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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적 인간 - 잘 알지 못해도 괜찮은 국내 미술관 여행
문하연 지음 / 동아엠앤비 / 2026년 9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미술적 인간>서평 그림은 몰라도 괜찮아요, 10월에 읽기 좋은 국내 미술관 에세이
"막내딸, 여기 비가 하염없이 와. 비가 하염없이 오니까 마음이 울적하네. 회신 요망"
여든둘 아버지가 딸에게 보낸 문자라고 합니다. 미술관 여행 에세이를 펼쳤는데 그림보다 이 문자가 먼저 튀어나오니 웃음부터 나더라고요. 부제가 '잘 알지 못해도 괜찮은 국내 미술관 여행'이에요. 그림은 잘 몰라도 그림의 떡은 누구보다 잘 아는 아재한테 이만큼 반가운 문구도 없는 거 같아요.
10월 넷째날, 일요일에 소개하는 책은 <미술적 인간>입니다.
저자 문하연 작가는 간호사 출신이고, 첫 책 <다락방 미술관> 이후 7년 만에 미술 이야기로 돌아왔다고 해요. 강원도에서 제주도까지 국내 미술관 열아홉 곳을 다니며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글을 묶었어요. 그런데 읽다 보면 미술관 안내서라기보다 남의 집 가족 앨범을 넘겨보는 느낌이 듭니다. 그림 설명이 한창 이어지다가도 어느새 아버지 이야기로, 아들 이야기로 슬그머니 흘러가거든요. 프롤로그에는 "우리나라 미술관 중에서 어디가 가장 좋아요?"라는 질문에 "그때그때 달라요"라고 답하는 대목이 있어요. 농담처럼 들리는데 꽤 진심인 거 같더라고요.

계절마다 꼽은 곳이 따로 있어요. 봄엔 벚꽃 피는 호암미술관, 여름엔 계곡 물소리 들리는 춘천 이상원미술관, 겨울엔 비교적 따뜻한 제주현대미술관이에요. 가을 칸에는 "단풍이 미쳐버린" 뮤지엄산과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적혀 있는데, 요즘 같은 때라 그 두 이름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어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읽었던 건 부소갤러리 장이에요. 부여, 논산, 강경을 도는 1박 2일 부녀 여행인데, 저자는 무릎이 불편한 아버지 체력을 아끼려고 수채화 동호회 전시를 그냥 지나치려 했대요. 그런데 아버지가 들어가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아마추어 작가들의 고만고만한 그림 사이를 다빈치 작품 보듯 유심히 둘러보시다가, 슬레이트 지붕 집 옆에 앙상한 나무가 선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추셨다고 해요. "쓸쓸하기 짝이 없네" 하시고는 나가려다 말고 이러셨대요. "잠깐만, 나 저 그림 다시 한번 보고 올게."
"옛날엔 다들 이렇게 가난하게 살았거든." 이어서 아버지는 딸 대신 관계자에게 이렇게 대답하세요. "이 그림은 정말로 쓸쓸하기 짝이 없네요. 그런데도 이 그림이 참 좋아요." 마흔 후반쯤 되면 부모님 걸음이 느려지는 게 하나둘 눈에 들어오잖아요. 그래서인지 체력을 계산하던 딸의 마음도, 그 계산을 슬쩍 무너뜨린 아버지의 한마디도 남 얘기 같지가 않았습니다.
저자는 이 장면 끝에서 스스로를 돌아봐요. 아버지와 그렇게 여행을 다니면서 미술관엔 한 번도 같이 가지 않았고, 아마추어 그림은 별것 아니라고 여겼다고요. "감동을 주는 그림이 꼭 명화일 리 없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솔직히 저는 이 대목이 좀 찔렸어요. 전시장에 가면 이름 큰 작가 앞에만 오래 서 있을 사람이 딱 저 같거든요.
극 F 아버지, 그리고 스스로 붙인 별명 '불효녀'.
아버지는 벤치에 앉으면 옆 사람에게 꼭 어디서 왔는지 물으세요. 해설사가 건물이 1942년에 지어졌다고 하면 "난 1943년생인데, 그럼 나보다 이 건물이 나이가 많네!" 하고 감탄하시고요. 말리면 "왜 넌 말도 못 하게 통제하냐?" 하고 삐지시니, 딸은 입을 다물고 멀찍이 떨어져 걷는다고 해요. 이런 투덜거림이 하나도 밉지 않았어요. 사비도성 가상 체험관에서 VR 고글을 쓰고 떨어지는 장면에 손잡이를 꼭 쥐셨다가, 끝나고 나서 멋쩍게 한참 웃으셨다는 장면까지요.
맛보기로 하나 꺼내자면 여행 다음 날 온 문자예요. "노벨 문학상 받은 한강이 너랑 동갑이더라. 누군 그런 상도 받는데 우리 딸은 되는 것 하나 없어 아버지가 심히 언짢다." 저자는 머리가 띵했다는데, 그래도 이렇게 답장을 보냅니다. "언젠가는 될 거예요, 아버지. 왜냐면 제가 될 때까지 할 거니까요. 회신 요망!" '회신 요망'으로 열고 '회신 요망'으로 닫히는 장이라 웃다가 찡해졌어요. 이 나이까지 회사를 다니다 보면 되는 것 하나 없는 기분을 모를 수가 없는데, 될 때까지 하겠다는 저 대답이 제 등도 한 번 두드려 주는 거 같았습니다.
프롤로그 끝에는 아버지가 2025년 늦가을에 하늘로 떠나셨다는 문장이 있어요. "그의 발 앞에 이 책을 놓아드리고 싶다"는 말을 알고 이 장을 읽으니, 웃긴 장면마다 다른 빛이 조용히 섞여 드는 느낌이 듭니다.
제주현대미술관 장에서는 저자가 이번엔 엄마가 돼서 아들과 여행을 떠나요. 7박 8일 제주 미술관 투어 중에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의 원화 143점이 온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 전시를 보러 갔대요. 가볍게 웃었던 건 만치니의 (필립스 부인)을 두고 "사실적이면서도 포토샵이 적당히 되어 있어" 주인공이 꽤 만족했을 거라는 대목이에요. 백 년도 더 전에 이미 보정 맛집이 있었던 셈이니, 초상화가도 고객 만족이 생명이었나 봅니다. 반 뒤어스의 (노인이 노래하면 젊은이는 피리를 불어라)를 보면서는 식탁 아래 등을 돌리고 연주에 빠진 아이의 볼이 사랑스러워 미소가 절로 나온다고 해요.

저자가 이 전시에서 단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무조건 고르겠다는 작품은 밀레이의 (한 땀! 한 땀!)이에요. "살짝 벌린 입술이 곧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는 표현이 좋았어요. 그림 볼 줄 모르는 사람도 '하나만 고른다면' 하는 마음으로 전시장을 돌면 훨씬 덜 막막하겠다 싶더라고요. 같은 방에 걸린 로세티의 (레지나 코르디움)은 모델 엘리자베스 시달과 로세티의 사연을 알고 나면 같은 얼굴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저자의 목소리는 확실히 낮아집니다.
세 시간 가까이 관람하고 나와 보니 아들에게서 두 시간 전에 온 문자가 있었대요. "관람 끝났고 카페에서 기다림." 왜 벌써 나왔냐고 빈정이 올라오던 참에 아들이 묻습니다. "엄마 좋아하는 그림 실컷 봐서 행복했어?" 혹시 돌려 까기인가 싶었는데 표정이 해맑았대요. 입장을 바꿔 자기가 게임하는 아들을 두 시간 기다렸다면 어땠을지 떠올리는 대목에 "(엄마 금쪽이 난동 예상)"이라는 괄호가 붙어 있어서 크게 웃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 아들, 보통이 아니에요.
숙소에서 "아까 오래 기다리느라 힘들었지? 미안해" 하니까, 그렇게 미안하면 치킨을 쏘래요. 원래는 비싸서 안 사 줄 생각이던 고등어회까지 사 줬는데, 회를 먹었더니 속이 냉하다면서요. 저자가 붙인 괄호는 "(분위기 급랭)".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모자 대화라 읽는 내내 재미있었어요. 아버지 뒤를 따라 걷던 딸이 아들과 여행하는 엄마가 되는 흐름이 <미술적 인간> 한 권에 같이 들어 있어서 더 좋았던 거 같아요. 장 끝에는 "익숙한 누군가를 새롭게 알고 싶다면 낯선 곳을 함께 여행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문장이 있어요.

컬러 도판이 큼직하게 실려 있어서 전시를 직접 보지 못해도 그림을 따라가기 좋아요. 미술관마다 근처에서 같이 들르기 좋은 곳도 챙겨 줘요. 부소갤러리 뒤로 이어지는 부소산성 숲길과 백마강 뱃길, 제주현대미술관 인근의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과 방림원 같은 곳들이요. 그래서 주말 나들이 계획을 짤 때 다시 꺼내 볼 책으로 책장에 꽂아 둘 만한 거 같아요. 열아홉 곳을 담았으니 얇은 책은 아니지만 장마다 미술관 하나씩 끊어져 있어서, 끌리는 곳부터 펼쳐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마침 10월이 시작됐어요. 단풍 소식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미술적 인간>에 나온 가을 미술관부터 하나씩 찾아가 볼까 싶어요. 그림 잘 몰라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친구를 하나 사귄 기분이라, 이번 가을이 조금 더 든든해졌습니다.
쓸쓸한 그림 앞에 선 아버지, 해맑게 묻는 아들, 그 사이에서 그림을 보는 딸의 다정한 미술관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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