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 - 공유되는 순간 완성되는 브랜드 스토리텔링의 원칙
로빈 랜다.그레그 브라운 지음, 최은아 옮김 / 알레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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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검정 바탕 위로 형광 초록 원들이 조용히 번져 나가는 표지입니다. 손에 쥐어 보니 생각보다 묵직해서, 며칠 안에 다 읽겠다는 마음은 처음부터 접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 두께가 부담스럽기보다 오히려 다행스러웠습니다. 천천히 읽어도 된다고 책이 먼저 말해주는 것 같았거든요.


그레그 브라운과 로빈 랜다가 쓰고 최은아가 옮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는 광고인이 쓴 광고 책인데요. 덮고 나서 남은 건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어떤 자리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잘 만들었다는 말보다 누군가에게 가닿았다는 말이 훨씬 어려운 칭찬이라는 걸 읽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책 중반에 제레미 불모어의 오래된 비유가 나옵니다. 인사이트는 냉장고 안의 불빛과 같아서 문을 열 때에만 켜진다는 이야기인데요. 이 대목에서 한참 머물렀습니다. 우리가 답이라고 믿는 것들 대부분은 문을 열어야만 보이는데, 정작 그 문을 여는 일은 자주 생략되니까요.


아디다스와 하바스 미들 이스트가 두바이 해수욕장에 실제로 수영할 수 있는 광고판을 세운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전 세계 여성의 32퍼센트가 공공장소에서 수영하는 걸 불편해하고 중동에서는 그 비율이 89퍼센트라는 데이터가 있었는데요. 담당자는 그 숫자가 답을 주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리서치 파트너들과 함께 그 지역 여성들을 오래 들여다본 뒤에야 인사이트가 나왔다고 하더군요. 숫자는 문고리였을 뿐이고, 불이 켜진 자리에 있던 건 수영을 포기해온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존중이라는 말이 이 책에 자주 나오는데요. 뉴욕 타임스 캠페인에서 그 말이 가장 잘 보였습니다. 언론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던 시기에 나온 광고인데, 결론을 말하는 대신 "진실은…"이라고 문장을 열어둔 채 판단을 독자에게 넘깁니다. 무엇을 믿으라고 설득하지 않고, 믿을지 말지를 정할 사람이 누구인지만 분명히 해두는 방식이지요. 뒤에 붙은 성과 수치보다 그 태도가 오래 남았습니다.


말한 대로 행동하라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장에서는 자꾸 손이 멈췄습니다. 파타고니아가 신문 한 면에 실은 시는 위에서부터 읽으면 절망인데, 아래에서부터 읽으면 선언이 됩니다. 읽는 방향을 바꾸라고 요구하는 광고이면서 그 요구 자체가 메시지인 셈입니다. 중고 가구를 되사는 아이케아 캠페인에 붙은 연구도 마음에 남았는데요. 사회적 책임을 말할 때 스스로를 지나치게 칭찬하는 어조는 오히려 신뢰를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캠페인은 목소리를 낮췄다고 해요. 좋은 일을 하고도 조용히 말하는 편이 낫다는 걸 광고가 먼저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현대자동차 슈퍼볼 광고를 만든 데이비드 메스핀의 인터뷰에는 촬영 직전의 작은 결정 하나가 나옵니다. 준비해둔 VR 고글이 군인들의 표정을 가릴 것 같아 쓰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인데요. 몇 달을 준비한 장치를 현장에서 내려놓은 이유가 사람의 얼굴을 가리지 않기 위해서였다니, 이 책이 말하는 존중이 어디까지 내려와 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가장 오래 붙들려 있던 대목은 삼성 아이테스트를 만든 브렛 콜리버의 인터뷰였습니다. 아이폰 사용자들이 갤럭시폰으로 바꾸는 일을 두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할 것처럼" 느낀다는 관찰에서 시작한 아이디어인데요. 정작 그 인사이트는 당시 받은 브리프에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팀은 브리프를 푸는 작업과 별도로 그 생각을 따로 챙겨 함께 제안했고, 클라이언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해요. "무척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하나의 제품에만 국한되기에는 너무 큰 아이디어인데요."


여기까지는 흔한 성공담인데, 인터뷰의 마지막 문장이 달랐습니다.


"인사이트에서 아이디어로 도약하는 과정은 비교적 단순했지만, 이를 실제로 구현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려운 도전이었다."


이 한 줄을 접어두었습니다. 회의실에서 박수를 받은 생각이 실제로 굴러가기까지 무엇이 필요한지, 그 사이에서 몇 번이나 주저앉게 되는지를 아는 분이라면 이 문장이 위로처럼 들리실 것 같습니다. 원래 어려운 일이었다고, 부족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문장이라서요.


물론 읽으면서 고개가 갸웃해지는 대목도 있었는데요. 이 책은 성과를 숫자로 증명하는 편이라, 낭포성 섬유증 아이들의 하루를 바꾼 조끼 이야기와 협업 화장품이 44분 만에 팔린 이야기가 같은 무게로 나란히 놓입니다. 방법은 같아도 남는 것이 다를 텐데 책은 그 차이를 굳이 나누지 않습니다. 존중이 있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설명도, 그 사이가 늘 그렇게 곧게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걸 오래 일해본 분들은 아실 겁니다. 사례가 대부분 큰 브랜드라 예산과 조직이 다른 자리에서는 그대로 옮겨오기 어렵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 책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과를 흉내 내지 말고 태도만 가져오면 충분하겠다 싶었습니다.


다양성과 형평성을 다룬 장, 정해진 공식이 없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마지막 장은 이 글에 다 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쪽에 저자들의 생각이 더 또렷해서, 읽으실 분들은 그 두 장을 아껴두셔도 좋겠습니다.


포르투갈의 한 페스티벌 포스터를 AI로 만든 팀은 중요한 것이 어떤 도구를 쓰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가이며, "그것이 곧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라고 말합니다. 도구는 계속 바뀔 것이고 이 책에 실린 기술도 몇 해 지나면 평범해지겠지요. 그래도 자기 언어를 가진 사람은 도구가 바뀌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로 읽혔습니다.


오래 일해온 사람에게 이 책이 건네는 말은 아마 이쯤일 겁니다. 브리프에 맞지 않아 접어둔 생각이 있다면 그건 틀린 게 아니었다고, 좋은 안이 실행 앞에서 무너진 경험이 여러 번이라면 그건 원래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고요. 화려한 사례들 사이사이에 그런 문장이 조용히 놓여 있습니다.


8월의 한낮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 좋은 계절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책이 오히려 어울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두를 수 없어 하루에 한 챕터씩만 넘기게 되는데, 그 속도가 책의 두께와 잘 맞더라고요.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절반쯤 읽어두면, 가을에 남은 절반이 조금 다르게 읽힐 것 같습니다.


설득하는 법을 배우려고 펼쳤다가, 접어두었던 생각들을 오래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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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혁명 : 랄프 왈도 에머슨 - 인간은 내면의 목소리를 믿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ㅣ 내면혁명 1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 이너스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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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한동안 들여다봤습니다. 옅은 청백색 바탕에 에머슨의 옆얼굴이 동판화처럼 새겨져 있는데, 시선이 정면을 향하지 않고 살짝 아래로 내려가 있어요. 제목에는 혁명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데 그림은 내내 조용합니다. 그 어긋남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따라다녔습니다. 안에 담긴 문장은 꽤 세게 나오는 편인데, 그 문장들이 가리키는 자리는 결국 소란이 걷힌 조용한 곳이더군요.


<내면혁명>은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았습니다. 이너북에서 시작한 시리즈의 첫 권이고, 19세기 미국 초월주의자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 신뢰 사상을 다섯 장으로 다시 엮은 편역서입니다. 한 손에 들어오는 판형에 220쪽이라 어디든 들고 다니며 읽기 좋았어요. 두께는 가볍지만 안쪽 문장의 힘은 그렇지 않습니다.


1장에서 저자는 둥근 돌 이야기를 꺼냅니다. 둥근 돌은 본래부터 둥글지 않았고, 물살에 깎이고 다른 돌에 부딪히면서 수십 년 끝에 그 모양이 되었다는 것. 사람도 같아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욕망이 결국 자기 모서리를 스스로 갈아내는 일이라고 씁니다. 여기서 모서리를 취향과 신념, 거절할 용기, 불편한 진실을 입 밖에 내는 양심으로 풀어 놓는데, 그 대목이 오래 남았습니다. 자신이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게 되어 메뉴를 고를 때마저 아무거나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는 장면도 그렇고요. 저자는 그것을 배려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자기 감각이 마비된 상태라고 씁니다. 챕터의 결론은 이렇게 놓여 있어요. "인격은 매끈함이 아니라 정직한 모서리에 있다."


읽다가 한 번 멈칫한 지점도 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은 친절을 전부 거래로 규정하는 대목이에요. 저자도 곧이어 균형을 잡긴 합니다. 갑자기 차갑게 굴라는 뜻이 아니고 진심일 때만 응하고 아닐 때는 차라리 침묵하라는 정도로 정리하죠. 그래도 여러 사람이 얽혀 겨우 굴러가는 자리에서는, 마음이 덜 실린 배려가 관계를 지탱해 주는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그 정도의 둥긂까지 위선으로 몰아붙이는 건 조금 가혹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책의 가운데쯤, 고독을 다룬 장에서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에머슨이 콩코드 숲으로 물러났을 때 사람들이 어리석다며 만류했다는 일화로 문을 여는데, 저자는 고독을 결핍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자기 세계를 지으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입구로 봅니다. 그 입구를 두려워하는 한 평생 남의 세계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신세에 머무른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집 이야기로 옮겨 놓으니 뜻이 단번에 들어왔습니다. 좋았던 건 그다음입니다. 저자도 모두가 숲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는 걸 압니다. 현실의 사람들에게는 대출이 있고 가족이 있고 마감이 있고 회의가 있다고 적어 두었어요. 그러면서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자기에게 온전히 돌아오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면 이미 작은 콩코드를 자기 안에 짓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출이라는 단어가 에머슨 옆에 놓여 있는 게 반가웠습니다. 장의 끝에는 알림을 모두 끄고 한 시간만 자기에게 돌아와 보라는 권유가 붙어 있고, 처음에는 어색할 것이고 휴대폰에 손이 갈 것이며 그 손을 거두는 데도 의지가 필요하리라는 말까지 미리 적어 두었더군요. 그 미리 일러 주는 태도가 꽤 다정하게 읽혔습니다.


뒤쪽으로 갈수록 이야기는 감정 쪽으로 옵니다. 칭찬 한마디에 올라갔다가 눈빛 하나에 무너지는 하루의 출렁임을 두고, 자존감이 타인의 손에 들린 리모컨이 된 상태라고 표현하더군요. 평정을 감정이 사라진 자리로 두지 않고, 파도가 쳐도 그 아래 대지가 흔들리지 않는 상태로 정의한 부분도 좋았습니다. "감정은 손님이고, 자신은 그 손님을 맞이하는 집의 주인이다."라는 문장이 그림으로 남았고요. 그런데 이 장에서 제 마음을 붙든 건 조금 더 낮은 자리에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저자는 사람이 기계가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아무리 단단한 사람도 어떤 날은 흔들리고 어떤 밤은 잠을 설친다고요. 평정을 훈련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건 흔들림의 유무가 아니라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씁니다. 어제는 사흘을 휘청였던 일에 오늘은 반나절 만에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에서 한숨이 놓였습니다.


책의 끝자락에는 새벽 세 시에 천장을 보며 누군가 건져 주기를 기다려 본 사람이라면 알 만한 장면이 놓여 있습니다. 거기서 구원이라는 큰 단어를 일상의 높이로 끌어내리는데, 그것이 거창한 빛이 아니라 이불을 걷어내는 한 번의 작은 동작에서 시작된다고 적혀 있어요. 앞뒤 문장의 무게에 비하면 소박한 그림인데 그래서 오히려 손에 잡혔습니다. 같은 자리에 칸트의 계몽 이야기도 나옵니다. 미성년이 나이와 무관한 상태라는 것, 자기 지성을 쓸 용기가 없어 남의 지도에 기대면 마흔이 되어도 쉰이 되어도 여전히 미성년이라는 것. 진짜 성년은 자기 인생의 마지막 결재권자가 자신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쓰는데, 결재라는 단어를 여기에 가져다 놓은 감각이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끊고 혼자 서라는 말은 아닙니다. 친구도 가족도 때로는 전문가의 도움도 필요하다고 분명히 적어 두고, 다만 그 도움이 도착하는 마지막 지점을 흐리지 말자고 합니다. "외부의 도움은 다리이고, 다리를 건너는 발은 언제나 자신의 것이다."


아쉬운 점을 하나 더 적자면 전개가 눈에 익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세게 던지고, 비유를 하나 세우고, 예상되는 반박을 미리 막고, 작은 실천을 권하고, 물음으로 닫는 순서가 여러 꼭지에서 거의 그대로 반복됩니다. 짧게 끊어 읽으면 안정감이 되지만 몰아서 읽으면 다음 문단이 짐작돼요. 하루에 한 꼭지씩 끊어 읽는 방식이 이 도서에는 더 어울립니다. 에머슨의 원문 "너 자신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너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없다"가 여러 번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로 눈에 걸렸고요.


그럼에도 한 권의 값은 충분히 합니다. 안쪽 어딘가에 진짜 책은 결국 독자를 책장 너머의 자기 삶으로 밀어낸다는 문장이 있는데, 이 안내서 자체를 설명하는 말로도 읽혔습니다. 정답을 받아 적고 싶은 마음으로 펼치면 아쉬울 수 있어요. 오래 미뤄 둔 질문을 꺼내 놓을 자리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조용히 쓸모가 있을 겁니다. 특히 조직 안에서 둥글게 사는 법을 먼저 익힌 세대에게는 몇 문장이 유독 가깝게 붙을 것 같고요.


8월로 넘어오면서 더위가 한창입니다. 창밖은 매미 소리로 소란한데 이 책은 내내 조용한 자리를 가리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만나다 보면 덮자마자 할 말이 정리되는 도서가 있고, 며칠 지난 뒤에야 문장이 되돌아오는 도서가 있습니다. 이번 한 권은 뒤쪽에 속했어요. 무더위가 한풀 꺾일 즈음 다시 한 꼭지씩 펼쳐 볼 생각입니다.


흔들리지 않게 되는 책이 아니라, 흔들린 뒤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을 줄여 가는 법을 알려 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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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증을 이기는 몸 - 암과 치매를 예방하는 자연치유력의 힘
이토 도시노리 지음, 김동연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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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염증. 이 두 글자에서는 대개 붉고 뜨거운 무언가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염증을 이기는 몸>의 표지는 그 예상을 조금 비껴가요. 흰 바탕 한가운데 노란 점들이 둥근 빛처럼 번져 있고, 그 안에 분홍빛 사람 형상이 조용히 서 있습니다. 경고판보다는 등을 데워 주는 온기 쪽에 가까운 배색이지요. 다 읽고 표지를 다시 들여다보니 이 색 선택이 내용과 정확히 맞물려 있었다는 걸 알겠더군요.


지은이 이토 도시노리는 췌장 이식의 권위자입니다. 일본 국내 1호 췌장·신장 동시 이식을 집도했고, 지금까지 70여 차례 같은 수술을 해왔습니다. 서양 의학의 최전방에 오래 서 있던 사람이지요. 그런 이력을 지닌 의사가 여섯 개 장 가운데 첫 장의 제목을 '몸을 고치려면 마음을 고쳐라'로 붙였습니다. 순서를 이렇게 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도서의 태도가 짐작됩니다.


앞부분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의사는 약으로 통증을 완화하거나 병든 장기를 절제하여 '병을 고칠' 수는 있어도 '몸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수술로 생긴 상처를 몸이 스스로 아물게 하는 힘이 없다면 수술이라는 행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평생 메스를 잡아온 사람이 자기 일의 한계를 이렇게 담담하게 적어 두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여기에는 스승 격인 아쓰미 가즈히코 교수의 이야기가 겹칩니다. 인공심장과 레이저 치료 같은 최첨단 연구를 이끌던 도쿄대 명예교수가 60년의 현장 끝에 전하고자 했던 핵심이 '의사에게 의존하지 않는 삶'이었다고 해요. 저자는 이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적으면서, 곧바로 서양 의학을 무시하는 뜻이 아니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고 덧붙입니다. 이 조심스러운 한 걸음이 있어서 뒤에 이어지는 통합의료 이야기가 미덥게 읽혔습니다.


미더웠던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저자는 통합의료 역시 근본적인 치료라고 할 수는 없다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침술이나 요가, 아로마테라피 같은 보완대체요법을 소개하면서도 만병통치의 언어를 쓰지 않아요. 20세기 의료가 완치를 겨눴다면 21세기는 관리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 갔다는 진단도 과장이 없고요. 고령자의 만성 질환처럼 되돌릴 수 없는 변화 앞에서는 원래대로 복구하는 일보다 그 병과 어떻게 동행할 것인지가 중요해진다는 말이 이 책 전체의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2장으로 넘어가면 문체가 확 가벼워집니다. 인류가 왜 두 발로 서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요. 빙하기를 향해 한랭화가 진행되면서 열대우림이 줄었고, 잘 익은 과일을 얻기 어려워지자 서서 걷는 편이 유리해졌다는 설명입니다. 그렇게 자유로워진 손이 도구를 만들고 문명을 낳았지만, 대가도 함께 따라왔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를 진화적 트레이드오프라고 부르며, 오늘날 고령자들이 겪는 만성 질환의 뿌리를 여기서 찾습니다.


이 대목의 소제목이 '침팬지는 어깨결림을 모른다'입니다. 고개를 숙인 자세가 길어지면 목뼈의 완만한 곡선이 사라지고, 체중 60킬로그램 기준으로 목이 감당할 부담이 평소의 두 배까지 늘어난다는 계산이 도표와 함께 실려 있어요. 허리를 30도만 숙여도 등 근육에 80킬로그램에 가까운 하중이 걸린다는 숫자도 나옵니다. 딱딱해질 수 있는 해부학 설명 끝에 저자는 이렇게 씁니다.


"침팬지에게 직접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어깨결림'을 모른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런 여유가 있어서 두꺼운 건강서를 끝까지 밀고 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장을 읽으면서 걸린 부분도 있어요. 목과 허리에 실리는 하중은 모멘트 방정식까지 동원해 소수점 단위로 제시하는데, 정작 장 제목에 걸린 '보폭'은 한참 뒤에야 모습을 드러냅니다. 600만 년의 진화사에서 출발해 스마트폰 자세까지 오는 흐름이 흥미롭긴 해도, 그 정교한 계산들이 걸음을 넓힌다는 실천으로 곧장 이어지는지는 읽는 동안 몇 번 의심이 들었습니다. 근거를 충분히 쌓고 나서 결론으로 가려는 성실함이겠지만, 실용서를 기대하고 펼친 독자라면 초반의 밀도에 조금 지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책의 뒤쪽, 치매를 다루는 장에서 걸음이 다시 느려졌습니다. 일본 후생노동성 자료를 근거로 돌봄이 필요해지는 원인 1위가 치매라는 사실을 짚는데, 몸이 부러지거나 쓰러지는 일보다 기억이 무너지는 일이 앞선다는 순서가 조용히 무겁게 다가옵니다. 최근 의학계가 치매를 생활습관병의 하나로 보기 시작했다는 관점, 당뇨와 고혈압과 이상지질혈증이 뇌혈관에 남기는 손상이 인지 기능 저하로 이어진다는 연구들도 정리되어 있고요. 의학 학술지 <란셋> 위원회가 꼽은 열네 가지 위험 요인을 모두 제거하면 이론상 치매의 45%는 예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뒤집으면 절반 이상은 손쓰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한데, 저자는 그 45%를 붙잡자는 쪽으로 손을 내밉니다.


가장 오래 붙들려 있었던 서술은 시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상 단백질이 뇌에 쌓이는 과정은 20년 넘게 이어지고, 증상은 20~25년이 지나서야 겉으로 드러난다고 해요. 80세에 치매 증상이 나타났다면 55세나 60세 무렵부터 뇌 안에서 무언가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는 뜻이라는 문장 앞에서 마음이 서늘해졌습니다. 그때 적절한 대책을 세웠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덧붙임은 뒤늦은 후회처럼 들리지 않고, 아직 시간이 남은 사람들을 향한 말로 읽혔어요. 마흔 후반이라는 자리에서 읽으면 남의 이야기로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이 책은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아 읽었습니다. 서평단으로 만나는 책들 가운데는 읽는 동안만 머무는 것도 있고, 다 읽고 나서 생활의 각도를 조금 틀어 놓는 것도 있는데요. 이 한 권은 후자에 가까웠습니다. 대단한 결심을 요구하지 않고, 고개를 덜 숙이고 걸음을 조금 넓히는 정도의 일을 오래 이어 가라고 말할 뿐이거든요. 병원 검사에서는 별말 없이 돌아왔는데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시기를 지나는 분이라면 이 목소리가 반가울 겁니다. 부모님의 노년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기 차례를 어렴풋이 계산해 보게 된 사람에게도 그럴 테고요. 통계가 전부 일본 자료라는 점은 아쉬웠지만, 고령화 속도를 생각하면 우리 이야기로 옮겨 읽는 데 큰 무리는 없었습니다.


한여름입니다. 열대야가 이어지고 낮에는 그늘을 찾아 걷게 되는 계절이라, 몸을 돌보자는 말이 가장 흐지부지되기 쉬운 때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해가 기운 저녁이면 걷기 좋은 바람이 붑니다. 오늘 걸음을 조금 넓혀 보는 일이 이십 년 뒤의 어떤 하루를 바꿔 놓을 수도 있다는 것, 이 책이 남긴 건 그 정도의 조용한 확신이었습니다.


병을 고치는 의학의 한계를 인정한 외과의가, 남은 시간 동안 몸을 살리는 법을 담담하게 일러 주는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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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히어로 vs 오피스 빌런 - 일보다 사람이 어려운 직장인을 위한 인간관계 리더십
길군(길상훈) 지음 / 밥북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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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가 먼저 말을 겁니다. 검은 배경 위로 빌딩 골조가 솟아 있고, 그 사이에서 파랑과 분홍이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히어로와 빌런이라는 단어는 만화처럼 가볍게 걸려 있는데, 아래에 붙은 문구는 일보다 사람이 어려운 직장인을 위한 인간관계 리더십이에요. 색은 요란하고 부제는 담백해서, 웃기려고 만든 책만은 아니겠다는 짐작이 들었습니다.


<오피스 히어로 vs 오피스 빌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한 줄이 에필로그 첫머리에 실려 있습니다. 브런치 작가 모도 님이 남긴 "이 책은 매우 위험한 책이오. 너무 재밌어서 위험하오."라는 문장인데, 읽어보면 그 말이 농담만은 아닙니다. 저자 길군은 서문에서 본문을 읽기 전에 에필로그를 펼치지 말라고 당부해 놓고, 정작 그 자리에 와서는 독자를 믿겠다며 슬쩍 넘어갑니다. 이런 능청이 책 전체에 깔려 있어요.


구성은 세 갈래입니다. 실무자 시선으로 조직의 인간 군상을 훑는 오피스 빌런, 관리자 자리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법을 묻는 오피스 히어로, 그리고 그 힘의 정체를 밝히는 히어로 스톤입니다.


인상적인 건 첫 문장부터 저자가 자기 이름표를 먼저 단다는 점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빌런 레벨 0, 일 안 하는 담당자였다고 적어요. 공기업을 고른 이유가 어린 시절의 꿈일 리 없었고 그냥 영업이 싫었을 뿐이라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그러다 지자체 위탁으로 문화센터를 맡게 되고, 위에서는 회원이 없다는 말만 내려옵니다. 이유를 설명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요. 밀어붙임을 견디다 나온 혼잣말이 '회원 수, 늘려주지 뭐'였다는 대목에서, 이 책이 다루려는 게 성과 기술이 아니라는 걸 알겠더군요. 여덟 달 만에 회원이 두 배 넘게 늘었다는 숫자가 나오긴 하지만, 저자는 곧바로 자기가 하려는 말은 영업 전략이 아니라고 못을 박습니다. 사람은 돈 때문에 일하지만 존중받기 때문에 일하기도 한다는 문장, 이 한 줄을 위해 앞의 이야기를 다 깔아둔 셈입니다.


2부에서 만나는 팀장 이야기는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수영장 수질 관리 시스템이 자꾸 멈춰 업체를 갈아치워도 소용없던 일에 그가 내놓은 답은, 습기에 굳은 소금을 깨서 넣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사람이지, 기계가 아닙니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저녁에 하던 수영장 청소를 새벽으로 옮기고, 화단을 직접 파보니 폐건축자재가 나오고, 짝수 층 엘리베이터가 자꾸 멈추자 홀수 층 짝수 층 구분을 아예 없애버리라고 합니다. 화장실에서 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이유를 두고는, 청소한 사람이 티를 내고 싶을 때 그렇게 한다고 짚어요. 담당자가 미화 직원만 탓하니 그렇게라도 표시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다만 읽으면서 걸린 부분도 있었습니다. 팀장이 등장할 때마다 짧은 한마디로 상황이 정리되고 감탄이 따라붙는 흐름이 반복되다 보니, 인물이 조금 이상적으로 그려진 인상을 받았어요. 현실에서는 옳은 판단을 가진 사람도 조직 안에서 번번이 밀리는 경우가 훨씬 많고, 그 마찰이야말로 오래 일한 사람들이 가장 지치는 지점일 텐데 그 자리가 매끄럽게 지워져 있습니다. 물론 저자가 존경을 담아 쓴 인물이라는 게 문장에 배어 있어서, 그 마음까지 탓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책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안내데스크 챕터에 있습니다. 남의 운동화를 신고 가려다 걸려도, 쓰레기를 몰래 버리다 들켜도, 주차 시비를 CCTV로 확인해줘도 화는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쏟아집니다. 그러다 저자가 질문 자체를 고쳐 씁니다. 직원들이 불친절한 것이 아니라 불친절해 보이는 것이라고요. 본질은 책임 전가라는 결론이 여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최종 빌런으로 지목되는 건 진상 고객이 아니라, 고객 앞에서 "그냥 한번 해드리세요."라는 한마디로 실무자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관리자입니다.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고 목소리에서 감정이 사라진 직원들 이야기는 담담해서 오히려 아팠습니다.


이 챕터가 힘을 얻는 건 마지막 한 문장 때문이에요. 그 멍청한 인간이 누구였는지 너무 늦게 깨달았다면서, 저자가 그 자리에 자신을 앉힙니다. 한참을 성토해놓고 스스로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구성이라 앞의 모든 문장이 다르게 읽힙니다. 그다음에 오는 해법도 거창하지 않아요. 무리한 요구를 절대 안 된다고 자르는 대신 검토해보겠다는 여유를 주고, 등록 안내는 강사들 손을 빌리고, 마지막에 "결과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말해주는 것. 이 책이 내내 반복하는 권위는 책임지는 순서라는 명제가 여기서 실물이 됩니다. 저자가 다른 대목에서 그 명제를 스스로 비틀어 보는 장면도 있는데, 정말 그렇다면 승진이라도 먼저 했을 거라고 적어둔 부분이요. 자기 논리에 취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보여서 오히려 신뢰가 갔습니다.


책의 끝자락은 사무실을 떠나 집으로 향합니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범인으로 지목되는 목소리가 "그냥 한번 해 줘라."인데, 사무실에서 실무자의 권위를 무너뜨리던 그 말과 문형이 똑같아요. 자리를 옮겨도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의 구조는 같다는 뜻이겠지요. 다만 이 대목에서 저자가 세우는 부부 구도는 위트로 읽는 사람과 불편하게 읽는 사람이 갈릴 것 같습니다. 판단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편이 좋겠어요.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은 도서입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만나다 보면 읽고 나서 할 말이 금방 정리되는 책이 있고, 자꾸 제 쪽을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 있는데 이번 한 권은 확실히 후자였습니다. 실무자로 억울했던 기억과 관리자로 무심했던 순간이 같은 페이지 안에 들어 있어서, 어느 쪽에 서 있든 마음이 편치만은 않습니다. 조직에서 사람 때문에 지쳐본 사람, 아래를 움직여야 하는 자리에 처음 올라선 사람이라면 자기 이야기로 읽힐 대목이 분명 있을 겁니다. 각 챕터 끝에 붙은 체크 포인트 질문들도 그 몫을 합니다.


칠월이 저물어 갑니다. 장마가 지나가고 더위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요즘, 사무실에서 사람 때문에 마음이 식어가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 같아요. 이 책은 그 마음을 다독여주기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차분히 설명해줍니다. 그런데 설명을 다 듣고 나면 이상하게 조금 가벼워집니다. 미워했던 얼굴 하나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여름이 다 가기 전에 한 권 붙들고 계실 분들께 권해봅니다.


사무실에서 사람에게 지쳐본 사람이, 그 사람을 다시 이해해보려 애쓴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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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신화 ㅣ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오카다 에미코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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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을 받고 표지부터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짙은 남색 바탕에 아라베스크 문양이 옅게 깔려 있고, 아래쪽에는 노랑과 파랑으로 나뉜 페르세폴리스의 석주가 서 있어요. 색면이 살짝 어긋나게 인쇄된 듯한 처리 덕분에 온전한 유적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한 번 무너졌다가 겨우 다시 세워 올린 구조물에 가깝게 느껴졌어요. 왕조의 흥망을 따라가는 책의 얼굴로는 꽤 정직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페르시아 신화>는 일본의 페르시아 문학 연구자 오카다 에미코가 쓰고 김진희가 옮긴 200쪽 남짓한 책입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출발해, 이란에서 지금도 낭송된다는 서사시 샤나메의 줄기를 따라갑니다. 아후라 마즈다와 아흐리만이 벌이는 빛과 어둠의 오랜 전쟁으로 문을 열고, 케유마르스에서 잠시드왕으로 이어지는 건국의 시간을 지나, 뱀왕 자하크와 영웅 로스탐에 이르지요. 신들의 계보를 나열하는 책은 아닙니다. 사람이 왕이 되고, 왕이 사람으로 무너지는 과정을 계속 보여줍니다.


가장 먼저 발이 묶인 곳은 3장이었어요. 뱀왕 자하크는 이미 페레이둔의 꿈에 시달리며 약해진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마지막까지 붙든 것은 군대가 아니라 한 장의 선언문이었습니다. 자하크는 공정하고 자비로운 왕이며 진실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문장을 적어놓고,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습니다. 서명하는 이들은 그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붓을 듭니다. 폭정이 힘으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화가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그려놓았다는 점이 놀라웠어요.


그 자리를 끊어놓는 인물이 대장장이 카베입니다. 열여덟 명의 아들 중 열일곱을 잃고 마지막 하나마저 빼앗길 처지에 놓인 늙은 아버지지요. 그는 왕 앞에서 서명을 거부하고 선언문을 찢어 발로 밟습니다. 그리고 일하던 가죽 앞치마를 창끝에 매달아 들고 걸어 나갑니다. 훗날 페레이둔이 여기에 금과 비단과 보석을 달아 카베의 깃발이 되고, 이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았다고 해요. 저는 이 대목이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라고 느꼈습니다. 영웅의 무기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고, 평생 두들기던 작업복에서 나왔으니까요.


자하크의 마지막도 인상적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붕마다 벽돌과 돌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에게 유리한 해석을 붙들고 있습니다. 왕좌를 되찾겠다는 계산보다 질투에 가까운 마음으로 이름을 숨긴 채 지붕에서 뛰어내리지요. 폭군의 끝이 장엄하지 않아서 오히려 사람 같아 보였어요. 그를 죽이지 말고 가두라는 천사의 명령이 이어지는데,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과 닿아 있는 장면이면서도 어딘가 개운하지 않은 여운을 남깁니다. 페레이둔이 500년 동안 평화롭게 다스렸다는 문장 뒤에도 그 불씨는 남아 있는 셈이니까요.


5장으로 넘어가면 결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왕 삼이 오래 기도한 끝에 얻은 아이는 은빛으로 빛나는 몸에 깊은 지혜를 담은 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다만 머리가 백발이었어요. 삼의 두려움은 아이를 향하지 않고 바깥의 시선을 향합니다. 사람들이 이 아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 생각 하나로 그는 아이를 산에 버립니다. 신령한 새 시무르그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지요. 이 아이가 잘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그저 슬픈 유기담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 삼은 아들 앞에 엎드립니다. "아들아, 용서해다오! 무거운 죄를 지은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 시무르그는 잘에게 깃털 한 장을 남기고 떠나고, 축복의 북과 나팔, 황금종 소리가 이어집니다. 잘못한 아버지가 사과할 기회를 얻고, 그 사과가 받아들여지는 결말은 신화에서 흔치 않습니다. 저는 이 장면 앞에서 오래 숨을 골랐어요.


책의 마지막 축은 로스탐과 소랍의 이야기입니다. 잘의 아들 로스탐은 사냥길에 명마 라흐시를 잃고 국경 너머 사만간에 머물다 공주와 인연을 맺고, 홍옥 세 알을 남긴 채 돌아갑니다. 태어난 소랍은 한 달 만에 한 살 아이만큼 자라고, 열 살에는 또래 중 누구도 겨룰 상대가 없게 되지요.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된 소년은 곧장 이란으로 향합니다. 아버지를 왕좌에 앉히겠다는 마음 하나로요. 책은 이 소년을 두고 아직 전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고 적어둡니다. 그리고 순환하는 천륜이 소년에게 국왕의 계략보다 더한 계략을 준비해두었다고 덧붙입니다. 자하크 편에서 반복되던 그 표현이 여기서 다시 나오는데, 책 전체를 꿰는 실이 무엇인지 그제야 선명해집니다.


가장 서늘한 대목은 투란 왕의 지시입니다. 그는 부자 관계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로스탐의 깃발 문양을 소랍에게 알려주지 말라고 못을 박지요. 어머니가 일러준 표식, 용 문양의 깃발과 꼭대기의 황금 사자는 소년이 아버지를 알아볼 유일한 열쇠였습니다. 그 열쇠를 누군가 의도적으로 감춥니다. 비극이 운명의 몫으로만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세 세대를 나란히 놓아보면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이 조금 달라집니다. 삼은 아들을 버렸으나 다시 만나 용서를 구할 시간을 얻었고, 잘은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결국 아버지를 얻었으며, 로스탐과 소랍에게는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누가 더 강한 영웅인가보다, 누가 서로를 알아볼 시간을 얻었는가가 이 신화의 진짜 갈림길이었던 것 같아요.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읽으니 그 차이가 유난히 크게 다가옵니다.


아쉬운 점도 적어둡니다. 사건 전개가 빠른 대신 인물의 내면을 설명하는 문장이 인색한 편이에요. 특히 소랍의 어머니처럼 이야기의 방향을 실질적으로 쥔 인물조차 몇 문단 안에서 소비되고 사라집니다. 원전을 압축해 소개하는 책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조금 더 머물러주었다면 하는 지점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낯선 고유명사와 계보가 빠르게 지나가는 점도 처음 읽는 분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어요. 목차를 한 번 훑고 들어가시길 권합니다.


이 책은 북유럽 카페를 통해 만나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신화라는 제목만 보고는 먼 나라 이야기려니 했는데, 아이를 버린 아버지와 겁 많은 폭군과 사과하는 늙은 왕이 차례로 나오더군요. 낯선 이름들 사이에서 익숙한 마음을 여러 번 만났습니다.


한여름 볕이 가장 두꺼운 시기입니다. 이런 계절에는 멀리 다녀오는 이야기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시원한 자리에 앉아 3000년 전 이란 고원의 왕과 대장장이와 아버지들을 만나고 나면,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것들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오래된 이야기가 주는 위로는 대체로 그런 방식이지요. 답을 주지 않고, 이미 다 겪은 사람들이 여기 있었다고만 알려줍니다.


영웅의 무용담을 기대하고 펼쳤다가, 서로를 알아볼 시간을 얻지 못한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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