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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당의 배신 - 살찌는 체질이란 없다
박지인(어떤약사)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밥공기가 나를 배신할 줄이야, 어떤약사 박지인 <혈당의 배신> 서평
83, 86, 89.
이십 대 중후반 신입 직원들이 입사 전 건강검진 결과지를 펼쳐 놓고 서로 수치를 비교하던 자리였다고 해요. 다들 80대 공복혈당을 받아 든 그 자리에서 한 사람의 결과지에만 116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이자 유튜브 구독자 11.6만 명의 '어떤약사' 박지인 님이고, 그 숫자 하나에서 출발한 책이 <혈당의 배신>이에요.
제목만 봤을 땐 무슨 막장 드라마인가 싶었는데, 읽어 보니 배신한 범인은 밥공기더군요.
한글날이 낀 금요일, 가을 연휴가 시작됐네요. 하늘은 높아지고 바람은 선선해져서 그런지 이맘때면 입맛이 유난히 도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혈당 얘기가 더 남 일 같지 않게 들리더라고요.
저자는 스스로를 꽤 건강한 사람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약대 시절 과외를 서너 개씩 하고 과 대표도 두 번이나 맡았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대요. 초콜릿이나 사탕은 찾지도 않았습니다. 카페에선 늘 아메리카노. 대신 밥을 무척 좋아해서 삼겹살집에 가도 고기보다 돌솥비빔밥을 더 반겼다는 대목에서 웃음이 났어요. 밥과 나물, 찌개를 좋아한다고 건강한 식습관이라는 칭찬을 들으면 "속으로는 조금 우쭐하기도 했다"는 고백까지 나오는데, 이게 남 얘기 같지가 않더군요.

마흔 후반 아재들 밥상이 딱 그렇잖아요. 국 한 그릇에 밥 한 공기, 반찬 몇 가지. 단 거 안 먹으니 괜찮겠지 하고 살아왔는데, 입에서 달지 않은 밥도 몸속에서는 결국 포도당이 된다는 사실을 저자는 너무 늦게 연결했다고 해요. 그 문장 앞에서 제 밥공기가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혈당의 배신>은 그 숫자보다 더 앞선 시절 이야기도 숨기지 않습니다. 약대 입시에 한 번 떨어지고 다시 책상 앞에서 버티던 무렵, 편의점에 대용량 떡볶이가 처음 나와서 늦은 밤 떡볶이가 손쉬운 위로였다고 하더라고요. 합격한 뒤에는 두 달 만에 토익 985점을 만들었고, 면접을 한 달 앞두고는 친구가 건넨 다이어트약으로 한 달 만에 13킬로그램을 뺐답니다. 잠을 이루기 어려웠고, 손이 떨렸고, 심장이 이유 없이 빨리 뛰는 날들이 이어졌대요. 나중에 다시 구한 약은 정식 포장도 설명서도 없이 지퍼백에 나뉘어 담겨 있었다고 하고요. 숨을 쉬지 못해 잠에서 깬 밤이 찾아왔고, 저자는 그날로 약을 끊었습니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이 여기였어요. 두 달 만에 토익 985점을 만든 사람이 의지가 약했을 리는 없잖아요. 저자도 돌아보면서 문제는 방향이었다고 말합니다. 시험은 기한까지 몰아붙이면 점수가 나오지만 몸은 날짜를 정해 놓고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이 못 된다는 얘기인데, 마감에 쫓기며 사는 직장인한테는 꽤 찔리는 말 같아요.

그다음 이야기는 한결 차분하게 흘러갑니다. 다이어트를 반복할수록 살이 덜 빠지면 다들 "기초대사량이 망가졌다"고 하는데, 저자는 그 한마디가 정확하지 않다고 하더군요. 체중이 줄면 유지해야 할 몸의 크기도 작아지니 소비량이 어느 정도 줄어드는 건 자연스럽고, 거기에 몸이 에너지 소비를 조금 더 낮추는 '대사 적응'이 더해진다는 설명이에요. 1995년 NEJM에 실린 연구, 1944년에 시작된 미네소타 기아 실험까지 따라가다 보면 정체기가 왜 오는지 감이 좀 잡히는 것 같습니다. 하루 약 1,570킬로칼로리로 버티면서 매주 35킬로미터 가까이 걸었다는 참가자들 이야기는 숫자만 봐도 배가 고파지더라고요.
<혈당의 배신>에서 제일 독특하다고 느낀 건 저자가 자기 몸을 실험대로 썼다는 점입니다. 연속혈당측정기를 피부에 붙이고 밥, 떡, 면, 과일, 커피를 하나씩 먹어 보고, 같은 음식을 순서만 바꿔서 먹고, 잠을 잘 잔 날과 못 잔 날을 비교합니다. "내 몸이 첫 번째 실험 대상이 된 셈이었다"는 문장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아요.
산꼭대기 보리밥 실험이 특히 재미있었어요. 같은 음식을 두 번 먹으려고 교외 산꼭대기에 있는 보리밥 정식 식당까지 찾아갔다고 하더군요. 한 번은 반찬과 채소, 단백질부터 먹고 밥은 마지막에. 다른 한 번은 평소 습관대로 밥부터 비벼서. 두 번 다 식전 혈당은 90mg/dL 후반이었는데, 반찬부터 먹은 날 최고치는 151이었고 밥부터 비빈 날은 177까지 올라갔대요.
더 귀가 솔깃했던 건 그다음입니다. 밥부터 먹은 날은 혈당이 90 안팎으로 빠르게 떨어지면서 피로가 밀려오고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는 느낌이 들었대요.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자꾸 입에 뭔가 넣고 싶어졌다고도 하고요. 점심 먹고 한두 시간 지나면 괜히 서랍 속 과자에 손이 가는 그 기분, 직장인이라면 다들 아실 거예요. 그게 의지 문제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저자는 두 번의 개인 실험만으로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선을 긋습니다. 식사 속도나 수면처럼 통제하지 못한 조건이 있었다는 것도 먼저 밝혀 두고요. 이런 솔직함 덕분에 오히려 믿음이 더 갔어요.
그래서 나오는 게 '채단탄'입니다. 채소, 단백질과 지방, 탄수화물의 앞 글자를 딴 말이에요. 채소 반찬 몇 입, 이어서 계란이나 두부, 생선, 고기, 그리고 밥과 면과 빵은 맨 뒤로. 채소가 없는 편의점에선 삶은 계란이나 두부, 무가당 두유를 먼저 먹고 김밥을 먹으면 되고, 국밥은 처음부터 밥을 말지 말고 고기와 건더기부터 먹으면서 밥을 조금씩 곁들이라고 하더군요.
국밥 대목에서 뜨끔했습니다.
저자도 약국에서 점심을 서둘러 먹을 때면 국에 밥을 말아 몇 번 씹지도 않고 삼킨 뒤 다시 일하러 나갔다고 털어놓는데, 점심시간 쪼개 쓰는 직장인 모습이 딱 그렇잖아요. 음식마다 10분, 15분씩 기다릴 필요는 없고 채소와 단백질 몇 입 먹고 자연스럽게 밥으로 넘어가면 된다는 말이 이어지는데, 그 끝에 붙은 한 문장이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중요한 것은 완벽한 순서가 아니라 첫 입이다."
첫 입.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다 싶더라고요.
식이섬유 설명도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채소를 먼저 먹으면 장에 방수막이 생긴다는 말을 흔히 듣는데, 그건 과장이 섞인 표현이고 실제로는 물을 머금은 끈끈한 젤이 탄수화물이 소화되고 흡수되는 길을 물리적으로 느리게 만드는 쪽이라고 해요. 그래서 언제 먹느냐가 중요하고, 밥과 빵을 다 먹고 나서 뒤늦게 챙기면 이미 시작된 포도당의 첫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거죠. 저자가 즐겨 먹는다는 차전자피 이야기에는 물을 충분히 마셔야 하고 처음엔 식감이 느끼할 수 있다는 말까지 솔직하게 붙어 있었고요. "탄수화물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준비해두는 도구다"라는 표현이 깔끔해서 좋았습니다.
저자의 실제 하루 루틴이 표로 나오는 대목도 있어요. 8시에 계란처럼 단백질이 든 첫 끼, 10시에 커피, 점심 뒤에는 10분 걷기, 저녁 7시 전에 마지막 식사, 8시에서 9시 사이 근력운동, 11시 30분 취침. 10시에 커피를 놓치면 그날은 아예 마시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던데, 커피로 하루를 버티는 직장인한테는 이게 제일 독한 항목 같아요. 약국을 비울 수 없으면 조제실에서 제자리 전신 동작을 한다는 얘기는 회사 자리에서도 슬쩍 따라 할 만하겠더라고요.
솔직히 처음엔 저녁 7시 전 마지막 식사에서 걸렸습니다. 회식이나 야근이 잡히는 날이면 지키기 어려운 시간이잖아요. 그런데 저자가 먼저 이 시간표는 모든 독자의 정답이 될 수 없다고, 교대근무를 하는 사람이나 아이를 돌보는 사람, 저녁 약속이 잦은 사람에게 같은 시각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말해 주더군요. 가져가야 할 건 순서라는 말이 이어지고요.
바로 뒤에 나오는 '바쁜 날을 위한 최소 루틴'은 다섯 가지예요. 잠들기 3시간 전까지 마지막 식사를 끝내고, 마지막 식사와 다음 날 첫 끼 사이를 우선 12시간 두고, 하루 한 끼 뒤엔 10분 걷거나 실내에서 5분이라도 움직이고, 일주일에 두 번은 하체를 포함한 근력운동을 하고, 7시간 넘게 잘 기회를 확보하면서 카페인이 그 시간을 침범하지 않게 하는 것. 그 아래 붙은 문장은 직장인용 생존 수칙처럼 들렸습니다.

"완벽한 날에만 지킬 수 있는 계획보다 바쁜 날에도 남는 계획을 만드세요."
에필로그에는 판정을 받고 나서도 바로 달라지지 못했던 시간이 담겨 있어요. 병원을 그만두고 약국을 연 뒤로는 정해진 점심시간 없이 국에 밥을 말아 서둘러 먹었고, 낮에는 열량 높은 라떼나 달콤한 커피를 조금씩 마셨대요. 저녁이면 허기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고, 먹는 양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체중은 오히려 늘었다고 합니다. 피부에는 화농성 염증과 한포진이 생겼고, 없던 두통과 위경련까지 반복됐다고 하고요. 다시 혈당을 제대로 들여다보기까지 4년쯤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연속혈당측정기를 붙이고 처음 먹은 음식이 좋아하던 돌솥비빔밥이었는데, 110mg/dL 안팎이던 혈당이 220 가까이 올라가 있었대요. 저자는 한 시간 동안 화면을 끄지 못하고 숫자가 움직이는 걸 계속 캡처했다고 합니다. 그때 든 생각이 이랬다고 해요. '약사인 나도 이렇게 모르는데, 일반인은 얼마나 막막할까.' 이 책이 어쩌면 그 순간부터 시작됐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저자는 끝까지 완벽한 사람인 척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약국에 환자가 이어지면 물도 충분히 못 마시고, 약속이 있는 날엔 계획보다 늦게 먹고, 피곤한 날엔 자극적인 음식이 당긴다고 털어놓습니다. 다만 그런 순간을 의지가 부족하다는 증거로 해석하지 않고 다음 선택을 바꾼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런 문장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한 번도 무너지지 않는 법'에 관한 책으로 쓰지 않았다. 무너진 뒤 돌아오는 법에 관한 책으로 썼다."
"숫자는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문장도, 스물일곱의 자신에게 건네고 싶다는 "괜찮다. 네 몸은 아직 바뀔 수 있다"라는 말도 좋았어요. 이 나이쯤 되면 건강검진 결과지 받는 날이 은근히 긴장되잖아요. 공복혈당 칸을 한 번 더 들여다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이 꽤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 같더라고요. 냉장고 음식을 다 버릴 필요도, 영양제를 한꺼번에 주문할 필요도 없고, 오늘 마지막으로 먹은 시간을 적어 보거나 다음 끼니에 채소를 먼저 몇 입 먹거나 식후 10분 움직이는 것 중 "하나면 충분합니다"라고 해 주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책은 손에 쥐기 부담 없는 두께예요. 주황색 화살표와 귀여운 아이콘이 빙 둘러싼 표지도 책꽂이에서 눈에 잘 띕니다. 차례가 꼼꼼하게 나뉘어 있어서 필요할 때 해당 장만 펼쳐 보기 좋고, 위고비와 마운자로, 4주 실천법, 혈당 영양제를 다루는 장도 따로 있더라고요. <혈당의 배신>은 식탁 근처 책꽂이에 꽂아 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볼 책 같아요.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계절이라는데, 올가을엔 살찌는 건 말한테 양보하고 저는 채단탄 순서로 버텨 볼 생각입니다. 연휴 밥상에 나물 몇 젓가락부터 먼저 올려 보려고요. <혈당의 배신> 덕분에 밥 먹는 게 덜 겁나고 오히려 즐거워진 기분이에요. 다들 넉넉한 한글날 연휴 보내세요.
단것 안 먹는 약사도 받아 든 공복혈당 116, 밥을 끊지 않고 먹는 순서와 첫 입부터 바꾸는 현실 혈당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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