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다정한 그대를 사랑하지만, 끝내 놓지 못하는 마음에 대하여
박경만 시인의 <다정한 그대를 사랑하지만 슬픈 기억 속에서 너를 잊고 싶어>는 제목부터가 한 편의 짧은 시 같습니다. 다정함과 슬픔, 사랑과 잊고 싶음이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였는데, 그 두 마음이 부딪치지 않고 묘하게 어울리더라고요.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받아 든 한 권을 며칠에 걸쳐 천천히 읽었습니다.
표지는 연한 살구빛이 부드러운 주황으로 번지는 그러데이션 한 장이 전부입니다. 단정하고 깨끗한 인상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표지에 가슴 한 켠이 시린 어떤 사람의 일러스트 한 점쯤 얹혀 있었더라면 시집의 정서가 더 또렷하게 전해졌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들었어요. 본문 사이에 흑백 사진이 몇 장 들어가 있긴 한데, 요즘 시집의 결을 생각하면 일러스트가 조금 더 어우러졌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분량은 가벼워서 얇고 가벼운 잡지 한 권을 챙기는 느낌으로 가방에 쏙 들어가요. 짧은 호흡으로 쓰인 시들이라 인스타그램의 글귀에 익숙한 분들에게도 부담이 적습니다. 읽다 보면 ‘아, 이 마음 알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행들이 곳곳에 있어, 시집을 거의 처음 펼치는 분께도 권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미’라는 시는 한 번 더 천천히 되짚어 읽게 됐어요.

매미가 뜨거운 여름에 소리 내어 우는 것은 더워서 우는 것이 아니라 넌출거리는 다정한 더위가 사라지는 게 싫어서 우는 게 아니라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못해 못내 아쉬워 우는 것이다.
여름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마다 무심히 듣던 매미 소리가, 이 시를 읽고 난 뒤로는 조금 다르게 들릴 것 같습니다. 시인은 매미가 나무에 슬쩍 붙어 더없이 떨어지지 않는 까닭까지 사랑의 비유로 끌어와요. 햇살 부서지는 틈새로 사랑이 뒤엉키고 다시 합쳐져 ‘더 큰 사랑’으로 가기 위함이라는 해석은, 듣고 보니 참 따뜻한 시선이지요. 헤어짐을 끝이 아니라 더 깊은 사랑으로 가는 길목으로 본다는 것. 어느 나이쯤에 이르러 다시 곱씹어볼 만한 자세입니다.
표제 시 ‘마음으로 가는 길’은 이 시집의 심장 같은 자리예요. 마음으로 가는 멀고도 험한 길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해서, 새장 속에 갇힌 너를 이제 놓아주고 싶다는 고백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다정한 그대를 사랑하지만 슬픈 기억 속에서 너를 잊고 싶어. 잘 가요. 내 사랑!’이라는 한 문장이 나오는데, 묘한 행입니다. 잊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내 사랑’이라고 부르는 마음, 그 모순이야말로 사랑이 끝나가는 자리에서 사람이 짓는 가장 정직한 표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푸념’ 연작 앞에서는 살짝 웃었습니다. 솔직히 내가 너를 계속 지켜봤는데 한 번도 너는 먼저 만나자고 하질 않더라는 토로, 흐르지 않고 고여만 있어 결국 썩어버리는 물에 빗댄 권태로움까지. 시라기보다 누군가의 메모장에 남은 혼잣말 같은 결이지요. 사랑을 미화하지 않고, 일방적이었던 마음과 지쳐버린 마음을 그대로 인정해 버리는 솔직함이 좋았습니다. 그리움의 시집 한가운데에 이런 피로감이 함께 놓여 있다는 게, 오히려 이 책을 더 믿을 만하게 만들었어요.
후반부의 ‘그대 속은 너무 깊어’는 표제 시와 짝을 이룬다고 봐도 좋을 시예요.
기억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추억 속에서 차츰 사라지는 것 말 못할 나의 마음 아직도 내가 너를 놓지 못하고 있다는 게 슬프지. 그대 속은 너무 깊어
기억과 추억을 따로 떼어 놓는 시선이 인상적이었어요. 우리는 흔히 기억이 흐려진다고 말하지만,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기억은 추억이라는 더 큰 자리 안에서 천천히 옅어져 가는 것에 가깝습니다. 잊고 싶다고 말하던 화자가, 결국 ‘그대 속이 너무 깊어’ 끝내 놓지 못하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장면. 시집 전체가 이 모순 위에 서 있다는 걸 이 한 편이 또렷이 보여줍니다.

서평단으로 받은 책이라 어떤 마음으로 펼쳤을지를 떠올려 보면, 이 시집은 ‘열어 보는 일’이 어렵지 않았어요. 잘 정돈된 시어보다는 마음의 결을 그대로 옮긴 듯한 행들이 많아, 시를 평소 잘 안 읽는 분도 부담 없이 페이지를 넘기실 수 있을 거예요. 사랑의 끝자락을 지나오신 분이라면 ‘아 맞아, 이런 마음이었지’ 하고 가만히 끄덕이게 될 것이고, 지금 그 한가운데에서 흔들리고 계신 분이라면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하는 작은 안도감을 받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을 망설이는 사람을 위한 시집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가 빈말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초여름의 문턱입니다. 낮의 햇살은 차츰 두꺼워지고, 저녁 바람에는 아직 옅은 봄의 잔향이 남아 있는 계절. 손에 가볍게 들리는 이 한 권을 가방에 두고 다니며 짬짬이 한두 편씩 펼쳐 읽기에 잘 어울리는 시집입니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깊어지기 전, 이 시집의 ‘매미’ 한 편을 먼저 읽어 두는 것도 올여름을 다정하게 맞이하는 한 가지 방법일 거예요.
잊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마음 안에 들이고 사는, 그 모순의 정직함을 담은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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