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어떻게 불안을 이기는가 - 고요한 행복에 이르는 에피쿠로스의 지혜
박은미 지음 / 서사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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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붉은 배경 한가운데,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손에 묻은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붉은 옷과 청록의 배경이 서로를 밀어내는데 정작 제목 글씨는 차분한 회청색으로 눌려 있어요. 불안을 감추지 않고 화면 정면에 세워둔 다음, 그것을 다루는 말은 낮은 목소리로 하겠다는 태도. 표지를 처음 봤을 때 받은 인상이 그랬고, 다 읽고 나서도 그 인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철학은 어떻게 불안을 이기는가>는 에피쿠로스가 남긴 백이십여 개의 구절 가운데 스물다섯 개쯤을 골라 오늘의 말로 풀어낸 책입니다. 손에 들면 한 손에 잡히는 판형에 두께도 적당해서, 진도에 부담이 없습니다. 저자 박은미는 철학박사이면서 '알아들을 수 있는 철학'을 모토로 활동해온 철학커뮤니케이터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문장에서 그 이력이 그대로 만져집니다. 개념어를 쌓아 올리는 대신 말을 걸듯 씁니다. 각 편 끝에는 질문 한 줄이 놓여 있어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없어진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잃기 싫은 것이 무엇인지 묻는 식입니다.


가장 먼저 발목이 잡힌 대목은 2장의 '부재'였습니다. 저자는 사람이 좋아지는 것에는 쉽게 적응하지만 나빠지는 것에는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불행해지기 쉬운 이유를 찾습니다. 좋아지는 쪽은 적응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익숙해지니 좋은 줄을 모르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있을 때는 있어서 좋은 점보다 있어서 불편한 점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없을 때는 없어서 불편한 점만 크게 보인다는 관찰이 이어집니다. 결국 곁에 없어져야 그 가치를 알게 되고, 늘 뒷북을 치며 후회하게 된다는 말인데, 이 문장 앞에서는 변명할 여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 챕터에서 저자가 꺼내는 사례가 하필 직장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취직했는데 이걸 위해 그렇게 애썼나 싶을 정도로 허망하다고 말한 사람의 이야기예요. 저자는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자연스럽다고 먼저 인정한 뒤에, 월급이 없어서 힘들었던 시간을 생각해보라고 권합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원했던 것이었는지 잊지 않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라는 말과 함께요. 챕터는 저자가 가장 좋아한다는 에피쿠로스의 구절로 닫힙니다.


"멀리 있는 것에 대한 욕심 때문에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무시하지 말라. 지금 누리고 있는 그것도 당신이 한 때 열망했던 것이었음을 잊지 말라."


이 책이 다독임에만 기울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건 바로 다음 챕터, '인식'에서였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하는 리더가 옆에 쓴소리하는 참모를 두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 역할을 자기 안에도 마련해두라고 권하는 대목이에요.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말한 악마의 변호인을 끌어와, 어떤 사람의 입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 사람의 논리를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못을 박습니다. 그게 안 되면 아직 악마의 변호인을 두지 못한 것이라고요. 예측력을 높이는 방법으로는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에 일부러 가중치를 얹으라고 조언하는데, 나를 잘 아는 친구나 인공지능에게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을 말해달라고 부탁해보라는 제안까지 나옵니다. 고대 철학서를 읽다가 이 문장을 만나니 조금 웃음이 났고, 동시에 실제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가 들수록 자기 판단을 검토받을 자리가 줄어드는데, 이 챕터는 그 빈자리를 정확히 가리킵니다. 논의에서 패한 사람이 새로 배운 바가 많으니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에피쿠로스의 말도 여기 함께 놓여 있습니다.


책의 무게가 확 실리는 곳은 3장입니다. 저자는 죽음을 다루면서 물리학자 김상욱의 이야기로 문을 엽니다. 동료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져 있을 때 돌아가신 분이 원자로는 우리 곁에 있다는 생각이 위로가 되었다는 말을 옮기고, 그 표현이 에피쿠로스의 죽음관을 떠올리게 한다고 연결해요. 에피쿠로스에게 죽음은 원자 배열의 해체이고,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서 생기는데 죽음은 감각의 박탈이니 두려워할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구절이 그 자리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탄생 이전의 비존재가 문제되지 않는다면 죽음 이후의 비존재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루크레티우스의 물음도 따라붙고요.


솔직히 말하면 이 논변만으로는 마음이 다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그 지점을 먼저 짚어줍니다. 에피쿠로스의 말을 다 받아들여도 지금 누리는 모든 것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은 슬픔을 준다고, 죽어서는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 있는 자신은 그 미래를 알고 있으니 삶의 허무가 슬픈 것이라고 적어요. 애써 모아둔 자산과 집착했던 관계와 청춘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는 생각 앞에서 사람이 무력해진다는 서술도 함께 나옵니다. 읽는 사람의 반론을 저자가 대신 말해주는 구성이라, 오히려 그다음 문장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다음이 이 책의 승부처입니다. 저자는 '덧없다'는 말을 한 번 더 뒤집어요. 덧없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하나의 고정관념일 수 있다고, 덧없음을 허무해하는 마음조차 덧없을 수 있다고 씁니다. 지금 나를 짓누르는 허무함이며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흘리는 눈물이며 왜 나만 운이 없냐고 억울해하는 마음까지도 길어야 몇십 년 뒤면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대목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슬퍼하는 일조차 덧없기에 비로소 오늘 눈앞의 평온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저자의 말이 그 가벼움의 정체였던 것 같아요. 불교의 방하착을 끌어와 손에 쥔 모래를 흘려보내듯 마음을 놓아버릴 때 편안해진다고 풀어내는 흐름도 자연스러웠습니다. 허무를 반박해서 이기는 방식이 아니라 끝까지 통과해서 지나가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제목의 '이기는가'가 어떤 뜻인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에피쿠로스 본인의 임종 편지를 읽는 자리에서는 꽤 오래 시선이 멈췄습니다. 극심한 통증을 열거한 다음에 이렇게 이어지거든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우리가 함께 나눈 철학적 대화들을 떠올리며 내 영혼이 느끼는 기쁨 덕분이지."


아타락시아를 말한 철학자가 자기 주장에 어울리는 마무리를 했다는 저자의 한마디가 과장 없이 들렸습니다. 이론을 논증으로 증명하는 대신 마지막 태도로 증명한 셈이니까요. 죽음 이후는 분명하지 않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느라 지금을 놓치는 것은 분명한 손해라는 문장도 이 장 어딘가에 있습니다. 손익을 따지는 말투인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실감이 컸어요.


아쉬운 대목도 있었습니다. '부재' 챕터에서 밀당을 소재로 끌어온 부분은 논지에 잘 붙지만, 철학책의 결 안에서는 살짝 겉도는 느낌이 있었어요. 저자도 밀당이 전략이 되는 것은 씁쓸한 일이라고 인정하며 방향을 돌리니 읽는 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습니다. 더 크게 남은 물음은 다른 쪽입니다. 덧없음을 끝까지 인정하면 해방감이 찾아온다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그 해방감이 실제 상실 앞에서 얼마나 버텨주는지에 대해서는 책이 답을 아껴둡니다. 아마 답할 수 없는 영역이겠지요. 다만 책장을 덮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것도 그 미결의 자리였습니다. 저자의 글은 위로를 건네되 결론을 대신 내려주지는 않고, 각 편 끝의 질문으로 공을 다시 넘깁니다. 그 방식이 이 책의 성격에 맞다고 생각해요.


읽는 동안 떠오른 얼굴들이 있습니다. 성과와 평가를 기준으로 오래 판단해온 사람, 자기 결정을 검토해줄 누군가가 필요한 사람, 부모 세대의 노년을 지켜보며 죽음이라는 단어를 처음 실감으로 만난 사람. 퇴직금으로 무엇을 해볼까 궁리하며 유리한 가능성만 보고 있는 이에게는 '맑은 정신의 추론'을 다룬 대목이 특히 서늘하게 읽힐 겁니다. 고대 철학이 어렵게 느껴져 미뤄두었다면, 이 한 권이 입구로 삼기에 무리가 없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네요.


이 도서는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았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정리하는 일이 순서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아 며칠을 두고 다시 펼쳤습니다. 마감을 위해 읽는 책과 저를 향해 읽게 되는 책이 다르다는 걸 알려준 한 권이었어요.


9월 중순의 공기가 아침저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여름 내내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슬며시 물러나는 계절이라, 있음의 가치를 뒤늦게 알아차리는 인간의 습성을 이야기한 이 책과 시기가 잘 맞았습니다. 창을 열어두면 바람이 한 자락 들어오는 저녁, 그 정도로도 하루가 괜찮아진다는 말을 이제는 조금 믿게 되었습니다.


죽음과 덧없음을 끝까지 인정하고 지나갈 때 오늘의 평온이 손에 남는다는 것을, 에피쿠로스의 말과 저자의 담백한 문장으로 확인하게 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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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표 2026-09-16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es24에서 3년간 120개 이상의 서평을 작성하며
책을 통해 많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서평을 작성하면서
책의 내용을 되새기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번에 신청한 책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기대하고 있습니다.
책을 통해 성장하는 경험, 계속해서 이어가겠습니다!

https://sarak.yes24.com/blog/boai2hy/review-view/20698572
< 사회복지사 마스터플랜 >
https://sarak.yes24.com/blog/boai2hy/review-view/20545304
< ADHD 농경사회의 사냥꾼 >
https://sarak.yes24.com/blog/boai2hy/review-view/20502390
< 운명이 건네는 호의, FAVOR >
https://sarak.yes24.com/blog/boai2hy/review-view/19960472
< 사무실의 도른자들 >
https://sarak.yes24.com/blog/boai2hy/review-view/18493270
< 업스트림 >
 
딸깍! 제미나이 & 노트북 - 초보자도 AI&AX 전문가로 만들어 주는 50가지 레시피
반병현.황현목 지음 / 생능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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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초록과 흰색뿐인 표지에 김이 오르는 종이컵 하나가 큼직하게 앉아 있습니다. 뚜껑은 반쯤 열려 있고, 그 위로 붙은 빨간 스티커에는 '딸깍!' 한마디. 손글씨체로 적힌 '50가지 레시피'까지 보고 나면 기술서라는 생각보다 부엌 선반에 꽂아 두는 조리법 책 쪽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은 도서인데, 교재 판형에 두께도 과하지 않아 처음 펼칠 때 부담이 적었습니다.


반병현, 황현목 두 저자가 쓴 <딸깍! 제미나이 & 노트북>은 구글 Gemini와 Gemini Notebook을 업무에 붙여 쓰는 방법을 다룹니다. 겨냥하는 독자가 분명합니다. 서류에 파묻힌 직장인과 공무원, 그리고 AI가 그럴듯한 거짓말을 내놓는 바람에 한 번 실망하고 손을 뗀 사람들이죠. 앞부분은 접속과 계정, 요금제 같은 '밑준비' 열 항목으로 조용히 시작하고, 그다음부터 레시피 번호가 붙은 실습이 쭉 이어집니다.


책의 성격이 확실히 잡히는 지점은 Notebook을 소개하는 9장입니다. 참고자료를 올려 주지 않으면 대화조차 안 되는 서비스라고 먼저 선을 긋습니다. 삽화에서는 로봇이 의자에 축 늘어져 "참고자료를..주세요..."라고 중얼거리고, 팔짱 낀 담당자가 세계 1위라며 왜 아무것도 모르냐고 쏘아붙입니다. 그러다 자료가 들어가면 "순식간에 천재로 돌변합니다"라고 적어 두었어요. 지원하는 파일 형식을 네 줄 표로 빼곡하게 보여 준 다음, 종류를 외울 필요는 없다고 곧바로 정리해 버리는 방식도 인상적입니다. 실무자 입장에서 정작 걸리는 대목은 그 아래 한 줄이었습니다. 한컴오피스 HWP는 인식되지 않으니 워드나 PDF로 바꿔 올려야 한다는 안내. 공공기관과 국내 기업의 문서 환경을 떠올리면 이 문장이 사실상 가장 높은 문턱입니다.


같은 챕터 끝에서 저자는 웹에서 소스를 검색해 오는 기능을 소개하자마자 되도록 쓰지 말라고 권합니다. 편리한데도 말이죠. AI가 찾아온 정보를 다시 AI에게 근거로 넘기면 이 도구를 쓰는 의미가 퇴색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사람이 직접 검토하고 골라낸 자료를 올려야 답변이 정교해진다는 말을 덧붙이는데, 기능 설명서에서 갑자기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건너가는 순간입니다. 결국 도구가 좋아질수록 무엇을 읽히고 무엇을 덜어낼지 판단하는 몫은 사람에게 남는다는 뜻이겠지요.


11장에 실린 '해 본 적 없는 업무' 레시피는 보는 각도가 조금 다릅니다. 로봇 다섯이 책상을 둘러싸고 서명이 누락됐다, 명조체로 적어야 한다, 저장하라고 저장, 하며 동시에 소리치고 담당자는 서류 더미 속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습니다. 첫 업무를 받아 든 사람의 얼굴이라 낯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첫 수가 대단한 기술이 아니에요. 지방세 관련 법령과 조례 마흔여덟 건을 올려 둔 채, 업무를 어떻게 파악하면 좋을지 안내해 달라고 물으면서 "처음 맡는 업무야."라는 한마디를 붙입니다. 옆자리 선배에게 건네는 말투 그대로입니다. 이후 마인드맵으로 수십 개 문서를 네 갈래로 묶고, 필요한 노드만 펼쳐 보고, 인포그래픽 한 장과 실무 가이드라인 보고서, 발표용 슬라이드까지 뽑아내는 흐름이 순서도 한 장으로 정리됩니다. 요즘 공공기관 보도자료에서 자주 보이던 그 깔끔한 그림체가 대부분 이 도구의 결과물이라는 설명에는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바로 다음 레시피는 사회복지시설 사례를 다룹니다. 노인복지시설을 신축한 법인이 운영자금 때문에 1층 일부를 카페로 임대했고, 그 면적이 연면적의 5%가 안 되는데도 시청이 건물 전체에 재산세를 부과한 상황. 4컷 만화 마지막 칸에서 담당자와 민원인이 물음표만 띄운 채 서 있는 그림이 사안의 난감함을 압축합니다. 실제 공무원이 마주하는 사건에 비하면 이조차 매우 요약된 자료라는 단서도 달려 있어요. 이 챕터에서 오래 남은 것은 법령 해석 결과보다 곁에 놓인 두 조언이었습니다. 하나는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창을 내려두고 다른 일을 하거나 잠시 일어나 기지개를 켜라는 권유인데, 뒤에 "농담이 아닙니다"라고 못을 박고 그것도 실무자에게 필요한 역량이라고 씁니다. 다른 하나는 출처를 일일이 열어 소스와 답변이 서로 맞는지 확인하는 검증을 AI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고 규정한 대목입니다.


다만 책 전체를 덮고 나서 한 가지가 계속 걸립니다. 표지와 소개글은 칼퇴를 약속하는데, 6장 오디오 오버뷰 챕터의 삽화에는 밥 먹을 시간도 사치라며 더 배우고 더 일하겠다고 되뇌는 인물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저자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라는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일중독자라 부르며 이동 시간과 식사 시간까지 학습으로 채워 온 사람이 절약한 시간의 쓸모를 어디에 두는지는 끝내 명확하지 않습니다. 순서도의 마지막 두 칸, 퀴즈로 복습하고 오디오로 추가 학습하는 단계까지 성실히 따라가면 도구를 익히는 일이 또 하나의 업무처럼 불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효율을 올리는 방법은 충분히 배웠는데, 그렇게 번 시간을 쉬는 데 쓰겠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에필로그에서 AI를 잘 사용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되묻는 만큼, 그 답의 한쪽에 '덜 일하기'도 놓였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렇다고 한 권의 값이 깎이지는 않습니다. 부서가 바뀌어 낯선 규정 앞에 앉아 본 사람, 매뉴얼을 넘겨받고도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몰라 첫 장만 만지작거려 본 사람이라면 짚이는 대목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서평단으로 읽은 책 가운데 이렇게 곧바로 실무 화면을 열게 만든 도서는 드물었습니다. 화면을 따라 하는 쪽보다, 무엇을 읽히고 무엇을 버릴지 고르는 손이 결국 사람 몫이라는 문장 하나 때문에 기억에 남는 한 권이 되었습니다.


아침 공기가 서늘해지고 해가 짧아지는 요즘, 두툼한 이론서보다 이렇게 필요한 항목만 펼쳐 보는 안내서가 손에 잘 맞습니다. 컵에서 김이 오르는 표지가 계절과도 잘 어울리네요.


도구를 빠르게 익히게 해 주는 실습서이면서, 자료를 골라 담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고 말해 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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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곡선 - 인생의 손익분기점을 넘어야 돈이 나를 위해 일한다
안유화 지음 / 경이로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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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검은 바탕을 가르며 금빛 빛줄기가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휘어 오르고, 그 끝에 도시의 윤곽과 원화 기호가 흩어져 있어요. 제목이 가리키는 것을 그림이 그대로 받아 적은 셈입니다. 그런데 손에 들자 두께와 무게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며칠에 걸쳐 나눠 읽었고, 결과적으로 그 속도가 이 도서에 맞았습니다.


이야기는 오후 3시 14분에 도착한 문자로 시작합니다. 면담은 11분 만에 끝나고, 쉰셋의 김상철은 명예퇴직 통보를 받습니다. 그날 이후 그의 몸은 매일 새벽 3시 14분에 깨어납니다. 아내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했고, 90일 뒤 월급이 끊긴다는 사실과 32평 아파트에 함께 살고 있는 대출도 혼자 짊어진 상태예요. 잠에서 깬 그가 거실 식탁에서 노트북을 열고 빈 화면에 적은 두 줄이 이 책의 출발점입니다. 들어오는 돈, 나가는 돈.


들어오는 돈은 월급 세후 약 620만 원 하나였습니다. 나가는 돈을 대출 원리금부터 부모님 용돈까지 더해보니 635만 원. 연봉 1억을 받는 가계가 매달 15만 원씩 적자였고, 그 구멍은 명절 상여금과 성과급이 용케 덮어왔던 것입니다. 여기서 더 무거운 두 줄이 따라붙습니다. 퇴직 후 들어오는 돈 0원, 나가는 돈 635만 원. 30년 동안 회사의 매출과 원가와 손익분기점을 지겹도록 들여다본 사람이 자기 돈은 한 번도 그렇게 본 적이 없었다는 서술에서, 저는 읽는 속도를 늦췄습니다.


이 장의 문턱을 넘게 해주는 문장은 심리학에서 옵니다. 저자는 손실회피 연구를 끌어와, 새벽마다 깨우는 것이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위험을 알리는 경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적습니다. "두려움은 적이 아니다. 이름 없는 두려움이 적이다." 공포에 이름을 붙이면 신호가 되고, 신호가 되면 읽을 수 있고, 읽을 수 있으면 대응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갭 = 매달 나가는 돈 − 자산이 벌어다 주는 돈. 635만 원이라는 숫자는 여전히 잔인한데, 적어놓고 나니 막연한 공포보다 차라리 낫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날 새벽 인물이 얻은 것은 해답이 아니라 좌표였다고 책은 정리합니다.


중반으로 가면 할머니가 등장합니다. 시장에서 달걀을 사면 절반은 장바구니 아래 볏짚을 깔아 담고 나머지는 작은 보자기에 따로 싸서 어린 손자 손에 들려주던 분이에요. 왜 귀찮게 나눠 담느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보자기 매듭을 단단히 묶으며 답합니다. "상철아, 달걀은 한 바구니에 다 담는 게 아니다." "한쪽이 넘어져도 먹을 달걀은 남아야지." 쉰셋이 되어 돌아보니 그의 달걀은 월급과 회사, 아파트, 원화, 하나의 직장경력에 거의 다 담겨 있었습니다. 분산이라는 개념을 이론으로 먼저 배우지 않고 시장 바닥의 지혜로 먼저 이해시키는 순서가, 이 책이 독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한국 독자에게 가장 아프게 읽힐 대목은 집을 다루는 자리일 겁니다. 저자는 부모님 세대가 강조해온 집 한 채가 인생의 방패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먼저 인정합니다. 집은 주거 안정이고 가족이 머무는 공간이며 인생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까지 긍정한 다음에 조심스럽게 덧붙입니다. 집은 단단하지만 현금이 흐르지 않는다고요. 자산총액은 있어 보이는데 쓸 돈이 부족한 구조, 부동산은 있는데 자산소득이 0원인 현실. 그 진단 끝에 놓인 문장은 이렇습니다. "집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집만 믿지 말라는 뜻이다." 살던 집을 흔들라고 부추기지 않으면서도 할 말은 하는 절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 나이와 정면으로 겹치는 장은 따로 있었습니다. 나이에 따라 돈의 임무가 달라진다고 말하는 장에서, 저자는 40대와 50대를 가장 많이 벌고 가장 많이 새는 시기로 규정합니다. 문제는 새는 비용이 하나같이 다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고 해요. 아이 교육도 중요하고 집도 필요하고 부모도 챙겨야 하고 보험도 있어야 하니, 그 돈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빠져나갑니다. 고정비 점검표에 붙은 질문들이 꽤 날카롭습니다. 대출이 노후준비를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보험에 중복보장은 없는지, 이 교육비가 아이의 미래인지 부모의 불안인지. 매달 나가는 돈은 처음엔 작아 보여도 십 년이 쌓이면 무시할 수 없는 규모가 된다는 지적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50대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활주로라는 비유가 나옵니다. 비행기가 뜨려면 활주로가 필요하고 너무 짧으면 이륙하지 못하는데, 월급에서 자산소득으로 넘어가는 일도 그렇다는 겁니다. 통보를 받고 나서야 자기 활주로가 짧다는 걸 알았으니 공포가 컸다는 해석이 1장과 맞물려요. 현금과 안전자금, 연금, 경험을 활주로로 꼽은 것까지는 예상 범위였는데, 마지막에 정보 활주로가 들어 있어서 조금 놀랐습니다. 가족이 찾을 수 있는 계좌와 보험, 상조, 디지털자산 정보를 정리해두라는 항목이에요. 자산의 크기가 아니라 남은 사람이 그것을 찾을 수 있는지를 묻는 자리라, 이 책이 왜 생애자산이라는 말을 쓰는지 그제야 납득이 갔습니다.


물론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초반의 635만 원 계산은 퇴직 이후에도 그 지출 구조가 고스란히 유지된다는 전제로 잡혀 있습니다. 실제로는 자녀 학원비나 차량 할부처럼 몇 년 안에 사라지거나 조정될 항목이 섞여 있으니, 공포를 선명하게 만드는 장치로는 강력하지만 숫자 자체는 다소 극적으로 설계됐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세대별 처방도 명료한 만큼 규범적입니다. 30대 봉투 체계가 결혼과 출산, 양가 부모님 지원을 기본값으로 놓고 짜여 있어서, 비혼이나 1인 가구처럼 지금 우리 사회에서 드물지 않은 경로에 그대로 대입하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다만 가계 대차대조표와 점검표가 대부분 빈칸으로 남아 있는 건 오히려 이 책의 성격에 맞는 선택이라고 봅니다. 채우는 사람의 숫자가 들어가야 비로소 작동하는 도구니까요.


그동안 받아온 도서들 가운데 가장 실무적인 성격이었고, 동시에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책입니다. 읽기만 하고 덮으면 절반도 가져가지 못하는 구성이라, 뒤쪽 100일 프로젝트는 제 숫자를 넣어가며 천천히 따라가 볼 생각이에요. 재테크 지식을 정리해주는 안내서라기보다, 자기 가계를 한 번쯤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작업대에 가깝습니다. 월급 하나에 기대어 십수 년을 버텨온 사람이라면 어느 장을 펼쳐도 자기 이야기가 섞여 있을 테고, 이제 첫 월급을 받는 자녀와 나란히 읽어도 대화가 될 만한 대목이 많습니다. 실제로 책 속 부녀가 그렇게 대화하고요.


저자는 아버지의 입을 통해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나이가 쉰셋이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잖아. 늦었음을 인정하면서도 포기로 기울지 않는 문장이라, 제게는 이 책 전체의 온도로 남았습니다. 50대를 포기의 시기가 아니라 전환의 시기로 부르는 대목도 같은 결이고요. 그리고 장을 닫는 한 줄이 오래 남습니다. "돈은 나이를 알아야 한다."


여름의 열기가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서늘해지는 9월입니다. 한 해의 남은 달들을 헤아려보기 좋은 시기이고, 숫자를 마주할 결심을 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때라고 생각해요. 곡선은 단번에 꺾이지 않습니다. 다만 방향은 오늘 정할 수 있습니다.


막연한 불안을 숫자로 바꾸어 자기 인생의 손익분기점을 계산하게 만드는, 천천히 읽고 오래 붙잡아야 하는 생애자산 설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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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 난 아이는 어떻게 자라는가 - 교육이 답이라는 거짓말
롭 헨더슨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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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원을 만들어 서던 장면부터 꺼내고 싶습니다. 케임브리지에 도착한 첫 주, 게이츠 장학생 아흔 명이 둘러앉아 아이스브레이커 게임을 합니다. 사회자가 쪽지를 읽고 해당되는 사람이 가운데로 나가는 방식이었고, 뒤쪽 질문은 두 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가, 로드 트립을 해본 적 있는가 같은 것들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첫 질문이 어렸을 때 반에서 장난꾸러기였느냐였습니다. 저자는 반사적으로 걸어 나갔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흔 명 가운데 그 자리에 선 사람은 자기뿐이었습니다. 사다리 꼭대기에 닿은 사람이 그곳에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이 소속감이 아니라 거리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산산조각 난 아이는 어떻게 자라는가>의 표지는 형광 연둣빛 바탕에 보라색 글자를 세로로 세워 놓고, 그 글자들을 일부러 잘라 흩어 놓았습니다. 제목이 말하는 상태를 조판이 먼저 보여 주는 셈이죠. 아래쪽 검정 띠에는 "계층의 사다리에 관한 가장 솔직한 보고서"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두께도 있고 다루는 무게도 상당해서, 처음 받아 들었을 때부터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야 할 책이라고 짐작했어요. 실제로 그렇게 읽었고, 그렇게 읽는 편이 맞았습니다.


책의 문을 여는 장은 2018년 예일대 졸업식 날에서 출발합니다. 인생의 정점을 먼저 세워 둔 다음, 곧바로 세 살 무렵의 첫 기억으로 내려갑니다. 어둠 속에서 엄마 무릎을 붙잡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던 경찰관 두 사람, 그리고 흰 복도에서 초콜릿 우유를 흘리고 도와달라고 엄마를 쳐다보는 장면이요. 엄마가 팔을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는 수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저자는 문단 끝에 한 문장으로 툭 놓아둡니다. 감정을 크게 쓰지 않는데 읽는 쪽에서 감정이 올라오는 서술 방식이 이 책 전체를 지탱합니다.


이어지는 대목에는 위탁 보호 통계가 줄줄이 나옵니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최소 다섯 곳 이상의 가정에 배정되고, 시스템을 떠나는 연령의 중앙값은 일곱 살이라는 숫자들이요. 그 뒤에 저자는 자신이 그 통계들을 뒷받침하는 개별 사례라고 적습니다. 아이를 특정 가정에 정들지 않게 하려고 미리 이 집 저 집 돌리는 관행에 대해서는 이렇게 씁니다. "이 전략은 아이들로부터 불필요하게 안정감을 박탈할 뿐이다." 선의로 설계된 제도가 개별 아이에게는 손상으로 돌아오는 구조를 보여 주는 문장입니다.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장면은 급식 줄입니다. 등교 첫날 식사 카드를 요구받았는데 그런 게 없었고, 받아 온 신청서를 위탁 어머니에게 가져갔더니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아주머니가 그걸 돈을 내라는 서류로 오해해 서명해 주지 않습니다. 무료 급식 등록 신청서였는데도요. 아이는 오해의 내용까지는 이해하지 못한 채 점심을 먹지 못할 거라는 사실만 이해합니다. 그런데도 매일 줄에 섰다고 해요. "마법처럼 시스템에 내가 등록돼 있기를 바라며." 서류를 읽고 처리하는 능력 자체가 자본이라는 이야기를 이 책은 다섯 살 아이의 점심시간으로 먼저 보여 줍니다. 나중에 급식 아주머니가 카드를 건네준 뒤에 적어 둔 문장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점심을 먹을 수 있어 기뻤고, 조금 덜 외로웠고, 배가 고프지 않으니 수업에도 더 잘 집중할 수 있었다는 순서요. 설명을 붙이지 않고 결과만 나열하는데 그 안에 급식의 의미가 다 들어 있습니다.


책의 중심 개념인 '사치 신념'은 뒤쪽에서 완성됩니다. 상층 계급에는 거의 아무런 비용 없이 지위를 부여하는 반면, 하층 계급에는 종종 대가를 치르게 하는 아이디어나 의견이라는 정의입니다. 저자는 여기에 부르디외를 끌어와 상류층에 받아들여지려면 교육과 언어와 취향이 필요하고, 그 세 가지에 능숙한 감각을 "편안함"이라 부른다고 소개합니다. 학위증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단어로 압축한 대목이죠. 예일에서 캐나다 구스 파카가 여기저기 보였다는 관찰, 900달러라는 옷값이 당시 미국인의 평균 주급에 맞먹었다는 계산도 함께 나옵니다. 값이 높아야 표지가 된다는 논리는 우리 쪽에서도 낯설지 않습니다. 한동안 중고등학생 사이에 특정 브랜드 패딩이 교복처럼 번지고 가격대별로 서열을 매기는 '계급도'라는 말까지 돌았고, 부모 등골이 휜다는 뜻의 신조어가 붙었던 시기가 있었으니까요. 옷 한 벌이 소속의 증명서로 작동하는 경험은 어느 사회에나 있다는 걸 책을 읽으면서 다시 확인했습니다.


저자가 힘주어 말하는 부분은 그다음입니다. "부유한 계급의 사람들은 불우한 사람들에게 해로운 생활 방식을 조장한다. 그러는 한편, 그들은 자신을 악영향에서 보호한다." 같은 선택의 결과가 계층에 따라 갈린다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유복한 가정의 학생은 경험 삼아 한 번 해보고도 대개 괜찮을 것이지만, 부모가 부재하는 집의 아이는 같은 시도 한 번으로 자멸할 수 있다는 대비요. 1960년에는 생물학적 부모와 사는 아이의 비율이 부유층과 노동자 계층 모두 95퍼센트로 같았는데 2005년에는 각각 85퍼센트와 30퍼센트로 갈라졌다는 수치도 제시됩니다. 런웨이의 유행이 몇 해 뒤 동네 백화점으로 흘러들듯 상류층의 신념도 불행까지 함께 아래로 흘러내린다는 비유가 이 논의를 닫습니다.


다만 이 구간을 읽으면서 한 번씩 속도를 줄여야 했습니다. 저자가 드는 사례가 마약 합법화와 경찰 예산, 특정 담론처럼 미국 정치의 쟁점에 바짝 붙어 있어서, 한국의 계층 지형에 그대로 옮겨 놓기에는 한 겹 걸러 읽을 필요가 있어 보였어요. 주장이 가장 뜨거워지는 자리에서 상관관계를 인과처럼 밀고 나가는 대목도 눈에 띕니다. 예산 삭감 이후 살인율이 치솟았다는 서술이 그런 예인데, 이 시기 범죄 증가의 원인을 두고는 팬데믹으로 인한 실업과 학교 폐쇄를 더 직접적인 요인으로 보는 분석도 있어서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 중인 사안입니다. 책의 진단을 저자의 해석으로 받아 두고, 우리 사정은 우리 자료로 다시 따져 보는 편이 정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 스스로도 명문대가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단서를 달아 두니, 그 신중함을 독자 쪽에서도 이어받으면 될 것 같아요.


마지막 장은 다시 안쪽으로 돌아옵니다. 저자는 원가족을 한쪽 끝이 고정된 고무줄에 비유합니다. 거리를 둘 수는 있지만 멀어질수록 더 강하게 끌어당길 뿐이라는 것이죠. 어른들의 응원이 아무리 쌓여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애정이 공허하게 느껴졌다는 고백, 가족이 자기를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이 데려가도록 두지 않을 거라고 믿는 아이의 논리를 성인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인용되는 정신의학자의 문장이 앞부분의 한 장면을 설명해 줍니다. 자신을 학대하는 가족과 위탁 가정 중 후자를 택하는 열 살 미만 아동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이요. 책의 앞머리에서 식탁 다리를 붙잡고 버티던 아이의 마음이 왜 그랬는지, 수백 쪽을 건너 뒤늦게 답이 옵니다. 그리고 허구 속 고아들을 열거한 뒤 저자는 짧게 못을 박습니다. "삶은 동화나 만화책과 다르다."


무엇을 떠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나를 떠나지는 않는다는 문장 앞에서는 걸음이 느려졌습니다.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독자로 떠올린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밝혀 두는데, 상류층이 이 책을 읽는 장면을 상상하면 속이 울렁거렸고, 대신 어릴 적 학교 도서관에서 그랬듯 이 책을 집어 들고 희망을 얻을 자기 같은 아이를 계속 떠올렸다고 합니다. 자기 처지를 비춰 볼 실화를 찾지 못했던 아이가 자라서 그 실화를 직접 써냈다는 뜻이 됩니다. 독자에게 동정심을 느꼤다면 그 마음을 지금 비슷한 환경에 있는 아이들에게 돌려 달라는 요청도 함께 적어 두었어요. 회고록과 사회 비평이 왜 한 권에 묶여 있는지에 대한 답은 결국 그 문장인 듯합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편하게 읽고 편하게 접는 책이 있고, 읽는 속도가 자꾸 느려지는 책이 있습니다. 이 한 권은 후자였고, 다 읽고 나서도 며칠 더 데리고 있게 됐어요. 성공담으로 소비하기 쉬운 이력을 가진 사람이 성공담의 자리를 내주고 대신 통계와 자기 결함을 함께 내놓았다는 점이 오래 남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중이라면 좋은 학군과 좋은 성적 이야기를 잠깐 접어 두고 이 책의 앞부분을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사회 구조와 계층 이동에 관심이 있는 분께는 뒷부분의 개념 정리가 유용할 거예요. 자기 힘으로 어딘가에 올라섰다고 생각해 온 사람에게는 책 후반부가 조금 불편할 수도 있는데, 그 불편함이 이 도서의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저녁 공기가 확실히 달라지는 계절입니다. 여름의 열기가 빠지고 창문을 열어 두면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는 시기에,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성취의 목록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환경이라는 이야기를 읽은 건 나쁘지 않은 순서였던 것 같아요. 이 가을에 누군가의 안정감을 조금 보태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보려 합니다.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올라간 사람이 그 사다리의 구조를 해부한 기록이며,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하는 한 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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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일흔, 처음으로 ‘나’로 살기 시작했다
장미킴 지음 / 모티브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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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프롤로그를 넘기면 곧바로 딸의 질문이 나옵니다. 엄마, 친구들 SNS만 보면 다들 해외여행 가고 대기업 들어가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아. 이 비교 지옥에서 어떻게 빠져나와야 해. 그러면 엄마가 답합니다. 스무 개의 장이 전부 이런 식이에요. 질문 하나에 대답 하나. 목차만 봤을 때는 요즘 흔한 시니어 에세이겠거니 했는데, 펼쳐보니 상담 기록에 가까웠습니다.


<내 나이 일흔, 처음으로 '나'로 살기 시작했다>는 1957년생 장미킴 저자가 서른일곱 해 만에 이혼 도장을 찍고 난 뒤의 시간을 딸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묶은 책입니다. 색소폰과 장구를 배우고 차차차를 추는 일흔의 이야기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읽어보면 도전담보다는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관한 책에 가깝습니다.


표지부터 이 책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연한 초록과 분홍이 나란히 놓인 배경에 창문 하나가 크게 자리하고, 흰 커튼 사이로 찻잔과 개어둔 수건, 안경, 들꽃 꽂은 화병이 놓여 있어요. 창밖엔 꽃나무가 보입니다. 조용하고 단정한 그림인데, 바로 아래 노란 띠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착하게만 살면 호구 되는 세상, 가끔은 한 성깔 하고 살아라!" 이 두 가지가 한 표지 안에 같이 있는 게 어색하지 않더군요. 책을 다 읽고 나면 오히려 그 조합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장의 제목은 발밑의 민들레를 봐야 남의 집 장미가 안 부럽다는 말입니다. 저자는 국민학교 동창회에서 겪은 일을 꺼내놓아요.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고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다듬으며 나도 이만하면 잘 살았다는 자부심을 품고 나갔는데, 다이아 반지를 낀 친구 옆에서 그 자부심이 풍선처럼 터져버렸다고요. 집에 오는 버스에서 창밖을 보다 눈물이 핑 돌았고 한동안 동창회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일흔의 저자가 굳이 이 장면을 첫 장에 놓은 이유가 있겠지요. 비교를 안 하는 사람이 해주는 조언이 아니라 지독하게 해본 사람의 정리라는 걸 먼저 밝혀두는 셈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결론은 소박합니다. 남과 저울질하는 동안에는 제 인생이 그 자리에 멈춘다는 것, 그러니 비교 대상을 과거의 자신으로 바꾸라는 것. 반지하 단칸방에서 방 두 개짜리 옥탑으로 옮기던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는 대목이 근거로 붙습니다. 낡은 트럭에 짐을 싣고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고, 창문을 열면 볕이 쏟아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고 적어놨어요. 옥탑이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는 걸 모를 리 없는 사람이 쓴 문장이라 더 남습니다. 장을 닫는 말은 이렇습니다. "너는 너라는 존재만으로도 가장 충분히 빛나는 주인공이니까."


3부의 인간관계 이야기도 눈여겨봤습니다. 걸러내야 할 사람 유형을 짚어가는데, 험담하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해놓고 곧바로 방향을 자기 쪽으로 돌립니다. 나 자신도 험담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조심하라고요. 사소한 서운함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조금씩 흘리다가 결국 여러 사람에게 미움받게 된 친구 사례를 붙이면서, 말이란 게 생각한 대로 그대로 전해지지 않을 때가 많다고 정리합니다.


같은 장에서 저자는 민망한 속내도 꺼내놓습니다.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기운이 쭉 빠졌다고, 삶이 유독 고달플 때는 저렇게 잘살면 나 좀 도와주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요. 그런 마음을 품으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지쳐 있을 땐 슬며시 들더라는 문장에서, 이 책이 왜 훈계로 읽히지 않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장의 마무리는 잘라내라는 말이 아니라 채우라는 말입니다. 나를 궁금해해 주고 서로 안부를 챙기며 힘든 일도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곁을 채우라는 쪽이에요. 사람을 고를 때 학벌이나 집안 같은 조건 대신 태도를 보라는 기준도 함께 제시되는데, 학벌이나 자란 환경은 본인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인성은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라는 구분이 명료했습니다.


4부에서는 나이 50에 처음 춤을 배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텝 하나 제대로 못 밟아 넘어지면서도 그 한 시간이 즐거웠다는 회고, 6시 이후엔 선생님들이 가르쳐주지 않으니 점심시간을 쪼개 개인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는 기록이 이어져요. 할까 말까 망설이는 이유의 대부분이 남의 눈치라고 진단하면서, 아침마다 눈치 아웃을 소리 내어 외치라는 처방을 내놓습니다. 30년 넘게 관광버스 한번 타려 해도 허락을 받아야 했고,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도 남편이 된장찌개를 먹자고 하면 제 입맛을 죽이고 살았다는 시절을 지나온 사람의 말입니다. 저자는 이혼하고 광명을 찾은 뒤에야 제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고 썼어요. 그리고 딸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남의 눈치 뒤에 숨어서 네 소중한 열정을 썩히지 말렴."


다만 전부 고개를 끄덕이며 읽지는 못했습니다. 같은 장에 "시간이 없다는 건 결국 열정이 없다는 소리야"라는 단언이 있어요. 새벽 4시에 일어나 청소 일을 나가고 오후에 돌아와 졸음을 참으며 장구를 치러 가는 사람이 한 말이니 무게가 없진 않습니다. 그런데 마흔 후반에서 쉰 언저리를 지나는 사람들 중에는 아이 뒷바라지와 부모 돌봄과 직장을 동시에 지고 있어서 시간이 없는 게 열정의 문제가 아닌 경우가 적지 않지요. 저자 자신도 고달플 때는 마음이 무너졌다고 앞에서 털어놨던 터라, 이 대목만은 조금 성급하게 밀어붙인 인상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책은 논증을 하려는 책이 아니라 딸에게 등을 떠미는 책이니, 그 화법으로 받아들이면 크게 걸릴 일은 아닙니다.


손에 쏙 들어오는 판형에 180쪽이라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앉은 자리에서 두세 장씩 끊어 읽기 좋았어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정보를 얻는 책과 마음을 건드리는 책이 갈리는데, 이번 한 권은 후자였습니다. 특히 부모 세대의 언어를 오랜만에 정면으로 마주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딸에게 하는 말로 쓰였지만, 그 말을 들으며 자란 세대가 읽으면 발신자와 수신자 양쪽에 다 서게 되거든요. 어머니에게 못 물어본 것들이 떠오르는 분이라면 이 책이 대신 답해주는 대목이 몇 군데 있을 겁니다. 요즘 새로 뭔가 배워볼까 망설이는 마음이 있다면 해보고 후회하는 것과 안 하고 후회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는 저자의 구분이 도움이 될 테고요.


9월 중순으로 접어드니 창문을 열어둘 만한 밤이 늘었습니다. 여름 내내 미뤄둔 것들을 꺼내보기에 나쁘지 않은 계절이지요. 표지 속 창가에 놓인 찻잔과 안경처럼, 별것 아닌 물건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는 풍경이 이 책의 온도와 닮았습니다. 일흔에 인스타그램을 시작해 수백만 뷰를 낸 사람이 하는 말이라 요란할 줄 알았는데, 정작 남는 건 조용한 문장들이었어요.


남이 가진 것에 두었던 기준을 제가 고를 수 있는 것 쪽으로 옮겨놓게 하는, 일흔의 담백한 인생 문답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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