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그를 선택했는가 - 삼성 출신 면접관들이 공개한 ‘뽑히는 사람’의 결정적 차이
이재혁 외 지음 / 더난출판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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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파란색 한 장으로 승부를 겁니다. 그 파랑이 어느 기업의 상징색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드물 테니, 제목을 읽기 전에 이미 어디 이야기인지 짐작하게 되는 표지예요. 네 귀퉁이에 작게 박힌 빛 반짝임이 없었다면 꽤 서늘했을 텐데, 그 작은 표시들 덕분에 누군가를 가만히 알아보려는 시선 같은 인상이 남습니다. 띠지에 적힌 "삼성에 합격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문장은 단호하고요. 이런 종류의 단호함은 대개 부담스럽지만, 30년 넘게 사람을 뽑아온 이들이 하는 말이라 일단 들어보게 됩니다.


<우리는 왜 그를 선택했는가>는 삼성에서 인사와 채용을 맡았던 네 분이 함께 쓴 책입니다. 자기소개서 쓰는 법에서 시작해 전문성 면접, PT, 토론, 비대면 면접을 지나 최종 임원 면접까지 이어지고, 부록에 실전 100문 100답이 붙어 있어요. 판형도 두께도 편안해서 며칠이면 넘어갑니다.


책장을 천천히 넘기게 된 곳은 3장 뒤쪽이었습니다. '탈락을 부르는 결정적 장면'이라는 제목 아래 실제 사례 열 건이 이어지는데, 그중 스펙이 모자라 떨어진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날 지원자 가운데 가장 뛰어났던 사람, 수학과를 나와 금융공학 석사를 마친 사람, 퀀트 분석 실력이 발군이었던 사람이 각각 다른 지점에서 미끄러집니다. 지원 동기가 평이했고, 아는 것을 구조화해 상대를 설득하지 못했고, 분석 설명에 머물러 투자 판단까지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준비를 많이 한 사람이 그 준비를 전부 말하려다 핵심을 흐렸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저자들은 열 건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자기중심적 사고의 함정을 꼽고, 이렇게 정리합니다. "결국 면접의 본질은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 조직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설득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대목이 아프면서도 어딘가 힘이 되는 이유는, 떨어진 사람들이 부족한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들 충분히 애쓴 사람들이었고, 전달의 방향이 조금 어긋났을 뿐이라는 이야기예요. 밤새 스펙을 쌓아온 청년들에게 이 진단은 위로가 될 수도, 더 막막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4장에는 반대편 장면도 실려 있습니다. 성적이 거의 최하위였던 지원자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담담하게 인정한 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고 어떻게 자신을 바꾸려 했는지를 설명해 합격한 이야기가 나와요. 면접관들이 공통으로 받은 인상은 약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선 사람이라는 점이었다고 합니다. 경험이 없다고 답해야 하는 순간에 대한 조언도 인상적입니다. "그런 경험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상황이 온다면 이렇게 대응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가능성이 남아 있고, 없습니다로 끝내면 자신의 가능성까지 스스로 닫아버린다는 것.


같은 장 끝자락에서 저자는 가장 중요한 준비를 놓치는 지원자가 많다고 말합니다. 회사 정보를 외우고 예상 질문을 돌리는 일 이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꿈이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이 일이 어떤 의미인지에 스스로 답을 가진 사람은 외운 답이 아니기 때문에 꼬리 질문에도 흔들리지 않는다고요. 면접관도 그런 사람은 알아본다면서 "이 사람은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왔는지 알고 있구나."라는 문장을 놓아둡니다. 취업 안내서를 펼쳤다가 삶의 방향을 묻는 질문지를 받아 든 기분이었어요.


물론 고개가 갸웃해지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초봉이나 근무지, 야근 여부부터 묻는 지원자를 두고 면접관 입장에서는 조금만 힘들어도 쉽게 이탈하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는 서술이 그렇습니다. 채용하는 쪽의 경험칙으로는 이해가 갑니다. 다만 근로조건을 확인하는 일이 예의 없는 행동으로 읽히지 않는 시대가 이미 왔고, 그런 질문을 삼가라는 조언이 앞으로도 유효할지는 물음표가 남더군요. 이 책이 조직 쪽에 서서 쓰인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하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6장이 더 반가웠습니다. '합격 이후가 진짜 시작이다'라는 제목 그대로, 입사한 다음의 이야기가 붙어 있어요. 저자 한 분이 12월 퇴근 무렵 승진 소식을 전화로 듣던 장면에서 시작해, 30년 넘게 지켜본 결론으로 넘어갑니다. 성장의 차이는 실력의 차이라기보다 태도와 신뢰의 차이였다는 문장입니다. 함께 일했던 후배 일곱 사람이 가명으로 등장하는데, 지시를 받으면 회의부터 길게 하지 않고 이미 첫 줄을 쓰고 있었다는 사람, 이 정도면 됐다는 말이 나올 때 분위기를 되돌려 세운 사람, 자기 역할이 아닌 빈틈을 먼저 메운 사람이 차례로 나옵니다.


여기서 저자가 스스로 브레이크를 밟는 대목이 좋았습니다. 신입사원 대부분은 꿈을 갖고 시작하지만 임원이 되는 사람은 1퍼센트에 불과하다면서, 꿈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못 박아요. 성공담을 늘어놓고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신언서판 이야기도 고전적인 훈계로 흐르지 않고 현장의 언어로 풀려 있고요. 잘 작성된 문서 한 장이 길게 설명한 말보다 강하다는 대목에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게 됐습니다.


네 분이 나눠 쓴 책이라 장마다 목소리의 결이 조금씩 다릅니다. 3장은 보고서에 가깝게 건조하고, 4장 후반은 조언에 가깝고, 6장은 회고에 가까워요. 통일감이 아쉬운 순간도 있지만, 면접장에 실제로 여러 사람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편차가 오히려 현장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나서 누구에게 건네야 할지 바로 떠오르는 책이 가끔 있는데, 이 한 권이 그랬어요. 하반기 공채를 앞두고 자기소개서 파일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청년이라면 3장과 4장만으로도 충분히 값을 합니다. 그리고 조직 안에서 몇 해를 보낸 사람에게는 6장이 다르게 읽힐 겁니다.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서요.


늦더위가 아직 남아 있지만 아침 공기에는 서늘한 기운이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9월이 오면 채용 공고가 다시 쏟아지고, 어느 집 식탁에는 말수가 줄어든 사람이 앉아 있을 테고요. 그런 계절에 이 파란 표지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뽑히는 요령보다는, 당신이 지나온 시간을 당신의 언어로 설명해보라는 권유에 가깝습니다. 그 정도의 조언이면 충분히 든든한 것 같아요.


합격의 기술을 알려주는 책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를 묻는 안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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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의 교양 -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지위의 법칙 ㅣ 세계척학전집 7
이클립스 지음 / 모티브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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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한동안 들여다보게 만드는 책입니다. 짙은 자줏빛 바탕 정중앙에 개기일식이 걸려 있고, 둘레를 육각형 창처럼 나눈 칸마다 공작과 사자, 유니콘, 두루미가 들어앉아 있어요. 그리고 딱 한 칸에만 사람이 서 있습니다. 꼬리를 활짝 편 새와 문장(紋章) 속 맹수들 사이에 팔짱을 낀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사람 하나. 저자 이름이 이클립스이고 그림도 일식이니, 빛이 가려진 다음에야 겨우 보이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겠구나 짐작하며 첫 장을 열었습니다.



<서열의 교양>은 모티브에서 펴낸 세계척학전집의 일곱 번째 권입니다. 시리즈 이름의 '척학'은 오타가 아니라 '알고도 모른 척'의 그 척을 노린 표기로 보여요. 부제가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지위의 법칙이니 앞뒤가 맞습니다. 400쪽에 손에 무리 없는 판형이고, 24명의 학자를 불러 모았다기에 학술서를 각오했는데 막상 읽어보면 사례 하나에 짧은 문장 서너 개로 끊어가는 리듬이라 진도가 수월했습니다.


1부에서 발이 묶인 자리는 사폴스키의 서열 스트레스였어요. 챕터 문을 여는 문장이 이미 서늘합니다. 영국 공무원 1만 8천 명을 수십 년 추적했더니, 흡연이며 운동 부족 같은 위험요인을 전부 보정하고도 직급에 따른 사망 위험 차이가 남았다는 겁니다. 이어지는 개코원숭이 이야기는 더 구체적이고요. 무리의 일인자였던 솔로몬은 매일 아침 덤벼드는 젊은 수컷을 매번 이겼는데, 이기는 쪽도 솔로몬이고 야위는 쪽도 솔로몬이었습니다. 살이 빠지고 얼굴에 상처가 늘다가 언젠가부터는 이기고도 먼저 물러났다고 해요.


이 챕터에서 가장 오래 남은 문장은 이겁니다. "배를 채우고도 남은 시간에 서로를 괴롭히는 짐승. 개코원숭이, 그리고 인간이다." 사폴스키가 개코원숭이를 연구 대상으로 고른 이유가 초원에 먹이가 넘쳐 하루 세 시간이면 배를 채우고 남는 시간을 서로 괴롭히는 데 쓰기 때문이었다는 대목에서, 저 문장은 비유가 아니라 관찰 기록에 가깝게 읽힙니다.


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사자에게 쫓긴 얼룩말은 몇 분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풀을 뜯는데, 인간을 덮치는 사자는 다음 달 실적이나 상사의 표정이나 통장 잔고라서 몇 분 만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게다가 우리는 닥치지도 않은 마감과 일어나지도 않은 해고를 머릿속으로 미리 겪는 재주가 있어서 장치가 좀처럼 꺼지지 않습니다.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사자 쪽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스위치라는 설명이었어요.


그다음이 위로 쪽으로 방향을 트는 대목입니다. 쥐 두 마리에게 세기와 시간까지 완전히 같은 충격을 주는데 한쪽 우리에만 바퀴가 있었고, 바퀴를 돌릴 수 있었던 쥐는 멀쩡했고 아무것도 못 한 채 견딘 쥐만 위장이 상했다는 실험이 나옵니다. 뉴욕 횡단보도 버튼 천 개 중 구백 개가 아무 데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도 아무도 떼어내지 않는 이유, 요양원에서 화분을 직접 고르고 물을 준 노인들이 3주 만에 더 활발해졌다는 관찰이 뒤를 잇고요. 저자가 정리한 변수는 두 가지입니다. 통제감과 예측 가능성. 자리를 바꾸기 어렵다면 마음대로 되는 구석 하나부터 만들어보라는 조언이 여기 붙어 있는데, 조직 생활을 오래 해온 사람에게는 꽤 현실적인 처방으로 들립니다.


3부의 켈트너 챕터는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앞에서 아래에 있는 몸을 다뤘다면 여기서는 위로 올라간 뇌를 봅니다. 모노폴리 실험이 인상적이었어요. 동전을 던져 부자 역할을 맡은 사람은 시작 자금도 주사위도 급여도 두 배를 받고, 두 참가자 모두 그 조건을 알고 게임을 시작합니다. 십오 분 뒤 부자로 배정된 사람은 목소리가 커지고 말을 판에 놓을 때 소리를 내고 프레첼 그릇으로 손이 자꾸 갔다고 해요. 게임이 끝난 뒤 왜 이겼느냐고 물으니 전략이 좋았고 판단이 빨랐다고 답합니다. 저자의 정리가 서늘합니다. "유리한 조건은 대답에서 사라진다."


삼십 분짜리 무작위 리더 역할을 맡은 사람이 남은 쿠키에 먼저 손을 뻗고 입을 벌린 채 씹더라는 관찰, 권력을 느끼도록 유도된 사람의 거울 뉴런 반응이 약해졌다는 실험까지 읽고 나면 켈트너가 말한 권력의 역설이 선명해집니다. 권력에 오르는 데 필요했던 특성이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서 가장 먼저 사라지고, 정작 본인은 자기가 변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흔을 넘기면 누군가를 평가하고 결정하는 자리에 조금씩 서게 되니, 이 챕터는 남의 이야기로 넘기기가 어려웠습니다. 윗사람이 사정을 못 알아듣는다면 실제로 이해하는 회로가 약해진 것일 수 있으니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하기보다 알아들을 언어로 바꿔 말하라는 조언도 실무적이었고요.


다만 걸리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저자는 앞선 챕터에서 요양원 화분 연구의 사망률 수치를 소개한 뒤, 바로 다음 쪽에 그 통계값이 나중에 정정되어 통상적인 기준으로는 유의하지 않게 됐다는 단서를 스스로 달아둡니다. 대중 교양서에서 흔치 않은 태도라 신뢰가 갔어요. 그런데 3부의 고급차 관찰처럼 재현을 두고 말이 오간 연구에는 같은 수준의 단서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사례를 다루는 온도가 챕터마다 조금 다르게 느껴졌고, 앞에서 보여준 신중함을 끝까지 밀고 갔으면 더 단단했겠다 싶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틀렸다고 잘라 말하는 부분도, 1부에서 두렵게 하는 길과 닮고 싶게 하는 길을 나란히 놓았던 서술과 완전히 포개지지는 않더군요. 강연에 가까운 리듬을 쓰는 저자라 의도된 단순화일 수도 있겠습니다.


4부에 이르면 책이 판 자체를 내려다봅니다. 브룩스의 두 이력서 챕터는 2011년 스티브 잡스의 추도식 장면으로 문을 여는데, 단상에 오른 여동생이 먼저 꺼낸 것은 애플의 부활도 아이폰도 아니었다고 해요. 오빠가 사랑을 진지하게 여긴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력을 남긴 사람의 장례식에서 성취가 이력서처럼 낭독되지 않았다는 문장이 이 챕터의 출발점입니다.


브룩스는 덕목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이력서 덕목은 학위와 경력과 매출처럼 시장이 값을 매겨주는 것들이고, 조사 덕목은 친절했다거나 어려운 순간에 옆을 지켰다처럼 이력서에 적을 자리조차 없는 것들이에요. 앞의 문서는 오늘 밤에도 열어서 다듬을 수 있지만 뒤의 문서는 제가 쓰지 못하고 저를 오래 지켜본 누군가가 씁니다. 창세기의 두 인간을 아담 I과 아담 II로 나눈 랍비 솔로베이치크의 구분을 가져와, 한쪽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고 다른 한쪽은 나는 왜 여기 있는가를 묻는다고 정리한 대목도 오래 남았습니다.


이 챕터에서 제일 조용하게 아픈 문장은 이거였어요. "상황에 지친 사람은 상황이 바뀌면 회복된다. 자기 자신에게 지친 사람은 상황이 바뀌어도 회복되지 않는다." 이력서 쪽으로만 시간을 몰아쓴 사람의 피로는 대개 뒤쪽이라고 저자는 덧붙입니다. 성취해도 채워지지 않고 사다리는 끝없이 위로 이어지며 계단마다 자기존중감의 유효기간이 짧다는 진단이 앞에 깔려 있어서, 이 문장이 훈계처럼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브룩스 본인이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매일 다뤄오면서 정작 자기 삶은 그 성공을 좇는 쪽으로 짜여 있었다고 먼저 자백해두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자기 확대 문화에 대한 진단은 우리 사정과 그대로 포개지지는 않는 듯합니다. 당신은 특별하다는 말이 사방에서 반복되어 결함을 응시할 언어가 사라졌다는 관찰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인데, 이곳은 오히려 스스로를 낮게 매기고 남과 비교하며 깎아내리는 말이 더 익숙한 편이니까요. 결함을 세 개 적어보라는 권유가 그런 독자에게 어떻게 가닿을지, 저자가 한국 상황에 맞춘 한 문단을 보태줬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좋은 삶이란 결함을 없앤 상태보다 평생 그것과 씨름해온 상태에 가깝다는 정의는, 완성이 아니라 지속을 말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따뜻했어요.


조사 덕목은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사소한 결정이 쌓여 자란다고 책은 말합니다. 식당 직원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아파트 경비원에게 인사를 했는지, 회의에서 말하지 못한 후배에게 나중에 의견을 물었는지. 한 번이면 무게가 없지만 매일 반복하는 방식이라면 그것이 십 년 뒤 사람들이 저를 기억하는 방식이 된다는 대목에서, 이 책이 왜 마지막 파트에 초연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납득이 갔습니다. 확인은 늦게 올 뿐 언젠가는 반드시 온다고 저자는 썼어요.


띠지에는 교실에 두 명의 왕이 있었고 그 작은 교실은 첫 판에 불과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학생회장과 일진이라는 두 갈래 왕좌가 성적표와 명함과 아파트 평수로 이름만 갈아입은 채 계속되고 있다는 뜻일 텐데, 이 책의 미덕은 그 판을 벗어나라고 다그치지 않는 데 있는 것 같아요. 대신 판의 구조를 보여주고, 어느 자리에 있든 몸이 상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짚어줍니다. 인정 욕구에 지쳐 있으면서도 그런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인정하기 싫었던 사람이라면, 읽는 내내 여러 번 걸음을 멈추게 될 겁니다. 조직에서 위로 올라가는 중인 사람에게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불편하게 읽힐 테고요.


서평단으로 만나는 책은 대개 정해진 기간 안에 읽고 감상을 정리해야 하는데, 이번 한 권은 마감을 의식하기 어려웠어요. 어느 대목에서는 밑줄을 긋다가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어지고, 어느 대목에서는 그냥 조용해졌습니다. 산에 오르는 동안은 산이 보이지 않는다는 저자의 문장이, 다 읽고 나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어요.


처서가 지나면서 밤공기가 한 겹 식었습니다. 낮의 열기는 아직 남아 있지만 저녁이 확실히 짧아졌고, 이맘때는 한 해의 절기가 어디쯤 왔는지 세어보게 되죠. 올해 무엇을 이뤘는지 세는 목록과 어떤 사람이었는지 남는 목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 책이 알려준 셈입니다. 서늘해지는 계절에 읽기 알맞은 한 권이었습니다.


서열은 사라진 적이 없고, 이 책은 그 판을 벗어나라고 말하는 대신 판의 규칙을 읽는 눈을 쥐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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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귀여운 미니 일러스트 쉽게 그리는 방법
요모리 나리 지음, 콘텐츠 연구소 옮김 / 정보문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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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이 손에 들어왔을 때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크기였습니다. 핸드북 판형에 두께도 얇아서 한 손에 잡히고, 가방 옆주머니에 꽂아 두어도 표가 나지 않아요. 그림 배우는 책이라고 하면 큼직한 판형에 종이도 도톰한 쪽을 떠올리게 되는데, <작고 귀여운 미니 일러스트 쉽게 그리는 방법>은 시작부터 부담을 덜어 놓고 문을 엽니다.


표지 이야기를 잠깐 하고 싶습니다. 민트빛 하늘색 바탕 위에 크림색 구름을 얹고, 그 둘레로 곰과 토끼, 알파카, 해파리, 케이크, 피아노가 둥글게 앉아 있어요. 가운데에는 아이 하나가 자기 키만 한 연필을 어깨에 걸치고 걸어갑니다. 저 정도 크기면 꽤 무거울 텐데 표정은 신이 나 있고요. 잘 그리는 일보다 일단 연필을 들고 나서는 일에 무게를 실은 그림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여는 자리에서 저자가 건네는 제안도 그 결과 같습니다. "실패해도 되는 낙서 노트부터 만들어보자"는 말인데요, 그림 앞에서 손이 굳는 이유가 실력 부족이 아니라 망칠까 봐 하는 걱정이라는 걸 저자는 알고 있는 듯합니다. 다 그리고 나서 마음에 안 들면 그만이라는 전제를 먼저 깔아 두니,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한결 편해집니다.


첫 파트는 동물입니다. 강아지 지면에서 시바견, 치와와, 포메라니안, 토이푸들이 각각 세 단계로 완성되는데, 방식이 명쾌해요. 1단계는 연회색 가이드 도형, 2단계는 검은 선 정리, 3단계는 색을 얹어 마무리. 견종을 가르는 기준도 뼈대나 비율이 아니라 실루엣과 무늬 한두 개입니다. 시바견 옆에는 눈썹처럼 보이는 무늬라는 메모가, 포메라니안 옆에는 풍성한 털 속에 작은 발이라는 메모가 붙어 있어요. 그 한 줄만 지키면 그 개가 됩니다.


고양이로 넘어가면 접근이 또 달라집니다. 여기서는 색과 무늬가 종을 가르는 기준이 되고, 설명에 문자를 끌어옵니다. 머리 한가운데서 갈라지는 'ㅅ'자 무늬, 이마에 새겨진 'M'자 무늬 같은 식이에요. 그림을 글자로 기억하게 만드는 방법이라 잘 잊히지 않습니다. 곰과 판다가 사실상 같은 형태에서 색 배분만 달라지며 갈라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고요. 형태를 하나 익히면 그걸로 여러 대상을 만들 수 있다는 감각이 여기서 잡힙니다.


기본형을 익힌 다음에는 동작이 이어집니다. 꼬리 흔드는 치와와, 자는 퍼그, 기지개 켜는 치즈 고양이처럼 그 종에 어울리는 몸짓을 붙여 놓았어요. 앉아 있는 그림 하나로 끝나지 않고 바로 쓸 데가 생기는 구조입니다.


일상 생활 파트는 결이 좀 다릅니다. 취미 지면에는 단계 안내 없이 완성된 아이콘들이 놓여 있어요. 독서와 영화, 게임, 쇼핑, 노래방, 드라이브. 자동차 옆에 붙은 메모 한 줄이 이 파트의 요령을 다 말해 줍니다. "더 귀엽게도 전체적으로 둥글게 표현하기". 사물을 귀엽게 만드는 기술이 결국 모서리를 둥글리는 데 있다는 정리인데, 앞 파트에서 익힌 도형 감각을 사물로 옮기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도시락 지면에서는 주먹밥 옆에 "속재료는 취향에 따라"라고 적어 두었더군요. 정답을 정해 주지 않고 여백을 남기는 태도가 책 전체에 일관되게 흐릅니다. 동아리 지면의 배너 문구는 아예 용도를 못 박아 두었어요. 동아리 일지나 다이어리에 활용해 보라는 안내인데, 그리는 행위를 기록과 연결 짓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계절 파트는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머물게 되는 구간이었습니다. 봄에는 부활절 달걀에서 나오는 토끼와 벚나무 아래 돗자리를 편 코알라가, 여름에는 물웅덩이 위에서 노래하는 개구리와 튜브를 낀 곰이 있어요. 가을 지면에는 차분한 색으로 계절 느낌을 살려 보라는 조언과 함께, 구름 모양에도 신경 써 보라는 말이 작게 적혀 있습니다. 계절감이라는 게 소재보다 색과 배경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라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겨울 지면 배너에는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에도 추천이라고 쓰여 있고요.


다만 걸리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계절 파트로 갈수록 원서의 일본 연중행사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코이노보리와 종이 투구, 란도셀, 테루테루보즈, 달맞이 경단과 참억새, 가가미모치와 다루마까지. 우리 달력과는 겹치지 않는 날들이라, 설날 지면을 보며 세배와 떡국을 그리려면 결국 스스로 응용해야 합니다. 안내 밀도가 파트마다 들쭉날쭉한 점도 조금 아쉬웠고요. 계절 파트는 지면마다 3단계를 꼬박 보여 주는데 일상 생활 파트는 완성형만 놓여 있어서, 700개를 모두 단계별로 배운다고 기대하면 어긋나는 구간이 생깁니다. 물론 사물은 형태가 이미 단순하니 단계를 나눌 실익이 적다는 판단이었을 테고, 도형으로 잡는 원리 자체는 어디에나 적용되니 출발점으로 삼기에는 충분합니다. 완성된 도안집으로 볼지, 응용의 재료로 볼지에 따라 평가가 갈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평을 쓰려고 펼쳤다가 그냥 넘겨보게 되는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마흔을 넘기고 나면 새로 시작하는 일 앞에서 자꾸 계산을 하게 됩니다. 이 나이에 이걸 배워서 뭘 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오거든요. 이 책에는 그런 계산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원 하나 그리고 귀 붙이면 곰이 되니까요. 잘하게 될지를 묻기 전에 손부터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이 얇은 책에 들어 있습니다.


여름이 물러가는 자리에 서 있는 지금, 이 책의 여름 지면과 가을 지면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게 공교롭게 느껴집니다. 빙수와 풍경 다음 장을 넘기면 그루터기에 앉아 책 읽는 다람쥐와 단풍잎이 기다리고 있어요. 계절이 바뀌는 걸 달력으로만 확인하고 지나쳐 왔는데, 올가을에는 다이어리 귀퉁이에 감 하나쯤 그려 넣어 봐도 좋겠다 싶습니다. 그림 실력이 늘지 않아도 상관없는 종류의 즐거움이 분명 있습니다.


잘 그리는 법이 아니라 계속 그리고 싶어지는 마음을 먼저 챙겨 주는, 가볍게 들고 다니며 아무 데나 펼치기 좋은 미니 일러스트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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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성장주 처음 투자 -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은
김운아 지음 / 경이로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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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은'. 표지 맨 윗줄에 적힌 이 문구를 먼저 들여다봤습니다. 크림빛 바탕에 붉은 화살표가 계단처럼 올라가고 그 사이로 동전과 돈주머니가 흩어져 있는 표지는, 재테크서에서 흔히 느껴지는 과열된 기운 없이 산뜻했어요.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아 든 <미국 성장주 처음 투자>는 크기도 두께도 만만해서, 각오를 다지지 않고도 첫 장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저자 김운아는 1,000만 원으로 출발해 순자산 40억 원을 일군 워킹맘 투자자입니다. 이런 이력이 앞에 붙은 책이라면 종목 이름과 매수 시점이 줄줄이 등장할 거라 짐작하기 쉬운데, 이 한 권은 그 예상을 처음부터 비껴갑니다. 저자가 코칭에서 절대 하지 않는 일이 종목 추천과 타이밍 제시라고 하니, 남은 자리에 들어앉은 것은 결국 태도와 마음의 문제입니다.


1부에서 가장 오래 붙들려 있었던 건 80억 원짜리 건물을 증여받고도 퇴사하지 못하는 J씨의 이야기였어요. 유학과 대기업, 매년 해외여행에 주말 골프까지 갖춘 사람이 20억 원의 증여세 앞에서 대출을 최대한 끌어오고, 월급을 동아줄처럼 붙잡게 되는 과정이 담담하게 적혀 있습니다. 기록적인 폭우로 오래된 건물에 물이 새기 시작하자 아침마다 임차인의 연락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했다는 대목에서는, 여유로운 건물주라는 말이 얼마나 헐렁한 표현인지 드러납니다. 저자는 이 사례를 두고 이렇게 정리합니다. "진짜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돈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이다." 30억 원 영끌로 산 압구정 아파트가 100억 원을 넘겼는데도 학원 상담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나섰다는 이어지는 사례까지 읽고 나면, 숫자와 자유가 나란히 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실감으로 남습니다. 백조가 수면 아래에서 발버둥친다는 비유는 익숙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제법 서늘하게 들리더군요.


같은 챕터 끝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등장하는 구성은 조금 뜻밖이었습니다. 1년에 6주만 일하고 62달러로 살았다는 <월든>의 삶을 부러워하면서도, 21세기에 그렇게 살기는 어렵다고 저자가 곧 인정하는 대목이 오히려 신뢰를 줬어요. 결혼식장에 들고 갈 가방 하나쯤은 있어야 하고 차를 살 때 승차감보다 하차감을 따지게 된 사정을 부정하지 않으니까요. 대신 이 소비가 저를 자유롭게 하는지 더 옭아매는지 스스로 물어보자는 제안이 남습니다. 미니멀리즘이나 파이어족 이야기가 유행처럼 오갔던 몇 해를 떠올려 보면, 이런 질문이야말로 유행이 지나도 남는 쪽 같습니다.


2부의 제목 '녹는 건 계좌가 아니라 정신력이다'는 이 책의 성격을 한 줄로 압축합니다. 마크 트웨인의 말을 끌어온 대목이 재미있어요. "10월은 주식 투자에 있어서 특히 위험한 달 중 하나다. 다른 위험한 달로는 7월, 1월, 9월, 4월, 11월, 5월, 3월, 6월, 12월, 8월 그리고 2월이 있다"라는 문장은, 위험 없는 날을 기다리는 마음을 웃으면서 무장 해제시킵니다. 저자는 엔비디아 주가가 7달러대에서 3달러 초반까지 밀렸던 구간과 35달러에서 12달러대로 내려앉았던 구간을 각각 그래프로 보여준 뒤, 10년 흐름 위에 그 두 시기를 작은 원으로 표시해 둡니다. 길게 늘어놓은 시간 축 위에서 그 원들이 거의 바닥에 붙은 점처럼 보이는 장면은 말보다 설득력이 있었어요. 그 옆에 놓인 한 줄이 이렇습니다. "파도가 몰아쳐도 바다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이 대목에는 물음이 하나 따라붙습니다. 살아남은 기업의 차트는 언제나 견디는 쪽이 옳았다고 말해주지만, 같은 시기 조용히 사라진 이름들은 그래프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출렁이는 파도를 견디면 좋은 기업의 주주는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단정이 조금 넉넉하게 느껴진 이유예요. 물론 저자가 그 앞뒤로 성장주 선별 기준을 따로 두고 있으니 무책임한 낙관은 아닙니다. 그래도 '반드시'라는 말은 초보 독자에게 다르게 읽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부에서 제 마음이 가장 편해진 곳은 초심자의 행운을 다룬 자리였습니다. 비트코인으로 시작하자마자 돈이 불어나 전 재산을 넣었다가 90% 폭락 뒤 손절하고, 신용대출까지 끌어와 결국 백기를 든 M씨의 사례는 주변에서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의 축약판 같았어요. 저자의 진단은 냉정합니다. 정신력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찾아온 행운은 기본기를 배울 기회를 앗아간다는 것. 그리고 행운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정신력이라고 적습니다. <연금술사>의 채굴꾼 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는데, 5년 동안 99만 9,999개의 돌을 깨고 마지막 하나를 던져버렸는데 그것이 에메랄드였다는 대목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자책을 권하지 않습니다. 이미 포기했다면 후회하지 말고 다시 발밑의 돌을 깨는 편이 현명하다고 하고, 사자마자 떨어지기만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합니다. 인생이라는 코스 요리에는 쓴맛과 단맛이 번갈아 나오니 순서가 조금 다를 뿐이라는 위로가 뒤따르죠. 손실 경험을 부끄러움으로 껴안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몇 줄이 책값을 하는 대목일 겁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 도서의 결은 더 분명해집니다. 6부에서 저자가 주변 사람들에게 건네는 말이 "돈만 잃으세요"라고 해요. 재테크서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방향의 조언입니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건강과 가족은 되돌리기 어렵다는 이유이고, 계좌의 90%가 사라져도 가족은 괜찮을 것이라는 서술까지 이어집니다. 남은 10%의 현금과 본인의 투자 능력, 가족의 인내를 근거로 대는 대목이 든든하게 읽히면서도, 40억을 이룬 사람의 10%와 이제 종잣돈을 모으는 사람의 10%가 같은 무게일지는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저자가 자산 규모에 따라 전략을 달리 가져가라고 반복해 말하는 만큼, 이 문장도 규모와 함께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실무적으로 가장 유용했던 개념은 '시한부 자금'이었어요. 집 살 돈이나 세금 낼 돈, 아이 등록금처럼 당장 쓰지 않아도 되는 돈을 여유 자금으로 착각하기 쉽다는 지적입니다. 2년 뒤 쓸 2억 원이 반토막 나면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100% 수익이 필요하고, 기한이 다가올수록 조급함이 레버리지나 리딩방 쪽으로 사람을 밀어낸다는 설명이 구체적입니다. 레버리지 구조를 풀어놓은 부분도 초보자를 배려했습니다. 일반 주식은 10% 내렸다가 11.1% 오르면 본전이 되지만 3배 상품은 30% 내린 뒤 33.3%가 올라도 원금의 93%에 머문다는 계산 하나로, 배수의 함정이 눈에 들어옵니다. 에베레스트 등반의 성공이 정상이 아니라 안전한 하산에 있다는 비유를 재테크로 옮긴 대목도 오래 남았습니다.


이 책이 마지막에 내놓는 답은 소박합니다. 빨리 부자가 되는 방법은 모르지만 확실하게 부자가 되는 방법은 안다고,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달리지 않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삶을 지키는 한 기회는 계속 온다는 문장과 같은 곳을 향하고 있죠. 그러니 이 안내서는 시작이 늦었다고 여기는 사람, 한 번 크게 잃고 시장 쪽으로 눈을 돌리기 어려워진 사람에게 특히 유용할 겁니다. 반면 유망 종목의 이름이나 진입 시점을 확인하려고 펼친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 실망이 이 책의 미덕이기도 하고요.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읽어오는 동안, 답을 주는 책보다 질문을 남기는 책이 손에 오래 남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 도서는 후자에 속합니다.


여름의 열기가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물러나는 시기입니다. 계절이 바뀌는 속도는 어차피 정해져 있어서 조급해할 여지가 없는데, 자산 앞에서는 유독 마음이 앞서기 쉽습니다. 이 한 권을 덮고 나서 남은 건 수익률에 관한 계산이 아니라 속도에 관한 감각이었어요. 서늘한 바람이 시작될 무렵 다시 펼쳐볼 것 같습니다.


종목과 타이밍 대신 견디는 힘을 알려주는 책. 시작이 늦었다고 느끼는 사람과 한 번 크게 잃어본 사람에게 특히 다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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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김도운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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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먼저 오래 봤습니다. 누런 크라프트지 같은 바탕에 세피아 결이 층층이 흐르고, 그 위로 검은 실루엣의 남자가 뒤돌아 서 있습니다. 몸은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잘게 조각나 있고 갈라진 틈으로 붉은빛과 초록빛이 얼핏 비칩니다. 붙여 놓은 흔적을 감추지 않은 사람의 형상입니다. 한 손에 쥔 작은 꽃가지가 표지에 적힌 한 줄 "느리게 걷는 이에게 찾아온 뜻밖의 아름다움"과 맞물리면서, 무너진 자리에서도 뭔가 하나는 놓지 않은 사람을 그려 놓은 듯했어요.


김도운 목사가 쓴 <그 자리에서>는 핸드북 판형입니다. 얇고 가벼워서 가방 어디에 넣어도 부담이 없고, 꼭지마다 길이가 짧고 끝에는 성경 말씀이 한 절씩 붙어 있어 하루 한 편씩 넘기기에 알맞습니다. 다만 물리적으로 가벼운 것과 읽기에 가벼운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두 꼭지 정도 지나면 속도가 저절로 줄어듭니다.


저자는 어린 시절 뇌전증 진단을 받고 발작과 함께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 사실이 이력으로만 놓여 있지는 않아요. 병을 숨긴 채 일하다 걸려서 잘렸고, 앓고 있다고 말하면 써주는 곳이 없어 최대한 버티다 잘리는 게 일상이었다고 씁니다. 운전면허도 딸 수 없고 육체노동도 어려운 조건에서 찾아낸 방편이 지하철 택배였는데, 오래 타면 증상이 나타난다는 걸 그때 알게 되어 얼마 못 가 그만두게 됐다는 대목에서 잠깐 손이 멈췄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기며 살았는데 현실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적은 문장은, 배제라는 말이 실제로 어떤 모양인지를 설명 없이 보여줍니다.


책의 앞쪽에 놓인 의심의 기록은 신앙서에서 이렇게까지 써도 되나 싶을 만큼 직설적입니다. 귀신병 걸린 새끼라는 조롱, 눈을 뒤집어 깐 채 흉내를 내던 사람 앞에서 느낀 살의까지 그대로 적어 놓았어요. 기도가 신앙이라기보다 괴로움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자기 진단, 예배가 "신앙을 고백하는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방관을 고발하는 자리가 되어갔다"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이 정직함이 없었다면 뒤에 나오는 결론은 아마 공허했을 겁니다.


전환도 극적이지 않습니다. 감정이 풀린 게 아니라 같은 사실을 다르게 읽게 되는 방식이에요. 하나님의 침묵을 무능을 숨기려는 회피로 몰아붙이던 사람이, 그 침묵이 자기 음성을 초대하는 관용이었고 배제는 저항을 초청하는 관대였다고 적습니다. 너무 기다려서 너무 밉고, 너무 기다리다 보니 흐릿해졌다는 문장이 이 자리의 정서를 잘 담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흐릿해도 희미해지거나 아득해지지는 않는다고 덧붙입니다. 바로 다음 꼭지에서 "믿음은 의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마주하는 것이다"라고 짧게 못 박는데, 앞의 다섯 쪽을 두 행으로 접어 놓은 셈입니다.


전부 수긍했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산책하는 강아지의 목줄을 보며 묶임이 곧 궁극의 자유임을 말하는 꼭지가 있어요. 목줄이 속박이 아니라 위태로움을 막는 힘이었다는 관찰은 선명합니다. 그런데 강아지와 보호자의 관계를 사람과 하나님에 곧바로 겹쳐 놓기까지, 앞선 글들이 보여준 지긋한 씨름의 시간이 이 대목에서는 생략된 느낌이 남습니다. 속박이 구원의 얼굴이라는 표현에 이르는 길이 조금 빨라서, 아직 목줄이 목줄로만 느껴지는 사람에게는 건너뛴 구간이 넓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물론 저자에게는 이미 오래 통과한 결론일 테니, 이건 읽는 쪽의 걸음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가장 실용적으로 다가온 자리는 뜻밖에도 중간부의 짧은 글이었습니다. 믿음이 초라하든 대단하든, 순종이 실패투성이든 성공적이든 상관없이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뿐이라며, 의심에 실망하지도 말고 믿음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씁니다. 불순종에 아파하지도 말고 순종을 과시하지도 말라는 문장이 뒤따릅니다. 자책과 자만을 한꺼번에 내려놓게 하는 구조인데, 오래 일하며 성과로 자신을 증명해 온 사람에게는 앞쪽 절반이 특히 아프게 읽힙니다. 다음 장은 거의 백지에 가깝고, 오직 찾으시고 세우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두 행만 놓여 있어요. 여백이 문장의 일부처럼 기능하는 편집입니다.


책은 죄가 파멸의 조건이 아니라는 이야기로 닫힙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신 분이 죄가 시작된 순간에 이곳을 지울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마주하셨다는 것, 그것이 죄를 권능으로 부수는 대신 사랑으로 성취하겠다는 뜻이었다는 선언이 마지막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앞서 사람과 하나님을 나란히 세운 꼭지에서 이미 예고된 결론이기도 하지요. 사람은 사랑을 지키려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하나님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 외에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는 문장. 전능을 말하다가 불가능의 언어로 착지하는 이 뒤집기가 이 책에서 가장 단단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정리된 문장과 살아낸 문장의 차이가 점점 분명해지는데, 이 한 권은 후자에 속합니다. 자기 고통을 다 말한 사람이 마지막에 "당신은 오늘 어땠나? 괜찮은지 궁금하다"라고 독자의 안부를 묻는 순서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신앙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보다 오히려 요즘 걸음이 느려진 쪽에 먼저 닿을 것 같아요. 질병이나 사고로 속도를 잃은 뒤 사회가 자리를 잘 내주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된 이들, 교회 안에서 받은 말 때문에 더 외로워진 이들이 읽으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 들 겁니다. 반대로 매끄러운 위로를 기대하는 분에게는 앞쪽 절반이 꽤 거칠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여름의 끝이 눈에 보이는 시기입니다. 처서를 앞두고도 낮은 여전히 뜨겁지만 해가 지고 나면 바람의 온도가 확실히 다르고, 저녁 공기에 가을 기운이 조금 섞여 있어요.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자리에 서면 자기 속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책이 손 닿는 곳에 있는 건, 생각보다 든든한 일이었습니다.


의심을 지우지 않고 끝까지 통과한 사람의 기록. 걸음이 느려진 자리에서 읽으면 가장 정확하게 들리는 <그 자리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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