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성장주 처음 투자 -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은
김운아 지음 / 경이로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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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은'. 표지 맨 윗줄에 적힌 이 문구를 먼저 들여다봤습니다. 크림빛 바탕에 붉은 화살표가 계단처럼 올라가고 그 사이로 동전과 돈주머니가 흩어져 있는 표지는, 재테크서에서 흔히 느껴지는 과열된 기운 없이 산뜻했어요.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아 든 <미국 성장주 처음 투자>는 크기도 두께도 만만해서, 각오를 다지지 않고도 첫 장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저자 김운아는 1,000만 원으로 출발해 순자산 40억 원을 일군 워킹맘 투자자입니다. 이런 이력이 앞에 붙은 책이라면 종목 이름과 매수 시점이 줄줄이 등장할 거라 짐작하기 쉬운데, 이 한 권은 그 예상을 처음부터 비껴갑니다. 저자가 코칭에서 절대 하지 않는 일이 종목 추천과 타이밍 제시라고 하니, 남은 자리에 들어앉은 것은 결국 태도와 마음의 문제입니다.


1부에서 가장 오래 붙들려 있었던 건 80억 원짜리 건물을 증여받고도 퇴사하지 못하는 J씨의 이야기였어요. 유학과 대기업, 매년 해외여행에 주말 골프까지 갖춘 사람이 20억 원의 증여세 앞에서 대출을 최대한 끌어오고, 월급을 동아줄처럼 붙잡게 되는 과정이 담담하게 적혀 있습니다. 기록적인 폭우로 오래된 건물에 물이 새기 시작하자 아침마다 임차인의 연락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했다는 대목에서는, 여유로운 건물주라는 말이 얼마나 헐렁한 표현인지 드러납니다. 저자는 이 사례를 두고 이렇게 정리합니다. "진짜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돈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이다." 30억 원 영끌로 산 압구정 아파트가 100억 원을 넘겼는데도 학원 상담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나섰다는 이어지는 사례까지 읽고 나면, 숫자와 자유가 나란히 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실감으로 남습니다. 백조가 수면 아래에서 발버둥친다는 비유는 익숙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제법 서늘하게 들리더군요.


같은 챕터 끝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등장하는 구성은 조금 뜻밖이었습니다. 1년에 6주만 일하고 62달러로 살았다는 <월든>의 삶을 부러워하면서도, 21세기에 그렇게 살기는 어렵다고 저자가 곧 인정하는 대목이 오히려 신뢰를 줬어요. 결혼식장에 들고 갈 가방 하나쯤은 있어야 하고 차를 살 때 승차감보다 하차감을 따지게 된 사정을 부정하지 않으니까요. 대신 이 소비가 저를 자유롭게 하는지 더 옭아매는지 스스로 물어보자는 제안이 남습니다. 미니멀리즘이나 파이어족 이야기가 유행처럼 오갔던 몇 해를 떠올려 보면, 이런 질문이야말로 유행이 지나도 남는 쪽 같습니다.


2부의 제목 '녹는 건 계좌가 아니라 정신력이다'는 이 책의 성격을 한 줄로 압축합니다. 마크 트웨인의 말을 끌어온 대목이 재미있어요. "10월은 주식 투자에 있어서 특히 위험한 달 중 하나다. 다른 위험한 달로는 7월, 1월, 9월, 4월, 11월, 5월, 3월, 6월, 12월, 8월 그리고 2월이 있다"라는 문장은, 위험 없는 날을 기다리는 마음을 웃으면서 무장 해제시킵니다. 저자는 엔비디아 주가가 7달러대에서 3달러 초반까지 밀렸던 구간과 35달러에서 12달러대로 내려앉았던 구간을 각각 그래프로 보여준 뒤, 10년 흐름 위에 그 두 시기를 작은 원으로 표시해 둡니다. 길게 늘어놓은 시간 축 위에서 그 원들이 거의 바닥에 붙은 점처럼 보이는 장면은 말보다 설득력이 있었어요. 그 옆에 놓인 한 줄이 이렇습니다. "파도가 몰아쳐도 바다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이 대목에는 물음이 하나 따라붙습니다. 살아남은 기업의 차트는 언제나 견디는 쪽이 옳았다고 말해주지만, 같은 시기 조용히 사라진 이름들은 그래프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출렁이는 파도를 견디면 좋은 기업의 주주는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단정이 조금 넉넉하게 느껴진 이유예요. 물론 저자가 그 앞뒤로 성장주 선별 기준을 따로 두고 있으니 무책임한 낙관은 아닙니다. 그래도 '반드시'라는 말은 초보 독자에게 다르게 읽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부에서 제 마음이 가장 편해진 곳은 초심자의 행운을 다룬 자리였습니다. 비트코인으로 시작하자마자 돈이 불어나 전 재산을 넣었다가 90% 폭락 뒤 손절하고, 신용대출까지 끌어와 결국 백기를 든 M씨의 사례는 주변에서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의 축약판 같았어요. 저자의 진단은 냉정합니다. 정신력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찾아온 행운은 기본기를 배울 기회를 앗아간다는 것. 그리고 행운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정신력이라고 적습니다. <연금술사>의 채굴꾼 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는데, 5년 동안 99만 9,999개의 돌을 깨고 마지막 하나를 던져버렸는데 그것이 에메랄드였다는 대목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자책을 권하지 않습니다. 이미 포기했다면 후회하지 말고 다시 발밑의 돌을 깨는 편이 현명하다고 하고, 사자마자 떨어지기만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합니다. 인생이라는 코스 요리에는 쓴맛과 단맛이 번갈아 나오니 순서가 조금 다를 뿐이라는 위로가 뒤따르죠. 손실 경험을 부끄러움으로 껴안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몇 줄이 책값을 하는 대목일 겁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 도서의 결은 더 분명해집니다. 6부에서 저자가 주변 사람들에게 건네는 말이 "돈만 잃으세요"라고 해요. 재테크서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방향의 조언입니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건강과 가족은 되돌리기 어렵다는 이유이고, 계좌의 90%가 사라져도 가족은 괜찮을 것이라는 서술까지 이어집니다. 남은 10%의 현금과 본인의 투자 능력, 가족의 인내를 근거로 대는 대목이 든든하게 읽히면서도, 40억을 이룬 사람의 10%와 이제 종잣돈을 모으는 사람의 10%가 같은 무게일지는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저자가 자산 규모에 따라 전략을 달리 가져가라고 반복해 말하는 만큼, 이 문장도 규모와 함께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실무적으로 가장 유용했던 개념은 '시한부 자금'이었어요. 집 살 돈이나 세금 낼 돈, 아이 등록금처럼 당장 쓰지 않아도 되는 돈을 여유 자금으로 착각하기 쉽다는 지적입니다. 2년 뒤 쓸 2억 원이 반토막 나면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100% 수익이 필요하고, 기한이 다가올수록 조급함이 레버리지나 리딩방 쪽으로 사람을 밀어낸다는 설명이 구체적입니다. 레버리지 구조를 풀어놓은 부분도 초보자를 배려했습니다. 일반 주식은 10% 내렸다가 11.1% 오르면 본전이 되지만 3배 상품은 30% 내린 뒤 33.3%가 올라도 원금의 93%에 머문다는 계산 하나로, 배수의 함정이 눈에 들어옵니다. 에베레스트 등반의 성공이 정상이 아니라 안전한 하산에 있다는 비유를 재테크로 옮긴 대목도 오래 남았습니다.


이 책이 마지막에 내놓는 답은 소박합니다. 빨리 부자가 되는 방법은 모르지만 확실하게 부자가 되는 방법은 안다고,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달리지 않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삶을 지키는 한 기회는 계속 온다는 문장과 같은 곳을 향하고 있죠. 그러니 이 안내서는 시작이 늦었다고 여기는 사람, 한 번 크게 잃고 시장 쪽으로 눈을 돌리기 어려워진 사람에게 특히 유용할 겁니다. 반면 유망 종목의 이름이나 진입 시점을 확인하려고 펼친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 실망이 이 책의 미덕이기도 하고요.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읽어오는 동안, 답을 주는 책보다 질문을 남기는 책이 손에 오래 남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 도서는 후자에 속합니다.


여름의 열기가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물러나는 시기입니다. 계절이 바뀌는 속도는 어차피 정해져 있어서 조급해할 여지가 없는데, 자산 앞에서는 유독 마음이 앞서기 쉽습니다. 이 한 권을 덮고 나서 남은 건 수익률에 관한 계산이 아니라 속도에 관한 감각이었어요. 서늘한 바람이 시작될 무렵 다시 펼쳐볼 것 같습니다.


종목과 타이밍 대신 견디는 힘을 알려주는 책. 시작이 늦었다고 느끼는 사람과 한 번 크게 잃어본 사람에게 특히 다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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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김도운 지음 / 작가의집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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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먼저 오래 봤습니다. 누런 크라프트지 같은 바탕에 세피아 결이 층층이 흐르고, 그 위로 검은 실루엣의 남자가 뒤돌아 서 있습니다. 몸은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잘게 조각나 있고 갈라진 틈으로 붉은빛과 초록빛이 얼핏 비칩니다. 붙여 놓은 흔적을 감추지 않은 사람의 형상입니다. 한 손에 쥔 작은 꽃가지가 표지에 적힌 한 줄 "느리게 걷는 이에게 찾아온 뜻밖의 아름다움"과 맞물리면서, 무너진 자리에서도 뭔가 하나는 놓지 않은 사람을 그려 놓은 듯했어요.


김도운 목사가 쓴 <그 자리에서>는 핸드북 판형입니다. 얇고 가벼워서 가방 어디에 넣어도 부담이 없고, 꼭지마다 길이가 짧고 끝에는 성경 말씀이 한 절씩 붙어 있어 하루 한 편씩 넘기기에 알맞습니다. 다만 물리적으로 가벼운 것과 읽기에 가벼운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두 꼭지 정도 지나면 속도가 저절로 줄어듭니다.


저자는 어린 시절 뇌전증 진단을 받고 발작과 함께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 사실이 이력으로만 놓여 있지는 않아요. 병을 숨긴 채 일하다 걸려서 잘렸고, 앓고 있다고 말하면 써주는 곳이 없어 최대한 버티다 잘리는 게 일상이었다고 씁니다. 운전면허도 딸 수 없고 육체노동도 어려운 조건에서 찾아낸 방편이 지하철 택배였는데, 오래 타면 증상이 나타난다는 걸 그때 알게 되어 얼마 못 가 그만두게 됐다는 대목에서 잠깐 손이 멈췄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기며 살았는데 현실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적은 문장은, 배제라는 말이 실제로 어떤 모양인지를 설명 없이 보여줍니다.


책의 앞쪽에 놓인 의심의 기록은 신앙서에서 이렇게까지 써도 되나 싶을 만큼 직설적입니다. 귀신병 걸린 새끼라는 조롱, 눈을 뒤집어 깐 채 흉내를 내던 사람 앞에서 느낀 살의까지 그대로 적어 놓았어요. 기도가 신앙이라기보다 괴로움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자기 진단, 예배가 "신앙을 고백하는 시간이 아닌 하나님의 방관을 고발하는 자리가 되어갔다"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이 정직함이 없었다면 뒤에 나오는 결론은 아마 공허했을 겁니다.


전환도 극적이지 않습니다. 감정이 풀린 게 아니라 같은 사실을 다르게 읽게 되는 방식이에요. 하나님의 침묵을 무능을 숨기려는 회피로 몰아붙이던 사람이, 그 침묵이 자기 음성을 초대하는 관용이었고 배제는 저항을 초청하는 관대였다고 적습니다. 너무 기다려서 너무 밉고, 너무 기다리다 보니 흐릿해졌다는 문장이 이 자리의 정서를 잘 담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흐릿해도 희미해지거나 아득해지지는 않는다고 덧붙입니다. 바로 다음 꼭지에서 "믿음은 의심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마주하는 것이다"라고 짧게 못 박는데, 앞의 다섯 쪽을 두 행으로 접어 놓은 셈입니다.


전부 수긍했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산책하는 강아지의 목줄을 보며 묶임이 곧 궁극의 자유임을 말하는 꼭지가 있어요. 목줄이 속박이 아니라 위태로움을 막는 힘이었다는 관찰은 선명합니다. 그런데 강아지와 보호자의 관계를 사람과 하나님에 곧바로 겹쳐 놓기까지, 앞선 글들이 보여준 지긋한 씨름의 시간이 이 대목에서는 생략된 느낌이 남습니다. 속박이 구원의 얼굴이라는 표현에 이르는 길이 조금 빨라서, 아직 목줄이 목줄로만 느껴지는 사람에게는 건너뛴 구간이 넓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물론 저자에게는 이미 오래 통과한 결론일 테니, 이건 읽는 쪽의 걸음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가장 실용적으로 다가온 자리는 뜻밖에도 중간부의 짧은 글이었습니다. 믿음이 초라하든 대단하든, 순종이 실패투성이든 성공적이든 상관없이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뿐이라며, 의심에 실망하지도 말고 믿음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씁니다. 불순종에 아파하지도 말고 순종을 과시하지도 말라는 문장이 뒤따릅니다. 자책과 자만을 한꺼번에 내려놓게 하는 구조인데, 오래 일하며 성과로 자신을 증명해 온 사람에게는 앞쪽 절반이 특히 아프게 읽힙니다. 다음 장은 거의 백지에 가깝고, 오직 찾으시고 세우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두 행만 놓여 있어요. 여백이 문장의 일부처럼 기능하는 편집입니다.


책은 죄가 파멸의 조건이 아니라는 이야기로 닫힙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신 분이 죄가 시작된 순간에 이곳을 지울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마주하셨다는 것, 그것이 죄를 권능으로 부수는 대신 사랑으로 성취하겠다는 뜻이었다는 선언이 마지막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앞서 사람과 하나님을 나란히 세운 꼭지에서 이미 예고된 결론이기도 하지요. 사람은 사랑을 지키려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하나님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십자가 외에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는 문장. 전능을 말하다가 불가능의 언어로 착지하는 이 뒤집기가 이 책에서 가장 단단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정리된 문장과 살아낸 문장의 차이가 점점 분명해지는데, 이 한 권은 후자에 속합니다. 자기 고통을 다 말한 사람이 마지막에 "당신은 오늘 어땠나? 괜찮은지 궁금하다"라고 독자의 안부를 묻는 순서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신앙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보다 오히려 요즘 걸음이 느려진 쪽에 먼저 닿을 것 같아요. 질병이나 사고로 속도를 잃은 뒤 사회가 자리를 잘 내주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된 이들, 교회 안에서 받은 말 때문에 더 외로워진 이들이 읽으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난 기분이 들 겁니다. 반대로 매끄러운 위로를 기대하는 분에게는 앞쪽 절반이 꽤 거칠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여름의 끝이 눈에 보이는 시기입니다. 처서를 앞두고도 낮은 여전히 뜨겁지만 해가 지고 나면 바람의 온도가 확실히 다르고, 저녁 공기에 가을 기운이 조금 섞여 있어요.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자리에 서면 자기 속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책이 손 닿는 곳에 있는 건, 생각보다 든든한 일이었습니다.


의심을 지우지 않고 끝까지 통과한 사람의 기록. 걸음이 느려진 자리에서 읽으면 가장 정확하게 들리는 <그 자리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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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의 함정 - 자극적일수록 더 공허해진다
따웨이 지음, 이지연 옮김 / 지니의서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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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형광 노란 바탕 위로 보라색 덩어리가 흘러내리고, 검은 스파이크가 사방에서 튀어 오릅니다. 표지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눈이 조금 피로했어요. 그런데 아래쪽 검은 띠에 박힌 한 줄을 읽고 나니 그 피로감이 계산된 것이겠다는 짐작이 들었습니다. 표지에 적힌 문구는 이렇습니다. "즐거움도 집중력도 잃었다면, 도파민을 점검하라!" 책이 하려는 이야기를 표지가 먼저 몸으로 보여 주는 구성이지요.


판형이 크지 않고 분량도 272쪽이라 손에 쥐기 편했고, 개념 하나에 사례 하나를 붙여 짧게 끊어 가는 방식이라 읽는 속도가 잘 붙었습니다. 중국의 심리상담사 따웨이가 쓰고 이지연이 옮긴 <도파민의 함정>은 도파민을 행복 물질이 아니라 갈망을 만들어 내는 신호로 다시 정의하면서 시작합니다. 더 많은 자극을 원하게 만들고 다음 보상을 기대하게 만드는 쪽이 도파민의 본업이라는 것이죠.


1부에서 가장 오래 눈길이 붙은 대목은 '공갈 젖꼭지 효과'였습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려 울음을 멈추게 하듯, 저렴하고 자극적인 오락거리가 불만을 잠재운다는 개념을 저자는 오늘의 쇼트 폼과 게임, 연예 뉴스에 겹쳐 놓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짚는 세 가지 작동 방식이 꽤 냉정한데, 그중 하나는 이렇게 정리돼 있습니다. "노력 없는 보상에 뇌는 순식간에 중독된다."


사례로 등장하는 디자이너 C의 하루가 특히 그랬습니다. 출근길 쇼트 폼, 점심시간 드라마, 잠들기 전 커뮤니티. 처음에는 달콤한 휴식처럼 느껼졌지만 몰입하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고, 집중력을 발휘해야 할 순간마다 멍한 상태로 빠져 버린다는 이야기였어요. 남의 일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감정적 비용이 들지 않는 가벼운 연결에 기대어 근원적인 외로움을 잠시 달랜다고 쓰는데, 이 문장이 이 챕터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아팠습니다.


2부의 '새장 논리'는 그림이 단순합니다. 평생 새장 안에서 살아온 새는 문이 열려 있어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비유죠. 저자는 그 이유를 손실 회피와 불확실성 기피, 그리고 새로운 판단에 드는 에너지를 아끼려는 본능에서 찾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가짜 안정감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대목을 읽으며 마음이 서늘해지는 사람이 저 혼자는 아닐 것 같아요. 현재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기보다 익숙한 업무에 머무는 쪽을 택한다는 예시가 나오는데, 이 문장 앞에서는 다들 잠깐 멈추게 될 겁니다. 저자가 권하는 첫 처방도 거창하지 않습니다. 선택의 순간마다 익숙해서 고르는 것인지 진심으로 원해서 고르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것, 그리고 뇌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큼 작은 변화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3부로 넘어가면 같은 원리가 사랑 쪽으로 옮겨 갑니다. '간헐적 강화' 챕터가 그렇습니다. 보상이 언제 올지 모를 때 갈망이 최고조로 올라간다는 설명에 저자는 독서를 끌어와 비유하는데, 결말이 뻔한 소설보다 다음 장을 알 수 없는 소설에 더 몰입하는 이치와 같다고 하지요. 오래된 연인 사이에서 확답을 조금 미루고 여백을 두었더니 당연하게 여겼던 시간이 당연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는 사례가 붙습니다.


솔직히 이 챕터에서는 고개가 조금 기울어졌습니다. 앞에서는 도파민에 끌려다니는 상태에서 빠져나오라고 하더니, 여기서는 그 원리를 관계 안에서 활용해 보라고 권하니까요. 저자도 그 간극을 의식한 듯 밀당이 아니라는 단서를 달고, 꼭 필요한 순간에는 확신을 보여 주라는 항목을 나란히 놓아 균형을 잡습니다. 그럼에도 3부 앞머리에 애착 불안이나 정서적 의존을 다루는 챕터가 따로 있는 책이라, 예측 불가능성이 어떤 사람에게는 관계를 살리는 긴장이 아니라 불안을 키우는 조건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남았어요. 도파민을 적으로 두지 말고 다루는 법을 익히라는 뜻으로 읽으면 앞뒤가 이어지긴 합니다만, 이 부분의 온도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잡힐 듯합니다.


의문을 품은 대목이 있어도 책 전체를 덮고 나서의 인상은 담담했습니다. 자기계발서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채찍질하는 문장이 거의 없어요. 반복되는 실수와 끊지 못하는 습관, 놓지 못하는 관계를 의지의 문제로 몰아가지 않고 뇌의 구조와 오래된 심리 패턴에서 원인을 찾아 주는 태도가 위로에 가깝게 다가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결심을 요구하는 책과 이해를 건네는 책이 나뉘는데, 이 한 권은 분명 뒤쪽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화면에 손이 가는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분들, 정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익숙한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마음을 오래 안고 있는 분들이 떠올랐습니다. 심리학 용어가 붙어 있어도 설명이 어렵지 않으니 이 분야를 처음 읽는 사람도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뒤로 갈수록 처방의 골격이 비슷하게 반복되는 인상은 있어서, 순서대로 완독하기보다 목차에서 눈에 걸리는 개념을 골라 읽는 방법도 괜찮겠습니다.


책의 끝자락에는 이런 문장이 놓여 있습니다. "진짜 삶은 화면 밖 당신의 시선 끝에 있다."


여름의 끝이 가까워지는데도 더위는 좀처럼 물러나지 않고, 밤이면 창밖 소리가 조금씩 얇아지는 시기입니다. 계절이 바뀌는 자리에서는 무언가를 크게 결심하고 싶어지지만, 이 책은 그 반대편을 가리킵니다. 거대한 결심보다 매일 반복되는 작은 선택이 삶을 만든다는 마지막 문장을 8월 말의 신간으로 만나게 되어, 유난히 알맞은 시기에 도착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며, 자극에 빼앗긴 일상의 감각을 조용히 되돌려 주는 심리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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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수학이 잘되는 수학책
송명진.박종하 지음 / 블랙피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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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받아 든 순간 먼저 느껴지는 건 두께입니다. 표지는 연한 버터색이라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데, 손에 얹으면 만만치 않은 무게가 옵니다. 빨강과 검정으로 큼직하게 박힌 제목 아래로 분홍과 하늘색 삼각형이 겹쳐 있고, 노랑 초록 캐릭터가 도형 위를 기어오르고 있어서 표정은 분명 명랑합니다. 그런데 안에 든 것이 185개의 문제라는 걸 알고 나면, 이 명랑함이 만만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앉은자리에서 넘길 책은 아니라고 짐작했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첫 장에 '계산이 상상을 죽인다'라는 제목의 꼭지가 있습니다. 정사각형 세 개가 위로 쌓여 있고 아래 왼쪽에서 위 오른쪽까지 이은 길이가 10일 때 정사각형 하나의 넓이를 구하라는 문제인데,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쓰면 세 줄에 끝납니다. 저자들은 답을 내놓고도 멈추지 않고 같은 문제를 다시 붙잡습니다. 정리를 쓰지 않고, 도형을 복사해 90도씩 돌려 네 개를 붙이는 방식으로요. 그렇게 만든 큰 정사각형 하나가 작은 정사각형 열 개분이라는 걸 확인하며 같은 답에 도착합니다. 훨씬 길고 훨씬 번거로운 길입니다.


그 뒤에 붙은 문장이 이렇습니다. "때로는 단순 계산이 다양한 상상을 죽이기도 합니다." 절 제목보다 수위를 낮춘 표현인데, 조금 더 읽으면 저자들이 스스로 균형을 잡아 두는 대목도 나옵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사용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익숙하게 쓰면 좋겠다고 분명히 적어 둡니다. 정해진 조건 안에서 최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려 보자는 게 요지였던 셈이죠. 자기 주장의 세기를 스스로 관리하는 책이라 읽는 쪽도 편안했습니다.


바로 다음 꼭지의 제목은 'Out of box'입니다. 숫자 카드 여덟 장을 두 줄로 놓고 두 개만 옮겨 양쪽 합을 맞추라는 문제인데, 여기서 저자들이 먼저 하는 일이 인상적입니다. 옮기기 시작하는 대신, 이 문제의 답이 존재하는지를 묻습니다. 두 줄의 합은 39이고 카드를 아무리 바꿔도 총합은 변하지 않으니 양쪽이 같아지려면 각각 19.5여야 하는데, 다루는 수는 모두 자연수입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먼저 나옵니다. 서둘러 숫자를 옮기다 보면 계획도 전략도 없이 주먹구구로 접근하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든다는 서술도 곁들여 있는데, 사무실에서 급한 일을 붙잡고 있을 때의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오래 눈이 머물렀습니다.


그다음 해법은 숫자가 종이 카드로 주어졌다는 점을 이용해 9를 뒤집어 6으로 쓰는 것입니다. 무릎을 치게 되는 대목이긴 한데, 여기서 가벼운 의문이 하나 남았습니다. 이 트릭은 한 번 알고 나면 그 자리에서 소모됩니다. 반면 뒤쪽 장에서 다루는 닮음비나 도형을 복제해 붙이는 방법은 다른 문제로 그대로 옮겨 쓸 수 있는 도구로 남습니다. 성질이 다른 두 종류가 '아이디어'라는 한 이름으로 묶여 있어서, 여러 장을 이어 읽다 보면 어느 쪽이 이 책이 말하는 수학 근육인지 잠깐 헷갈립니다. 저자들도 그걸 의식했는지 같은 꼭지의 뒤 문제에서는 같은 트릭이 통하지 않게 조건을 바꿔 두었습니다.


중반의 닮음 이야기는 훨씬 단단합니다. 높이가 3미터와 4.5미터인 전신주 사이에 사람이 서 있을 때 그 사람의 키를 구하는 문제가 있는데, 닮은 삼각형 몇 개를 찾아내는 것만으로 답이 나옵니다. 직접 재지 않고도 알아내는 셈이죠. 이 장의 앞부분에 탈레스가 그림자 길이만으로 피라미드 높이를 알아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 오래된 방법이 전신주와 사람의 키로 내려와 있는 배치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같은 장에서 저자들은 어려운 미적분은 풀면서도 닮은 도형을 찾아 비교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아 비율 문제를 놓치는 고등학생이 많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진도를 얼마나 앞질렀느냐와 생각이 얼마나 깊어졌느냐가 따로 움직인다는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건 '자기 복제'라는 꼭지였습니다. 빗변 길이 두 개만 주어진 도형의 넓이를 묻는데, 그 도형만 뚫어져라 바라본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고 책은 말합니다. 네 개를 복사해 돌려 붙여야 비로소 한 변이 7인 정사각형 안에 한 변이 5인 정사각형이 비어 있는 틀이 드러납니다. 그런 배치를 떠올리는 일이 공감각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의 몫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처음에는 생소해도 비슷한 경험을 쌓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라고 저자들은 덧붙입니다. 머리로만 하기 어렵다면 종이에 그려서 오려 붙여 보라는 권유까지 나옵니다. "누구나 경험할수록 익숙해집니다." 이 짧은 문장을 만나고서야 이 책이 왜 이렇게 두꺼운지 납득이 갔습니다. 요령 몇 개를 알려 주려는 책이 아니라, 같은 손놀림을 여러 장에 걸쳐 다르게 써 보게 하려고 이 부피를 감당한 것입니다.


읽는 방식에 대해서도 한마디 남기고 싶습니다. 문제를 건너뛰고 풀이만 읽으면 이 책은 정말 얄팍해집니다. 저자들이 준 것은 답이 아니라 손을 쓰는 시간이니까요. 그래서 하루에 한두 문제씩, 연필을 들고 천천히 가는 편이 맞습니다. 아이 문제집을 들여다보다 막혀 본 어른이라면 반가울 대목이 많고, 학교를 떠난 뒤로 도형을 만져 본 적 없는 사람에게도 진입 장벽이 낮습니다. 초등학생 수준의 지식으로 접근하게 설계했다는 저자들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빠른 답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의 방식이 답답할 수도 있겠습니다.


서평단으로 만난 책 가운데 이렇게 오래 곁에 두고 조금씩 읽어야 하는 한 권은 드물었습니다. 마감에 맞춰 읽어 내는 종류가 아니라, 마감이 지나고도 계속 펼치게 되는 종류였습니다.


늦여름의 열기가 낮에는 여전한데 아침저녁으로는 바람의 결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계절에 어울리는 책이 있다면, 급할 것 없이 한 문제씩 넘기며 손을 움직이게 하는 이 도서가 그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도 아직 남은 문제가 많을 텐데, 그게 아깝지 않습니다.


공식으로 3초에 끝날 문제를 일부러 30분 동안 붙잡게 만드는 책, 그 30분에 남는 것이 있다고 조용히 설득하는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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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
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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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평범한 날들은 사라졌고>의 앞부분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유명 에이전트가 다섯 살 몰리에게 춤추는 게 좋으냐고 묻고, 돈을 받으면 좋겠냐고 묻습니다. 아이는 둘 다 그렇다고 답합니다. 그 장면을 보며 엄마 페이는 생각해요. 돈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몰리는 분명 초콜릿 아이스크림 정도를 생각했을 테니까. 아이의 동의는 이렇게 받아졌고, 계약은 어른들 사이에서 성립됩니다.


몇 장 넘기면 에이전트가 광고 단가를 부릅니다. 1년쯤 지나면 한 편에 5만 달러 이상이 될 거라는 말에 페이의 머릿속이 하얘지는데, 그때 나오는 문장이 「정말 많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살 수 있는 돈이다」예요. 조금 전에 딸을 두고 했던 계산이 자기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옵니다. 어른의 상상도 결국 같은 크기였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이 반복이 이 소설 전체의 설계도라고 봤습니다.


수잰 레드펀의 이 장편은 남편이 사라진 뒤 세 아이를 홀로 키우는 서른두 살 페이 마틴의 이야기입니다. LA 거리에서 우연히 찍힌 막내 몰리의 탭 댄스 영상이 폭발적으로 퍼지고, 가족은 하루아침에 할리우드 한복판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656면이라 손에 쥐면 묵직하지만 챕터가 짧아 속도는 붙는 편이에요. 저는 일부러 천천히 읽었습니다. 사건만 따라가면 놓치는 문장이 많은 책이라서요.


페이가 계약에 다가가는 이유가 허영이 아니라는 점을 눌러 두고 싶습니다. 큰돈이 들어온다는 말을 들은 순간 그가 떠올리는 목록의 첫 항목은 아들 탐의 상담 치료비입니다. 그다음이 빚, 그다음이 낡은 차 수리예요. 이 순서에 페이라는 사람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대목에서 에이전트가 결혼했느냐고 묻고, 페이는 남편이 다섯 달 전에 사라졌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입니다. 거짓말은 아니면서 없는 삶이 그려지는 순간이죠. 남편도 관여하느냐는 물음에는 「아뇨. 저뿐이에요」라고 답하고, 곧 이런 문장이 붙습니다. 지난 12년간의 결혼 생활이 더 정확하게 요약되는 순간이라고요. 이 한 줄에서 저는 이 소설이 연예계 이야기만 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가족이 무너지는 방식도 자극적이지 않게 쓰였습니다. 중반쯤에 사라졌던 남편 션이 돌아오는데, 문제가 닥쳤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나중에야 슈퍼히어로처럼 등장한다는 서술로 그 사람을 한 줄에 정리해 버립니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달려가고, 열두 살 에밀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새 옷입니다. 이 동네에서는 옷을 더 잘 입어야 한다고요. 상처에서 배운 것이 고작 이런 거냐는 페이의 반응이 아팠습니다. 결국 남편은 새로 산 컨버터블에 아이들을 태우고 떠나고, 페이는 여행 가방과 함께 주차장에 남습니다. 그 뒤로 할 일 목록에 적어 둔 이혼 전문 변호사에게 전화하기 항목의 밑줄이 세 번에서 여섯 번으로 늘어납니다.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밑줄 개수만 세는 방식이 오히려 세게 읽혔어요.


책의 뒤쪽으로 가면 페이는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다른 아역의 어머니를 찾아갑니다. 딸이 열세 살 때 겪은 일을 두고 페이가 그것은 범죄라고 말하자, 그 어머니는 「미국에서는 그렇게 부르겠죠」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페이를 정면으로 봅니다. 우리는 둘 다 좋은 인생과 미래를 위해서 딸들을 팔아넘긴 것이고, 차이가 있다면 자기는 그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는 거라고요. 아이 치료비를 먼저 떠올렸던 선한 동기가 이 논리 안에서 변명으로 흡수됩니다. 이 대면 장면이 이 소설에서 가장 서늘한 자리였습니다.


더 오래 남은 것은 그다음입니다. 몰리는 이미 몸이 상했고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상태예요. 그런데 아이 주변의 어른들이 하나같이 같은 대답을 내놓습니다. 에이전트는 수익을 계산하고, 프로듀서는 통제를 놓지 않으려 하고, 페이가 마음을 준 남자마저 「그만둬서는 안 돼요」라고 말합니다. 자기는 그만두지 않았느냐고 되묻자 「나는 프로그램이 끝나고 그만뒀어요. 촬영 중간이었다면 절대 떠나지 않았을 거예요」라는 답이 돌아오고요. 많은 사람이 이 일에 매달려 있으니 한 아이의 사정으로 멈출 수는 없다는 논리인데, 로맨스로 보였던 축이 여기서 조용히 정체를 드러냅니다. 페이는 그를 할리우드라는 종교의 신자로 정리합니다. 그 표현이 과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앞에서 근거를 쌓아 둔 소설이에요.


다만 걸린 대목도 있습니다. 페이가 총을 든 스토커에게 협박당한 일을 회상하면서, 그 청년은 악당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어린 사람일 뿐이었다고 연민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문장으로 자기 처지와 겹쳐 놓기까지 하고요. 인물의 심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아이를 향한 실제 위협을 그렇게 부드럽게 감싸도 괜찮은지는 의문이 남았습니다. 페이의 판단력이 흔들린다는 걸 보여 주려는 의도였다 해도, 이 소설이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단호했던 만큼 이 자리에서만 초점이 흐려진 인상을 받았어요. 결말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표지에 별 스티커로 얼굴이 덮인 그 아이의 사진이 왜 하필 그렇게 디자인됐는지는 알게 됩니다.



번역에 대해서도 한마디 남기고 싶습니다. 오래된 시리얼 광고 문구나 흘러간 영화의 대사처럼 미국 독자에게만 자연스러운 표현마다 옮긴이 주가 붙어 있습니다. 농담의 온도까지 넘기려 한 흔적이라 반가웠어요. 이 이야기가 남의 나라 사정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도 비슷합니다. 아이 얼굴이 부모 계정에 매일 올라가고 조회수가 곧 기회가 되는 일이 우리 쪽에서도 낯설지 않으니까요. 자녀의 재능을 어디까지 밀어줘야 하는지 고민해 본 분이라면 남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을 것이고, 화려한 세계의 뒷면이 궁금해 집어든 독자에게도 값은 충분합니다. 대신 아동 착취를 정면으로 다루는 구간이 있어서, 가볍게 쉬어 갈 소설을 찾는 분께는 권하기 조심스럽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만나다 보면 정보로 남는 책과 질문으로 남는 책이 갈리는데, 이 한 권은 확실히 뒤쪽이었습니다.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속물이라고 몰아세우지 않으면서, 그 마음의 값을 누가 치르는지는 끝까지 정확하게 계산해 보여 주거든요.


처서를 지나 저녁 공기가 먼저 바뀌는 시기입니다. 매미 소리가 옅어지고 해가 조금씩 짧아지는 이맘때가, 두툼한 소설 한 권을 천천히 붙들기에는 알맞은 것 같아요. 책의 끝자락에 나오는 말처럼 이 세계는 사람을 강하게도 약하게도 만들고, 하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면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회사든 무엇이든 오래 몸담은 판이 사람을 어떤 쪽으로 바꿔 놓았는지, 이 나이가 되면 대충 짐작이 갑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그 짐작이 조금 더 선명해졌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진 뒤에 벌어지는 일을 656면 내내 정직하게 따라가는, 빠르지만 얕지 않은 할리우드 가족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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