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지능 - 다이어트, 대사, 건강한 식생활의 최신 과학
케빈 홀.줄리아 벨루즈 지음, 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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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살 안 빠지는 거, 정말 내 의지가 약해서일까요.

마흔 후반이 되도록 저는 그렇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음식 지능>은 머리말부터 그 믿음을 슬쩍 흔들어 놓더라고요.


10월 첫 월요일이에요.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계절인데, 거울을 보면 살찌는 게 꼭 말만은 아닌 것 같아요. 내일 출근 생각에 일요일 오후가 조금 아깝게 느껴지는데, 햅쌀에 전어에 먹을 건 또 왜 이렇게 많은지요.


김영사에서 9월에 나온 책입니다.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20여 년 동안 영양과 대사를 연구한 과학자 케빈 홀과 건강 전문 기자 줄리아 벨루즈가 함께 썼고, 번역은 소아과 의사이자 번역가인 강병철 선생님이 맡았어요. 원서가 2025년 이코노미스트 올해의 책에 뽑혔다니 받아 들기 전부터 기대가 컸네요.


머리말 제목이 '별먼지와 햇빛'이에요.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이야기로 시작해서, 사람은 별먼지로 만들어졌고 햇빛의 에너지로 움직인다는 데까지 갑니다. 다이어트 책이 우주에서 문을 여니 괜히 설레더라고요. 건강한 음식을 식탁에 올릴 책임이 누구에게 있냐는 설문에 가장 많이 나온 답은 '나 자신'이었대요.


저도 그 답을 골랐을 사람입니다.

저자들은 여기서 질문을 바꿔 보자고 해요. 어떤 식단이 최고인지 따지기 전에, 우리가 왜 지금처럼 먹게 됐는지부터 들여다보자고요.


케빈 홀이라는 사람, 참 재밌습니다. 고등학교 때 열과 물질에 호기심이 생겨 물리학을 택했고, 얼터너티브 록 밴드에서 베이스를 쳤다고 해요. 맥길대학교에서 불규칙한 심장 박동을 모델링해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그 뒤 바이오 벤처에서 당뇨 환자의 식후 반응을 시뮬레이션하다가, 전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알아도 소화는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고요. 비만 연구자들 사이에서 유일한 물리학자였대요. 책이 빼곡한 연구실에서 흰 가운 대신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다는 묘사에는 웃음이 났어요. 어릴 적 꿈이 아버지 작업장을 돕던 정비공이었다니, 사람 몸을 기계 뜯어보듯 들여다보는 시선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파는 물건도 없고 특정 식단 편도 들지 않는 사람이라 마음 놓고 따라갈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줄리아 벨루즈는 2015년 여름 인터뷰를 하러 갔다가 케빈을 처음 만났습니다. 두 사람 모두 뻔해 보이는 질문까지 되풀이해서 묻는 편이라, 과학에 밝지 않은 저도 숨 고르며 따라갈 수 있었어요.


<음식 지능>에서 제일 재밌는 건 다들 상식처럼 알던 이야기를 하나씩 뒤집는 데 있는 것 같아요. 대표적인 게 8,000칼로리 법칙. 8,000칼로리를 덜 먹으면 지방이 1킬로그램 빠진다는 계산인데, 원래 1파운드에 3,500칼로리라는 규칙을 우리 독자에 맞게 킬로그램으로 바꾼 거라고 하네요. 뿌리는 1950년대 추정치예요. 막상 덜 먹기 시작하면 대사가 느려지고 뇌가 '더 먹어!' 신호를 보내서, 1년 안에 체중이 멈춰 선다고 합니다. 2012년에 미국영양학회가 공식적으로 버린 규칙인데도 아직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니 신기하죠. 다이어트를 몇 번 해 본 분이라면 처음 몇 달 잘 빠지다가 딱 멈추는 그 정체기를 아실 거예요. 그게 꼭 내가 해이해져서만은 아니었다는 설명에 어깨가 조금 가벼워지더라고요.


다른 대목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중반부 식품 환경 장의 쥐 실험이에요. 쥐는 원래 먹는 칼로리를 알아서 조절한답니다. 그런데 프루트 루프, 초콜릿칩 쿠키, 마시멜로, 땅콩버터, 살라미, 치즈 같은 마트 음식을 차려 주자 열흘도 안 돼 원래 사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대요. 60일 뒤에는 평균 체중이 50% 가까이 늘었다고 해요. 뉴욕 지하철에서 피자 조각을 끌고 가던 쥐 영상 이야기까지 곁들여지는데, 웃기면서도 남 일 같지가 않았어요. 케빈은 이 실험을 사람에게 옮겨, 성인 20명을 한 달 동안 병원에 머물게 하며 연구했습니다. 2019년에 나온 이 연구는 비타민 발견 이후 가장 중요한 영양 연구라는 평까지 들었다고 해요. 그런데도 저자들은 성인만, 한 달 동안, 병원에서 한 연구라 아직 모르는 게 많다고 스스로 선을 긋더군요. 그 태도가 좋았습니다.


이 장을 읽다 보면 과식과 비만이 의지 부족 탓만은 아니고, 몸의 생물학이 지금의 식품 환경을 만난 결과라는 말이 조금씩 이해가 가요. 2018년 미국 성인이 먹는 칼로리의 60% 정도, 아이들은 3분의 2 가까이가 초가공식품에서 온다는 숫자 앞에서는 할 말이 없어지고요. 그런데도 정책 결정자 300명쯤에게 물었더니 90% 넘게 비만의 주된 원인으로 개인의 동기 부족을 꼽았다니.


점심 메뉴 하나 고르는 것도 버거운 직장인 입장에선 좀 억울한 느낌이 듭니다.


옮긴이의 말에서는 또 다른 얼굴을 만나게 돼요. 강병철 선생님은 대학에 들어갈 때 42킬로그램이었는데 인턴 시절 70킬로그램을 넘겼고, 지금은 하루 만 보를 안 걷는 날이 드물다고 털어놓습니다. 의사 선생님도 먹는 문제 앞에선 우리랑 똑같이 고민한다는 게 은근히 위안이 되더라고요. 열 문항짜리 퀴즈도 실려 있어요. 하나만 귀띔하자면 대사가 느린 사람이 오히려 체중을 가장 잘 유지한다는군요. '나는 대사가 느려서 큰일'이라고 투덜대던 사람에겐 반가운 소식이죠. 체지방을 집 안의 벽장과 선반에 빗댄 설명도 있어요. 선반을 뜯어내면 잡동사니가 엉뚱한 데 쌓이듯, 체지방을 억지로 없애면 지방도 엉뚱한 곳에 쌓인다는 거예요.


옮긴이가 책 내용을 정리하며 쓴 문장 중에 밑줄 긋고 싶은 게 있었어요.


"우리는 '적당히 먹는다'는 선을 지킬 수 없다"

의지가 약하거나 식탐이 많아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몸이 원래 그렇게 반응한다는 뜻이래요. 좋은 과학책의 미덕으로 과학적 엄밀성과 역사적 통찰력을 꼽으며 남긴 말도 좋았습니다.


"전자가 없으면 공허하고, 후자가 없으면 길을 잃는다"


이 책은 둘 다 갖춘 데다 재미까지 있다고 덧붙여요. 번역한 분이 이렇게 신나서 칭찬하니 덩달아 믿음이 가는 것 같아요.


솔직히 술술 읽히기만 하는 책은 아니에요. 연구 이름과 통계가 촘촘히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속도가 확 줄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 통계가 중심이라 우리 식탁 이야기가 조금 더 있었으면 싶기도 했고요. 그나마 옮긴이의 말에서 우리나라 성인 35%, 아동·청소년 20%가 비만이라는 숫자를 보태 줘서 반가웠어요. 해법도 해로운 식품을 분명히 정의하고 아이들 대상 마케팅을 막자는 정책 쪽 이야기예요. 그래서 '나는 오늘 저녁 뭘 먹지' 하는 답답함은 남는 편이에요. 옮긴이도 말은 쉽지만 싸움은 결코 쉽지 않을 거라고 인정하더라고요.


<음식 지능>은 두께도 꽤 두툼합니다. 들고만 있어도 팔 운동이 될 것 같은데, 운동만으로 살 빼기는 어렵다는 게 이 책 이야기니 팔뚝만 단단해지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도 오해 하나를 붙잡으면 끝까지 파고드는 구성이라, 궁금한 주제부터 골라 읽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소장 가치를 묻는다면 책장 잘 보이는 곳에 꽂아 두고 싶은 쪽이에요. 저탄고지나 단백질, 혈당 측정기 같은 유행이 돌 때마다 꺼내 볼 사전 같은 책이 <음식 지능>이거든요. 브로콜리와 도넛이 한 그릇에 담긴 표지도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어요. 칼로리를 킬로그램 단위로 바꿔 준 번역의 세심함도 두고두고 볼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옮긴이의 말은 살도 빼고 사람도 지구도 구하는 열쇠가 한 끼 식사에 있다는 문장으로 끝나요. 거창하게 들리지만, 먹을 게 넘치는 가을에 한 끼를 다르게 보게 해 준 것만으로도 좋은 책 만난 것 같아 흐뭇합니다. 내일 월요일 점심 메뉴 고를 때는 <음식 지능> 생각이 먼저 날 것 같네요.


살이 찌는 게 내 의지 탓만은 아니라는 걸, 별먼지에서 마트 진열대까지 따라가며 차근차근 보여 주는 음식 과학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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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적 인간 - 잘 알지 못해도 괜찮은 국내 미술관 여행
문하연 지음 / 동아엠앤비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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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미술적 인간>서평 그림은 몰라도 괜찮아요, 10월에 읽기 좋은 국내 미술관 에세이


"막내딸, 여기 비가 하염없이 와. 비가 하염없이 오니까 마음이 울적하네. 회신 요망"

여든둘 아버지가 딸에게 보낸 문자라고 합니다. 미술관 여행 에세이를 펼쳤는데 그림보다 이 문자가 먼저 튀어나오니 웃음부터 나더라고요. 부제가 '잘 알지 못해도 괜찮은 국내 미술관 여행'이에요. 그림은 잘 몰라도 그림의 떡은 누구보다 잘 아는 아재한테 이만큼 반가운 문구도 없는 거 같아요.


10월 넷째날, 일요일에 소개하는 책은 <미술적 인간>입니다.

저자 문하연 작가는 간호사 출신이고, 첫 책 <다락방 미술관> 이후 7년 만에 미술 이야기로 돌아왔다고 해요.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국내 미술관 열아홉 곳을 다니며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글을 묶었어요. 그런데 읽다 보면 미술관 안내서라기보다 남의 집 가족 앨범을 넘겨보는 느낌이 듭니다. 그림 설명이 한창 이어지다가도 어느새 아버지 이야기로, 아들 이야기로 슬그머니 흘러가거든요. 프롤로그에는 "우리나라 미술관 중에서 어디가 가장 좋아요?"라는 질문에 "그때그때 달라요"라고 답하는 대목이 있어요. 농담처럼 들리는데 꽤 진심인 거 같더라고요.


계절마다 꼽은 곳이 따로 있어요. 봄엔 벚꽃 피는 호암미술관, 여름엔 계곡 물소리 들리는 춘천 이상원미술관, 겨울엔 비교적 따뜻한 제주현대미술관이에요. 가을 칸에는 "단풍이 미쳐버린" 뮤지엄산과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적혀 있는데, 요즘 같은 때라 그 두 이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읽었던 건 부소갤러리 장이에요. 부여, 논산, 강경을 도는 1박 2일 부녀 여행인데, 저자는 무릎이 불편한 아버지 체력을 아끼려고 수채화 동호회 전시를 그냥 지나치려 했대요. 그런데 아버지가 들어가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아마추어 작가들의 고만고만한 그림 사이를 다빈치 작품 보듯 유심히 둘러보시다가, 슬레이트 지붕 집 옆에 앙상한 나무가 선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추셨다고 해요. "쓸쓸하기 짝이 없네" 하시고는 나가려다 말고 이러셨대요. "잠깐만, 나 저 그림 다시 한번 보고 올게."


"옛날엔 다들 이렇게 가난하게 살았거든." 이어서 아버지는 딸 대신 관계자에게 이렇게 대답하세요. "이 그림은 정말로 쓸쓸하기 짝이 없네요. 그런데도 이 그림이 참 좋아요." 마흔 후반쯤 되면 부모님 걸음이 느려지는 게 하나둘 눈에 들어오잖아요. 그래서인지 체력을 계산하던 딸의 마음도, 그 계산을 슬쩍 무너뜨린 아버지의 한마디도 남 얘기 같지가 않았습니다.


저자는 이 장면 끝에서 스스로를 돌아봐요. 아버지와 그렇게 여행을 다니면서 미술관엔 한 번도 같이 가지 않았고, 아마추어 그림은 별것 아니라고 여겼다고요. "감동을 주는 그림이 꼭 명화일 리 없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솔직히 저는 이 대목이 좀 찔렸어요. 전시장에 가면 이름 큰 작가 앞에만 오래 서 있을 사람이 딱 저 같거든요.


극 F 아버지, 그리고 스스로 붙인 별명 '불효녀'.

아버지는 벤치에 앉으면 옆 사람에게 꼭 어디서 왔는지 물으세요. 해설사가 건물이 1942년에 지어졌다고 하면 "난 1943년생인데, 그럼 나보다 이 건물이 나이가 많네!" 하고 감탄하시고요. 말리면 "왜 넌 말도 못 하게 통제하냐?" 하고 삐지시니, 딸은 입을 다물고 멀찍이 떨어져 걷는다고 해요. 이런 투덜거림이 하나도 밉지 않았어요. 사비도성 가상 체험관에서 VR 고글을 쓰고 떨어지는 장면에 손잡이를 꼭 쥐셨다가, 끝나고 나서 멋쩍게 한참 웃으셨다는 장면까지요.


맛보기로 하나 꺼내자면 여행 다음 날 온 문자예요. "노벨 문학상 받은 한강이 너랑 동갑이더라. 누군 그런 상도 받는데 우리 딸은 되는 것 하나 없어 아버지가 심히 언짢다." 저자는 머리가 띵했다는데, 그래도 이렇게 답장을 보냅니다. "언젠가는 될 거예요, 아버지. 왜냐면 제가 될 때까지 할 거니까요. 회신 요망!" '회신 요망'으로 열고 '회신 요망'으로 닫히는 장이라 웃다가 찡해졌어요. 이 나이까지 회사를 다니다 보면 되는 것 하나 없는 기분을 모를 수가 없는데, 될 때까지 하겠다는 저 대답이 제 등도 한 번 두드려 주는 거 같았습니다.


프롤로그 끝에는 아버지가 2025년 늦가을에 하늘로 떠나셨다는 문장이 있어요. "그의 발 앞에 이 책을 놓아드리고 싶다"는 말을 알고 이 장을 읽으니, 웃긴 장면마다 다른 빛이 조용히 섞여 드는 느낌이 듭니다.


제주현대미술관 장에서는 저자가 이번엔 엄마가 돼서 아들과 여행을 떠나요. 7박 8일 제주 미술관 투어 중에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의 원화 143점이 온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 전시를 보러 갔대요. 가볍게 웃었던 건 만치니의 (필립스 부인)을 두고 "사실적이면서도 포토샵이 적당히 되어 있어" 주인공이 꽤 만족했을 거라는 대목이에요. 백 년도 더 전에 이미 보정 맛집이 있었던 셈이니, 초상화가도 고객 만족이 생명이었나 봅니다. 반 뒤어스의 (노인이 노래하면 젊은이는 피리를 불어라)를 보면서는 식탁 아래 등을 돌리고 연주에 빠진 아이의 볼이 사랑스러워 미소가 절로 나온다고 해요.


저자가 이 전시에서 단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무조건 고르겠다는 작품은 밀레이의 (한 땀! 한 땀!)이에요. "살짝 벌린 입술이 곧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는 표현이 좋았어요. 그림 볼 줄 모르는 사람도 '하나만 고른다면' 하는 마음으로 전시장을 돌면 훨씬 덜 막막하겠다 싶더라고요. 같은 방에 걸린 로세티의 (레지나 코르디움)은 모델 엘리자베스 시달과 로세티의 사연을 알고 나면 같은 얼굴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저자의 목소리는 확실히 낮아집니다.


세 시간 가까이 관람하고 나와 보니 아들에게서 두 시간 전에 온 문자가 있었대요. "관람 끝났고 카페에서 기다림." 왜 벌써 나왔냐고 빈정이 올라오던 참에 아들이 묻습니다. "엄마 좋아하는 그림 실컷 봐서 행복했어?" 혹시 돌려 까기인가 싶었는데 표정이 해맑았대요. 입장을 바꿔 자기가 게임하는 아들을 두 시간 기다렸다면 어땠을지 떠올리는 대목에 "(엄마 금쪽이 난동 예상)"이라는 괄호가 붙어 있어서 크게 웃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 아들, 보통이 아니에요.

숙소에서 "아까 오래 기다리느라 힘들었지? 미안해" 하니까, 그렇게 미안하면 치킨을 쏘래요. 원래는 비싸서 안 사 줄 생각이던 고등어회까지 사 줬는데, 회를 먹었더니 속이 냉하다면서요. 저자가 붙인 괄호는 "(분위기 급랭)".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모자 대화라 읽는 내내 재미있었어요. 아버지 뒤를 따라 걷던 딸이 아들과 여행하는 엄마가 되는 흐름이 <미술적 인간> 한 권에 같이 들어 있어서 더 좋았던 거 같아요. 장 끝에는 "익숙한 누군가를 새롭게 알고 싶다면 낯선 곳을 함께 여행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문장이 있어요.


컬러 도판이 큼직하게 실려 있어서 전시를 직접 보지 못해도 그림을 따라가기 좋아요. 미술관마다 근처에서 같이 들르기 좋은 곳도 챙겨 줘요. 부소갤러리 뒤로 이어지는 부소산성 숲길과 백마강 뱃길, 제주현대미술관 인근의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과 방림원 같은 곳들이요. 그래서 주말 나들이 계획을 짤 때 다시 꺼내 볼 책으로 책장에 꽂아 둘 만한 거 같아요. 열아홉 곳을 담았으니 얇은 책은 아니지만 장마다 미술관 하나씩 끊어져 있어서, 끌리는 곳부터 펼쳐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마침 10월이 시작됐어요. 단풍 소식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미술적 인간>에 나온 가을 미술관부터 하나씩 찾아가 볼까 싶어요. 그림 잘 몰라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친구를 하나 사귄 기분이라, 이번 가을이 조금 더 든든해졌습니다.


쓸쓸한 그림 앞에 선 아버지, 해맑게 묻는 아들, 그 사이에서 그림을 보는 딸의 다정한 미술관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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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투자자를 위한 최소한의 재무제표 공부
김영민 지음 / 메이트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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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감 말고 숫자로 고르는 주식, 김영민 <주식투자자를 위한 최소한의 재무제표 공부> 서평


사상 최대 이익을 발표했는데 주가가 떨어지는 회사가 있습니다. 반대로 실적이 영 시원찮은데 주가가 먼저 오르는 회사도 있고요. 주식을 조금이라도 해본 분이라면 이 두 장면 앞에서 고개를 갸웃했던 기억이 다들 있으실 거 같아요. 저도 그렇게 갸웃하던 개미 중 하나였는데, 이번에 만난 <주식투자자를 위한 최소한의 재무제표 공부>가 그 이유를 숫자로 하나씩 풀어주더군요.


제목에 재무제표가 박혀 있어서 솔직히 '재미없는 제표'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막상 읽어보니 '재미제표'더라고요.


메이트북스 슬림북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라 손에 쥐면 가볍고 얇은 편이에요. 표지에는 "60분 만에 끝내는"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한 번 훑는 데는 그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꼭지마다 달린 것들을 직접 써먹으려면 두고두고 펼쳐 보게 될 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은이 김영민 님은 경제학을 공부하고 재테크 잡지에서 오래 취재기자로 일했고, 지금은 전업 투자자이자 집필가로 활동한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문장이 군더더기 없이 짧고 단단합니다. 지은이의 말 첫머리부터 아픈 데를 정확히 짚으시는데, 이 문장이었어요.


"주가가 오르면 늦을까 봐 사고, 주가가 빠지면 더 떨어질까 봐 팝니다."

뜨끔했습니다.

이렇게 투자하면 판단의 기준이 "시장의 소음 속에 놓이게 된다"고 하는데, 반박할 말이 없더군요. 회사에서는 보고서 숫자 하나만 틀려도 진땀을 빼면서, 정작 내 돈이 들어간 회사의 숫자는 기사 제목만 보고 넘겼으니까요. "많이 빠졌으니 싸다"는 생각을 주식시장에서 가장 위험한 착각으로 꼽는 대목도 있어요. 이익이 더 빠르게 줄고 있으면 낮아 보이던 주가수익비율이 곧 높아질 수 있다는 설명이 이어지는데, 거기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싸 보이는 주식과 실제로 살 만한 주식은 다르다는 말, 마음에 단단히 걸어두고 싶은 문장이었어요.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꼭지마다 끝에 붙은 (실전에 바로 활용하는 AI 프롬프트)예요. 기업 이름만 바꿔 넣으면 그대로 쓸 수 있게 생겼습니다. 이를테면 "○○기업의 최근 8개 분기 매출·영업이익·순이익과 향후 4개 분기 예상치를 표로 정리해줘" 같은 문장으로 시작해요. 재미있는 건 평가하는 틀이 꼭지마다 다르다는 점이에요. 이익의 흐름은 '정점·둔화·바닥·회복'으로, 매출 성장의 힘은 '강함·보통·약함'으로, 본업의 흐름은 '개선·정체·악화'로 판단해 달라고 하고, 끝에는 늘 숫자 근거와 위험 신호를 3가지씩 달라는 주문이 붙습니다. 그러면서도 지은이는 AI가 최종 판단까지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고 분명히 선을 그어요. 그 균형이 좋았어요.


다른 꼭지보다 유독 천천히, 문장 하나하나 따라가듯 읽은 곳은 (주가는 현재 이익보다 앞으로 달라질 이익에 먼저 반응한다)였습니다. "이익이 가장 많이 나온 시점이 반드시 좋은 매수 시점은 아니다"라는 문장 다음에 정점과 바닥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정점은 이익이 높은 상태에서 주문·가격·가동률이 먼저 약해질 때 나타나고, 바닥은 이익이 낮아도 주문이 회복되고 원가 부담이 줄기 시작할 때 가까워진다고 해요.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잘나가던 부서가 꺾일 때도 실적표에 찍히기 전에 먼저 티가 나잖아요. 거래처 연락이 뜸해지고, 회의는 길어지고.


기업도 다르지 않다는 얘기로 들렸어요.

매출 이야기도 흥미로웠습니다. 매출이 똑같이 20% 늘어난 기업이라도 많이 팔아서 늘었는지, 값을 올려서 늘었는지에 따라 성장의 힘이 다르다는 거예요. 할인 판매나 유통업체에 물량을 미리 넘겨서 늘린 판매량은 다음 분기 판매를 오히려 줄일 수 있다는 대목에서는 피식 웃음이 났어요. 월말에 숫자 맞추려고 물량을 미리 넘기는 풍경은 회사 다녀본 분들이라면 한 번쯤 보셨을 테니까요. "가격이 10% 올라도 판매량이 15% 줄면 매출은 감소한다"는 예시처럼, 계산이 단순해서 오히려 머리에 쏙 들어오는 설명이 많은 것도 좋았습니다.


영업이익 꼭지에서는 광고비·연구개발비·인건비를 줄여 이익을 높였다면 필요한 투자까지 줄인 건 아닌지 살펴야 한다는 부분이 오래 남았어요. 당장 숫자는 예쁜데 내년이 걱정되는 실적. 중년 직장인한테는 꽤 익숙한 장면이라 남 일 같지 않더라고요. 그 꼭지를 맺는 문장을 맛보기로 옮겨 볼게요.


"핵심은 많이 파는 기업이 아니라 판매 증가를 꾸준히 이익으로 바꾸는 기업을 찾는 것이다."

뒤쪽 4장으로 가면 업종마다 봐야 할 숫자가 따로 있다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목차를 보면 반도체, 전력기기, 조선, 방산·원전, 로봇까지 요즘 시장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업종들이 들어 있어요. 전력기기 꼭지에는 연간 매출 1조 원짜리 기업이 수주잔고 2조 원을 들고 있는 예시가 나와요. 그런데 쌓인 주문을 제때 매출로 바꿀 생산능력이 있는지가 관건이라는 설명이 이어지죠. 조선 꼭지에서는 "조선 기업은 물량보다 계약의 질을 봐야 한다"는 문장 다음에 (비싸게 받은 배를 원가 안에서 만들 수 있는지 본다)라는 소제목이 나옵니다. 큰 계약을 따냈다고 다 같이 박수 치고 나서, 막상 납기와 원가를 맞추느라 고생하는 건 어느 회사나 비슷한 풍경 아닐까 싶어요. LNG선, 특수선, 해양플랜트, 컨테이너선마다 가격과 원가 구조가 다르다는 설명까지 읽고 나니, 뉴스에서 수주 소식이 나올 때 이제는 다른 데부터 보게 될 거 같아요.


솔직히 걸렸던 건 제 쪽 사정이었습니다. 영업외손익, 공사손실충당금, 후판 가격 같은 단어 앞에서는 걸음이 확실히 느려지더라고요. 재무제표를 처음 여는 분이라면 낯선 용어 몇 개는 검색해 가며 읽는 편이 마음 편할 것 같아요. 프롬프트도 읽기만 하면 그냥 문장일 뿐이라, 종목 이름을 직접 넣어 돌려봐야 비로소 내 것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주식 앱은 하루에도 몇 번씩 열면서 사업보고서는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사람, 딱 저 같은 사람한테 이 정도 두께와 이 정도 난이도가 알맞은 출발선 같아요. 가방에 넣어도 티가 안 날 만큼 얇은데, 업종별 프롬프트가 꼭지마다 붙어 있으니 실적 시즌이 올 때마다 다시 꺼내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주식투자자를 위한 최소한의 재무제표 공부>를 책장에 꽂아둘 이유는 거기서 충분하다고 봐요.


지은이의 말 마지막 문장을 옮기면서 마무리할게요.

"재무제표를 읽는 순간, 주식투자는 감으로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확인하고 선택하는 일로 바뀝니다."


선선한 10월에 들어서자마자 좋은 책을 만난 거 같아서 기분이 참 좋습니다. 올가을엔 단풍 따라 제 계좌도 빨갛게 좀 물들어 주면 좋겠네요. 물론 이번엔 숫자부터 확인하고요.


사상 최대 실적에도 주가가 빠지는 이유를 숫자로 풀어주고, 꼭지마다 바로 쓸 수 있는 AI 프롬프트까지 담은 얇고 알찬 재무제표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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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의 지혜, 오늘에 충실하라 - 시간과 감정을 다스리는 세네카의 53가지 인생 지혜
세네카 지음, 정영훈 엮음, 이선미 옮김 / 메이트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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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피곤하면 화부터 나는 이유, 세네카가 먼저 알더라고요 <세네카의 지혜, 오늘에 충실하라> 서평


목요일쯤 되면 별것 아닌 일에도 괜히 욱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게 꼭 상대 탓만은 아닐 수 있다고 2천 년 전 로마의 철학자가 이미 말해 두었더군요. 잠이 부족하거나 몸이 지쳤을 때는 평소라면 넘길 일도 견디기 어렵다고요. 늘 피곤한 아재 입장에서는 이 한 장 때문에라도 누구한테든 이 책 얘기를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10월 셋째날, 토요일이에요.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져서 얇은 겉옷을 하나 챙기게 되는 계절입니다. 이번에 이야기할 책은 <세네카의 지혜, 오늘에 충실하라>예요. 세네카는 후기 스토아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였던 사람이에요. 그의 여러 저작에서 53가지 인생 지혜를 골라 지금의 말로 다시 엮은 책입니다. 정영훈 엮음, 이선미 옮김이고 메이트북스에서 나왔어요.


구성이 꽤 독특한 편입니다. 장 하나가 펼친 두 쪽 안에서 딱 끝나거든요. 장 번호는 작은 고리에 매달린 동그라미 안에 들어 있는데, 메달 같기도 하고 열쇠고리 같기도 해서 보는 맛이 있더군요. 마지막 문단에서는 앞에서 한 이야기를 명령형으로 한 번 더 꾹 눌러 정리해 줘요. 그래서 한 장만 읽어도 손에 쥐어지는 게 분명한 느낌이 듭니다.


엮은이의 말을 보면 (도덕 서한)을 중심에 두고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분노에 관하여), (마음의 평정에 관하여) 같은 저작을 함께 참고했다고 해요. 번역서나 명언집과는 결이 다른 책이라고도 하고요. 그 글에서 제일 좋았던 문장은 이거예요.


"철학은 읽는 순간보다 선택하는 순간에 필요하다."

두께는 보통 책보다 한참 얇은 편이라 가방에 넣어도 티가 잘 안 납니다. 들고 다니기도 가벼운데 덮고 나면 어깨까지 조금 가벼워지는 기분이라, 이런 게 진짜 경량 철학 아닌가 싶어요.


맨 앞의 01장(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재산이다)부터 직장인 마음을 정확히 건드리더라고요. 사람들은 돈을 쓸 때는 손익을 따지면서 시간을 내줄 때는 대가를 거의 묻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정리합니다.


"가장 귀한 것을 가장 쉽게 내놓는다."

통장 비유가 특히 좋았어요. 통장 잔액은 줄어든 만큼 드러나는데 사라진 순간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거예요. 월급날 통장은 꼬박꼬박 들여다보면서 내 하루가 어디로 새는지는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거 같더라고요. 습관처럼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하고, 목적 없이 검색하고, 필요 이상으로 대화를 늘이는 사이에 흩어진 몇 분이 모여 온전한 한 시간을 없앤다고 합니다. 퇴근하면 유튜브만 보다 잠들던 시절의 제가 딱 그랬어요.


뜨끔.

장 끝에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스스로 물어보라는 질문이 하나 나와요. 이 일은 내 삶의 한 부분을 내어줄 만큼 중요한가. 회사 모니터 옆에 붙여 두고 싶은 문장이에요.

솔직히 마음에 걸렸던 장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다음 02장(거절하지 못하면 내 시간은 남의 것이 된다)입니다. 너무 제 얘기 같아서요. 돈을 요구받으면 이유와 액수를 따지는데 시간을 요구받으면 생각하기도 전에 승낙한다는 첫 문단부터 할 말이 없더군요. 그다음 문장은 더 아프게 들어와요.


"거절을 못하게 막는 것은 대개 친절이 아니라 평판에 대한 두려움이다."

차갑거나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서 원하지 않는 약속을 받아들인다는 대목은, 직장 생활 오래 한 사람 중에 안 걸리는 사람이 드물 거 같아요. 책은 부탁은 요청일 뿐 의무가 아니라고 하면서 결정하기 전에 확인할 세 가지를 내놓습니다. 반드시 내가 해야 하는가, 지금 해야 하는가, 이 일을 맡아도 이미 정한 중요한 일을 지킬 수 있는가. 가족과 친구, 공동체를 위해 감당해야 할 몫은 있다고 선을 그어 두기도 해요. 무조건 거절하라는 얘기로 흐르지 않는 점이 좋았습니다.


PART 2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감정 쪽으로 옮겨 갑니다. 21장(첫 동요를 분노로 키우지 마라)은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빨리 뛰는 몸의 반응부터 꺼내더군요. 이런 반응은 이성보다 먼저 일어나서, 갑작스러운 소리에 움찔하는 것처럼 의지로 막기 어렵다고요. 그러니 첫 동요를 느꼈다는 이유로 자신을 탓하지 말라고 합니다. 화가 났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진 것 같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거 같았어요.


22장(화가 나면 바로 말하거나 결정하지 마라)은 거의 실전 매뉴얼에 가까워요.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면 짧게 말하라. "지금은 바로 답하지 않겠다" "사실을 확인한 뒤 다시 이야기하겠다"라고 밝히면 충분하다. 긴 해명과 반박은 다툼을 이어갈 말만 늘린다."

답장을 보내지 말고, 전화를 끝내고, 혼자 걸으며 시간을 확보하라는 말도 있어요. 목소리를 낮추고 굳은 손을 펴라는 데까지 갑니다. 손을 펴라니,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철학책은 처음 보는 거 같더라고요. 다음 날에도 같은 결론이라면 그때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문장까지 읽고 나면, 메신저 창에 급하게 써 내려갔던 긴 답장들이 하나씩 떠오르고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그다음 23장(자꾸 화가 난다면 몸의 피로부터 살펴라)이에요. 피로는 참을성을 먼저 줄인다고 하더군요. 피곤하면 기다리는 시간은 길게 느껴지고, 작은 소음도 거슬리고, 평범한 말까지 무례하게 들린다고요. 바깥 상황은 그대로인데 그걸 받아들이는 힘이 약해진 거라는 설명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습니다.


화가 반복되는 조건을 찾아보라는 대목도 좋았어요. 잠이 부족한 날인지, 식사를 거른 뒤인지, 일이 몰린 때인지. 중년 직장인한테는 이 셋이 거의 매일 겹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인데요.


그렇다고 피곤하니 봐 달라는 얘기로 끝나지는 않아요. "피로는 거친 행동이 나온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을 옳게 만들지는 못한다." 지쳤다는 이유로 상처를 주었다면 사과하고 행동을 고치라는 말까지 붙어 있어요. 위로와 따끔함이 한 장 안에 같이 들어 있는 느낌이 듭니다.


읽다 보니 세네카라는 사람 자체도 궁금해지더라고요. 웅변술이 뛰어났지만 천식과 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출세도 남들보다 늦었다고 해요. 몸이 지치면 마음도 흔들린다는 얘기를 머리로만 쓴 사람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황제 곁에서 권력의 한복판을 지나온 사람이 시간이며 분노며 거절 같은 걸 이렇게 생활의 말로 풀어 놓았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요.


PART 3에서는 관계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거절 얘기와 짝을 이루는 문장이 하나 눈에 들어왔어요. "감사를 복종으로 바꾸지는 마라."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후의 모든 요구를 따라야 하는 건 아니라고 하더군요. 고마움을 기억하는 것과 내 판단을 넘겨주는 것을 나눠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 같았습니다.


책의 끝으로 갈수록 이야기는 조금 더 깊어집니다.

50장(노년에는 할 일을 줄이고 중요한 일에 시간을 써라)은 제목만 보면 아직 먼 얘기 같은데, 40대 후반에게는 문 앞까지 와 있는 이야기처럼 읽혔어요. 더 높은 자리와 더 많은 성취가 지금도 필요한지 물어보라고 하고, 오래 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끝까지 붙들 필요는 없다고 하더군요. 승진이며 연봉이며 붙들고 달려온 것들을 한 번쯤 내려놓고 바라봐도 된다는 말 같아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오래 살았다고 시간을 잘 쓴 것은 아니라는 문장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고요.


이어지는 51장과 52장은 죽음을 다뤄요. 무겁게만 흐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차분한 결이더라고요. 죽음을 생각하는 목적이 삶을 어둡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고 하면서, 해야 할 말을 전하고 내려야 할 결정을 내리고 맡은 일은 시작하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서두르라는 뜻도 아니라서, 죽음을 기억하는 일을 "이유 없는 미룸을 줄이는 일"이라고 부르는 대목이 마음에 들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슬픈 것도 자연스럽다고 인정해 주는 문장도 있어서, 사람 마음을 함부로 다그치지 않는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고요.


마지막 53장(완벽해지려 하지 말고 결점을 하나씩 줄여라)은 책 전체를 다정하게 마무리하는 장 같아요. 한 번도 화내지 않고 늘 옳게 행동하겠다는 목표는 쉽게 좌절을 만든다면서, 자주 반복되는 결점 하나부터 줄이라고 하거든요. 예전보다 덜 화내고, 잘못을 더 빨리 인정하고, 욕심에 끌리다가도 일찍 멈춘다면 이미 달라지고 있는 거라고요.


"나아진다는 것은 결점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같은 결점을 조금씩 덜 반복하는 것이다."

<세네카의 지혜, 오늘에 충실하라>는 곁에 두고 아무 데나 펼쳐 보기 좋은 책이에요. 장마다 두 쪽이면 끝나니까 그날 마음에 걸리는 제목 하나만 골라 읽어도 충분하거든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날엔 02장, 괜히 짜증이 나는 날엔 23장을 펴 보면 되겠더라고요. 회사에서 늘 남의 일까지 떠안고 있는 후배 책상에 슬쩍 올려 두고 싶은 책이기도 합니다. 읽는 내내 재미있었어요.


하늘이 부쩍 높아진 가을 초입에 <세네카의 지혜, 오늘에 충실하라> 덕분에 좋은 책 만난 거 같아서 좋았습니다. 오늘은 일찍 자 보려고요. 피곤하면 화부터 난다고 세네카 선생님이 그러셨으니까요. 하루만 더 버티면 주말입니다. 다들 화 대신 잠을 넉넉히 챙기는 가을 보내세요.


시간과 거절, 분노와 피로, 그리고 덜어냄까지, 2천 년 전 세네카가 중년 직장인의 하루에 건네는 짧고 단단한 53가지 처방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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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물방울 모양
데라치 하루나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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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아직은 몰라요" 그 한마디가 오래 남는 책, 데라치 하루나 <기억은 물방울 모양>서평

금요일 저녁이 되면 이번 주에 뭘 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어요. 분명히 바빴는데 손에 남은 게 별로 없는 느낌이죠. 이번에 소개할 책은 데라치 하루나의 <기억은 물방울 모양>인데, 이 책은 그렇게 흘러가 버린 시간을 하나씩 다시 주워 담는 이야기 같았습니다.

원제는 <雫>, '시즈쿠'라고 읽고 물방울이라는 뜻이래요. 일본에서는 2024년 가을에 NHK출판에서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는 김지연 번역으로 문예춘추사에서 나왔습니다. 작가는 사가현 출신이고, <비올레타>로 데뷔해 <물을 수놓다>로 가와이 하야오 이야기상을 받은 분이에요. 이름은 낯설어도 이력을 보면 마음을 꿰매는 이야기를 꾸준히 써 온 작가인 것 같아요.


이야기는 2025년 4월에서 시작합니다. 마흔다섯 살 나가세 다마는 '주얼리 다카미네'에서 20년 동안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건물 철거로 회사가 문을 닫는 마지막 날을 맞아요. 텅 빈 사무실, 몇 장 남지 않은 명함, 창문에 비친 나이 든 몸. 이 대목에서 책장이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저도 회사 책상 서랍 안쪽에 명함 상자를 넣어 두고 있는데, 언젠가 그 상자가 다 쓸모없어지는 날이 오겠구나 싶었거든요.


이 책에서 가장 독특하다고 느낀 건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점이에요. 2020년, 2015년, 2010년 하는 식으로 5년씩 과거로 내려가서 1995년, 열다섯 살 중학생들에게 닿아요.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읽다 보니 이 방식이 꽤 다정하게 느껴졌습니다. 2025년에 철거를 앞두고 텅 비어 있던 5층짜리 빌딩을 1995년의 다마가 교복 차림으로 처음 올려다보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열다섯 살 다마는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기가 죽어서,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던 치맛단 주름이 갑자기 창피해져요. 같은 건물이 30년을 사이에 두고 겹쳐 보이니까, 앞에서 무심히 읽은 장면들을 자꾸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천천히 읽게 되는 대목이 있었어요. 1995년 장에서 금속 기술자 고마 씨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에요. 열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제자로 들어갔다는 고마 씨에게 누가 이 일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데, 고마 씨는 느릿느릿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직은 몰라요"라고 대답합니다. 망했다 싶은 일이 나중에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하고, 운이 좋다고 생각한 일이 재난을 부르기도 한다고요. 괴로운 시기라고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인생에 좋다 나쁘다 결론을 내리기는 아직 이르다는 말이 나와요. 이 대목은 몇 번을 다시 읽었습니다. 마흔 넘어서 이것저것 결론부터 내리려고 했던 제 습관이 조금 머쓱해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인물들도 하나같이 기억에 남아요. 다카미네는 어릴 때부터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아이였던 것 같아요. 노트 좀 보여 달라, 교과서 좀 빌려 달라며 말을 거는데, 다마는 그럴 때마다 움츠러들어요. 그 빌딩 1층의 보석 가게를 보면서 다마가 "저 가게는 다카미네처럼 반짝거리네요"라고 혼잣말을 하는데, 이 한 줄에 그 아이가 다마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 다 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반짝이던 아이가 2025년에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넓네, 텅 비니까"라고 중얼거려요. 그 거리가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시즈쿠는 말수가 적은데도 존재감이 큰 인물 같아요. 어른들이 시즈쿠 문제로 둘이서만 얘기하겠다고 하자, 평소 손 들고 발표하는 일도 거의 없던 다마가 "기노시타 일인데 어째서 기노시타를 빼는 건가요?"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나가려는 다마의 팔을 시즈쿠가 꽉 붙잡고 "여기 있어"라고 하죠. 둘이 친해지는 순간을 따로 설명하지 않는데도 그 손힘만으로 충분히 전해지는 것 같았어요. 모리는 늘 조용히 옆에서 챙겨 주는 친구라는 인상입니다. 다카미네의 체육복 바지 실밥이 터졌을 때 감쪽같이 꿰매 준 사람도 모리였어요.


2015년 장에 나오는 대화 하나도 적어 둡니다. 영원은 찾았느냐는 미술 선생님의 물음에 "아직 못 찾았어요"라고 답하자, 선생님이 "그렇구나, 나도 그래"라고 해요. 정답을 알려 주는 어른 말고, 같이 모르겠다고 말해 주는 어른도 있다는 게 묘하게 위로가 됐습니다. 이 책에는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너한테만 하는 얘긴데" 같은 말이 시점을 바꿔 가며 몇 번씩 나오는데, 같은 말이 다른 나이에 다시 들릴 때마다 반가운 기분이 들었어요.


아쉬운 점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시간이 거꾸로 흐르니까 처음 몇 장은 인물들의 관계가 잘 잡히지 않아서 앞으로 돌아가 확인할 때가 있었습니다. 감정을 크게 터뜨리는 장면도 거의 없어서, 사건이 빠르게 몰아치는 소설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초반이 조금 잔잔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저는 그 잔잔함이 좋았지만 취향을 탈 수는 있겠다 싶습니다.


번역은 편하게 읽혔어요. '기노시타 시즈쿠'라는 이름이 나무 아래 물방울이라는 뜻이라든가, 일본어로 바느질 매듭을 '다마무스비'라고 한다는 역주가 곳곳에 달려 있어서 이름에 숨은 재미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책은 손에 쥐기 알맞은 크기라 들고 다니기도 좋았어요. 보석 이야기라고 무게까지 금덩이는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파스텔 무지개 바탕에 물방울 모양 보석이 놓인 표지도 예뻐서 책장 눈에 띄는 자리에 꽂아 두고 싶어지네요.


10월 첫 금요일이에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달라진 게 느껴지는 걸 보니 가을이 성큼 온 것 같습니다. 이런 계절에는 오래된 친구 이름이 하나쯤 떠오르기도 하잖아요. 이 책을 덮고 나면 서랍 속 낡은 물건 하나를 꺼내 보고 싶어질지도 몰라요. 기억은 물방울 모양이라는데, 요즘 제 기억은 자꾸 증발하는 걸 보면 물방울은 확실히 맞는 것 같습니다.


30년을 5년씩 거슬러 올라가며 네 친구의 시간을 다시 꿰어 보는, 잔잔하고 다정한 소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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