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인 수면법 - 잠까지 완벽할 필요는 없다
메레인 판더라르 지음, 고현석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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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먼저 보게 되는 책이 있습니다. <원시인 수면법>이 그랬어요. 잠을 다룬 책이라면 보송한 침구나 달빛 정도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도서의 얼굴은 청록빛이 도는 밤의 숲입니다. 물기 어린 잎사귀 사이로 흰 글씨가 두껍게 박혀 있고, '시'자 안쪽에 사람 하나가 서 있어요. 누워 있지 않고 서 있다는 점이 눈에 남았습니다. 아래쪽 띠지에 적힌 "완벽한 잠을 목표로 삼는 순간, 잠은 휴식이 아니라 과제가 된다!"라는 한 줄은 이 책이 하려는 말을 거의 다 담고 있고요. 손에 쥐면 좁은 판형에 제법 도톰해서, 오래 붙들고 읽기에 편안한 두께였습니다.


저자 메레인 판더라르는 네덜란드 수면의학센터에서 오래 일한 수면 치료사입니다. 동시에 이십 대에 심각한 불면을 겪은 환자이기도 했어요. 책 안에서 그 시절을 숨기지 않고 꺼내 놓는데, 무용 공연을 준비하며 스무 명에게 안무를 가르치던 무렵 음악과 동작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고 합니다. 건강도 관계도 일도 안정적이었는데 잠만 자지 못했고, 수면치료사로서 스스로에게 숙면을 선물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치료사가 자기 침대를 먼저 고백하고 시작하는 책이라, 첫인상부터 경계심이 좀 풀렸어요.


첫 장은 예상과 다른 곳에서 출발합니다. 잠을 잘 자는 법이 아니라 우리 몸이 어떤 밤에 맞춰 만들어졌는지를 먼저 훑어요. 조상들의 조상은 나무 위 둥지에서 잤고, 이유는 명확합니다. 높은 곳에 있으면 포식자를 피할 수 있으니까요. 졸다가 갑자기 떨어지는 느낌에 깜짝 놀라 깨는 근육 수축, 이른바 수면놀람증이 그 시절의 흔적일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책이 확 가까워졌습니다. 따분하지만 중요한 회의 중에 고개가 꺾이는 장면을 저자가 예로 드는데, 그 민망한 순간조차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던 반응의 잔재라는 이야기니까요.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침대는 이십만 년쯤 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풀과 나뭇가지, 잎사귀로 만들어 동굴 안에 두었고 그 위에는 벌레를 쫓는 식물이 놓여 있었어요. 잠자리를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려는 손길이 그렇게 오래됐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뭉클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침대 층층에서 재도 발견했다는데, 잠을 자고 난 뒤 깔개에 불을 질러 벌레를 쫓았던 흔적이라고 하고요. 지금 이 의식을 되살린다면 아침마다 태울 침대를 싣고 쓰레기장으로 향하는 자동차 행렬이 생길 거라는 농담까지 붙여 두는데, 이런 유머 덕분에 사백 쪽 가까운 분량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책의 무게중심은 제4장에 있습니다. 전통 생활을 유지하는 부족 사회에는 '불면증'이라는 말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는 관찰에서 시작해서, 밤중에 깨는 일을 고장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짚어요. 저녁형 인간은 늦게까지 경계를 유지하고 아침형 인간은 새벽에 깨어 무리를 지켰으며, 그 사이의 공백은 얕은 잠을 자는 사람들이 메웠다는 가설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적혀 있어요. "얕은 잠을 자는 사람들은 어쩌면 동굴 속에서 모두를 지켜 낸 '슈퍼 히어로'였는지도 모른다." 저자 스스로 다소 냉소적인 위로로 들릴 수 있다고 먼저 인정하고 꺼내는 문장인데, 그 조심스러움까지 포함해서 좋았습니다.


같은 장에서 마음이 가장 오래 걸린 곳은 따로 있었어요. 잠을 못 자는 사람에게 주변이 건네는 선의가 오히려 절망이 될 수 있다는 대목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마음을 놓아 버려야 해, 나도 가끔 잠을 못 자. 저자는 이런 말들이 대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합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는데도 나아지지 않을 때 사람은 자기가 무기력하다고 여기게 되고, 주변이 그 힘듦을 가늠하지 못할 때 더 외로워진다고요.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무력감도 함께 그려 두는데, 잠은 잘 잤냐는 아침 인사에 돌아오는 대답을 한 줄로 떼어 놓았습니다. "최악이었어. 당신은?" 짧은 대화 한 토막에 그 집의 아침 공기가 다 들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다면 왜 현대인만 이렇게 잠들기 어려운가. 이 책의 답은 잠 자체가 아니라 잠을 대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스필먼과 글로빈스키의 모델을 빌려 타고난 수면 성향, 실직 같은 촉발 사건, 그리고 문제가 생긴 뒤에 새로 만들어지는 사고방식과 행동을 나눠 설명해요. 마지막 항목이 핵심입니다. 왜 아직도 깨어 있지, 이러다 내일 망치겠어 같은 걱정, 시계를 자꾸 확인하는 습관, 오늘은 꼭 숙면해야 한다는 기대 같은 것들이요. 뇌는 이런 생각을 진짜 벌어진 일처럼 받아들여서, 일을 망칠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스트레스 반응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포식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은 포식자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반응한다는 설명이 붙는데, 이 책에서 포식자라는 말이 어떻게 쓰이는지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뒤쪽으로 갈수록 실천 쪽으로 내려옵니다. 잠들기 한 시간 반쯤 전부터 하루를 차분히 정리하라는 권유가 나오고, 그 본보기로 주/호안시 부족의 저녁이 등장해요. 선선해지고 어두워지면 모닥불 앞에 둘러앉는데, 낮에는 채집 계획이나 사냥 전략 같은 실용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밤에는 대화의 성격이 바뀐다고 합니다. 모닥불 대화의 팔십 퍼센트 이상이 상징적인 이야기이고 대개 배울 만한 교훈을 담고 있으며, 낮에 직접 부딪치던 갈등이 밤에는 이야기 형태로 풀려 나온다고요. 관찰한 연구자는 "그들은 그날의 문제들을 불씨와 함께 사라지게 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이후 우리의 실용적인 정보 흡수가 하루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는 문장이 바로 뒤에 놓여 있어서, 이 대비가 오래 남았어요.


의자에 앉아 하는 호흡 연습도 소개되는데, 억지로 리듬을 만들지 말고 자연스러운 호흡을 따라가라는 당부가 붙습니다. 침대가 아니라 의자에서 연습하라는 조건도 일관돼요. 그리고 이 장에서 저자가 얻었다는 깨달음 하나가 특히 오래 남았습니다. 밤에 사람을 깨우는 것이 꼭 부정적인 생각만은 아니라는 것, 즐거운 활동이나 창의적인 일도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잠을 밀어낸다는 것이요. 속도를 줄이다 보면 열패감이 들 수도 있지만, 한계를 인정하면 오히려 여유가 생기고 뇌는 더 안전한 환경에 있다고 여기게 된다는 설명이 따라옵니다. 마흔 후반쯤 되면 이 문장이 다르게 읽힙니다. 잠을 못 자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더 하겠다고 선택한 대가라는 관점 전환이니까요.


마지막 장은 균형을 이야기합니다. 성인의 최적 수면 시간이 여덟 시간이라는 생각은 십구 세기 초의 낡은 관념에 기반한 과장된 믿음으로 보인다고 단언하고, 조상들의 평균은 여섯에서 일곱 시간 사이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정리해요. 나이가 들수록 밤잠에서 자주 깨는 현상을 파수꾼 가설로 설명하는 대목도 여기 있습니다. 노인들이 위험 신호에 더 쉽게 깨어났고 그 예민함이 무리를 지켰다는 이야기인데, 새벽에 눈이 떠지는 변화를 쇠퇴의 신호로만 읽지 않게 해 주더군요. 필요한 수면의 양이 삶의 시기마다 달라질 수 있고 어떤 시점에는 이전보다 적게 자도 충분할 수 있다는 문장도 같은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비유는 식사입니다. 좋은 식사에는 준비가 필요하고, 시작하기 전에 어느 정도 배가 고파야 하고, 몸이 심하게 긴장해 있으면 진수성찬 앞에서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이야기예요. 허기가 수면 압력에 해당한다고 보면 그림이 선명해집니다. 감자칩 반 봉지를 먹은 뒤 형편없이 조리된 음식을 꾸역꾸역 삼키려는 상황이 곧 우리가 잠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요. 산업사회에서 잠이 일종의 패스트푸드가 되어 버렸다는 진단으로 이어지는데, 빠르고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방식이 새로운 기준이 됐다는 말이 뼈아팠습니다.


다 좋았느냐 하면 걸리는 데가 하나 있었어요. 여덟 시간이라는 기준을 낡은 관념이라며 물리친 책이 정작 뒤쪽에서는 꽤 촘촘한 숫자를 내놓습니다. 잠들기 두세 시간 전부터 주변 밝기를 촛불 열 개 정도로, 잠자리 들기 한두 시간 이내에는 격렬한 운동을 피하고, 침상 시간은 주 단위로 십오 분에서 삼십 분씩 조정하라는 식으로요. 대부분 환경에 관한 조건이고 잘 잤는지를 채점하는 항목은 아니니 성격이 다르긴 합니다. 다만 숫자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 안내마저 새로운 체크리스트로 삼기 쉽겠다 싶었어요. 통제를 내려놓으라는 권유와 구체적인 지침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결국 읽는 사람 몫으로 남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덮으면 끝나는 책과 생활 어딘가에 남는 책이 갈리는데, 이번 한 권은 후자에 가까웠어요. 잠을 잘 자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잠을 채점하지 말라고 말하는 쪽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여덟 시간을 채웠는지 헤아리는 습관이 오래된 분, 새벽에 눈이 떠지는 일이 잦아져 내심 신경 쓰이는 분이라면 얻어 갈 문장이 많을 거예요. 수면 관련 정보를 찾다가 자극적인 제목들 사이에서 지쳤던 분에게도 좋은 정리가 됩니다. 저자가 마지막에 붙여 둔 당부처럼, 숙면이 힘든 밤에는 원시인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한번 물어보는 정도가 이 책이 권하는 전부입니다.


책 끝에서 저자는 자기처럼 당신도 특별한 원인이 없어 보이는데 잠들기 어려운 날이 있을 수 있다고 적어 둡니다. 치료사가 끝까지 독자 옆자리에 앉아 말하는 방식이 이 책의 결을 잘 보여 준다고 생각했어요.


9월 중순을 넘기면서 밤공기가 눈에 띄게 선선해졌습니다. 해도 부쩍 일찍 저물고요. 계절이 알아서 어두워지고 서늘해지는 이 시기가, 잠에 관한 책을 읽기에는 가장 좋은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밤에는 몇 시간을 잤는지 세는 대신 불빛 몇 개만 미리 꺼 두려고 합니다.


잠을 더 잘 자는 기술 대신, 잠을 채점하지 않는 태도를 배우게 하는 다정한 수면 과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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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장난 글공부
강학종 지음 / 오프온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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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손에 쥐어 보니 두께도 판형도 부담 없는 쪽입니다.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틈이 펼치기 좋은 정도예요. 표지에는 민트색 언덕 위로 책을 펼쳐 든 아이가 웃고 있고, 아래쪽 분홍 띠에 이 한 권이 담은 것들이 숫자로 적혀 있습니다. 27가지 일기 작성법, 엄마의 마음 준비 11가지, 읽기 독립을 도와주는 그림책 110권. 겉은 학습서의 얼굴인데 정작 문을 열면 아이들의 연필 자국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기로 배우는 초등 그림책 인문학>은 박향의 작가와 두 딸 김나연, 김다은이 함께 쓴 도서입니다. 나연이의 일기장이 스물여덟 권, 다은이의 것이 여덟 권. 그 분량이 이 책의 재료 전부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제1부에서 조금 놀랐습니다. 아이에게 뭘 시킬지를 말하기 전에 옆에 앉는 어른의 태도를 먼저 손보자고 나오거든요. 처음부터 혼자 잘 쓰는 아이는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항목이 첫 번째고, 일기 쓰기가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창조적 활동임을 알아주라는 항목이 그다음입니다. 맞춤법은 지적하지 않는다, 일기장은 처음엔 다섯 줄이 넘지 않는 것으로 사 준다, 필명을 만들어 준다. 특히 필명 이야기가 오래 남았습니다. 숙제를 검사받는 사람 대신 이름을 가진 필자로 아이를 대우하는 장치인 셈이죠. 저자는 두 딸도 습관이 붙기까지는 일주일에 두세 번만 썼다고 담담하게 적어 둡니다. 매일 쓰기를 요구하지 않는 실용서라는 점에서 신뢰가 갔어요.


갈등 일기 부분은 사례가 먼저 나옵니다. 다은이의 '슬픈 날'은 네 줄입니다. 예나가 먼저 놀자고 했다가 안 논다고 해서 슬펐고, 서아까지 안 논다고 해서 더 슬펐다는 기록. 슬펐다에서 더 슬펐다로 한 칸 올라가는 것만으로 그날의 온도가 다 적힌 셈입니다. 나연이의 '듣기 싫은 엄마의 잔소리'는 거의 전부 그림이에요. 화난 얼굴 위로 책 봐, 유두브보지 마, 게임은 5분 해가 말풍선으로 떠 있고, 그 아래엔 '착한 말'이라는 제목으로 사랑해, 최고야, 고마워, 괜찮아, 멋져가 나란히 적혀 있습니다. 듣기 싫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을 아이가 스스로 갈라 놓은 지면입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아홉 살이면 다 혼자 하라고 한다는 고민, 9살이 무슨 고등학교 3학년 같다는 비유, 그리고 엄마는 많이 안 그러는데 아빠가 많이 그런다는 관찰이 나옵니다. 아이 일기에 '아빠'라는 단어가 이런 자리에 들어앉아 있는 걸 읽는 일은 생각보다 조용한 경험이었습니다.


방법론은 그 뒤에 붙습니다. 사건을 육하원칙으로 차갑게 적어 열기를 내리고, 감정의 온도를 시시각각 남기고, 비유로 무게를 표현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딱 한 문장을 써 보고, 진짜 원했던 것을 질문으로 던지고, 억울함에 발언권을 주고, 마지막엔 자신을 안아 주는 한마디로 끝냅니다. 앞에 실린 두 편의 일기가 이 일곱 단계의 예시로 그대로 회수되는 구조라 설명이 겉돌지 않았습니다. 이 챕터에서 가져가고 싶은 문장은 이거였어요.


"일기장은 세상에서 가장 입이 무겁고 다정한 나의 편입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이 나를 흔드는 무언가에서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는 설명도 붙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정서 명명과 겹치는 대목이라, 아이용으로 쓰인 문장이지만 어른이 읽어도 유효합니다.


뒷부의 질문 일기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나연이의 '방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는 음식을 먹고 내려가 가스를 만든다는 나름의 설명으로 시작해서, 엄마는 뿡, 아빠는 뿡뿌룽, 동생은 뽕, 자기는 뿡 ㅋㅋㅋ으로 가족별 소리를 분류하고는 이렇게 닫힙니다. "역시 방귀는 no." 또 한 편은 사진이 왜 네 컷일까를 묻다가 손님들이 기다려서일 거라고 스스로 답을 내고, 동생은 아직 배울 게 많다고 정리한 뒤 꼭 대학 잘 가라는 말을 붙이고, 끝에는 엄마 아빠 다은이 사랑해로 마무리합니다. 저자가 이 챕터에서 당부하는 건 간단합니다. 검색창이나 AI를 열기 전에 머릿속에서 나온 첫 생각을 먼저 적어 보라는 것. 방귀의 원리는 기계도 알지만 우리 아빠 방귀 소리가 뿡뿌룽이라는 관찰은 그 집 아이만 쓸 수 있는 정보라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읽으면서 걸린 점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문장 써 보기, 내가 진짜 원했던 핵심 찾기 같은 항목은 여덟 살, 열 살 아이가 혼자 해내기엔 난도가 꽤 높아 보였어요. 결국 옆에서 어른이 얼마나 잘 물어 주느냐에 달린 일인데, 그 질문을 어떻게 건네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는 상대적으로 얇습니다. 구성도 그렇습니다. 일기 예시, 정의, 작성법 일곱 가지, 그림책 두 권, AI 시대의 세 가지 힘. 이 틀이 스물일곱 갈래에 똑같이 적용되다 보니 찾아 쓰기엔 편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면 뒤로 갈수록 비슷하게 읽히는 구간이 생깁니다. 사전처럼 필요한 갈래만 펼쳐 보는 쪽이 이 도서를 제대로 쓰는 방법 같아요.


그림책 목록은 꽤 성실합니다. 갈등 일기에는 난주 작가의 <잔소리의 최후>가 놓여 있는데, 잔소리꾼 엄마를 둔 고슴도치가 반격을 시작하는 이야기라 아이와 부모가 같이 웃게 되는 책이라고 소개합니다. 함께 붙은 레오 리오니의 <까마귀 여섯 마리>는 밭을 지키려는 농부와 먹이를 찾는 까마귀가 서로를 향한 비난에만 열을 올리는 우화로, 갈등이라는 주제에 잘 맞는 선택이었습니다. 질문 일기 쪽에는 이상교 작가와 밤코 작가의 <싫다는 건 뭘까?>, 조안 M. 렉서와 알리키의 <좋은 걸까? 나쁜 걸까?>가 들어 있어요. 싫다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법과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여유. 질문이라는 갈래에 이 두 권을 붙인 감각이 좋았습니다. 부록의 110권 목록까지 있으니 읽기 독립 시기에 뭘 골라야 할지 막막한 집에서는 이 부분만으로도 값을 합니다.


AI가 정답은 찾지만 먼저 궁금해하지는 않는다는 문장이 책 곳곳의 뼈대입니다. 요즘 도구들의 작동 방식을 아는 분이라면 이 진술에 토를 달 여지도 있겠지만, 저자가 겨누는 건 기술 논쟁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 물음을 갖는 습관 쪽이라 무리한 주장으로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부제에 걸린 AI 시대라는 말이 장식으로 그치지 않고 각 챕터 끝에서 매번 회수되는 점도 성실하게 느껴졌고요.


서평단 책을 받다 보면 읽고 덮으면 끝나는 것과 책상에 남겨 두게 되는 것이 갈리는데, 이 한 권은 후자였어요. 저녁에 아이 일기장을 펼쳐 놓고 뭐라고 말해 줄지 막막해지는 분들, 일기를 검사하는 손과 읽어 주는 목소리 사이에서 헷갈려 온 분들에게 실질적인 참고가 될 겁니다. 초등 저학년 아이를 곁에 둔 집이라면 목차만 훑어봐도 오늘 밤에 써 볼 일기 한 종류는 건질 수 있을 테고요.


가을로 넘어오면서 해가 짧아졌습니다. 저녁이 길어진 만큼 아이가 공책 앞에 앉는 시간도 조금 앞당겨질 텐데, 그 옆자리에 어떤 얼굴로 앉아 있을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를 고쳐 줄 사람보다 먼저 읽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이 책이 하는 말은 결국 그 한마디로 모입니다.


아이의 일기장을 검사 대상에서 읽을 거리로 옮겨 놓는 안내서, 스물일곱 갈래의 작성법과 그림책 110권 목록이 든 실용적인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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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로 배우는 초등 그림책 인문학 - 하루 30분, AI 시대를 앞서가는 아이의 인문학 습관
박향의 외 지음 / 오롯한삐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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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손에 쥐어 보니 두께도 판형도 부담 없는 쪽입니다.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틈이 펼치기 좋은 정도예요. 표지에는 민트색 언덕 위로 책을 펼쳐 든 아이가 웃고 있고, 아래쪽 분홍 띠에 이 한 권이 담은 것들이 숫자로 적혀 있습니다. 27가지 일기 작성법, 엄마의 마음 준비 11가지, 읽기 독립을 도와주는 그림책 110권. 겉은 학습서의 얼굴인데 정작 문을 열면 아이들의 연필 자국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기로 배우는 초등 그림책 인문학>은 박향의 작가와 두 딸 김나연, 김다은이 함께 쓴 도서입니다. 나연이의 일기장이 스물여덟 권, 다은이의 것이 여덟 권. 그 분량이 이 책의 재료 전부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제1부에서 조금 놀랐습니다. 아이에게 뭘 시킬지를 말하기 전에 옆에 앉는 어른의 태도를 먼저 손보자고 나오거든요. 처음부터 혼자 잘 쓰는 아이는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항목이 첫 번째고, 일기 쓰기가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창조적 활동임을 알아주라는 항목이 그다음입니다. 맞춤법은 지적하지 않는다, 일기장은 처음엔 다섯 줄이 넘지 않는 것으로 사 준다, 필명을 만들어 준다. 특히 필명 이야기가 오래 남았습니다. 숙제를 검사받는 사람 대신 이름을 가진 필자로 아이를 대우하는 장치인 셈이죠. 저자는 두 딸도 습관이 붙기까지는 일주일에 두세 번만 썼다고 담담하게 적어 둡니다. 매일 쓰기를 요구하지 않는 실용서라는 점에서 신뢰가 갔어요.


갈등 일기 부분은 사례가 먼저 나옵니다. 다은이의 '슬픈 날'은 네 줄입니다. 예나가 먼저 놀자고 했다가 안 논다고 해서 슬펐고, 서아까지 안 논다고 해서 더 슬펐다는 기록. 슬펐다에서 더 슬펐다로 한 칸 올라가는 것만으로 그날의 온도가 다 적힌 셈입니다. 나연이의 '듣기 싫은 엄마의 잔소리'는 거의 전부 그림이에요. 화난 얼굴 위로 책 봐, 유두브보지 마, 게임은 5분 해가 말풍선으로 떠 있고, 그 아래엔 '착한 말'이라는 제목으로 사랑해, 최고야, 고마워, 괜찮아, 멋져가 나란히 적혀 있습니다. 듣기 싫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을 아이가 스스로 갈라 놓은 지면입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아홉 살이면 다 혼자 하라고 한다는 고민, 9살이 무슨 고등학교 3학년 같다는 비유, 그리고 엄마는 많이 안 그러는데 아빠가 많이 그런다는 관찰이 나옵니다. 아이 일기에 '아빠'라는 단어가 이런 자리에 들어앉아 있는 걸 읽는 일은 생각보다 조용한 경험이었습니다.


방법론은 그 뒤에 붙습니다. 사건을 육하원칙으로 차갑게 적어 열기를 내리고, 감정의 온도를 시시각각 남기고, 비유로 무게를 표현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딱 한 문장을 써 보고, 진짜 원했던 것을 질문으로 던지고, 억울함에 발언권을 주고, 마지막엔 자신을 안아 주는 한마디로 끝냅니다. 앞에 실린 두 편의 일기가 이 일곱 단계의 예시로 그대로 회수되는 구조라 설명이 겉돌지 않았습니다. 이 챕터에서 가져가고 싶은 문장은 이거였어요.


"일기장은 세상에서 가장 입이 무겁고 다정한 나의 편입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이 나를 흔드는 무언가에서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는 것으로 바뀐다는 설명도 붙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정서 명명과 겹치는 대목이라, 아이용으로 쓰인 문장이지만 어른이 읽어도 유효합니다.


뒷부의 질문 일기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나연이의 '방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는 음식을 먹고 내려가 가스를 만든다는 나름의 설명으로 시작해서, 엄마는 뿡, 아빠는 뿡뿌룽, 동생은 뽕, 자기는 뿡 ㅋㅋㅋ으로 가족별 소리를 분류하고는 이렇게 닫힙니다. "역시 방귀는 no." 또 한 편은 사진이 왜 네 컷일까를 묻다가 손님들이 기다려서일 거라고 스스로 답을 내고, 동생은 아직 배울 게 많다고 정리한 뒤 꼭 대학 잘 가라는 말을 붙이고, 끝에는 엄마 아빠 다은이 사랑해로 마무리합니다. 저자가 이 챕터에서 당부하는 건 간단합니다. 검색창이나 AI를 열기 전에 머릿속에서 나온 첫 생각을 먼저 적어 보라는 것. 방귀의 원리는 기계도 알지만 우리 아빠 방귀 소리가 뿡뿌룽이라는 관찰은 그 집 아이만 쓸 수 있는 정보라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읽으면서 걸린 점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문장 써 보기, 내가 진짜 원했던 핵심 찾기 같은 항목은 여덟 살, 열 살 아이가 혼자 해내기엔 난도가 꽤 높아 보였어요. 결국 옆에서 어른이 얼마나 잘 물어 주느냐에 달린 일인데, 그 질문을 어떻게 건네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는 상대적으로 얇습니다. 구성도 그렇습니다. 일기 예시, 정의, 작성법 일곱 가지, 그림책 두 권, AI 시대의 세 가지 힘. 이 틀이 스물일곱 갈래에 똑같이 적용되다 보니 찾아 쓰기엔 편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면 뒤로 갈수록 비슷하게 읽히는 구간이 생깁니다. 사전처럼 필요한 갈래만 펼쳐 보는 쪽이 이 도서를 제대로 쓰는 방법 같아요.


그림책 목록은 꽤 성실합니다. 갈등 일기에는 난주 작가의 <잔소리의 최후>가 놓여 있는데, 잔소리꾼 엄마를 둔 고슴도치가 반격을 시작하는 이야기라 아이와 부모가 같이 웃게 되는 책이라고 소개합니다. 함께 붙은 레오 리오니의 <까마귀 여섯 마리>는 밭을 지키려는 농부와 먹이를 찾는 까마귀가 서로를 향한 비난에만 열을 올리는 우화로, 갈등이라는 주제에 잘 맞는 선택이었습니다. 질문 일기 쪽에는 이상교 작가와 밤코 작가의 <싫다는 건 뭘까?>, 조안 M. 렉서와 알리키의 <좋은 걸까? 나쁜 걸까?>가 들어 있어요. 싫다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법과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여유. 질문이라는 갈래에 이 두 권을 붙인 감각이 좋았습니다. 부록의 110권 목록까지 있으니 읽기 독립 시기에 뭘 골라야 할지 막막한 집에서는 이 부분만으로도 값을 합니다.


AI가 정답은 찾지만 먼저 궁금해하지는 않는다는 문장이 책 곳곳의 뼈대입니다. 요즘 도구들의 작동 방식을 아는 분이라면 이 진술에 토를 달 여지도 있겠지만, 저자가 겨누는 건 기술 논쟁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 물음을 갖는 습관 쪽이라 무리한 주장으로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부제에 걸린 AI 시대라는 말이 장식으로 그치지 않고 각 챕터 끝에서 매번 회수되는 점도 성실하게 느껴졌고요.


서평단 책을 받다 보면 읽고 덮으면 끝나는 것과 책상에 남겨 두게 되는 것이 갈리는데, 이 한 권은 후자였어요. 저녁에 아이 일기장을 펼쳐 놓고 뭐라고 말해 줄지 막막해지는 분들, 일기를 검사하는 손과 읽어 주는 목소리 사이에서 헷갈려 온 분들에게 실질적인 참고가 될 겁니다. 초등 저학년 아이를 곁에 둔 집이라면 목차만 훑어봐도 오늘 밤에 써 볼 일기 한 종류는 건질 수 있을 테고요.


가을로 넘어오면서 해가 짧아졌습니다. 저녁이 길어진 만큼 아이가 공책 앞에 앉는 시간도 조금 앞당겨질 텐데, 그 옆자리에 어떤 얼굴로 앉아 있을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를 고쳐 줄 사람보다 먼저 읽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이 책이 하는 말은 결국 그 한마디로 모입니다.


아이의 일기장을 검사 대상에서 읽을 거리로 옮겨 놓는 안내서, 스물일곱 갈래의 작성법과 그림책 110권 목록이 든 실용적인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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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문 당일 도착의 경제학 - 유통, 물류를 알면 비즈니스가 보인다
엄지용.신승윤 지음 / 시원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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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검정 바탕에 형광 초록. <오늘 주문 당일 도착의 경제학>은 표지부터 신호등처럼 눈에 들어옵니다. 위쪽에 건물 몇 채와 초록 트럭이 얹혀 있어서 경제서라기보다 도시의 단면을 그린 도판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띠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시장을 움직이는 진짜 힘, 돈의 흐름은 물류에서 시작된다. 손에 들어 보니 크기도 두께도 평범해서, 분야만 보고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편하게 넘길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은 도서입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들이 던지는 진단은 짧고 분명합니다. 더 많이 팔고 더 빠르게 배송하고 더 넓은 시장을 점령하면 된다는 외형 성장의 문법이 힘을 잃고, 그 자리를 최적화가 채우고 있다는 것이죠. 단위 경제성, 수익성 있는 물류, 데이터 기반 의사 결정 같은 말들이 이어집니다. 업계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도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성장률 숫자로 버티던 시절이 저물고 나면, 남는 질문은 결국 어떻게 남길 것인가 하나로 좁아지니까요.


책의 중반, 대형 마트 새벽배송을 다룬 장이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2026년 대형 마트와 SSM의 새벽배송을 허용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 추진 안건이 고위당정협의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에 업계가 활기를 띠었고, 개정안 소식이 전해진 날 이마트 주가가 8.5% 급등해 52주 신고가를 기록했다는 대목까지는 그럴듯한 성장 서사입니다. 이마트와 롯데마트 점포를 합치면 쿠팡이 구축한 물류 센터 수보다 많다는 숫자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들은 곧바로 현장의 온도를 가져옵니다. 취재에 응한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새벽배송은 과정 중 하나일 뿐이라며 신중했다고 해요. 신선 식품 풀필먼트 기업의 한 임원은 오프라인 쇼핑에 최적화된 공간에 새벽배송 물류 센터의 옷을 입히면 엄청난 비효율이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냉장·냉동 탑차를 위한 독도 없이 마트 주차장을 써야 하는 상황을 두고 "이건 도심 곳곳의 지하철역을 그대로 MFC화한다는 발상이랑 다를 게 없어요."라고 덧붙이는데, 이 비유 하나로 상황이 그려집니다. 저자들의 정리는 이렇습니다. "법이 바뀌어 문이 열려도, 문 뒤에 있는 매장 구조 자체가 새벽배송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미국 월마트를 참고 사례로 끌어온 방식도 좋았습니다. 매장을 물류 거점으로 쓴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실행하려고 매장 설계부터 인력 배치, 픽업존 구조, 긱워커 플랫폼까지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는 점을 짚습니다. 국내 사례로 넘어오면 결이 달라집니다. 이마트 매장을 거점으로 삼은 퀵커머스가 다섯 달 만에 전국망을 갖췄지만, 본업과 병행하게 된 매장 직원과 픽업존 상품을 배달하는 라이더의 이해관계가 어긋나 있었다는 것이죠. 픽업존이 지하나 2층에 있으면 라이더들 사이에서 다신 콜 안 잡는다는 반응이 나온다는 문장에서, 조직 안에서 일이 늘어나는 방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일 거예요.


편의점으로 넘어가면 같은 문제가 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집니다. 강남구와 관악구 현장에서 만난 아르바이트 직원의 말이 특히 오래 남았습니다. 카운터를 보면서 배달 주문을 수락하고 라이더가 오기 전까지 피킹과 패킹을 마쳐 별도 공간에 진열해야 한다면서, "배달 알림 소리에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요."라고 하더군요. 점주는 중개 수수료가 20%를 넘어 남는 게 별로 없다고 하고, 라이더는 단가 낮고 부피 예측이 어려운 편의점 콜을 기피합니다. 세 주체 누구도 확실히 이득을 보지 못하는 구조인데, 서비스는 계속 확대됩니다.


이 장을 못처럼 박는 숫자가 있습니다. 퀵커머스를 시행한 이마트 점포의 98.2%가 전담 인력 없이 기존 업무와 병행했고, 그 결과 78.1%가 휴게 시간이 줄었다고 답했다는 조사입니다. 여기에 결정과 실행 사이의 거리라는 진단이 붙고, 본사가 확장을 결정하고 플랫폼이 서비스를 발표하지만 그 결정을 새벽 4시에 실행하는 건 점포의 야간 알바와 점주라는 문장으로 이어집니다. 윗선에서 내려온 결정과 그것을 몸으로 받아내는 자리 사이의 거리는, 업종을 바꿔 놓아도 비슷하게 벌어져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으로 갈수록 서술의 무게가 사람 쪽으로 기울어요. 쿠팡 물류 센터를 다룬 대목에서 저자들은 두 장면을 나란히 놓습니다. 한쪽에서는 고강도 노동에 대한 고발이 이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현장에 들어가려는 일용직 지원 경쟁이 치열합니다. 근무 신청 앱에서 출근 확정을 받기가 어려워 쿠켓팅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고 하죠. 왜 다시 그 문을 두드리는지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이 세 가지로 정리되는데, 문턱이 없다는 점, 정산이 정확하다는 점 그리고 사회 보장 제도를 활용하려는 계산입니다. 커뮤니티에서 가장 활발히 공유되는 주제가 실업 급여 수급을 위한 근무 일수 맞추기라는 설명에서, 산업 이야기가 고용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실업 급여를 받은 뒤 현장에 복귀한 분의 말이 이 책에서 가장 정확한 문장이었던 것 같아요. 급여만 생각하면 노동 강도에 비해 벌이가 너무 적은 일이라고 하면서, 취업 준비 자금을 모으려고 업무 일수 맞추기에 집중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힘든 업무로 뺑뺑이를 돌아도 참았죠. 통계 몇 줄보다 이 한마디가 상황을 더 잘 설명합니다.


도로 위의 장면은 방향이 반대입니다. 2025년 택배 없는 날을 두고 쿠팡 대리점 협력사들이 참여 반대 기자 회견을 열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쉬라고 만든 제도를 거부하는 이유는 단가 하락과 휴일 뒤에 밀려오는 물량이었습니다. 한 퀵플렉서는 쌓인 물량을 한꺼번에 무리해서 처리할 바에 기존 루틴대로 일정을 소화하는 게 낫다며, 고객 주문과 결제를 막는 게 아니라면 택배 없는 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휴식을 권리로 규정해도 수요를 그대로 두면 부담이 뒤로 미뤄질 뿐이라는 지적이라, 제도를 만드는 쪽에서 먼저 읽어야 할 대목으로 보였습니다.


저자들이 정직하다고 느낀 지점은 자기가 앞에서 제시한 숫자를 스스로 흔든다는 데 있습니다. 주 5일 이하로 일하는 기사 비율이 62%라는 데이터를 소개해 놓고, 몇 쪽 뒤에서는 가족 명의로 백업 기사를 등록해 두고 실제로는 주 7일 내내 단독으로 일하며 수익을 다 가져가는 이중 계정 관행을 전하면서, 그 데이터에 착시가 반영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현장의 시각을 붙입니다. 업계 자료를 그대로 옮기는 책이라면 하지 않을 선택이겠죠.


다만 에필로그에서는 조금 걸리는 데가 있었습니다. 혁신은 기술로 시작할 수 있지만 완성은 사람이 한다는 결론,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현장과 사람이 있다는 문장은 따뜻하고 저자들의 진심도 느껴집니다. 그런데 앞 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혁신의 주인공이라기보다 시스템의 빈틈 위에서 각자 유리한 계산을 하며 버티는 쪽이었어요. 실업 급여를 목표로 근무 일수를 맞추고, 가족 명의 계정으로 주 7일을 감당하는 선택은 희망의 언어로 감싸기가 어렵습니다. 저자들이 이 간극을 모를 리 없는데도 마무리에서 다시 사람을 답의 자리에 놓았으니,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계산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가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남았습니다. 이 책의 약점이라기보다, 4장까지 다 읽은 독자에게 남는 숙제에 가깝겠습니다.


읽는 내내 익명 표기가 절마다 A, B, C로 다시 돌아가는 탓에 누가 어느 자리에서 한 말인지 잠깐씩 되짚어야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현장 취재가 촘촘한 책일수록 이런 부분이 아쉽게 느껴지네요.


쿠팡과 네이버의 배송 경쟁이 궁금해서 집어들었다면 2장이 충분한 답을 줄 겁니다. 제 경우에는 뒤로 갈수록 생각이 다른 데로 갔어요. 회사에서 새 사업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는 분이라면 결정과 실행 사이의 거리라는 표현 앞에서 잠깐 멈추게 될 테고, 고용 형태가 흔들리는 시대를 지나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기업 정규직이 오랫동안 지향점이었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진단이 남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을 겁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받아 읽어 왔지만, 산업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그 구조 안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까지 같이 보여주는 책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찬 바람이 돌기 시작하는 계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주문 건수도 늘고 배송 물량도 함께 불어난다는데, 새벽에 움직이는 트럭과 캠프의 컨베이어를 한번쯤 떠올려 봐도 좋겠습니다. 클릭 한 번의 편리함이 그냥 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 한 권이 차분하게 알려줍니다.


당일 도착의 속도를 만드는 것은 기술만이 아니며, 그 속도를 매일 새벽 감당하는 사람들의 구조까지 함께 보게 만드는 현장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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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역 고사성어 - 삼천 년 지혜를 오늘의 삶으로 읽는 생존의 언어
김세중 지음 / 스타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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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초역'이라는 두 글자가 파란 원 안에 도장처럼 박혀 있습니다. 살구빛 바탕에 분홍과 초록 매듭 문양이 네 귀퉁이를 잡고 있고, 아래쪽으로는 초록 삼각과 파란 아치가 산과 문처럼 놓여 있어요. 한자 성어를 다룬 책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묵직한 인상과는 거리가 있는, 단정하고 밝은 표지입니다. 판형도 두께도 보통이라 손에 들었을 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종류가 아니었고요.


김세중 작가가 논어와 맹자, 손자병법, 춘추전국과 삼국지, 초한지에서 골라낸 성어 123개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옮겨 놓은 책입니다. 구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해요. 한쪽 면에는 성어의 뜻과 출전, 유래가 짧게 정리되고 그 아래 '초역'이라는 이름의 문장 한 대목이 박스로 들어갑니다. 맞은편 면은 현대의 사례 한 편, 그리고 '오늘의 한 줄 생각'으로 닫힙니다. 앞에서부터 차례로 읽어도 되고, 지금 마음에 걸리는 대목을 펼쳐 읽어도 되는 형태입니다. 저는 후자로 읽었습니다.


가장 먼저 붙잡힌 곳은 역지사지였어요. 맹자에서 온 말이라는 설명 뒤에 붙은 초역이, 제 눈에 뾰족하게 보이는 상대의 태도가 실은 그가 서 있는 낭떠러지의 깊이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발바닥 밑을 먼저 내려다보라는 권유였습니다. 이어지는 사례는 세종대왕입니다. 관청의 여자 노비가 아이를 낳고 이레만 쉬고 노동에 복귀해야 했던 시절, 세종은 그 휴가를 백 일로 늘리고 출산 전 한 달을 더했으며 남편에게도 서른 날을 주어 아내를 돌보게 했다고 적혀 있어요. 덧붙은 문장은 이렇습니다. "제가 앉은 자리가 편안하면 서 있는 사람의 불편함이 안 보인다.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그의 자리에 서보자."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자리가 하나씩 올라가고, 그러면 앉은 자리의 감각이 기준이 됩니다. 서 있는 사람의 종아리가 어떤 상태인지는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 되고요. 이 꼭지가 오래 남은 이유는 거창한 교훈 때문이 아니라, 지금 제 시야의 한계를 조용히 짚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토사구팽 꼭지는 결이 다릅니다. 사기 회음후열전의 한신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사례로 붙은 인물은 6세기 동로마의 벨리사리우스입니다. 영토를 되찾아 제국의 전성기를 만들었지만 명성이 커질수록 황제의 의심을 받았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직위와 재산을 잃었습니다. 두 눈을 멀게 해 거리로 내몰았다는 대목은 야사로 전해진다고 책이 분명히 표시해 두었어요. 여기 실린 초역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쓸모가 다했을 때 버려지는 도구가 되지 마라. 타인의 손 위에서 춤추며 달콤한 찬사에 취해 있을 때, 이미 등 뒤에서는 칼날이 갈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늘한 문장이지만 겁을 주려는 목적은 아닙니다. 한 줄 생각이 향하는 곳은 어떤 풍파에서도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자신만의 뿌리를 키워야 한다는 쪽이니까요. 몸담은 조직 안에서만 통용되는 유능함과, 조직 밖에서도 남는 실력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 나이쯤 되면 짐작하게 됩니다.


권토중래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당나라 두목의 시에서 온 말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쳐 올라온다는 뜻이라고 해요. 다산 정약용이 십팔 년 유배를 견디며 오백여 권을 남긴 이야기가 붙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지금이 학문의 기틀을 세울 기회라며 매일 먹을 갈았다는 서술 뒤에, 몸은 귀양지에 갇혀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거대한 흙먼지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문장이 놓입니다. 성어의 뜻과 사례가 하나의 그림으로 맞물리는 대목이라 편집이 잘 되었다고 느꼈어요. 초역은 이렇게 닫힙니다. "한 번 넘어졌다고 해서 인생의 무대가 끝난 것은 아니다. 무릎의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다시 일어서는 자가 결국 마지막에 웃는 진짜 승자가 된다."


견원지간 꼭지는 소리 내어 웃을 만한 사례를 데려옵니다. 개와 원숭이의 앙숙 설화 다음에 코카콜라와 펩시의 콜라 전쟁이 나와요. 서로를 무너뜨리려고 비방 광고와 마케팅비를 쏟아붓는 동안 웰빙이라는 큰 흐름을 놓쳤고, 그 틈으로 건강 음료와 생수의 신흥 강자들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웃과 동료를 적으로 규정하는 일이 자신을 지켜 주던 울타리를 허무는 것과 같다는 마무리가 붙는데,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소모적인 대립을 떠올리면 남의 일처럼 읽히지 않습니다.


읽으면서 걸리는 지점도 있었습니다. 사례의 무대가 제왕과 명장, 대문호와 글로벌 기업 쪽에 많이 몰려 있어요. 이야기의 힘은 분명하지만, 백 일의 출산 휴가를 내린 임금과 반도체에 나라의 미래를 걸었던 창업자의 결단을 제 하루의 판단에 바로 갖다 붙이기에는 간격이 꽤 큽니다. 마무리가 대체로 권유형이나 명령형으로 닫히는 것도, 여러 꼭지를 연달아 읽으면 조언이 조금 촘촘하게 느껴집니다. 다만 이 책은 애초에 아무 데나 펼쳐 한 꼭지씩 읽으라고 안내하고 있으니, 그렇게 읽는 편이 결에 맞겠다는 생각으로 정리했어요. 같은 인물이 여러 장에 다시 나오는 것도 처음엔 겹친다 싶었지만, 한 사람의 생애를 여러 각도에서 잘라 보여 주는 편집으로 받아들이면 수긍이 갑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 보면 한 번 읽고 정리되는 책과 책장에 세워 두고 자꾸 꺼내게 될 책이 갈리는데, 이 한 권은 후자에 놓였어요. 고사성어를 새로 배우고 싶은 마음보다, 결정을 앞두고 흔들릴 때 기댈 문장이 필요한 사람에게 쓸모가 더 클 것 같습니다. 조직에서 사람을 다루는 자리에 앉은 분이라면 역지사지와 견원지간 쪽에서, 한 번 크게 넘어져 본 분이라면 권토중래 쪽에서 오래 머무실 듯하고요. 아이와 함께 한 꼭지씩 읽고 이야기를 나눠 봐도 괜찮을 만큼 문장이 어렵지 않습니다.


아침저녁 바람이 서늘해지고 해가 눈에 띄게 짧아지는 시기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분기를 앞두고 무엇을 접고 무엇을 밀고 나갈지 셈을 하게 되는 계절이기도 하지요. 이런 무렵에 삼천 년을 건너온 네 글자를 하루 한 꼭지씩 읽는 일은, 생각보다 든든한 준비가 됩니다.


오래된 네 글자를 오늘의 자리로 끌어다 놓은 책으로, 결정 앞에서 흔들리는 사람에게 기댈 문장을 건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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