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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신화 ㅣ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오카다 에미코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4년 7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을 받고 표지부터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짙은 남색 바탕에 아라베스크 문양이 옅게 깔려 있고, 아래쪽에는 노랑과 파랑으로 나뉜 페르세폴리스의 석주가 서 있어요. 색면이 살짝 어긋나게 인쇄된 듯한 처리 덕분에 온전한 유적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한 번 무너졌다가 겨우 다시 세워 올린 구조물에 가깝게 느껴졌어요. 왕조의 흥망을 따라가는 책의 얼굴로는 꽤 정직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페르시아 신화>는 일본의 페르시아 문학 연구자 오카다 에미코가 쓰고 김진희가 옮긴 200쪽 남짓한 책입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출발해, 이란에서 지금도 낭송된다는 서사시 샤나메의 줄기를 따라갑니다. 아후라 마즈다와 아흐리만이 벌이는 빛과 어둠의 오랜 전쟁으로 문을 열고, 케유마르스에서 잠시드왕으로 이어지는 건국의 시간을 지나, 뱀왕 자하크와 영웅 로스탐에 이르지요. 신들의 계보를 나열하는 책은 아닙니다. 사람이 왕이 되고, 왕이 사람으로 무너지는 과정을 계속 보여줍니다.
가장 먼저 발이 묶인 곳은 3장이었어요. 뱀왕 자하크는 이미 페레이둔의 꿈에 시달리며 약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마지막까지 붙든 것은 군대가 아니라 한 장의 선언문이었습니다. 자하크는 공정하고 자비로운 왕이며 진실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문장을 적어놓고,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습니다. 서명하는 이들은 그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붓을 듭니다. 폭정이 힘으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화가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그려놓았다는 점이 놀라웠어요.

그 자리를 끊어놓는 인물이 대장장이 카베입니다. 열여덟 명의 아들 중 열일곱을 잃고 마지막 하나마저 빼앗길 처지에 놓인 늙은 아버지지요. 그는 왕 앞에서 서명을 거부하고 선언문을 찢어 발로 밟습니다. 그리고 일하던 가죽 앞치마를 창끝에 매달아 들고 걸어 나갑니다. 훗날 페레이둔이 여기에 금과 비단과 보석을 달아 카베의 깃발이 되고, 이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았다고 해요. 저는 이 대목이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라고 느꼈습니다. 영웅의 무기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고, 평생 두들기던 작업복에서 나왔으니까요.
자하크의 마지막도 인상적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붕마다 벽돌과 돌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에게 유리한 해석을 붙들고 있습니다. 왕좌를 되찾겠다는 계산보다 질투에 가까운 마음으로 이름을 숨긴 채 지붕에서 뛰어내리지요. 폭군의 끝이 장엄하지 않아서 오히려 사람 같아 보였어요. 그를 죽이지 말고 가두라는 천사의 명령이 이어지는데,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과 닿아 있는 장면이면서도 어딘가 개운하지 않은 여운을 남깁니다. 페레이둔이 500년 동안 평화롭게 다스렸다는 문장 뒤에도 그 불씨는 남아 있는 셈이니까요.

5장으로 넘어가면 결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왕 삼이 오래 기도한 끝에 얻은 아이는 은빛으로 빛나는 몸에 깊은 지혜를 담은 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다만 머리가 백발이었어요. 삼의 두려움은 아이를 향하지 않고 바깥의 시선을 향합니다. 사람들이 이 아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 생각 하나로 그는 아이를 산에 버립니다. 신령한 새 시무르그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지요. 이 아이가 잘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그저 슬픈 유기담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 삼은 아들 앞에 엎드립니다. "아들아, 용서해다오! 무거운 죄를 지은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 시무르그는 잘에게 깃털 한 장을 남기고 떠나고, 축복의 북과 나팔, 황금종 소리가 이어집니다. 잘못한 아버지가 사과할 기회를 얻고, 그 사과가 받아들여지는 결말은 신화에서 흔치 않습니다. 저는 이 장면 앞에서 오래 숨을 골랐어요.
책의 마지막 축은 로스탐과 소랍의 이야기입니다. 잘의 아들 로스탐은 사냥길에 명마 라흐시를 잃고 국경 너머 사만간에 머물다 공주와 인연을 맺고, 홍옥 세 알을 남긴 채 돌아갑니다. 태어난 소랍은 한 달 만에 한 살 아이만큼 자라고, 열 살에는 또래 중 누구도 겨룰 상대가 없게 되지요.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된 소년은 곧장 이란으로 향합니다. 아버지를 왕좌에 앉히겠다는 마음 하나로요. 책은 이 소년을 두고 아직 전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고 적어둡니다. 그리고 순환하는 천륜이 소년에게 국왕의 계략보다 더한 계략을 준비해두었다고 덧붙입니다. 자하크 편에서 반복되던 그 표현이 여기서 다시 나오는데, 책 전체를 꿰는 실이 무엇인지 그제야 선명해집니다.
가장 서늘한 대목은 투란 왕의 지시입니다. 그는 부자 관계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로스탐의 깃발 문양을 소랍에게 알려주지 말라고 못을 박지요. 어머니가 일러준 표식, 용 문양의 깃발과 꼭대기의 황금 사자는 소년이 아버지를 알아볼 유일한 열쇠였습니다. 그 열쇠를 누군가 의도적으로 감춥니다. 비극이 운명의 몫으로만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세 세대를 나란히 놓아보면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이 조금 달라집니다. 삼은 아들을 버렸으나 다시 만나 용서를 구할 시간을 얻었고, 잘은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결국 아버지를 얻었으며, 로스탐과 소랍에게는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누가 더 강한 영웅인가보다, 누가 서로를 알아볼 시간을 얻었는가가 이 신화의 진짜 갈림길이었던 것 같아요.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읽으니 그 차이가 유난히 크게 다가옵니다.
아쉬운 점도 적어둡니다. 사건 전개가 빠른 대신 인물의 내면을 설명하는 문장이 인색한 편이에요. 특히 소랍의 어머니처럼 이야기의 방향을 실질적으로 쥔 인물조차 몇 문단 안에서 소비되고 사라집니다. 원전을 압축해 소개하는 책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조금 더 머물러주었다면 하는 지점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낯선 고유명사와 계보가 빠르게 지나가는 점도 처음 읽는 분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어요. 목차를 한 번 훑고 들어가시길 권합니다.

이 책은 북유럽 카페를 통해 만나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신화라는 제목만 보고는 먼 나라 이야기려니 했는데, 아이를 버린 아버지와 겁 많은 폭군과 사과하는 늙은 왕이 차례로 나오더군요. 낯선 이름들 사이에서 익숙한 마음을 여러 번 만났습니다.
한여름 볕이 가장 두꺼운 시기입니다. 이런 계절에는 멀리 다녀오는 이야기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시원한 자리에 앉아 3000년 전 이란 고원의 왕과 대장장이와 아버지들을 만나고 나면,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것들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오래된 이야기가 주는 위로는 대체로 그런 방식이지요. 답을 주지 않고, 이미 다 겪은 사람들이 여기 있었다고만 알려줍니다.
영웅의 무용담을 기대하고 펼쳤다가, 서로를 알아볼 시간을 얻지 못한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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