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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일흔, 처음으로 ‘나’로 살기 시작했다
장미킴 지음 / 모티브 / 2026년 8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프롤로그를 넘기면 곧바로 딸의 질문이 나옵니다. 엄마, 친구들 SNS만 보면 다들 해외여행 가고 대기업 들어가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아. 이 비교 지옥에서 어떻게 빠져나와야 해. 그러면 엄마가 답합니다. 스무 개의 장이 전부 이런 식이에요. 질문 하나에 대답 하나. 목차만 봤을 때는 요즘 흔한 시니어 에세이겠거니 했는데, 펼쳐보니 상담 기록에 가까웠습니다.
<내 나이 일흔, 처음으로 '나'로 살기 시작했다>는 1957년생 장미킴 저자가 서른일곱 해 만에 이혼 도장을 찍고 난 뒤의 시간을 딸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묶은 책입니다. 색소폰과 장구를 배우고 차차차를 추는 일흔의 이야기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읽어보면 도전담보다는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관한 책에 가깝습니다.

표지부터 이 책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연한 초록과 분홍이 나란히 놓인 배경에 창문 하나가 크게 자리하고, 흰 커튼 사이로 찻잔과 개어둔 수건, 안경, 들꽃 꽂은 화병이 놓여 있어요. 창밖엔 꽃나무가 보입니다. 조용하고 단정한 그림인데, 바로 아래 노란 띠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착하게만 살면 호구 되는 세상, 가끔은 한 성깔 하고 살아라!" 이 두 가지가 한 표지 안에 같이 있는 게 어색하지 않더군요. 책을 다 읽고 나면 오히려 그 조합이 정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장의 제목은 발밑의 민들레를 봐야 남의 집 장미가 안 부럽다는 말입니다. 저자는 국민학교 동창회에서 겪은 일을 꺼내놓아요.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고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다듬으며 나도 이만하면 잘 살았다는 자부심을 품고 나갔는데, 다이아 반지를 낀 친구 옆에서 그 자부심이 풍선처럼 터져버렸다고요. 집에 오는 버스에서 창밖을 보다 눈물이 핑 돌았고 한동안 동창회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일흔의 저자가 굳이 이 장면을 첫 장에 놓은 이유가 있겠지요. 비교를 안 하는 사람이 해주는 조언이 아니라 지독하게 해본 사람의 정리라는 걸 먼저 밝혀두는 셈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결론은 소박합니다. 남과 저울질하는 동안에는 제 인생이 그 자리에 멈춘다는 것, 그러니 비교 대상을 과거의 자신으로 바꾸라는 것. 반지하 단칸방에서 방 두 개짜리 옥탑으로 옮기던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는 대목이 근거로 붙습니다. 낡은 트럭에 짐을 싣고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면서도 힘든 줄 몰랐다고, 창문을 열면 볕이 쏟아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고 적어놨어요. 옥탑이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는 걸 모를 리 없는 사람이 쓴 문장이라 더 남습니다. 장을 닫는 말은 이렇습니다. "너는 너라는 존재만으로도 가장 충분히 빛나는 주인공이니까."
3부의 인간관계 이야기도 눈여겨봤습니다. 걸러내야 할 사람 유형을 짚어가는데, 험담하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해놓고 곧바로 방향을 자기 쪽으로 돌립니다. 나 자신도 험담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조심하라고요. 사소한 서운함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조금씩 흘리다가 결국 여러 사람에게 미움받게 된 친구 사례를 붙이면서, 말이란 게 생각한 대로 그대로 전해지지 않을 때가 많다고 정리합니다.

같은 장에서 저자는 민망한 속내도 꺼내놓습니다.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기운이 쭉 빠졌다고, 삶이 유독 고달플 때는 저렇게 잘살면 나 좀 도와주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요. 그런 마음을 품으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지쳐 있을 땐 슬며시 들더라는 문장에서, 이 책이 왜 훈계로 읽히지 않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장의 마무리는 잘라내라는 말이 아니라 채우라는 말입니다. 나를 궁금해해 주고 서로 안부를 챙기며 힘든 일도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곁을 채우라는 쪽이에요. 사람을 고를 때 학벌이나 집안 같은 조건 대신 태도를 보라는 기준도 함께 제시되는데, 학벌이나 자란 환경은 본인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인성은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라는 구분이 명료했습니다.
4부에서는 나이 50에 처음 춤을 배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텝 하나 제대로 못 밟아 넘어지면서도 그 한 시간이 즐거웠다는 회고, 6시 이후엔 선생님들이 가르쳐주지 않으니 점심시간을 쪼개 개인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는 기록이 이어져요. 할까 말까 망설이는 이유의 대부분이 남의 눈치라고 진단하면서, 아침마다 눈치 아웃을 소리 내어 외치라는 처방을 내놓습니다. 30년 넘게 관광버스 한번 타려 해도 허락을 받아야 했고,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도 남편이 된장찌개를 먹자고 하면 제 입맛을 죽이고 살았다는 시절을 지나온 사람의 말입니다. 저자는 이혼하고 광명을 찾은 뒤에야 제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고 썼어요. 그리고 딸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남의 눈치 뒤에 숨어서 네 소중한 열정을 썩히지 말렴."
다만 전부 고개를 끄덕이며 읽지는 못했습니다. 같은 장에 "시간이 없다는 건 결국 열정이 없다는 소리야"라는 단언이 있어요. 새벽 4시에 일어나 청소 일을 나가고 오후에 돌아와 졸음을 참으며 장구를 치러 가는 사람이 한 말이니 무게가 없진 않습니다. 그런데 마흔 후반에서 쉰 언저리를 지나는 사람들 중에는 아이 뒷바라지와 부모 돌봄과 직장을 동시에 지고 있어서 시간이 없는 게 열정의 문제가 아닌 경우가 적지 않지요. 저자 자신도 고달플 때는 마음이 무너졌다고 앞에서 털어놨던 터라, 이 대목만은 조금 성급하게 밀어붙인 인상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 책은 논증을 하려는 책이 아니라 딸에게 등을 떠미는 책이니, 그 화법으로 받아들이면 크게 걸릴 일은 아닙니다.

손에 쏙 들어오는 판형에 180쪽이라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앉은 자리에서 두세 장씩 끊어 읽기 좋았어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정보를 얻는 책과 마음을 건드리는 책이 갈리는데, 이번 한 권은 후자였습니다. 특히 부모 세대의 언어를 오랜만에 정면으로 마주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딸에게 하는 말로 쓰였지만, 그 말을 들으며 자란 세대가 읽으면 발신자와 수신자 양쪽에 다 서게 되거든요. 어머니에게 못 물어본 것들이 떠오르는 분이라면 이 책이 대신 답해주는 대목이 몇 군데 있을 겁니다. 요즘 새로 뭔가 배워볼까 망설이는 마음이 있다면 해보고 후회하는 것과 안 하고 후회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는 저자의 구분이 도움이 될 테고요.
9월 중순으로 접어드니 창문을 열어둘 만한 밤이 늘었습니다. 여름 내내 미뤄둔 것들을 꺼내보기에 나쁘지 않은 계절이지요. 표지 속 창가에 놓인 찻잔과 안경처럼, 별것 아닌 물건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는 풍경이 이 책의 온도와 닮았습니다. 일흔에 인스타그램을 시작해 수백만 뷰를 낸 사람이 하는 말이라 요란할 줄 알았는데, 정작 남는 건 조용한 문장들이었어요.
남이 가진 것에 두었던 기준을 제가 고를 수 있는 것 쪽으로 옮겨놓게 하는, 일흔의 담백한 인생 문답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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