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쌤의 토익 비밀과외 (2026 개정) - 토익 베스트셀러 1위 저자, 서아쌤의 토익 700-900+ 완성 기본서 ㅣ 서아쌤의 토익 비밀과외
최서아.시원스쿨어학연구소 지음 / 시원스쿨LAB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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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밀려도 오늘 몫부터, <서아쌤의 토익 비밀과외 (2026 개정)> 서평



목차를 펼치면 Chapter도 아니고 Unit도 아니고, Playlist라고 적혀 있습니다. 장마다 제목이 유튜브 재생 화면처럼 꾸며져 있어서 재생 버튼, 빨간 진행 바, 설정 톱니바퀴까지 다 그려져 있더라고요. 토익 기본서를 펼쳤는데 영상 하나 틀어놓은 기분이 드는 책, <서아쌤의 토익 비밀과외 (2026 개정)>이에요.


그나저나 제목은 비밀과외인데 표지에 이렇게 큼지막하게 써 붙여 놨으니, 비밀은 이미 동네방네 다 퍼진 거 아닌가 싶었어요.

책은 보통 소설책보다 제법 두툼한 편이에요. 그래도 정답과 해설을 2권으로 따로 떼어 놓아서 1권에는 RC 이론, LC 이론, 실전모의고사 3회분만 담겼습니다. 이렇게 나눈 이유를 책에서는 '휴대성 향상'이라고 적어 두었는데, 가방 무게에 예민해진 중년 어깨한테는 그 다섯 글자가 제일 반갑더군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곳은 의외로 3주 완성 학습플랜이었어요. RC부터 시작하는 플랜이 있고, RC와 LC를 하루에 하나씩 같이 가는 플랜이 그 옆에 있는데 뒤쪽에 "서아쌤 추천!"이라는 손글씨가 붙어 있습니다. 표 위에는 이런 안내가 있어요.

"해당일의 학습을 하지 못했더라도 이전으로 돌아가지 말고 오늘에 해당하는 학습을 하세요. 그래야 끝까지 완주할 수 있습니다."


영어 공부 얘기인데 회사 일 얘기로도 들리더라고요. 밀린 걸 처음부터 다 하겠다고 붙잡고 있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끝내는 일, 이 나이쯤 되면 누구나 몇 번은 겪어봤을 테니까요. 바로 아래에는 토익은 천천히 1회 보는 것보다 빠르게 2회, 3회 보는 게 훨씬 효과가 좋다는 문장도 있습니다. 한 번에 완벽하게 끝내려는 욕심부터 내려놓으라는 말 같아서, 늘 피곤한 직장인한테는 이게 위로가 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진도표에서 위로받을 줄은 몰랐네요.

본문은 "토익 문법의 핵심! 동사 수/태/시제 전쟁을 끝내러 왔다!" 같은 제목으로 시작해요. 수 일치, 태, 시제, 복합 동사 문제가 탭처럼 나뉘어 있고, 예문마다 정답과 헷갈리는 오답을 대괄호 안에 나란히 넣어 보여줍니다. 주어와 동사 사이에 끼어든 수식어를 '거품'이라고 부르는 것도 재밌었어요. Growth in technology markets throughout Asia 같은 문장도 거품을 걷어내면 결국 Growth 하나만 남는 거죠.

시제 부분에는 여백 군데군데 붉은 손글씨 메모가 달려 있어요. "recently는 과거시제 단서로도 쓸 수 있어요", "by the end of는 미래완료시제 will have p.p.의 단서로도 쓸 수 있어요" 같은 식입니다. 인쇄된 책인데 선생님이 옆에서 펜으로 쓱 동그라미를 쳐주는 것 같아서, <서아쌤의 토익 비밀과외>라는 제목에 '과외'가 괜히 붙은 게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현재완료 예문 중에 Mr. Laing has been employed by Silas Electronics over the last 30 years라는 문장이 있어요. 한 회사에서 30년이라니, 문법보다 그 근속연수에 눈이 먼저 갔습니다. Check-up Test에서는 Mr. Scott이 뛰어난 영업 실적 덕에 휴가를 하루 더 받던데, 이런 문장은 풀다 말고 부러워지는 게 진짜 함정인 거 같아요.

복합 동사 문제 지면에는 동사 자리 파악, 가짜 동사 소거, 수 일치, 태, 시제 순으로 Step 칸이 나뉘어 있고 괄호를 직접 채우게 돼 있어요. 감으로 찍던 문제를 순서대로 하나씩 따져보게 만드는 구조라, 회사에서도 체크리스트부터 만드는 사람이라면 손에 착 붙을 것 같더군요.


LC로 넘어가면 Playlist 6의 평서문과 부가 의문문 대목이 재밌었습니다. 평서문은 정해진 정답 패턴이 없어서 끝까지 듣고 소거해야 한다고 해요. 그 예시로, 직원 휴게실 커피 머신이 고장 났다는 말에 "교체 부품이 오고 있어요"라고 받는 대화가 나와요. 우리 회사 탕비실 풍경이랑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부가 의문문은 꼬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평서문 부분에 집중하면 된다는 비밀 Tip도 있고, 간접 의문문에는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이메일 못 받으셨나요?" 같은 돌려 말하는 대답이 정답이 되는 패턴이 정리돼 있어요. 사무실에서 실제로 오가는 대화가 딱 이런 식이라 그런지 낯설지 않았어요.


솔직히 걸렸던 건 LC Check-up Test 페이지예요. 스무 문항이 전부 Mark your answer on your answer sheet라는 문장만 줄지어 있어서, 음원이 없으면 한 문제도 손댈 수가 없는 지면이거든요. 다행히 Playlist마다 음원 바로듣기 QR이 붙어 있으니 휴대폰과 이어폰만 챙기면 해결되긴 합니다. Part 7 삼중지문도 세 지문을 오가려니 중년의 눈이 꽤 바빴는데, 지문 종류를 먼저 파악하고 연계 문제는 맨 마지막에 풀라는 전략을 따라가니 시선 둘 곳이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이었어요.


맛보기로 하나 소개하면, Practice에 웨딩드레스 이야기가 나와요. Hanna Wright가 주문한 드레스가 알고 보니 재고가 딱 하나뿐이고, 그것도 토론토 웨스트 쇼룸에 진열돼 있던 샘플이었다는 거예요. 매장 직원 Clara Jones는 사과 메일을 보내면서 바로 전액 환불을 받든지, 15퍼센트 할인을 받고 그 드레스를 받든지 고르라고 합니다. 그 뒤에는 할인, 배송비, 세금까지 찍힌 영수증이 이어지고요. 광고, 메일, 영수증 세 장을 맞춰봐야 풀리는 구조라 짧은 추리극 한 편 읽는 기분이었어요. 그녀가 어느 쪽을 골랐는지는 지문 속 단서로 직접 맞혀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직장인 마음에 제일 가까이 닿았던 세트가 있어요. TechNova가 AppEase를 인수했다는 기사가 먼저 나오고, 운영 매니저 Michael Trench가 전 직원에게 보낸 메일이 이어집니다. 5월 1일부터 초과근무 정책이 바뀐다는 내용이에요. 첨부된 기존 정책과 나란히 놓고 뭐가 달라졌는지 찾아야 하는데, 본사 담당자가 화상 Q&A까지 연다는 대목에서는 괜히 웃음이 나더라고요.


영어 시험 지문인데, 사내 메일함 연 기분.

중간중간 영국 탐조 동호회 게시판 가이드라인과 회원 가입 양식이 한 세트로 나오기도 해서, 토익 지문 덕분에 새 구경까지 하게 됩니다. 지문 소재가 회사, 행사, 쇼핑, 취미를 고루 오가니 읽는 맛이 지루하지 않았어요.


이론 15일에 모의고사 3일이라는 리듬이 분명하고 2회독, 3회독을 권하는 책이니까, 한 번 훑고 꽂아두는 책이라기보다 여러 바퀴 돌려 보는 쪽에 가깝습니다. 모의고사는 QR로 모바일 해설까지 바로 볼 수 있어서 책상 위에 오래 두고 쓸 만한 구성 같아요. 회사 다니면서 짬짬이 영어를 다시 붙잡아 보려는 분이라면 <서아쌤의 토익 비밀과외> 같은 진도표가 꽤 든든한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줄 거예요.


10월 둘째 주 토요일,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어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던데, 올해는 귀도 트이고 눈도 뜨이는 토익의 계절로 삼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할 몫부터 하라는 그 한 문장을 챙겨 갑니다. <서아쌤의 토익 비밀과외 (2026 개정)>, 덕분에 마음 한쪽이 든든해진 주말이에요.


밀려도 오늘 몫부터 하라는 진도표와 손글씨 같은 메모가 바쁜 직장인 옆에서 끝까지 같이 뛰어주는 토익 기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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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WA 시대 : 전통금융과 블록체인의 만남 - 누구나 뉴욕 한복판 빌딩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금융의 대전환
박홍남 지음 / 새로운제안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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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강남 빌딩 1주에 1만 원? 〈RWA 시대〉 박홍남, 블록체인이 여는 금융의 문 서평

진분홍 바탕을 은박 띠가 가로로 지나가는 표지라 어디에 두어도 눈에 확 띄는 편이에요. 점을 찍어 만든 큼직한 글씨로 Real World Asset이 박혀 있고, 그 사이로 부제가 지나갑니다. 누구나 뉴욕 한복판 빌딩의 주인이 될 수 있다니. 월급날마다 통장 보고 한숨 쉬는 사람한테는 꽤 솔깃한 말이더라고요.


사실 토큰이라는 단어부터 낯설었어요. 토큰 하면 아직도 버스 요금통에 짤랑 넣던 그 쇠동전이 먼저 떠오르는 세대라서요.

<RWA 시대>는 그 토큰이 빌딩이 되고 채권이 되고 금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현실의 자산을 블록체인 위 디지털 증서로 만들어 주식처럼 누구나 쉽게 사고팔게 한다는 개념인데, 책은 시작부터 블랙록 이야기로 성큼 들어가요. 래리 핑크 회장이 2024년 초 한 매체 인터뷰에서 "모든 금융 자산이 토큰화될 것"이라고 했다는 대목이 나와요. JP모건과 골드만삭스, 뉴욕증권거래소까지 토큰화 워킹그룹에 참여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면 자세가 슬쩍 고쳐지더군요. 코인판에서 잠깐 도는 유행어쯤으로 여겼던 단어가 월가 한복판에서 오가고 있었던 거죠.


<RWA 시대>가 재미있는 건 출발점이에요. 시세 얘기로 바로 달려갈 줄 알았는데, 목차를 보면 물물교환과 화폐의 탄생, 금본위제, 달러 패권으로 이어지는 금융의 역사부터 차근차근 깔고 들어갑니다. 저자는 연합인포맥스에서 크립토 데이터 기획과 국내 코인 기준가격 산정, 코인 평가 같은 일을 맡았던 분이라고 해요. 그래서인지 숫자와 그래프를 꺼내 놓고 하나씩 짚어 가는 방식이 몸에 밴 느낌이 들어요. 주변에서 크립토 투자 조언을 구할 때마다 강조하던 얘기를 정리한 책이라고 하니, 아는 형님이 경제 이야기를 길게 풀어주는 듯한 결도 있습니다.


저자가 맨 먼저 꺼내는 단어는 '장벽'이에요. 물이나 나무는 물론이고 빌딩, 금, 예술품, 눈에 보이지도 않는 탄소배출권이나 저작권까지 가격이 매겨지는 세상이죠. 그런데 그 거대한 자산 대부분이 평범한 개인은 다가가기 힘든 벽 뒤에 숨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서울 도심의 고가 빌딩은 평생 모아도 부족하고, 비싼 그림은 어디서 사는지도 모른다는 문장에서는 그냥 웃음이 났어요. 너무 제 얘기라서요.


빌딩은 그대로 땅 위에 서 있고, 블록체인 위에는 그 빌딩에 대한 권리의 기록이 올라간다는 설명도 반가웠습니다. 막연히 건물이 통째로 컴퓨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거든요. 법률, 회계, 보관, 평가, 규제, 신원확인, 지급결제까지 한꺼번에 맞물려야 돌아가는 구조라고 하니, 생각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가는 판이구나 싶었고요.

3장의 부동산 이야기로 넘어가면 부제가 무슨 뜻인지 손에 잡히기 시작합니다. 소제목부터 "강남 빌딩 지분을 10만 원으로?"예요. 국내 사례로 나오는 카사는 서울 도심의 상업용 부동산을 디지털 수익증권(DABS)으로 쪼개서 투자하게 했어요. 100억짜리 건물을 100만 개 증권으로 나누면 1주에 1만 원이 된다는 계산입니다. 임대 수익은 분기마다 나눠 받고, 건물이 팔리면 매각 차익도 지분만큼 나뉜다고 하더라고요.


강남 빌딩 1주에 1만 원.

미국의 RealT 얘기는 더 신기했어요. 이더리움 위에서 미국 임대 부동산 지분을 토큰으로 팔고, 투자자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인 USDC로 매달 임대수익을 받는 구조래요. 책에는 "한국에 앉아서 디트로이트나 시카고의 임대 주택에 소액 투자하고 매달 달러로 임대료를 받는 것이 이미 가능한 시대가 열린 것이다"라는 문장이 나와요. 디트로이트는 영화에서나 본 동네 이름이라 그런지 실감이 날 듯 말 듯하더군요. 장 끝에 붙은 INSIGHT 박스에는 RealT, Lofty AI, Landshare 같은 해외 프로젝트와 카사가 한눈에 정리되어 있어서 이름 익히기에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장밋빛 얘기만 늘어놓는 편은 아닌 거 같아요. 부동산 토큰은 아직 전통 부동산보다 유동성이 낮아 팔고 싶을 때 살 사람을 찾기 어려울 수 있고, 대출을 끼는 레버리지도 쉽지 않다는 점을 저자가 먼저 꺼내 놓습니다. 등기부에 올라야 소유권이 법적 효력을 갖는 한국에서는 법률 개정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함께요. 지금은 신탁회사가 부동산을 소유하고 그 수익권을 토큰화하는 방식으로 공백을 메운다고 합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인 해법이라는 표현이 솔직하게 들렸어요.


2장 첫머리의 그래프 하나는 월급쟁이로 오래 살아온 입장에서 그냥 넘기기가 어렵더라고요. 미국 제조업 근로자 평균 시급이 36.68달러, 베트남은 2024년 기준 약 1.61달러. 막대 두 개 사이에 약 22.8배라는 화살표가 그어져 있습니다. 저자는 "같은 공장이고 똑같은 물건을, 비슷한 시간에,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 낸다"고 쓰고는, 이 격차가 정말 노동력의 차이인지 어디서 태어났느냐의 차이인지를 묻습니다. 물가나 생산성, 산업구조 같은 요인도 함께 작용한다는 단서는 달아 둬요. 그래도 화폐가 약한 나라일수록 금융시스템도 뒤처져, 해외에서 번 돈을 고향에 보낼 때 20% 가까운 환전·수수료가 붙기도 한다고 하네요.

한 시간의 값이 태어난 곳에 따라 이렇게 갈린다는 걸 숫자로 보니 기분이 좀 이상했어요. 이 이야기가 2009년 비트코인의 등장으로 이어지고, 그 끝에 RWA가 놓이는 흐름이라 책의 큰 줄기도 이쯤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RWA 시대>에서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6장의 'RWA는 누구를 부자로 만드나'였어요. 저자가 스스로 "가장 불편한 질문"이라고 부르는 대목인데, 'RWA 관련 코인을 사면 부자가 된다'는 식의 이야기와는 일부러 거리를 둡니다. 골드러시 때 가장 안정적으로 돈을 번 사람은 광부들에게 청바지와 곡괭이를 판 상인이었다는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요. 블랙록과 시큐리타이즈, JP모건, 코인베이스, 서클처럼 판을 깐 쪽은 자산 값이 오르든 내리든 수수료와 이자를 챙긴다는 거죠. 그래서 '개별 코인의 가격'보다 '각 플레이어가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보라는 말이 책 전체에 깔려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두 번째 부자 이야기는 좀 더 씁쓸했어요. 팔기 어렵던 빌딩이나 그림, 사모펀드 지분이 토큰화로 거래가 쉬워지면 유동성 프리미엄이 붙어 값이 오릅니다. 그런데 그 첫 수혜는 결국 원래 그걸 가진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거예요. "평등을 향한 기술이 초기에는 오히려 가진 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 투자서에서 이런 문장을 먼저 꺼내 놓으니 오히려 믿음이 가더군요.


거기서 문을 닫아버리지는 않습니다.

초기 주식시장도 소수의 부자와 기관 차지였지만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도 스마트폰으로 애플 주식을 사요. 저자는 이 예를 들면서 RWA도 비슷한 길을 갈 거라고 내다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해요. "RWA는 부자가 되는 마법의 버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잠겨 있던 문을 여는 열쇠일 뿐이다." 공부하고 준비한 사람과 그저 남을 따라 뛰어든 사람 사이에서 갈릴 거라는 문장에서는 점심시간마다 종목 얘기로 들썩이는 사무실 풍경이 떠올라 혼자 뜨끔했어요.


걸렸던 건 제 쪽 사정이에요. DABS, USDC, SPV, 스마트 컨트랙트 같은 말이 연달아 나오면 처음엔 머리가 살짝 버벅거립니다. 실물 부동산에서 신탁회사와 SPV, 토큰 발행, 다수의 투자자로 이어지는 구조도가 있어서, 그림이랑 본문을 몇 번 오가며 따라가니 그제야 흐름이 잡히더라고요. 코인을 한 번도 안 사본 분이라면 이 대목은 조금 천천히 가셔도 괜찮을 거 같아요.


두께는 보통 경제서와 비슷하거나 살짝 날씬한 편이라 들고 다니기 부담이 없어요. 빌딩 얘기가 가득한 책치고는 무게가 꽤 착합니다. 빌딩은 무거워도 토큰은 가볍다는 걸 책이 몸소 증명하는 셈이랄까요. 목차를 보면 4장에는 블랙록과 JP모건, 프랭클린 템플턴부터 미래에셋증권과 네이버까지, 5장에는 이더리움과 솔라나, 체인링크 같은 디지털자산이 각자 맡은 역할별로 정리되어 있어요. 뉴스에 낯선 이름이 나올 때마다 다시 펼쳐볼 사전처럼 책장 손 닿는 곳에 꽂아두기 좋겠더라고요.


10월 둘째 주 토요일, 하늘은 높아지고 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서늘해졌네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데 올가을엔 <RWA 시대> 덕분에 돈 공부까지 한 바퀴 돌고 온 기분입니다. 강남 빌딩 주인은 아직 먼 얘기지만, 뉴스 속 토큰화라는 말이 더는 남의 나라 말처럼 들리지 않아서 그것만으로도 꽤 든든해요. 좋은 책 만나서 머리가 한결 말랑해진 주말입니다.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요.


빌딩 한 조각에 1만 원이 되는 시대, 화폐의 역사에서 달러 패권까지 따라가며 RWA라는 금융의 대전환을 차근차근 풀어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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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당의 배신 - 살찌는 체질이란 없다
박지인(어떤약사)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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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밥공기가 나를 배신할 줄이야, 어떤약사 박지인 <혈당의 배신> 서평

83, 86, 89.

이십 대 중후반 신입 직원들이 입사 전 건강검진 결과지를 펼쳐 놓고 서로 수치를 비교하던 자리였다고 해요. 다들 80대 공복혈당을 받아 든 그 자리에서 한 사람의 결과지에만 116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이자 유튜브 구독자 11.6만 명의 '어떤약사' 박지인 님이고, 그 숫자 하나에서 출발한 책이 <혈당의 배신>이에요.


제목만 봤을 땐 무슨 막장 드라마인가 싶었는데, 읽어 보니 배신한 범인은 밥공기더군요.

한글날이 낀 금요일, 가을 연휴가 시작됐네요. 하늘은 높아지고 바람은 선선해져서 그런지 이맘때면 입맛이 유난히 도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혈당 얘기가 더 남 일 같지 않게 들리더라고요.

저자는 스스로를 꽤 건강한 사람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약대 시절 과외를 서너 개씩 하고 과 대표도 두 번이나 맡았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대요. 초콜릿이나 사탕은 찾지도 않았습니다. 카페에선 늘 아메리카노. 대신 밥을 무척 좋아해서 삼겹살집에 가도 고기보다 돌솥비빔밥을 더 반겼다는 대목에서 웃음이 났어요. 밥과 나물, 찌개를 좋아한다고 건강한 식습관이라는 칭찬을 들으면 "속으로는 조금 우쭐하기도 했다"는 고백까지 나오는데, 이게 남 얘기 같지가 않더군요.


마흔 후반 아재들 밥상이 딱 그렇잖아요. 국 한 그릇에 밥 한 공기, 반찬 몇 가지. 단 거 안 먹으니 괜찮겠지 하고 살아왔는데, 입에서 달지 않은 밥도 몸속에서는 결국 포도당이 된다는 사실을 저자는 너무 늦게 연결했다고 해요. 그 문장 앞에서 제 밥공기가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혈당의 배신>은 그 숫자보다 더 앞선 시절 이야기도 숨기지 않습니다. 약대 입시에 한 번 떨어지고 다시 책상 앞에서 버티던 무렵, 편의점에 대용량 떡볶이가 처음 나와서 늦은 밤 떡볶이가 손쉬운 위로였다고 하더라고요. 합격한 뒤에는 두 달 만에 토익 985점을 만들었고, 면접을 한 달 앞두고는 친구가 건넨 다이어트약으로 한 달 만에 13킬로그램을 뺐답니다. 잠을 이루기 어려웠고, 손이 떨렸고, 심장이 이유 없이 빨리 뛰는 날들이 이어졌대요. 나중에 다시 구한 약은 정식 포장도 설명서도 없이 지퍼백에 나뉘어 담겨 있었다고 하고요. 숨을 쉬지 못해 잠에서 깬 밤이 찾아왔고, 저자는 그날로 약을 끊었습니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이 여기였어요. 두 달 만에 토익 985점을 만든 사람이 의지가 약했을 리는 없잖아요. 저자도 돌아보면서 문제는 방향이었다고 말합니다. 시험은 기한까지 몰아붙이면 점수가 나오지만 몸은 날짜를 정해 놓고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이 못 된다는 얘기인데, 마감에 쫓기며 사는 직장인한테는 꽤 찔리는 말 같아요.


그다음 이야기는 한결 차분하게 흘러갑니다. 다이어트를 반복할수록 살이 덜 빠지면 다들 "기초대사량이 망가졌다"고 하는데, 저자는 그 한마디가 정확하지 않다고 하더군요. 체중이 줄면 유지해야 할 몸의 크기도 작아지니 소비량이 어느 정도 줄어드는 건 자연스럽고, 거기에 몸이 에너지 소비를 조금 더 낮추는 '대사 적응'이 더해진다는 설명이에요. 1995년 NEJM에 실린 연구, 1944년에 시작된 미네소타 기아 실험까지 따라가다 보면 정체기가 왜 오는지 감이 좀 잡히는 것 같습니다. 하루 약 1,570킬로칼로리로 버티면서 매주 35킬로미터 가까이 걸었다는 참가자들 이야기는 숫자만 봐도 배가 고파지더라고요.


<혈당의 배신>에서 제일 독특하다고 느낀 건 저자가 자기 몸을 실험대로 썼다는 점입니다. 연속혈당측정기를 피부에 붙이고 밥, 떡, 면, 과일, 커피를 하나씩 먹어 보고, 같은 음식을 순서만 바꿔서 먹고, 잠을 잘 잔 날과 못 잔 날을 비교합니다. "내 몸이 첫 번째 실험 대상이 된 셈이었다"는 문장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아요.


산꼭대기 보리밥 실험이 특히 재미있었어요. 같은 음식을 두 번 먹으려고 교외 산꼭대기에 있는 보리밥 정식 식당까지 찾아갔다고 하더군요. 한 번은 반찬과 채소, 단백질부터 먹고 밥은 마지막에. 다른 한 번은 평소 습관대로 밥부터 비벼서. 두 번 다 식전 혈당은 90mg/dL 후반이었는데, 반찬부터 먹은 날 최고치는 151이었고 밥부터 비빈 날은 177까지 올라갔대요.


더 귀가 솔깃했던 건 그다음입니다. 밥부터 먹은 날은 혈당이 90 안팎으로 빠르게 떨어지면서 피로가 밀려오고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는 느낌이 들었대요.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자꾸 입에 뭔가 넣고 싶어졌다고도 하고요. 점심 먹고 한두 시간 지나면 괜히 서랍 속 과자에 손이 가는 그 기분, 직장인이라면 다들 아실 거예요. 그게 의지 문제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저자는 두 번의 개인 실험만으로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선을 긋습니다. 식사 속도나 수면처럼 통제하지 못한 조건이 있었다는 것도 먼저 밝혀 두고요. 이런 솔직함 덕분에 오히려 믿음이 더 갔어요.

그래서 나오는 게 '채단탄'입니다. 채소, 단백질과 지방, 탄수화물의 앞 글자를 딴 말이에요. 채소 반찬 몇 입, 이어서 계란이나 두부, 생선, 고기, 그리고 밥과 면과 빵은 맨 뒤로. 채소가 없는 편의점에선 삶은 계란이나 두부, 무가당 두유를 먼저 먹고 김밥을 먹으면 되고, 국밥은 처음부터 밥을 말지 말고 고기와 건더기부터 먹으면서 밥을 조금씩 곁들이라고 하더군요.


국밥 대목에서 뜨끔했습니다.

저자도 약국에서 점심을 서둘러 먹을 때면 국에 밥을 말아 몇 번 씹지도 않고 삼킨 뒤 다시 일하러 나갔다고 털어놓는데, 점심시간 쪼개 쓰는 직장인 모습이 딱 그렇잖아요. 음식마다 10분, 15분씩 기다릴 필요는 없고 채소와 단백질 몇 입 먹고 자연스럽게 밥으로 넘어가면 된다는 말이 이어지는데, 그 끝에 붙은 한 문장이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중요한 것은 완벽한 순서가 아니라 첫 입이다."

첫 입.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다 싶더라고요.

식이섬유 설명도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채소를 먼저 먹으면 장에 방수막이 생긴다는 말을 흔히 듣는데, 그건 과장이 섞인 표현이고 실제로는 물을 머금은 끈끈한 젤이 탄수화물이 소화되고 흡수되는 길을 물리적으로 느리게 만드는 쪽이라고 해요. 그래서 언제 먹느냐가 중요하고, 밥과 빵을 다 먹고 나서 뒤늦게 챙기면 이미 시작된 포도당의 첫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거죠. 저자가 즐겨 먹는다는 차전자피 이야기에는 물을 충분히 마셔야 하고 처음엔 식감이 느끼할 수 있다는 말까지 솔직하게 붙어 있었고요. "탄수화물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준비해두는 도구다"라는 표현이 깔끔해서 좋았습니다.


저자의 실제 하루 루틴이 표로 나오는 대목도 있어요. 8시에 계란처럼 단백질이 든 첫 끼, 10시에 커피, 점심 뒤에는 10분 걷기, 저녁 7시 전에 마지막 식사, 8시에서 9시 사이 근력운동, 11시 30분 취침. 10시에 커피를 놓치면 그날은 아예 마시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던데, 커피로 하루를 버티는 직장인한테는 이게 제일 독한 항목 같아요. 약국을 비울 수 없으면 조제실에서 제자리 전신 동작을 한다는 얘기는 회사 자리에서도 슬쩍 따라 할 만하겠더라고요.


솔직히 처음엔 저녁 7시 전 마지막 식사에서 걸렸습니다. 회식이나 야근이 잡히는 날이면 지키기 어려운 시간이잖아요. 그런데 저자가 먼저 이 시간표는 모든 독자의 정답이 될 수 없다고, 교대근무를 하는 사람이나 아이를 돌보는 사람, 저녁 약속이 잦은 사람에게 같은 시각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말해 주더군요. 가져가야 할 건 순서라는 말이 이어지고요.

바로 뒤에 나오는 '바쁜 날을 위한 최소 루틴'은 다섯 가지예요. 잠들기 3시간 전까지 마지막 식사를 끝내고, 마지막 식사와 다음 날 첫 끼 사이를 우선 12시간 두고, 하루 한 끼 뒤엔 10분 걷거나 실내에서 5분이라도 움직이고, 일주일에 두 번은 하체를 포함한 근력운동을 하고, 7시간 넘게 잘 기회를 확보하면서 카페인이 그 시간을 침범하지 않게 하는 것. 그 아래 붙은 문장은 직장인용 생존 수칙처럼 들렸습니다.


"완벽한 날에만 지킬 수 있는 계획보다 바쁜 날에도 남는 계획을 만드세요."

에필로그에는 판정을 받고 나서도 바로 달라지지 못했던 시간이 담겨 있어요. 병원을 그만두고 약국을 연 뒤로는 정해진 점심시간 없이 국에 밥을 말아 서둘러 먹었고, 낮에는 열량 높은 라떼나 달콤한 커피를 조금씩 마셨대요. 저녁이면 허기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고, 먹는 양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체중은 오히려 늘었다고 합니다. 피부에는 화농성 염증과 한포진이 생겼고, 없던 두통과 위경련까지 반복됐다고 하고요. 다시 혈당을 제대로 들여다보기까지 4년쯤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연속혈당측정기를 붙이고 처음 먹은 음식이 좋아하던 돌솥비빔밥이었는데, 110mg/dL 안팎이던 혈당이 220 가까이 올라가 있었대요. 저자는 한 시간 동안 화면을 끄지 못하고 숫자가 움직이는 걸 계속 캡처했다고 합니다. 그때 든 생각이 이랬다고 해요. '약사인 나도 이렇게 모르는데, 일반인은 얼마나 막막할까.' 이 책이 어쩌면 그 순간부터 시작됐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저자는 끝까지 완벽한 사람인 척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약국에 환자가 이어지면 물도 충분히 못 마시고, 약속이 있는 날엔 계획보다 늦게 먹고, 피곤한 날엔 자극적인 음식이 당긴다고 털어놓습니다. 다만 그런 순간을 의지가 부족하다는 증거로 해석하지 않고 다음 선택을 바꾼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런 문장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한 번도 무너지지 않는 법'에 관한 책으로 쓰지 않았다. 무너진 뒤 돌아오는 법에 관한 책으로 썼다."

"숫자는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는 문장도, 스물일곱의 자신에게 건네고 싶다는 "괜찮다. 네 몸은 아직 바뀔 수 있다"라는 말도 좋았어요. 이 나이쯤 되면 건강검진 결과지 받는 날이 은근히 긴장되잖아요. 공복혈당 칸을 한 번 더 들여다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이 꽤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 같더라고요. 냉장고 음식을 다 버릴 필요도, 영양제를 한꺼번에 주문할 필요도 없고, 오늘 마지막으로 먹은 시간을 적어 보거나 다음 끼니에 채소를 먼저 몇 입 먹거나 식후 10분 움직이는 것 중 "하나면 충분합니다"라고 해 주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책은 손에 쥐기 부담 없는 두께예요. 주황색 화살표와 귀여운 아이콘이 빙 둘러싼 표지도 책꽂이에서 눈에 잘 띕니다. 차례가 꼼꼼하게 나뉘어 있어서 필요할 때 해당 장만 펼쳐 보기 좋고, 위고비와 마운자로, 4주 실천법, 혈당 영양제를 다루는 장도 따로 있더라고요. <혈당의 배신>은 식탁 근처 책꽂이에 꽂아 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볼 책 같아요.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계절이라는데, 올가을엔 살찌는 건 말한테 양보하고 저는 채단탄 순서로 버텨 볼 생각입니다. 연휴 밥상에 나물 몇 젓가락부터 먼저 올려 보려고요. <혈당의 배신> 덕분에 밥 먹는 게 덜 겁나고 오히려 즐거워진 기분이에요. 다들 넉넉한 한글날 연휴 보내세요.


단것 안 먹는 약사도 받아 든 공복혈당 116, 밥을 끊지 않고 먹는 순서와 첫 입부터 바꾸는 현실 혈당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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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프터 - 나는 AI로 인생을 바꿨다
비기 지음 / 모티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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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치킨값은 1초, AI 구독료 29,000원은 며칠? <크래프터> 비기 서평

<크래프터>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수제맥주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크래프트 비어 좋아하는 아재 눈에는 그렇게 읽히더라고요.


치킨 2만 원은 1초 만에 결제하던 사람이 한 달 29,000원짜리 AI 구독료 앞에서는 마우스 위 손가락이 안 눌렸다고 해요. <크래프터>는 이 고백으로 문을 엽니다. 회삿돈으로 쓸 때는 가볍던 AI가 내 지갑에서 매달 빠져나간다고 생각하니 계산이 달라졌다는 대목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어요. 월급 받는 사람이라면 이 감각, 다들 아실 거 같아요.


오늘은 10월 9일 한글날이에요. 금요일이라 사흘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고요.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한데, 책 후반에 1년 전만 해도 영어 프롬프트를 정교하게 써야 했던 일이 지금은 한국어 한 줄이면 된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오늘 같은 날 꺼내 들기 잘 맞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표지 얘기부터 하자면, 파란 바탕에 가로줄이 촘촘히 깔리고 그 위로 CRAFTER라는 글자가 세로로 서 있어요. 오래된 모니터 화면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느낌이랄까요. 아래쪽은 연두색으로 번지듯 바뀌어서 색감이 꽤 산뜻합니다. 두께는 보통 자기계발서 정도라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 부담 없는 편이에요.


저자 비기는 자기소개부터 솔직해요. 내세울 학벌도 대단한 기술도 없었고 7년 동안 부업에 실패했다고 하더라고요. 쿠팡 로켓그로스 사업 비용, 해외 구매대행 강의 수강료처럼 거의 돌아오지 않은 돈이 수백만 원이었답니다. 그 돈을 떠올리고 나서야 결제 버튼을 눌렀다는데, 그때 들었다는 생각이 이랬습니다.


"이것마저 안 해보면, 나는 평생 같은 자리에 있겠구나."

평생 같은 자리.

마흔 후반 직장인이 이 문장을 읽고 웃으며 넘기기는 좀 어렵더라고요.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게 흘러가는 게 어떤 건지 너무 잘 아는 나이라서 그런 거 같아요.

그다음 이야기는 의외로 소박합니다. 저자는 네이버 블로그를 부업으로 하고 있었고, AI에게 처음 맡긴 일도 블로그 글이었대요. 보조배터리 신제품을 주제로 블로그 글을 써달라고 했더니 1분 만에 그럴듯한 글이 나왔는데, 키워드도 글자 수도 문맥도 엉성해서 만족도로 치면 20퍼센트 정도였다고 해요. 그래서 상위 노출 조건과 D.I.A 로직을 먼저 설명해 줬더니 만족도가 70에서 80퍼센트까지 올라갔고요. 저도 네이버에서 블로그를 하는 입장이라 이 대목에서는 귀가 쫑긋하더군요. 저자가 여기서 얻은 깨달음은 이 한 문장으로 정리돼요.


"AI를 잘 쓰는 것은 AI에게 무엇을 시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AI에게 무엇을 알려주느냐의 문제였다."

수강생 두 사람 이야기도 기억에 남아요. 이해도 빠르고 질문도 날카롭던 수강생은 자기 식으로 두세 번 물어보고는 "별거 없는 것 같은데요" 하며 떠났대요. 컴퓨터가 서툴던 50대 중반 수강생은 "이걸 제가 할 수 있을까요?"로 시작했는데, 어떤 날은 열 번 넘게 질문을 고쳐 가며 자기만의 프롬프트를 만들어 갔다고 하고요. 저자는 몇 번 써보고 판단하는 걸 낚싯대를 세 번 던져보고 이 바다에는 물고기가 없다고 말하는 일에 빗대던데, 그 비유가 너무 딱 맞아서 웃음이 나더라고요. 50대 수강생 쪽에 자꾸 마음이 가는 건 아무래도 나이 탓이겠지요.


20년 동안 네이버와 구글로 정보를 찾아온 습관을 자판기에 비유한 대목도 있어요. 버튼을 누르면 정해진 음료가 나오는 방식에 익숙해서, AI 채팅창에서도 짧은 키워드만 던지고 "이게 뭐야, 네이버가 낫네" 하며 닫아버린다는 거죠. 읽다가 살짝 뜨끔했습니다. "이직해야 할까"라고 짧게 물었을 때와, 친구한테 털어놓듯 경제 사정이며 부모님 걱정까지 풀어놓고 물었을 때 답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주는 실험도 나오는데, 이 나이대 직장인이라면 남 일처럼 읽히지는 않을 것 같고요.


<크래프터>만의 특이한 점을 꼽으라면, 저자가 CRAFTER를 소개하면서 외워서 매번 다 채우는 공식이라기보다 결과가 어긋날 때 한 번 훑어보는 체크리스트에 가깝다고 말한다는 점이에요. 맥락을 뜻하는 Context, 역할의 Role, 지시의 Action, 형식과 예시의 Format과 Example, 사고 과정의 Thinking, 근거의 Evidence, 검증과 개선의 Refinement까지 일곱 가지예요. 일곱 글자를 레고 블록으로 그려 놓고 필요한 블록만 골라 쌓는 그림도 들어 있어서, 매번 일곱 개를 다 챙겨야 한다는 부담이 한결 덜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중 하나만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맥락이라는 저자의 말도 시원시원해서 좋았어요.


AI를 설명하는 비유도 직장인 눈높이에 맞춰져 있습니다. 세상 모든 지식을 머리에 넣고 다니고 모든 언어를 마스터한 엄청나게 똑똑한 신입사원인데, 내 머릿속은 못 읽는대요. "이 보고서 좀 어떻게 해봐"라고 던지면 가장 무난한 결과가 돌아와요. 반대로 내일 아침 회장님 보고용 계약 검토 자료이니 법적 리스크 관점에서 위험 요소별 대응 방안까지 정리해 달라고 하면 결과물의 차원이 달라진다는 설명이 이어지죠. 일을 맡기는 쪽이든 받는 쪽이든 회사에서 한 번쯤 겪어본 장면이라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어요.


토큰화, 임베딩 벡터, 셀프 어텐션 같은 단어가 줄줄이 나오는 대목에서는 솔직히 살짝 긴장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기사를 읽을 때 핵심 명사나 동사에 눈이 더 머물고 조사는 스쳐 지나가듯이 AI도 중요한 단어에 더 집중한다는 식으로 풀어줘서, 저 같은 사람도 충분히 따라갈 만했습니다.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결혼 축하 메시지 이야기예요. 오랜만에 연락하는 지인에게 보낼 메시지를 그냥 "결혼 축하 메시지 써줘"라고만 시켰더니 "두 분의 행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같은 형식적인 인사가 나왔대요. 그래서 그 사람과의 관계, 한동안 연락 못 한 미안함,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결을 원한다는 것까지 풀어서 다시 적어줬더니 그제야 보낼 만한 메시지가 나왔다고 해요. 이 나이쯤 되면 오랜만에 연락해야 할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잖아요. 그 어색한 첫 문장을 고르는 마음을 알아서, 프롬프트 얘기인데도 사람 사이 이야기처럼 읽혔어요.


내 머릿속에 너무 당연하게 들어 있는 정보일수록 빠뜨리기 쉽다는 것.

맛보기로 하나 꺼내자면 짜장면 이야기가 있어요. 잡담하다가 짜장면을 좋아한다고 흘리듯 말했더니 AI가 그걸 메모리에 저장해 버렸대요. 그 뒤로 블로그 글감을 뽑아달라고 하면 "직장인이 30분 만에 끓이는 짜장면 한 그릇"이 끼어 있었다고 해요. 마케팅 카피에는 "짜장면 한 그릇처럼 든든한 우리 서비스"가 들어갔고, 새해 다짐 예시에는 "짜장면을 일주일에 한 번만 먹기"가 들어 있었다고 하네요. 메모리는 가끔 들어가서 점검하고 정리하는 게 좋다는 팁으로 이어지는데, 이 짜장면 세 그릇 덕분에 그 팁은 잊어버릴 수가 없겠어요.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계약서의 위험을 분석하는 예시도 쓸모가 있습니다. 한 줄 지시에서 키워드를 더한 문장으로, 다시 맥락을 풀어 쓴 한 단락으로 단계를 밟아 가요. 국내 이커머스 회사이고, 고객 결제 데이터를 다루고, 인프라가 24시간 멈추면 안 되고, 결과물은 임원 회의 자료로 쓴다는 것까지 들어가니 AI가 추측할 여지가 크게 줄어든다고 해요. 정보는 많을수록 좋겠거니 했는데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긴 문서 중간에 묻힌 정보는 AI가 잘 찾지 못한다는 Lost in the Middle 연구가 나와요. 대화가 여러 차례 오가면 성능이 평균 39퍼센트 떨어졌다는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와 세일즈포스의 연구도 함께 근거로 들어서 믿음이 갔어요. 긴 자료는 앞쪽에, 핵심 지시는 맨 끝에.


책 뒤쪽에서 저자가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지금도 무섭다."라고 털어놓는 대목은 꽤 의외였어요. 팔로워 10만 명을 넘기고 강의도 하고 책까지 쓰는 사람이, AI가 더 쉬워지면 자기가 알려주는 것들이 누구나 아는 것이 되어버릴까 봐 걱정한다니까요.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냐는 질문에는 극복하지 않았다고 답합니다. 두려움이 있는 채로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뿐이라고요. 영어도 못하면서 낯선 나라에서 1년을 버틴 경험이 그 바탕이었다고 하는데, 그 대목의 문장들이 짧고 단단했어요.


"무섭다. 하지만 한다. 하면 알게 된다. 알게 되면 다음이 열린다."

AI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내 자리는 괜찮을까 싶은 마음, 이 나이 직장인이라면 다들 비슷할 거예요. 저자는 걱정만 하고 AI를 써보지 않는 걸 비가 올지 걱정하면서 우산은 안 챙기는 일에 빗대는데, 걱정만 하던 쪽이라면 살짝 찔릴 비유입니다.


AI 한두 번 써보고 별거 없다며 창을 닫아본 적이 있다면 <크래프터>가 웃기면서도 꽤 반갑게 읽힐 거 같아요.

저자는 특정 도구의 사용법은 1년 뒤면 또 바뀌겠지만, AI를 대하는 태도가 결과를 바꾼다는 사실은 도구가 바뀌어도 그대로라고 해요. <크래프터>를 책장에 오래 꽂아두고 싶은 이유도 거기 있는 거 같습니다. 프롬프트가 엉뚱한 답을 내놓을 때 일곱 글자 체크리스트를 다시 펼쳐 보면 되니까요. AI가 이제 막 스마트폰의 2010년쯤을 지나고 있다는 말도 기억해 둘 만하고요. 그 무렵 스마트폰을 먼저 손에 쥐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오늘 시작하면 1년 뒤에는 앞서 있는 쪽이 된다는 말이 빈말로 들리지는 않더군요.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말하는 크래프터는 AI가 인생을 바꿔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AI를 손에 들고 자기 일과 삶의 변화를 직접 만들어가는 사람이에요. 그제야 책 제목이 제대로 읽혔습니다.


에필로그 끝에는 바로 해볼 수 있는 숙제가 하나 있어요. 채팅창에 "지금 나는 ○○으로 고민이 많은데, 이걸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라고 묻고, 답이 내 상황과 맞지 않으면 한 번 더 말을 거는 거예요. 한글날 연휴 첫날이니 우리말로 내 사정을 한 단락 꽉 채워서 AI한테 말 걸어보기 딱 좋은 날 같아요. 물론 짜장면 얘기는 빼고요.


가을바람 선선한 연휴 초입에 좋은 책을 만나서 머릿속이 한결 가지런해진 기분입니다. 이번 연휴에는 유튜브 대신 채팅창부터 열어볼 생각이에요. 다들 넉넉한 가을 연휴 보내세요.


29,000원 앞에서 망설이던 평범한 사람이 수백 번 틀려 가며 찾아낸, AI에게 내 사정을 제대로 건네는 법과 무서워도 계속하는 태도에 관한 책


#크래프터 #나는AI로인생을바꿨다 #비기 #모티브 #CRAFTER #프롬프트 #프롬프트설계 #프롬프트엔지니어링 #AI활용법 #AI책추천 #챗GPT활용 #생성형AI #AI부업 #직장인자기계발 #자기계발서추천 #책추천 #신간도서 #가을독서 #서평 #BOOKU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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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역 솔로몬 - 오늘을 빼앗긴 당신에게 건네는 3,000년 지혜의 인생 처방전
신동운 지음 / 스타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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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체면 때문에 덥석 약속하는 직장인이라면, 3,000년 전 왕에게 한 수 배워 볼까요 <초역 솔로몬>서평

분홍빛 표지 한가운데서 하얀 수염의 노인이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 뒤로는 SOLOMON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깔려 있고요. 지혜의 왕을 이렇게 말랑한 핑크로 감쌌다는 것부터 재미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 근엄한 할아버지가 건네는 첫마디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니, 3,000년 묵은 말이 목요일 아재의 피로에도 듣는 약일지 궁금해지더라고요.


제목만 보고 솔로들을 위한 지침서인가 잠깐 기대했다는 건 비밀로 해 두겠습니다.

<초역 솔로몬>은 잠언, 전도서, 아가에 담긴 솔로몬의 가르침 가운데 77가지를 골라 오늘의 말로 풀어낸 책이에요. 신동운 작가가 썼고 스타북스에서 9월에 나왔습니다. 성경에서 출발한 책이라 교회 다니는 분들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막상 펼쳐 보니 회사 생활 오래 한 선배가 들려주는 처세 이야기에 더 가까운 얼굴이더군요.


<초역 솔로몬>은 짜임이 꽤 독특합니다. 꼭지마다 녹색 왕관 안에 번호가 박혀 있고, 초록 굵은 글씨로 핵심이 먼저 한두 줄 나와요. 이어서 솔로몬 시대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통찰과 메시지'가 오늘의 고민으로 이어 붙인 다음, 맨 끝 연두색 박스 안에 '오늘의 한 줄'이 밑줄과 함께 들어앉아 있어요. 처음엔 좀 교과서 같다 싶었는데 몇 꼭지 지나니 이 반복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어디를 펼쳐도 길 잃을 일이 없으니까요.


맛보기로 하나 꺼내 보자면 (희망과 겸손을 아우른 솔로몬의 반지) 꼭지가 좋겠어요. 솔로몬이 궁중 보석 세공사를 불러, 슬픔에 빠졌을 때 용기를 주고 기쁨에 도취했을 때 스스로를 다잡게 할 글귀를 반지에 새기라고 명합니다. 세공사는 반지는 근사하게 만들었는데 정작 글귀를 찾지 못해 밤마다 시름에 빠지고, 결국 지혜롭기로 소문난 신하를 찾아가죠. 신하는 잠시 미소를 짓더니 작은 종이에 짧은 문장을 적어 건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다들 한 번쯤 들어 본 말인데, 이야기 속에서 다시 만나니 결이 좀 다르게 읽히는 거 같아요. 힘들 때 꺼내 보는 위로로만 알고 있었는데, 잘나갈 때 고개 숙이라는 경계가 같은 반지 안에 나란히 붙어 있더군요. 꼭지 끝의 한 줄은 이랬습니다. "오늘 당신을 아프게 하는 시련도, 마음을 들뜨게 하는 성취도, 당신을 찾아왔다 지나갈 뿐이다." 사무실 모니터 옆에 포스트잇으로 붙여 두고 싶은 문장이에요.


솔직히 제일 많이 걸린 건 (성급한 언약이 부르는 재앙) 쪽이었어요. 책이 아니라 제가요. 한 젊은 거상이 타국 상인들과 연회를 즐기다 호기롭게 대형 거래를 장담하며 무리한 이행 보증을 약속하는데, 순간의 기분과 체면에 취해 뱉은 그 한마디가 가문 전체를 채무의 늪으로 끌고 갑니다. 눈물로 찾아온 그에게 솔로몬이 하는 말은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였어요.


회식 자리 분위기에 휩쓸려 "그거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해 본 적 없는 직장인이 있을까 싶더라고요. 이 꼭지는 그 습관을 콕 집어내요. '오늘의 한 줄'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탁이나 약속은 순간의 체면 때문에 덥석 수락하지 말자."인데, '덥석'이라는 단어가 어찌나 딱 맞는지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약속은 신중해야 하며, 실행은 신속해야 한다"는 문장도 좋았어요. 예의 바르게 거절하는 것도 용기라는 얘기라서요.


(분노한 상태에서는 결정을 유예하라)에서는 솔로몬이라는 사람이 조금 다르게 보였어요. 이웃 나라 군대가 오만하게 국경을 넘어 자원을 약탈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장수들은 당장 보복하자고 고성을 지릅니다. 솔로몬도 주먹이 불끈 쥐어질 만큼 화가 났다고 해요. 그런데 그는 명령 대신 침묵을 택합니다.

늘 단칼에 판결을 내리는 냉철한 천재로만 떠올렸는데, 치미는 화를 꾹 누르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는 거 같더라고요. "분노가 마음을 지배할 때 칼을 뽑으면 결국 그 칼끝은 나 자신과 내 나라를 향하게 된다." 회사 일로 치면 열 받은 채로 써 내려간 메일 같은 거겠죠.


보내기 버튼 앞에서, 딱 한 번만 더 숨 고르기.

거의 한 문장씩 따라가듯 제일 느린 속도로 읽은 꼭지는 (헛되고 헛되다는 말의 진짜 의미)였어요. 노년의 솔로몬은 금은보화와 화려한 왕궁, 수많은 신하와 절정의 권력을 다 쥐어 봤는데도, 왕좌에 앉아 지평선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의 허무감을 떨치지 못했다고 해요. 세상에서 가장 많이 가져 본 사람의 고백이라 그런지 가볍게 넘길 수가 없더군요.


"막대한 재물도, 거대한 권력도 죽음이라는 거대한 실체 앞에서는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했다." 이 문장 앞에서 명함에 박힌 직함이며 해마다 신경 쓰이는 고과 같은 것들이 슬그머니 떠올랐습니다. 마흔 후반쯤 되면 그런 것들이 내 이름보다 앞에 서 있을 때가 많거든요.

그렇다고 이 꼭지가 다 내려놓고 허무하게 살라는 쪽으로 흐르지는 않아요. "헛되도다"를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경각심으로 풀어 주고, 그 빈자리에 내면의 바른 양심과 따뜻한 사랑, 소소한 일상의 기쁨을 가만히 놓아 두는 느낌이 듭니다.


같은 장 끝자락에 있는 (늙어감에 대한 우아한 수용)은 나이 탓인지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았어요. 평생 권력과 영화를 누린 늙은 관료가, 눈이 침침해지고 손발이 떨리고 머리칼이 하얘지는 게 두려워 솔로몬을 찾아옵니다. 솔로몬이 그에게 들려주는 말이 참 시적이에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맷돌 소리가 안개 속으로 아득해지고,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지는 날이 찾아온다."


떨리는 손과 흐려지는 눈을 이렇게 옮겨 놓으니 서글프기보다는 담담하게 받아들여지더라고요. '통찰과 메시지'에 나오는 "늙어 감은 소멸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가는 깊은 숙성의 과정이다"라는 문장은 중년 직장인 귀에 꽤 든든하게 들어오는 말이었습니다.


<초역 솔로몬>은 한 번 읽고 꽂아 두기엔 좀 아까운 책 같아요. 경청과 대화에서 시작해 감정, 겸손, 부와 절제, 일과 성취를 지나 인생과 허무, 사랑과 신의, 유산까지 11개 장에 77꼭지가 들어 있고, 맨 뒤에는 솔로몬의 지혜 어록 100선이 따로 붙어 있어요. 그날 마음 상태에 따라 목차를 훑어보고 한 꼭지만 골라 읽어도 충분하더군요. 두께도 보통 인문서 정도라 가방에 넣고 다니기 부담이 없습니다.


한 주 내내 말에 치이고 사람에 치인 분이라면, 아무 데나 펼쳐도 내 얘기 같은 꼭지 하나쯤은 걸려들 거 같아요. 저는 <초역 솔로몬>을 읽는 내내 지혜로운 큰형님한테 한 수씩 배우는 기분이라 재미있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서늘해진 10월 초예요. 단풍 들기 전 이맘때가 이런 책 펼치기에 딱 좋은 철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좋은 어른 말씀을 한 보따리 얻어 들은 것 같아 마음이 든든합니다.


주말을 하루 앞둔 목요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주문 외우면서 버텨 보겠습니다. 다만 금요일 저녁만큼은 좀 천천히 지나가 줬으면 좋겠네요.


절망 앞에선 희망을, 성공 앞에선 겸손을. 3,000년 전 왕의 반지가 피곤한 중년 직장인에게 건네는 77가지 처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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