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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물방울 모양
데라치 하루나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9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아직은 몰라요" 그 한마디가 오래 남는 책, 데라치 하루나 <기억은 물방울 모양>서평
금요일 저녁이 되면 이번 주에 뭘 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어요. 분명히 바빴는데 손에 남은 게 별로 없는 느낌이죠. 이번에 소개할 책은 데라치 하루나의 <기억은 물방울 모양>인데, 이 책은 그렇게 흘러가 버린 시간을 하나씩 다시 주워 담는 이야기 같았습니다.
원제는 <雫>, '시즈쿠'라고 읽고 물방울이라는 뜻이래요. 일본에서는 2024년 가을에 NHK출판에서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는 김지연 번역으로 문예춘추사에서 나왔습니다. 작가는 사가현 출신이고, <비올레타>로 데뷔해 <물을 수놓다>로 가와이 하야오 이야기상을 받은 분이에요. 이름은 낯설어도 이력을 보면 마음을 꿰매는 이야기를 꾸준히 써 온 작가인 것 같아요.
이야기는 2025년 4월에서 시작합니다. 마흔다섯 살 나가세 다마는 '주얼리 다카미네'에서 20년 동안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건물 철거로 회사가 문을 닫는 마지막 날을 맞아요. 텅 빈 사무실, 몇 장 남지 않은 명함, 창문에 비친 나이 든 몸. 이 대목에서 책장이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저도 회사 책상 서랍 안쪽에 명함 상자를 넣어 두고 있는데, 언젠가 그 상자가 다 쓸모없어지는 날이 오겠구나 싶었거든요.

이 책에서 가장 독특하다고 느낀 건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점이에요. 2020년, 2015년, 2010년 하는 식으로 5년씩 과거로 내려가서 1995년, 열다섯 살 중학생들에게 닿아요.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읽다 보니 이 방식이 꽤 다정하게 느껴졌습니다. 2025년에 철거를 앞두고 텅 비어 있던 5층짜리 빌딩을 1995년의 다마가 교복 차림으로 처음 올려다보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열다섯 살 다마는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기가 죽어서,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던 치맛단 주름이 갑자기 창피해져요. 같은 건물이 30년을 사이에 두고 겹쳐 보이니까, 앞에서 무심히 읽은 장면들을 자꾸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천천히 읽게 되는 대목이 있었어요. 1995년 장에서 금속 기술자 고마 씨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에요. 열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제자로 들어갔다는 고마 씨에게 누가 이 일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데, 고마 씨는 느릿느릿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직은 몰라요"라고 대답합니다. 망했다 싶은 일이 나중에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하고, 운이 좋다고 생각한 일이 재난을 부르기도 한다고요. 괴로운 시기라고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인생에 좋다 나쁘다 결론을 내리기는 아직 이르다는 말이 나와요. 이 대목은 몇 번을 다시 읽었습니다. 마흔 넘어서 이것저것 결론부터 내리려고 했던 제 습관이 조금 머쓱해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인물들도 하나같이 기억에 남아요. 다카미네는 어릴 때부터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아이였던 것 같아요. 노트 좀 보여 달라, 교과서 좀 빌려 달라며 말을 거는데, 다마는 그럴 때마다 움츠러들어요. 그 빌딩 1층의 보석 가게를 보면서 다마가 "저 가게는 다카미네처럼 반짝거리네요"라고 혼잣말을 하는데, 이 한 줄에 그 아이가 다마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 다 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반짝이던 아이가 2025년에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넓네, 텅 비니까"라고 중얼거려요. 그 거리가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시즈쿠는 말수가 적은데도 존재감이 큰 인물 같아요. 어른들이 시즈쿠 문제로 둘이서만 얘기하겠다고 하자, 평소 손 들고 발표하는 일도 거의 없던 다마가 "기노시타 일인데 어째서 기노시타를 빼는 건가요?"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나가려는 다마의 팔을 시즈쿠가 꽉 붙잡고 "여기 있어"라고 하죠. 둘이 친해지는 순간을 따로 설명하지 않는데도 그 손힘만으로 충분히 전해지는 것 같았어요. 모리는 늘 조용히 옆에서 챙겨 주는 친구라는 인상입니다. 다카미네의 체육복 바지 실밥이 터졌을 때 감쪽같이 꿰매 준 사람도 모리였어요.
2015년 장에 나오는 대화 하나도 적어 둡니다. 영원은 찾았느냐는 미술 선생님의 물음에 "아직 못 찾았어요"라고 답하자, 선생님이 "그렇구나, 나도 그래"라고 해요. 정답을 알려 주는 어른 말고, 같이 모르겠다고 말해 주는 어른도 있다는 게 묘하게 위로가 됐습니다. 이 책에는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너한테만 하는 얘긴데" 같은 말이 시점을 바꿔 가며 몇 번씩 나오는데, 같은 말이 다른 나이에 다시 들릴 때마다 반가운 기분이 들었어요.
아쉬운 점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시간이 거꾸로 흐르니까 처음 몇 장은 인물들의 관계가 잘 잡히지 않아서 앞으로 돌아가 확인할 때가 있었습니다. 감정을 크게 터뜨리는 장면도 거의 없어서, 사건이 빠르게 몰아치는 소설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초반이 조금 잔잔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저는 그 잔잔함이 좋았지만 취향을 탈 수는 있겠다 싶습니다.

번역은 편하게 읽혔어요. '기노시타 시즈쿠'라는 이름이 나무 아래 물방울이라는 뜻이라든가, 일본어로 바느질 매듭을 '다마무스비'라고 한다는 역주가 곳곳에 달려 있어서 이름에 숨은 재미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책은 손에 쥐기 알맞은 크기라 들고 다니기도 좋았어요. 보석 이야기라고 무게까지 금덩이는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파스텔 무지개 바탕에 물방울 모양 보석이 놓인 표지도 예뻐서 책장 눈에 띄는 자리에 꽂아 두고 싶어지네요.

10월 첫 금요일이에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달라진 게 느껴지는 걸 보니 가을이 성큼 온 것 같습니다. 이런 계절에는 오래된 친구 이름이 하나쯤 떠오르기도 하잖아요. 이 책을 덮고 나면 서랍 속 낡은 물건 하나를 꺼내 보고 싶어질지도 몰라요. 기억은 물방울 모양이라는데, 요즘 제 기억은 자꾸 증발하는 걸 보면 물방울은 확실히 맞는 것 같습니다.
30년을 5년씩 거슬러 올라가며 네 친구의 시간을 다시 꿰어 보는, 잔잔하고 다정한 소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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