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읽는 관전의 기술
김양희 지음 / 메이트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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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포장을 열자 초록이 먼저 왔습니다. 형광에 가까운, 아주 선명한 초록이에요. 표지 가운데 다이아몬드 라인만 옅게 그어져 있고 나머지는 전부 잔디 색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야구장 통로를 지나 관중석으로 올라섰을 때 눈앞에 확 펼쳐지는 그 색을 그대로 인쇄해 둔 것 같았어요.


위쪽에는 "야구는 '왜'를 묻는 순간 시작된다", 아래 띠지에는 "야구는 '왜'를 읽는 스포츠다!"가 적혀 있습니다. 같은 말을 위아래로 두 번 눌러 놓은 셈이죠. 처음엔 조금 과하다 싶었는데 다 읽고 나니 이해가 갔습니다. 이 한 권이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그것뿐이거든요.


<야구를 읽는 관전의 기술>은 25년 넘게 프로야구 현장을 취재해온 김양희 기자가 쓴 책입니다. 지금은 한겨레 스포츠 팀장으로 일하고 계시고요. 판형도 두께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잡고 있으면 한 챕터씩 끊어 읽기가 좋았습니다. 각 장이 짧게 끝나는 구성이라 중간에 멈춰도 흐름을 놓치지 않아요.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대목은 수비를 다룬 장이었습니다. 챕터 머리에 이런 문장이 걸려 있어요.


"화려한 공격은 한 경기를 빛낸다. 안정된 수비는 한 시즌을 지탱한다."


저자는 야구계 오랜 격언인 "타격에는 슬럼프가 있지만 수비에는 슬럼프가 없다"를 먼저 꺼내놓고, 곧바로 스스로 반론을 답니다. 수비도 심리와 컨디션의 영향을 받으니 문자 그대로 맞는 말은 아니라고요. 그러면서도 이 격언이 계속 회자되는 이유를 반복 재현성에서 찾습니다. 타구 판단, 첫 발, 포구 자세, 송구 메커니즘. 몸에 익을수록 흔들림이 줄어드는 영역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감독들은 방망이가 식은 선수라도 수비가 안정적이면 쉽게 라인업에서 빼지 않는다고 해요.


한화 이글스의 숫자 대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팀 순위 꼴찌였던 해에는 수비율이 최하위에 실책도 리그에서 가장 많았는데, 정규리그 2위로 올라선 시즌에는 수비율 전체 1위에 실책 수가 가장 적었다고 하죠. 성적이 좋아서 수비가 안정된 건지 수비가 안정돼서 성적이 따라온 건지, 저자는 후자 쪽에 무게를 둡니다.


같은 챕터에 염경엽 LG 감독의 말이 실려 있어요. 수비가 몸에 배면 저절로 몸이 간다고, 현역 시절 공 오는 쪽으로 몸을 날리다 보니 지금도 왼쪽 배 윗부분이 까맣다고 했답니다. 살이 계속 까지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습관이 되면 안 할 수가 없다는 대목에서 잠깐 멈췄습니다. 티가 안 나는 자리에서 같은 동작을 몇 년씩 반복해온 사람의 몸에 남는 흔적이니까요. 회사든 어디든, 조직을 실제로 버티게 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혔습니다.


투수 이야기를 다룬 장에서는 결이 조금 달랐어요. 완투가 미덕이던 시절에서 여럿이 나눠 지는 시대로 넘어온 과정을 의학과 데이터 양쪽으로 설명하는데, 75구에서 80구를 넘어서면 인대와 근육을 지탱하는 힘이 급격히 떨어지고 릴리스 포인트가 흔들린다고 합니다. 선발이 같은 타자를 세 번째 상대할 때 피안타율이 크게 오른다는 지표도 함께 나오고요. 100구 이후의 에이스보다 갓 올라온 불펜 투수가 실점을 막을 확률이 높을 수 있다는 문장이 이 장의 요약입니다.


이 장 끝에 붙은 짧은 박스 글이 책 전체에서 가장 진하게 남았습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 선수가 롯데의 4승을 혼자 책임진 기록을 날짜순으로 따라가는 글이에요. 열흘 동안 다섯 경기에 나서 40이닝을 던졌고, 공은 610개였다고 합니다. 팀 전체 이닝의 3분의 2였다죠. 그리고 이렇게 닫습니다.


"투혼으로 포장된 혹사로 최동원은 결국 9시즌(1983~1990년)밖에 뛰지 못했다. 최동원의 어깨도 '인간'의 어깨였던 것이다."


전설로 부르던 기록의 뒷면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이렇게 담담하게 적어두니 오히려 더 오래 남더군요. 버티는 것 자체를 훈장으로 여기던 시절의 기준이 지금은 관리해야 할 위험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저자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기록으로만 보여줍니다. 바로 앞에서 100구 제한을 두고 에이스가 10년, 15년 건강하게 마운드를 지키게 하려는 경영학적 선택에 가깝다고 설명해 둔 터라 이 배치가 더 효과적이었어요.


숫자를 다룬 7장도 좋았습니다. 기록지 위에서 안타는 전부 똑같이 1로 적힙니다. 리그 최고 투수에게 뽑아낸 안타든 지친 불펜 상대로 빗맞은 안타든 구분이 없고, 9회 1점 차 승부에서 나온 안타와 10대 0으로 기울어진 경기에서 나온 안타가 타율에서 정확히 같은 무게를 갖는다고 해요. 그래서 상대 에이스가 선발인 날에는 몸이 안 좋다며 라인업에서 빠졌다가 후반에 약한 불펜이 올라오면 대타로 나서겠다는 타자도 실제로 있답니다. 개인 타율 관리를 위해서요. 평가 지표 하나가 사람의 행동을 어디까지 비틀어 놓는지 보여주는 예라, 야구 밖에서도 짚이는 데가 있었습니다.


팬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해결하는 타자를 두고 영양가 있는 안타를 친다고 말하잖아요. 저자는 그게 감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야구의 본질에 가까운 직관적 이해라고 씁니다. 현장의 언어가 데이터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는 얘기죠. 이 대목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아쉬운 곳도 있었어요. 1장에 '1점이 결정짓는 승부와 패자의 서사'라는 챕터가 있습니다. 1점 차에서 간절함이 조급함으로 바뀌는 과정, 무사 1·3루에서 감독의 철학이 갈리는 순간을 촘촘하게 풀어놓아서 읽는 재미가 큽니다. 강팀 감독일수록 이 순간 더 냉정하다는 관찰도 좋았고요. 한 점을 막으려다 대량 실점의 문을 여는 쪽이 더 치명적임을 알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야구장 밖에서도 통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목에 걸어둔 '패자의 서사'는 끝까지 정면으로 다뤄지지 않아요. 두 팀 모두 안전한 선택을 포기하고 도박을 강요받는다는 대목이 그나마 가깝지만, 진 쪽에 남는 이야기를 따로 펼쳐주지는 않습니다. 제목이 기대하게 만든 만큼 한 챕터쯤 더 있었어도 좋았겠다 싶었어요. 챕터 끝을 닫을 때마다 한 뼘씩 세게 밀어붙이는 문장 습관도 눈에 띄는데, 타율을 두고 유용한 지표라고 인정해놓고 결론에서 숫자의 오류라고 못박는 식입니다. 읽는 맛은 살지만 앞뒤가 살짝 어긋나 보이기도 했고요.


그래도 이 책의 미덕은 분명합니다. 규칙을 외우게 하는 대신 장면의 앞뒤를 붙여서 보게 만들어요. 불펜이 서너 명으로 구성되니 다음에 누가 올라올지 미리 짚어보는 것도 재밌는 관전법이라고 권하는 대목처럼, 당장 오늘 중계를 볼 때 써먹을 수 있는 제안이 곳곳에 있습니다. 정우영 캐스터가 추천사에서 술술 읽히는데 쉽지 않다고 미리 일러둔 이유도 알겠더라고요. 문장은 편하지만 담긴 정보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야구를 오래 봤다고 자부하는 분일수록 새로 알게 되는 게 많을 겁니다. 반대로 올해 처음 야구장에 다녀왔거나 중계를 틀어놓고도 왜 저 타이밍에 투수를 바꾸는지 몰라 답답했던 경우라면, 1장과 5장만 먼저 읽어도 다음 경기가 달라 보일 거예요. 아이와 함께 야구장에 가는 분들께도 권할 만합니다. 설명해 줄 말이 늘어나거든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나서 오래 남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갈리는데, 이 한 권은 야구를 보는 방식 자체를 조금 바꿔놓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값을 했다고 생각해요.


늦더위가 아직 안 물러난 8월 말입니다. 순위 싸움이 슬슬 조여드는 시기고, 저녁 무렵 중계를 틀어놓기에도 좋은 계절이죠. 남은 경기들을 보면서 이 책이 알려준 것들을 하나씩 찾아볼 생각입니다. 투구 직전 야수들의 발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감독이 전화기를 언제 드는지, 그리고 오늘 나온 그 안타 하나가 기록지 한 줄로 남을 것인지 흐름을 바꿀 것인지.


같은 경기를 봐도 다르게 보이는 이유를 알려주는 책. 야구를 이미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선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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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정리하는 아이 - 잔소리 없이 아이를 자라게 하는 정리 육아법
강민영.유진아.정다은 지음 / msjn(엠에스제이엔)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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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정리를 다룬 책이라고 하면 각 잡힌 수납장 사진부터 떠올리게 됩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은 이 도서는 처음부터 다른 곳을 겨눕니다. 아이 방이 어질러진 이유를 게으름으로 정리하지 않아요. 아직 자라는 중인 힘을 어떻게 꺼내 줄지 묻는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구성은 공간과 시간과 관계라는 세 축으로 짜였습니다. 수학 과외로 십 년을 보낸 분, 정리수납 현장을 팔 년 넘게 지킨 분들이 각자 맡은 자리에서 겪은 사례를 나눠 실었어요. 그래서 논리를 세우는 문장보다 현장에서 건져 올린 장면이 훨씬 많습니다. 이론이 궁금한 독자에게는 다소 얇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당장 오늘 저녁에 써 볼 것을 찾는 독자에게는 이쪽이 더 반가울 것 같아요.


첫 장은 진단으로 시작합니다. 흐트러진 속마음이 흐트러진 공간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다시 공부를 흔든다는 관찰이 출발점입니다. 물건이 많아 생긴 구조의 문제인지, 스트레스나 불안에서 온 문제인지 먼저 갈라 보라는 조언이 이어져요. 아픈 아이에게 운동을 권하는 격이라는 비유가 나오는데, 읽으면서 조금 뜨끔했습니다. 이어 등장하는 클린스팟은 방 전체를 손대는 큰 계획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직접 고른 한 칸이면 충분하다고 해요. 부모가 자리를 지정해 준 선반은 두 주 만에 원래대로 돌아갔고, 아이가 스스로 고른 책상 상판은 석 달을 버텼다는 기록이 나란히 실려 있습니다.


실행 방법으로 제시된 3P도 간결합니다. 꺼내서 고르고 자리를 정한 뒤 제자리에 넣는 흐름이 전부예요. "정리의 시작은 눈이 아니라 손"이라는 문장이 이 장의 성격을 압축합니다. 계획을 세우느라 보낸 저녁보다 손을 댄 오 분이 낫다는 이야기인데, 미루는 버릇이 몸에 밴 어른에게도 그대로 옮겨 붙는 조언이었습니다.


습관을 다루는 절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게 됐어요. 신호와 행동과 보상이 맞물려 돌아가는 원리를 설명한 다음, 성공률 팔 할이면 충분하고 일주일에 닷새면 훌륭하다고 적어 둡니다. 습관이 자리 잡기까지 평균 두 달쯤 걸린다는 연구도 곁들이고요. 완벽을 목표로 세우지 말라는 이 문장이 정리를 가르치는 책에서 나온 것이라 더 오래 남았습니다. 물건 버리기를 아까워하는 아이에게 사진으로 남기자고 권하며 "물건은 비워도 기억은 남기자"라고 말하는 장면도 좋았어요.


시간을 다루는 장은 아이에게 시간이 투명하게 느껴진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약속을 못 지키는 까닭이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간 감각이 아직 자라는 중이기 때문이라고 읽어 내는 시선이 다정했어요. 그래서 처방도 시계 읽기 훈련으로 가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만화 한 편이 이십 분, 양치 모래시계가 삼 분이라는 식으로 아이가 이미 아는 단위에 시간을 걸어 둡니다. 이십오 분 집중에 오 분 휴식을 붙이되 저학년은 이십 분, 고학년은 삼십 분으로 조정하고 쉬는 시간이 오 분을 넘기지 않게 한다는 기준도 구체적입니다. 끝이 보일 때 집중이 살아난다는 설명에는 어른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예요.


후반부로 갈수록 시선이 아이에게서 부모 쪽으로 옮겨 갑니다. 관계를 다룬 장에서는 에너지를 어디에 쓸지 구역을 나눠 보라고 권해요. 가족과 소수의 진솔한 사이에는 온전히 쏟고, 학교나 업무 관련 창구는 확인만 하고 알림을 꺼 두고, 들여다볼수록 지치기만 하는 곳은 비우라는 제안입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못을 박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 하면 내 마음의 용량은 결국 바닥나고 맙니다." 직장맘은 시간이 모자라 죄책감을 안고 전업맘은 경계가 없어 소진된다는 진단도 인상 깊었어요. 개인의 사정을 탓하는 자리에서 물러나 정리되지 않은 공동체 문화를 지목하는 지점에서 이 한 권의 시야가 한 뼘 넓어집니다.


아쉬운 곳도 있었습니다. 관계 파트의 주어가 거의 내내 엄마예요. 공간과 시간을 이야기할 때는 부모 전반을 향하던 문장이 여기서만 한쪽으로 기웁니다. 거절을 연습하고 단톡방을 줄이는 일이 왜 엄마의 몫으로 배치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끝까지 나오지 않아요. 아빠나 조부모, 다른 양육자가 이 과정에 어떻게 들어오는지 다룬 한 절이 있었다면 훨씬 단단했을 것 같습니다. 속을 먼저 살피라고 강조해 놓고 곧바로 투명 수납함과 라벨과 타이머 게임이 따라 나오는 흐름도 조금 급하게 느껴졌고요.


그래도 읽고 나서 손에 쥐게 되는 것이 분명한 안내서입니다. 아이 방 문을 열 때마다 한숨부터 나오는 분에게는 한 칸에서 출발하라는 제안이 실제로 힘이 될 거예요. 아이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정작 제 책상과 제 휴대폰 알림 목록을 돌아보게 만드는 문장이 적지 않았고, 어쩌면 그 순서가 이 책이 노린 설계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가 먼저 정돈될 때 아이도 따라 정돈된다는 결론은 익숙한 말이지만, 사례를 하나씩 따라 읽고 나면 그 익숙한 말이 다르게 들려요.


아이 방 한 칸을 정돈하는 일에서 시작해 부모의 관계와 마음까지 닿는 실전 정리 교육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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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맛있는 고기 요리 레시피 55 - 프렌치 셰프가 알려주는
후카자와 아야 지음, 최선아 옮김 / 시그마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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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굽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문을 여는 요리책은 처음이었습니다. <매일 맛있는 고기 요리 레시피 55>의 첫 레시피가 그렇습니다. "굽지 않고 전기밥솥에 1시간 30분 동안 그대로 넣어 두기만 하면 입에서 녹아내리는 로스트포크가 완성됩니다." 준비물은 돼지 목살 한 덩이와 소금, 설탕, 마른 허브 조금, 월계수 잎 한 장. 밑간해서 랩으로 감싸고 지퍼백의 공기를 뺀 다음, 뜨거운 물을 부은 내솥에 잠기도록 넣고 보온 버튼을 누르면 됩니다. 프렌치 셰프가 알려주는 고기 요리라고 해서 조금 긴장했는데, 첫 장부터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어요.



표지도 그 태도를 미리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이끼빛 도자기 접시에 로스트비프가 담겨 있고, 겉면은 진하게 익었는데 안쪽은 곱게 분홍입니다. 크레송 몇 줄기 말고는 장식이랄 게 없고 나머지는 흰 여백이에요. 아래쪽 띠에 놓인 네 컷이 재미있습니다. 얼음 띄운 오차즈케, 치즈가 흘러내리는 핫샌드위치, 냉파스타, 스프링롤. 고기 요리책의 얼굴에 밥과 빵과 면이 나란히 올라와 있는 셈인데, 목차를 펼치면 그게 편집자의 취향이 아니라 이 책의 구조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 도서는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받았습니다.


로스트포크 한 덩이는 세 갈래로 흩어집니다. 두껍게 썰어 홀그레인 머스터드와 치즈를 얹고 겉에 버터를 발라 약한 불로 천천히 구우면 핫샌드위치가 되고, 막대 모양으로 잘라 시소잎과 오이, 당근과 함께 라이스페이퍼에 말면 스프링롤이 됩니다. 세 번째가 인상적이었어요. 식은 밥에 얇게 썬 고기를 올리고 차게 식힌 다시마 육수를 붓는 것으로 끝나는 오차즈케입니다. 조리 단계가 두 줄이에요. 우메보시와 양하, 와사비, 얼음 몇 조각을 곁들이라는 말이 붙어 있고, 사진 속 초록 그릇에 얼음이 떠 있는 장면이 이 책에서 가장 시원한 컷입니다.


밑간에 설탕이 소금과 같은 분량으로 들어가는 게 처음엔 의아했는데, 단맛을 내려는 게 아니라 고기가 수분을 붙들게 하려는 장치더군요. 그리고 저자가 여러 레시피에서 반복해 권하는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냉장고에서 하룻밤 재워 두라는 것. 특별한 기술은 거의 요구하지 않으면서 기다림만은 양보하지 않는 셈입니다.


닭 근위 콩피도 같은 방식입니다. 정통 콩피는 재료가 잠기도록 기름을 붓고 아주 오래 익히는 프랑스식 보존 조리법인데, 가정에서 그대로 하기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적은 기름으로 20분, 이름도 '콩피 스타일'이라고 붙였습니다. 흉내 낼 수 있는 데까지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솔직하게 비워 둔 태도가 제목에 그대로 드러나요. 근위의 질긴 막을 칼로 저며 내는 손질 사진이 실려 있는 것도 고마웠습니다. 손이 잘 가지 않던 재료라 그 한 컷이 실제로는 가장 큰 도움이 될 것 같더군요.


버리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콩피에 썼던 기름은 감자를 굽는 데 다시 쓰이고, 마무리로 살짝 데워 샐러드 위에 두르는 것까지 이어집니다. 소고기 자투리살은 리예트가 되었다가 감자와 섞여 크로켓 속으로 들어가고요. 레시피마다 냉장 보관 며칠이라고 작은 상자에 적어 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처음부터 남기고 다시 꺼내 먹는 걸 전제로 짜인 책이라는 뜻이니까요.


가장 마음에 남은 페이지는 뜻밖에도 프렌치와 거리가 먼 쪽이었습니다. 소고기 우엉 생강 조림. 우엉을 연필 깎듯 얇게 어슷썰라는 설명이 붙어 있고, 소개 문장에는 만든 다음 날 맛이 더 배어들고 식어도 맛있으니 도시락으로도 좋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이 책 전체의 성격을 대신 말해 주는 것 같았어요. 다음 날 더 맛있어지는 음식을 알려주는 요리책은 결국 오늘 저녁 한 끼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그 조림에 지단 채와 밥을 섞어 삼각형으로 뭉치면 다음 날 주먹밥이 됩니다.


다만 크로켓 페이지에서는 한 번 멈칫했습니다. 제목은 구운 크로켓인데 마지막 단계에는 튀김기름에서 노릇해질 때까지 튀긴다고 되어 있어요. 빵가루를 미리 볶아 쓰는 오븐식 조리와 튀김 조리 사이 어디쯤인 것 같은데, 원서 표기의 문제인지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차이인지는 알기 어려웠습니다. 사소한 대목이지만 요리책은 문장 한 줄이 곧 동선이 되는 책이라, 이런 부분은 조금 더 또렷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았어요.


리예트 챕터에는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차갑게 잘 식히면 버터가 굳으면서, 폭신하게 완성됩니다." 왜 이 음식이 식혀야 하는 음식인지를 길게 늘어놓지 않고 한 줄로 정리해 버립니다. 프라이팬 하나로 10분이면 된다는 리예트가 덩어리 고기 책 한복판에 놓여 있는 것도 저자 나름의 배려로 읽혔습니다.


사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네요. 완성된 접시가 페이지마다 큼직하게 들어가 있고, 손질하고 끓이는 중간 과정도 사진으로 이어집니다. 글자만 따라가는 책이 아니라 넘기는 재미가 있어요.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컷이 여럿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밥상에 바라는 게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가짓수를 늘리기보다 하나를 제대로 익혀 접시에 담아 내고 싶어지는 쪽으로요. 이 책이 위로가 되는 지점도 거기 있었습니다. 재우고, 넣어 두고, 그다음은 도구에 맡기라고 말해 주니까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 왔지만 읽고 나서 냉장고 문을 한 번 열어 보게 만드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 한 권이 그랬습니다.


불 조절에 몇 번 실패한 뒤로 큰 고깃덩이를 슬며시 피해 온 분이라면 얻어 갈 게 많을 겁니다. 손님상 메뉴가 늘 비슷해서 고민이라면 응용 레시피 쪽만 훑어도 실마리가 잡힐 거예요. 이미 수비드 장비를 갖추고 저온 조리에 익숙한 분에게는 새로운 정보가 그리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처서가 지나면서 저녁 공기가 슬쩍 달라졌습니다. 아직 한낮은 덥지만 곧 주방에 오래 서 있어도 견딜 만한 계절이 올 테고, 그 전까지는 차가운 오차즈케 쪽이 어울리겠지요. 여름 끝과 가을 초입을 한 권 안에서 오갈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지금 꺼내 보기 좋은 도서입니다.


밥솥에 맡기고 하룻밤 기다리면 되는, 다음 날 더 맛있어지는 고기 요리 55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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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범죄실록 - 조선을 뒤흔든 범죄, 수사, 재판 이야기
정명섭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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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가 먼저 말을 겁니다. 미색 한지 같은 바탕 위에 먹으로 그은 소나무 가지, 그 아래 갓을 쓰고 돌아선 흰 도포 차림의 뒷모습. 여기까지는 눈에 익은 사극 한 장면인데, 도포 자락 끝과 발치에 붉은 얼룩이 번져 있습니다. 표지 아래쪽 붉은 띠에는 범죄로 들추어낸 조선의 민낯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고요. 단정한 먹그림에 핏자국 하나를 얹어 놓은 셈이라, 정명섭 작가가 이 한 권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표지에서 대충 짐작이 됩니다.


구성은 다섯 갈래입니다. 포도청과 포교, 오작인과 검시, 의금부와 국문, 한양에서 벌어진 잔혹한 사건들, 그리고 범죄 언저리에서 살아간 사람들. 판형도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읽는 호흡이 편했습니다. 다만 편하게 넘어가는 페이지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편하지 않아요.


가장 오래 붙들려 있던 대목은 2부의 오작인이었습니다. 살인사건이 나면 시신을 살펴 사인을 밝히던 사람들인데, <경국대전>에는 이들의 직위나 녹봉 규정이 없습니다. 국가가 반드시 필요로 하면서도 법전 안에 자리 하나를 내주지 않은 직책이라는 뜻이지요. 검시는 수령이 직접 지휘해야 하는 중대한 공무였고, 아전에게 떠넘긴 사실이 드러나면 관직에서 영원히 추방될 만큼 무겁게 다뤄졌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수령은 지휘봉만 쥐었고, 손을 움직인 쪽은 오작인이었어요.


저자는 여기에 담담한 한 줄을 얹습니다.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어렵고 힘든 일은 항상 가장 아랫사람에게 주어졌다."


시신을 만지는 일이라는 이유로 불결하다는 인식과 귀신이 붙는다는 미신에 시달렸고, 실록에도 승정원일기에도 이름이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살인사건이 터질 때마다 수령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오작인이었다고 하니, 천대받으면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자리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죽은 사람의 몸에 남은 흔적을 읽어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을, 정작 자기 억울함은 어디에도 적지 못한 이들이 감당했다는 사실이 오래 남았어요.


4부에서 만난 개춘의 이야기는 읽는 속도를 늦추게 합니다. 1533년 용산강에서 대여섯 살 여자아이가 두 발이 잘린 채 발견된 사건인데, 저자는 잔혹함을 전시하는 쪽으로 가지 않습니다. 아이가 전해 가을에 집을 나와 겨울을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다는 것, 데려갔다가 도로 버린 사람이 한 명이 아니었다는 것, 조사가 끝내 미궁에 빠졌다는 것을 차례로 적을 뿐이에요. 억울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종이 조사를 멈춥니다. 무고를 막으려던 신중함이 결과적으로 피해 아동을 놓아버린 자리인데, 저자는 이 충돌을 따로 지적하지 않고 지나갑니다. 대신 이렇게 닫아요.


"두 발목이 잘린 개춘이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았다."


같은 시대에 청계천 주변과 성문 근처에서 버려진 아이들이 여러 차례 발견되었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영조가 자휼전칙을 두어 국가가 거두려 했지만 실효는 제한적이었고요. 아이를 버린 부모의 사정으로 지목되는 것이 극심한 생활고와 신분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물려주느니 차라리, 라는 마음 앞에서는 뭐라 정리할 말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5부의 외지부 장은 결이 조금 다릅니다. 글을 모르거나 법에 어두운 백성을 대신해 소장을 써주고 소송을 대리하던 사설 법률가들인데, 조선은 이들을 단속했습니다. 명분은 소송을 조장한다는 것이었어요. 1478년에는 붙잡아 가족과 함께 변경으로 보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는데도 몇 년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납니다. 법을 잘 아니 법망을 빠져나갔고, 소송이 계속되는 한 필요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봅니다.


이 장에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부분은 하의삼도 이야기입니다. 왕실과 연결된 가문이 섬 주민들의 땅에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시작된 다툼이 300년을 갔습니다. 1723년 주민들이 수백 장의 문서를 들고 한성부까지 올라갔지만 서류에 관아 인준이 없다는 이유로 패소했어요. 서류의 형식을 아는 사람이 곁에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붙인 문장은 짧습니다.


"법은 강한 자의 편이었다."


윤선도가 노비 소송에 직접 뛰어들어 상대편 외지부를 맹비난한 대목도 흥미롭게 읽힙니다. 어부사시사를 쓴 문인의 다른 얼굴이 거기 있어요.


읽으면서 갸웃했던 지점도 있습니다. 저자는 외지부의 후예가 훗날 독립운동가의 법정을 지키는 변호사로 이어졌다고 마무리하는데, 이야기로는 시원하지만 그 사이 갑오개혁 이후 근대 법제가 통째로 이식된 과정이 꽤 얇게 처리된 인상이었어요. 두 흐름을 곧장 하나로 잇기에는 건너뛴 계단이 있어 보입니다. 오작인 장도 비슷합니다. 하찮으나 존엄하다는 소제목을 걸어두었지만 실제로 인용된 실록 기록은 아이를 버리거나 신체 일부를 팔았다는 어두운 사례 쪽에 몰려 있어요. 기록 자체가 남지 않은 직업이니 저자로서도 어쩔 수 없었겠으나, 존엄이라는 단어를 받쳐줄 근거는 조금 더 있었으면 싶었습니다.


그런 아쉬움에도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사건의 자극에서 멈추지 않고 그 뒤의 구조를 보려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염매 같은 이야기를 다룰 때도 성호사설은 관찬 사서가 아니어서 진위를 알 수 없다고 먼저 밝히고 넘어가요. 그런 태도가 있어서 뒤의 서술을 믿고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 남은 건 사건 목록이 아니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검시관, 이후의 삶이 적히지 않은 아이, 무뢰배로 불리며 쫓겨 다닌 대리인. 조선의 사법 체계가 제법 촘촘했다는 사실과, 그 촘촘한 그물이 끝내 건지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란히 놓입니다. 광화문역 8번 출구 근처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장예원 표지석만 남아 있다는 대목을 읽고는, 오늘 지나다니는 길 아래에 그런 이야기가 깔려 있구나 싶어 잠깐 멈칫했어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책과 마음이 불편해지는 책이 있는데, 이 한 권은 후자였고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늦더위가 물러가려다 만 8월 끝자락에 읽기 좋은 책이었습니다. 서늘한 이야기들이 많은데도 이상하게 읽고 나면 마음이 차가워지지만은 않아요.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라는 원칙을 지키려 애쓴 사람들이 그 안에 분명히 있었으니까요. 가을로 넘어가기 전, 역사책 한 권을 천천히 읽고 싶은 분이라면 목차 어느 부에서 시작해도 좋을 겁니다. 사극에서 본 조선과 실제 기록 속 조선의 간격이 궁금했던 분께도 잘 맞을 거예요.


조선의 범죄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기록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이 남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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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을 읽는 40가지 이야기 - 중동으로의 첫 발걸음
박현도 외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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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이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무게를 가늠하는 것이었습니다. 416쪽, 손바닥에 얹으면 제법 묵직합니다. 표지를 펼치기도 전에 며칠 만에 해치울 책은 아니겠다는 짐작이 들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읽었어요. 목차 순서를 지키기보다 눈에 걸리는 제목부터 펼치는 식으로, 여러 날에 나눠서요.


표지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습니다. 중동을 다룬 도서라면 으레 모래빛이나 황토색을 떠올리게 되는데 <중동을 읽는 40가지 이야기>는 짙은 초록을 깔았습니다. 그 위에 아치형 창을 내고 흰 기둥과 금빛 장식, 물에 비친 반영을 담았어요. 열기가 아니라 그늘과 물의 서늘함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아래쪽에 적힌 '낯선 중동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안내서'라는 문구와도 결이 맞고요. 디자인 하나로 이미 한 가지 선입견을 건드리고 시작하는 셈입니다.


책의 앞머리, 중동을 보는 세 가지 시선이라는 대목에서 저자들은 뜻밖에도 축구로 문을 엽니다. 그라운드의 함성, 2002년의 기억, 국가대항전이 있는 날 치킨집 배달이 밀리고 아파트 곳곳에서 환호와 탄식이 흘러나오는 풍경. 그렇게 익숙한 자리로 독자를 데려다 놓은 다음, 방향을 틀어 극동과 중동이라는 말 자체를 뜯어봅니다. 극동은 동쪽의 끝, 중동은 동쪽의 중앙. 두 이름 모두 유럽이 기준점입니다. 함께 실린 지도에는 서양이 왼쪽에 있고 근동과 중동과 극동이 차례로 놓여 있는데, 캡션이 유럽 관점으로 본 극동과 중동이에요. 우리가 무심코 써온 지명이 실은 남의 자리에서 매긴 좌표라는 사실이 한 장으로 드러납니다.


여기서 저자들이 내놓는 설명이 이 챕터의 힘입니다. 언어도 종교도 민족도 다른 한국과 중국, 일본, 몽골, 시베리아를 한데 묶어 극동아시아라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위치가 바뀝니다. 설명을 듣는 쪽에서 같이 이름 붙여진 쪽으로요. 챕터를 닫는 두 문장이 그 감각을 그대로 받아냅니다. "중동은 멀지 않다. 중동이 멀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우리 마음속 낯설음의 거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유럽 중심의 명칭임을 그렇게 분명히 짚어놓고 저자들은 "어쨌든 이 고착화된 표현을 우선 빌려 써 보자."라며 넘어갑니다. 입문서라는 성격을 생각하면 현실적인 선택이고, 대안을 만드는 일이 이 책의 몫도 아니겠지요. 그래도 문제를 제기한 손끝에서 바로 관용을 인정하고 지나가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 남더군요. 초반부터 지명과 분류가 촘촘하게 몰려 있어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다소 빡빡한 구간이기도 합니다.


중반을 넘어서면 석유가 더 이상 나지 않는다면이라는 물음이 나옵니다. 도입은 또 화려합니다. 39억 원짜리 하이퍼카를 경찰차로 굴린 아부다비, 3백조 원을 들여 치른 카타르 월드컵. 그러고 나서 그 부의 내부를 보여줍니다. GCC 산유국의 석유산업이 1930년대 이후에야 개발되기 시작했다는 것, 지금의 풍요가 백 년이 채 안 된 일이라는 것. 카타르는 총인구 311만 명 중 자국민이 10% 남짓이라 자원 수입이 고스란히 돌아가고, 대학원 학비까지 국가가 대줍니다. 반면 사우디는 인구가 크고 자국민 비율도 60% 수준이라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이 적을 수밖에 없다고 적혀 있어요. 그래서 저자들은 상상할 수 없이 많은 부를 가진 사람부터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까지 있으니 다층적인 시선으로 아랍 산유국을 바라봐야 한다고 씁니다. 부자 나라라는 한 단어로 눌러놓았던 것이 여러 겹으로 갈라지는 순간입니다.


이 장에서 잠깐 손이 멈춘 곳은 따로 있었습니다. 1970년대 유가가 오르던 시절 우리나라에서도 중동 건설 붐을 따라 많은 노동자가 사막으로 떠났다는 문장이 지나갑니다. 그 이야기를 어른들 입을 통해 들으며 자란 세대라면 이 한 줄이 남의 나라 통계로만 읽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때 그곳으로 갔던 사람들의 시간과, 지금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인도와 방글라데시와 필리핀 사람들의 시간이 한 문단 안에서 겹칩니다.


그 겹침을 정면으로 다루는 곳이 뒤쪽의 이주민 교차로 이야기입니다. 사막 위에 발자국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문장으로 조용하게 시작해서, 떠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나라를 나란히 놓아요. 2011년 이후 시리아를 떠난 수백만 명, 2015년 바닷가에 떠밀려온 세 살배기 쿠르디의 사진, 2020년 베이루트 항구 폭발 이후 레바논을 빠져나간 의료진과 기술직들. 예멘 사람들의 긴 여정을 두고 저자들은 그것이 단순한 탈출이면서 동시에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려는 인간적인 결단이기도 하다고 적습니다. 떠나는 이를 피해자 자리에만 두지 않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으로 세우는 문장이라 오래 남았습니다.


받아들이는 쪽 이야기도 미화하지 않습니다. 걸프 산유국이 해외에서 공급받는 노동력은 약 2천 5백만 명 규모이고, 두바이와 아부다비는 외국인이 인구의 85% 이상입니다. 건설 현장부터 호텔과 가정 서비스까지 이들 없이는 나라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놓고, 곧바로 열악한 숙소와 불안정한 고용, 출국을 제한하는 제도를 짚습니다. 경제적 풍요 뒤에 감춰진 이야기가 이주 구조의 또 다른 그림자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솔직히 말하면 이 부분은 한 문단으로 끝나는데, 앞에서 월드컵 개최 비용을 3백조 원이라고 그토록 구체적으로 적어둔 것에 비하면 저울이 조금 기울어 보였습니다. 네옴시티를 100% 재생에너지로 짓겠다는 계획이나 나라별 비전 연도를 발표 그대로 옮겨둔 대목도 마찬가지고요. 다만 40가지 이야기를 한 권에 담는 책에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테고, 여기서 걸린 물음을 들고 다른 책으로 건너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요르단과 레바논이 오랜 시간 난민 수용의 부담을 짊어져 왔고, 일부 국가에서는 국내 정치 갈등과 얽혀 난민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변하기도 한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한국을 언급하지 않지만, 최근 몇 해 사이 우리 사회가 통과해온 논쟁을 떠올리면 남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습니다. 이 책이 좋은 지점은 그런 연결을 독자에게 맡겨둔다는 데 있어요. 결론을 대신 내려주지 않고, 다층적으로 보라는 요구만 반복해서 남깁니다.


인용한 통계마다 퓨 리서치 센터와 유엔, OPEC, IMF 같은 출처를 각주로 밝혀둔 점도 신뢰가 갔습니다. 무슬림 인구 증가 그래프를 보여준 다음에 인구수 증가가 곧바로 절대적인 힘이나 헤게모니 장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스스로 제동을 거는 문장에서는 저자들의 태도가 그대로 보였고요. 요즘 이슬람 인구 통계가 소비되는 방식을 생각하면 의도적으로 넣은 안전장치일 겁니다.


이번 한 권은 읽는 방식 자체를 바꿔놓았습니다. 마감에 맞춰 완독하고 정리하는 대신, 40개의 이야기를 며칠에 걸쳐 흩어 읽고 그중 몇 개를 다시 펼치는 쪽을 택하게 됐거든요. 두께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챕터마다 다 아는 줄 알았던 것이 하나씩 흔들려서이기도 했습니다. 뉴스에서 중동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전쟁과 석유 두 글자만 떠올리던 분이라면 이 안내서가 그 두 글자 사이에 놓인 나머지를 꽤 넓게 채워줄 겁니다. 여행 계획이 있는 분에게도, 아이가 세계사를 배우기 시작해 같이 읽을 교양서를 찾는 집에도 어울리겠고요. 무엇보다 이름을 붙이는 쪽과 불리는 쪽이 다르다는 감각을 한번 겪어보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처서를 앞두고도 낮 볕은 아직 뜨겁습니다. 그래도 해가 지고 나면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온도가 며칠 전과 다르지요. 여름이 물러가는 자리에서 이 초록 표지를 다시 봅니다. 뜨거운 땅을 다룬 책인데 서늘한 물그림자를 앞세운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낯선 곳을 이해하는 일은 온도를 낮추고 천천히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되니까요.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곁에 두고 남은 이야기들을 마저 읽어볼 생각입니다.


사막과 석유라는 두 단어로 묶어두었던 곳을 40개의 이야기로 하나씩 풀어내는, 낯설음의 거리를 좁혀주는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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