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신살도감
애옹희(성민정) 지음 / 모티브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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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처음 받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사주책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나” 였어요. 핑크와 보라, 푸른빛이 번지듯 섞인 그라데이션 위에 큼직한 검정 고딕으로 박힌 제목, 양옆에서 익살스럽게 자세를 잡은 고양이 두 마리. 진지하게 풀어내면 한없이 무거워질 주제를 이렇게 산뜻하게 끌고 갈 수도 있다는 게 신선했습니다. 표지를 보자마자 “그래서 제 일주는 뭘까” 하고 찾아보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면, 디자인의 첫인상은 충분히 성공한 셈이에요.


북유럽 카페를 통해 만나게 된 <사주 신살 도감>은 생각보다 묵직했어요. 손에 들면 사전 같은 무게감이 있는데, 막상 펼치면 일러스트 삽화와 시원한 여백 덕분에 눈이 피로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목차를 훑다가 마음이 가는 꼭지부터 천천히 넘겨보면 되는 안내서예요. 사주를 운명의 정답표가 아니라 ‘나를 이해하는 언어’로 다룬다는 저자의 시선이 이런 편집에도 그대로 묻어납니다.


목차에서 가장 먼저 눈이 갔던 곳은 ‘장성살 스위치’ 파트였어요. 40대 후반쯤 되면 회사에서 권한이라는 게 알게 모르게 따라붙습니다. 누군가의 결정에 사인을 해야 하고, 어떤 방향이 맞는지 먼저 말해야 하는 자리에 자꾸 놓이게 돼요. 그러다 보면 ‘이게 제 그릇이 맞나’ 싶은 순간도 함께 찾아옵니다. 저자는 장성살을 권력의 표식이라기보다 ‘중심축이 서는 표식’으로 풀어요. 영향이 모이는 자리, 결정이 통하는 위치, 구조의 가운데에 서는 흐름이라는 설명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무거운 자리에 놓이는 것이 ‘잘못된 배치’가 아니라 ‘작동 중인 결’로 읽히니까요.


특히 오래 머문 대목은 장성살에게 ‘힘의 세기보다 쓰임의 방향이 중요하다’고 짚어준 부분이었습니다. 통제가 지나치면 독선으로 보이고 추진이 강하면 압박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경고, 그래서 이끄는 속도는 빠르되 듣는 폭은 넓히는 쪽이 균형에 가깝다는 조언. 회사에서 후배들에게 자꾸 “이건 이렇게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제 모습이 잠깐 떠올랐어요. 듣는 폭이라는 단어 앞에서 조금 머쓱해지더라고요.


‘백호살 처방’은 결이 또 달랐어요. 성과는 없는데 노력은 계속 쌓일 때 가장 먼저 올라오는 생각이 “내가 부족한가”라는 자기 의심이라는 문장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분명히 열심히 한 것 같은데 숫자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구간이 옵니다. 옆자리 동료는 승진했다고 하고, 누구는 집을 샀다고 하고, 저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보고서를 쓰고 있고. 저자는 그런 시기를 두고 이렇게 말해요. “지금은 성과의 시간이 아니라 지속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무너지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잘 지나오고 있다.” 이 문장을 읽고 한참 표지를 덮어두었습니다.


뒤에 이어지는 “버틴다는 건 가만히 있다는 뜻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살아나는 힘이다”라는 대목도 좋았어요. 잘 풀리는 구간보다 안 풀리는 구간에서 더 단단해진다는 시선, 비교를 줄이고 루틴을 유지하는 쪽을 택한다는 설명. 결과가 보이지 않는 시기를 ‘부족함’이 아니라 ‘안에서 길러지는 구간’으로 다시 읽어주는 처방이 담백해서 더 와닿았습니다.


‘남들보다 느린 것 같아 불안할 때’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좀 더 차분해졌어요. 우리는 효율적인 삶을 좋은 삶이라 배워왔기 때문에 멈춤이나 우회에 쉽게 불안을 느낀다는 진단이 정확하다고 느꼈습니다. 저자는 어떤 일은 이른 시기에 이루어지면 오히려 오래 유지되지 못하기도 하고, 충분한 시간을 지나야 비로소 자리를 잡기도 한다고 적어두었어요. 겉으로 보이는 속도와 실제의 안정감이 항상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문장. 40대 후반쯤 되니 이 말이 머리로만 와닿는 게 아니라 몸으로도 조금씩 와닿습니다.


이 안내서의 좋은 점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정답을 들이밀지 않는다는 거예요. 다만 흔들리는 순간에 잠시 펼쳐 들고, 제 결에 맞는 꼭지를 찾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는 톤이 일관됩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은 도서이지만, 활동을 마치고 나서도 책장 가까운 자리에 꽂아두고 싶어졌어요. 앞으로 제 사주가 어떤 시기를 지나든, 그때그때 목차를 펼쳐 처방을 한 줄씩 받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요.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5월 끝자락, 낮에는 제법 덥고 저녁에는 바람이 선선해지는 이맘때 읽기에 잘 어울리는 도서였습니다. 무거운 위로보다 가벼운 토닥임이 필요한 계절에, 사주가 어렵게 느껴졌던 분께, 그리고 요즘 회사에서 자꾸 흔들린다고 느끼시는 분께도 조용히 건네보고 싶은 안내서예요.


한 줄로 정리하자면, 흔들리는 시기를 ‘부족함’이 아니라 ‘아직 풀이되지 않은 결’로 다시 읽어주는 다정한 처방전 같은 도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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