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서
김도운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먼저 오래 봤습니다. 누런 크라프트지 같은 바탕에 세피아 결이 층층이 흐르고, 그 위로 검은 실루엣의 남자가 뒤돌아 서 있습니다. 몸은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잘게 조각나 있고 갈라진 틈으로 붉은빛과 초록빛이 얼핏 비칩니다. 붙여 놓은 흔적을 감추지 않은 사람의 형상입니다. 한 손에 쥔 작은 꽃가지가 표지에 적힌 한 줄 "느리게 걷는 이에게 찾아온 뜻밖의 아름다움"과 맞물리면서, 무너진 자리에서도 뭔가 하나는 놓지 않은 사람을 그려 놓은 듯했어요.


김도운 목사가 쓴 <그 자리에서>는 핸드북 판형입니다. 얇고 가벼워서 가방 어디에 넣어도 부담이 없고, 꼭지마다 길이가 짧고 끝에는 성경 말씀이 한 절씩 붙어 있어 하루 한 편씩 넘기기에 알맞습니다. 다만 물리적으로 가벼운 것과 읽기에 가벼운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두 꼭지 정도 지나면 속도가 저절로 줄어듭니다.


저자는 어린 시절 뇌전증 진단을 받고 발작과 함께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 사실이 이력으로만 놓여 있지는 않아요. 병을 숨긴 채 일하다 걸려서 잘렸고, 앓고 있다고 말하면 써주는 곳이 없어 최대한 버티다 잘리는 게 일상이었다고 씁니다. 운전면허도 딸 수 없고 육체노동도 어려운 조건에서 찾아낸 방편이 지하철 택배였는데, 오래 타면 증상이 나타난다는 걸 그때 알게 되어 얼마 못 가 그만두게 됐다는 대목에서 잠깐 손이 멈췄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기며 살았는데 현실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적은 문장은, 배제라는 말이 실제로 어떤 모양인지를 설명 없이 보여줍니다.


책의 앞쪽에 놓인 의심의 기록은 신앙서에서 이렇게까지 써도 되나 싶을 만큼 직설적입니다. 귀신병 걸린 새끼라는 조롱, 눈을 뒤집어 깐 채 흉내를 내던 사람 앞에서 느낀 살의까지 그대로 적어 놓았어요. 기도가 신앙이라기보다 괴로움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자기 진단, 예배가 "신앙을 고백하는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방관을 고발하는 자리가 되어갔다"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이 정직함이 없었다면 뒤에 나오는 결론은 아마 공허했을 겁니다.


전환도 극적이지 않습니다. 감정이 풀린 게 아니라 같은 사실을 다르게 읽게 되는 방식이에요. 하나님의 침묵을 무능을 숨기려는 회피로 몰아붙이던 사람이, 그 침묵이 자기 음성을 초대하는 관용이었고 배제는 저항을 초청하는 관대였다고 적습니다. 너무 기다려서 너무 밉고, 너무 기다리다 보니 흐릿해졌다는 문장이 이 자리의 정서를 잘 담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흐릿해도 희미해지거나 아득해지지는 않는다고 덧붙입니다. 바로 다음 꼭지에서 "믿음은 의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마주하는 것이다"라고 짧게 못 박는데, 앞의 다섯 쪽을 두 행으로 접어 놓은 셈입니다.


전부 수긍했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산책하는 강아지의 목줄을 보며 묶임이 곧 궁극의 자유임을 말하는 꼭지가 있어요. 목줄이 속박이 아니라 위태로움을 막는 힘이었다는 관찰은 선명합니다. 그런데 강아지와 보호자의 관계를 사람과 하나님에 곧바로 겹쳐 놓기까지, 앞선 글들이 보여준 지긋한 씨름의 시간이 이 대목에서는 생략된 느낌이 남습니다. 속박이 구원의 얼굴이라는 표현에 이르는 길이 조금 빨라서, 아직 목줄이 목줄로만 느껴지는 사람에게는 건너뛴 구간이 넓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물론 저자에게는 이미 오래 통과한 결론일 테니, 이건 읽는 쪽의 걸음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가장 실용적으로 다가온 자리는 뜻밖에도 중간부의 짧은 글이었습니다. 믿음이 초라하든 대단하든, 순종이 실패투성이든 성공적이든 상관없이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뿐이라며, 의심에 실망하지도 말고 믿음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씁니다. 불순종에 아파하지도 말고 순종을 과시하지도 말라는 문장이 뒤따릅니다. 자책과 자만을 한꺼번에 내려놓게 하는 구조인데, 오래 일하며 성과로 자신을 증명해 온 사람에게는 앞쪽 절반이 특히 아프게 읽힙니다. 다음 장은 거의 백지에 가깝고, 오직 찾으시고 세우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두 행만 놓여 있어요. 여백이 문장의 일부처럼 기능하는 편집입니다.


책은 죄가 파멸의 조건이 아니라는 이야기로 닫힙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신 분이 죄가 시작된 순간에 이곳을 지울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마주하셨다는 것, 그것이 죄를 권능으로 부수는 대신 사랑으로 성취하겠다는 뜻이었다는 선언이 마지막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앞서 사람과 하나님을 나란히 세운 꼭지에서 이미 예고된 결론이기도 하지요. 사람은 사랑을 지키려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하나님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 외에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는 문장. 전능을 말하다가 불가능의 언어로 착지하는 이 뒤집기가 이 책에서 가장 단단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정리된 문장과 살아낸 문장의 차이가 점점 분명해지는데, 이 한 권은 후자에 속합니다. 자기 고통을 다 말한 사람이 마지막에 "당신은 오늘 어땠나? 괜찮은지 궁금하다"라고 독자의 안부를 묻는 순서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신앙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보다 오히려 요즘 걸음이 느려진 쪽에 먼저 닿을 것 같아요. 질병이나 사고로 속도를 잃은 뒤 사회가 자리를 잘 내주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된 이들, 교회 안에서 받은 말 때문에 더 외로워진 이들이 읽으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 들 겁니다. 반대로 매끄러운 위로를 기대하는 분에게는 앞쪽 절반이 꽤 거칠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여름의 끝이 눈에 보이는 시기입니다. 처서를 앞두고도 낮은 여전히 뜨겁지만 해가 지고 나면 바람의 온도가 확실히 다르고, 저녁 공기에 가을 기운이 조금 섞여 있어요.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자리에 서면 자기 속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책이 손 닿는 곳에 있는 건, 생각보다 든든한 일이었습니다.


의심을 지우지 않고 끝까지 통과한 사람의 기록. 걸음이 느려진 자리에서 읽으면 가장 정확하게 들리는 <그 자리에서>입니다.


#그자리에서 #김도운 #작가의집 #신앙서적추천 #묵상집 #기독교도서 #뇌전증 #투병에세이 #고통과신앙 #서평단 #북유럽카페 #책추천 #독서기록 #QT추천도서 #위로가되는책 #신앙에세이 #40대독서 #소그룹교재 #믿음과의심 #늦여름독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