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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ㅣ 21세기 시선으로 읽는 동양고전
박찬근 지음 / 청년정신 / 2026년 8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가 먼저 말을 걸었어요. 흰 바닥에 회색으로 크게 앉힌 書經 두 글자, 그 위에 낡은 고서 몇 권을 쌓아 올린 것 말고는 장식이 거의 없습니다. 3천 년 전 통치의 교과서라는 이름값을 생각하면 좀 더 위엄을 부려도 될 텐데 여백을 넓게 비워 뒀더군요. 아래쪽에 작게 적힌 한 줄이 리더의 품격을 만드는 16가지 물음이었으니, 이 책이 어떤 자리에 서려는지는 표지에서 이미 짐작이 됐습니다.
208쪽, 손에 쥐기 좋은 크기입니다. 두께로 사람을 주저앉히는 고전이 아니어서 첫 장을 넘기는 데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어요.

<서경>은 요·순·우·탕·문왕·무왕의 말과 군신 사이의 논쟁을 모아 둔 경전이고,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과 밤새 붙들었고 정조가 왕도정치의 뼈대를 세울 때도 곁에 두었던 책입니다. 저자 단산 박찬근 선생은 35년간 한학을 연구하고 강의해 온 분인데, 채침의 서집전을 바탕 텍스트로 삼아 이 방대한 경전을 春夏秋冬 네 계절, 열여섯 개 장으로 다시 짰습니다. 봄에 리더의 조건을 심고, 여름에 땀 흘려 실천하고, 가을에 결산하고, 겨울에 스스로를 갱신하는 순서예요. 계절에 고전을 얹은 발상이 처음에는 편집상의 장식처럼 보였는데, 읽어 갈수록 이 배치가 내용을 붙잡아 주는 쪽으로 작동합니다.
봄 부의 네 번째 장에서 걸음이 느려졌어요. 표제가 호문즉유, 묻기를 좋아하면 여유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상나라를 세운 탕왕이 천하를 얻은 직후에 오히려 편안하지 못했고, 그 흔들림을 읽은 신하 중훼가 진언을 올리며 임금의 덕 가운데 하나로 꼽은 것이 바로 묻는 태도였다고 해요.
"묻기를 좋아하면 넉넉해지고,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면 작아진다."
넉넉함을 뜻하는 유裕라는 글자를 저자가 열어 보이는 대목이 특히 좋았습니다. 옷 의와 골짜기 곡이 겹쳐 있어서, 품이 넉넉해 무언가 담을 여지가 있는 옷이면서 동시에 모든 물을 받아들이는 깊은 계곡이라는 겁니다. 질문을 던지는 순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그 인정이 빈자리를 만들고, 그 빈자리로 남의 지혜가 흘러든다는 설명이었어요. 넉넉함이 비워 둠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는 문장으로 단락이 닫힙니다.

반대편에 놓인 글자가 자용自用입니다. 스스로를 쓴다는 뜻인데, 남의 경험을 배제하고 제 판단만으로 결정하는 태도를 가리켜요. 자기만 쓰는 사람은 자기 시야각만큼만 세상을 본다고, 저자는 담담하게 적어 둡니다. 연차가 쌓이면 묻는 일이 어색해집니다. 모른다고 말하는 게 무능의 자백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오니까요. 그런데 이 장은 정반대로 말해요. 리더는 지혜를 혼자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흩어진 지혜가 모여드는 자리가 되는 것이라고요.
이 장의 「서경 깊이 읽기」는 먹줄 이야기입니다. 목수가 굽은 나무 위에 튕겨 곧은 금 하나를 남기는 그 검은 실인데, 아무리 뒤틀린 나무도 먹줄 앞에서는 제 굽음을 숨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곧음의 기준이 자기 밖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임금에게 그 먹줄은 간언이고요.
"조직의 굽음은 늘 꼭대기에서 자란다. 아무도 먹줄을 대지 않아서."
이 문장 앞에서 잠깐 손을 멈췄습니다. 높이 오른 사람일수록 곧은 소리를 듣기 어렵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굽음을 보고도 먹줄을 대지 못한다고 해요. 대는 순간 미움을 살까 두렵기 때문이라고요. 그러니 좋은 리더는 스스로 먹줄을 부른다는 것, 제 굽은 곳을 말해 달라고 청하는 한마디가 곧 간언을 따르는 일이라는 것. 회의실에서 침묵이 흐를 때 그것을 동의로 읽어 온 시간들이 함께 떠올랐습니다.
가을 부로 넘어가면 결이 한층 서늘해집니다. 문을 여는 장이 죄당짐궁, 허물은 제가 진다는 뜻이에요. 탕왕 재위 중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고, 점괘가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나왔을 때 탕왕은 그렇다면 자신이 제물이 되겠다고 답합니다. 상림으로 나가 머리카락과 손발톱을 자르고 흰 띠풀로 스스로를 묶어 제물의 모양으로 하늘에 고했다는 기록인데,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물러서요. 사실의 기록인지 상징적 서술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먼저 밝히고, 이 장면이 여러 고전에 함께 남은 이유를 진위가 아니라 각인의 강도에서 찾습니다. 고전을 다루는 손길이 조심스러운 자리라 신뢰가 갔습니다.
이 장의 마무리가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붙들린 대목입니다.
"허물이 드러났을 때 책임지는 것은 오히려 쉽다. 남들이 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진다. 정작 어려운 것은 아무도 모르는 허물을 스스로 용서하지 않는 일이다."

책임이라는 말을 그동안 너무 헐하게 써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드러난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어차피 피할 수 없어서 하는 것이고, 저만 아는 실수를 덮지 않는 쪽이 훨씬 값이 비싼 일이라는 겁니다. 정약용을 인용한 대목도 이 결을 따라갑니다. 허물을 제 것으로 삼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의지로 할 수 있는데, 공을 제 것으로 삼지 않는 일은 더 깊은 자기 극복을 요구한다고요. 칭찬받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니까요. 자랑하지 않을 때 비로소 내면이 평안해진다는 문장이 뒤에 붙어 있는데, 이 한 줄은 위로처럼 읽혔습니다.
다만 읽으면서 걸리는 지점도 있었어요. 이 책이 세워 둔 모범은 대체로 최종 결정권자의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조는 재해가 들면 수라상의 반찬 수를 줄일 수 있었고, 유성룡은 벼슬에서 물러나 <징비록>을 쓸 수 있었고요. 그런데 조직의 중간에 낀 자리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허물을 혼자 지겠다고 나선 순간 무엇이 어디서 어긋났는지 규명할 기회가 그대로 닫혀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자책이 구성원의 책임감을 높인다는 저자의 관찰은 옳다고 보는데, 그 효과가 자리의 높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야기까지는 이 책이 나아가지 않는 듯합니다. 물어서 잘된 사례가 세종에서 이순신으로 이어지는 배열도, 묻는 일이 결정을 늦추거나 책임을 흐리게 만드는 국면은 비켜 갑니다. 고전을 오늘로 옮겨 오는 책이라면 한 번쯤 짚어 줄 만한 대목이었다고 생각해요.
가을 부를 닫는 장은 개과불린입니다.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다는 뜻인데, 봄 부에서 만났던 중훼가 여기서 다시 등장해요. 같은 신하가 같은 진언에서 꼽은 덕목이 책의 앞과 뒤를 묶는 셈입니다.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으셨고, 선을 따르기를 물 흐르듯이 하셨다."
고칠 개改가 자기 기己와 칠 복攴이 합쳐진 모양이라는 풀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두드려 바꾸는 일이니 고침에는 폭력의 이미지가 숨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렵다고 해요. 리더가 잘못을 고치기 힘든 이유를 저자는 둘로 나눕니다. 잘못을 인정하면 권위를 잃는다는 착각, 그리고 이미 그 방향으로 많은 자원이 들어갔다는 현실. 쏟아부은 것이 아까워 틀린 길을 계속 간다는 진단은 요즘 조직에서도 그대로 통합니다. 왕안석의 개혁이 그렇게 무너졌다고 짚으면서 저자가 붙인 구분이 날카로웠어요.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했던 것이 아니라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는 데 인색했던 것이라고요.
반대편에 세종의 공법이 놓입니다. 새 세법을 만들면서 자기 안을 밀어붙이지 않고 전국의 관리와 백성 십칠만여 명에게 가부를 물었고, 찬반이 갈리자 전면 시행 대신 일부 지역에서 먼저 시험해 문제가 드러나면 손봤다는 과정이 정리돼 있어요. 오늘날의 시범 사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완성된 법을 내린 게 아니라 고쳐 가는 법을 함께 만든 것이라는 서술, 그리고 개과불린이 한순간의 결단이면서 오래 고쳐 나가는 끈기이기도 하다는 마무리가 좋았습니다.
이 장의 결론은 순서에 있습니다. 검신이 앞에 있어야 개과가 뒤따른다는 것. 자신을 살피지 않는 사람에게는 고칠 잘못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남에게는 완비를 구하지 말고 자신을 단속하기를 미치지 못한 듯이 하라는 이윤의 말이 그 뿌리로 놓여 있어요. 사람은 이 저울을 대개 거꾸로 듭니다. 남의 작은 흠은 크게 보면서 제 큰 허물은 어쩔 수 없었다며 넘기니까요.
완성이 리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침이 리더를 만든다.

책 전체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아마 이 대목일 겁니다. 열여섯 개 장을 지나오며 갖춰야 할 덕목의 목록을 받아 든 독자에게, 저자는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은 없다고 인정해 줘요. 그리고 고쳐라, 물처럼 흘러라라고 답합니다. 이 순서가 이 책의 따뜻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장 끝에는 「나를 향한 질문」이 다섯 개씩 놓여 있습니다. 답을 이미 정해 두고 형식만 갖춘 물음이 아니었는지, 회의에서 먼저 말하는 사람인지 마지막에 말하는 사람인지, 곁에 제 굽은 곳을 말해 줄 사람이 있는지를 되짚게 하는 항목들이에요. 이 장치 때문에 이 책은 하루에 몰아 읽는 쪽보다 한 장씩 끊어 읽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세 장을 이어 읽었을 때는 마무리의 형식이 반복되는 게 눈에 들어왔는데, 하루에 한 장씩 두고 읽으면 그 반복이 오히려 리듬으로 작동하겠더군요.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만나다 보면 읽고 정리하고 넘어가는 흐름에 익숙해지는데, 이번 한 권은 그 흐름을 조금 붙들었어요. 읽는 사람을 평가하는 자리에 세우는 책이라서요. 조직을 이끄는 분들에게 유용할 내용이 분명히 많지만, 직함과 무관하게 제 판단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어디서든 걸리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려운 한문 때문에 동양고전을 멀리 뒀던 분들께도 문턱이 낮은 편이에요. 원문과 독음과 직역이 나란히 배치돼 있어서 한자를 모르고도 막힘없이 읽힙니다.
늦더위가 아직 남아 있지만 아침 공기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무렵이네요. 마침 이 책의 가을 부가 리더의 유산, 수확과 결산을 다룹니다. 한 해의 절반을 넘긴 자리에서 무엇을 거뒀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셈해 보기에 계절이 맞춤합니다. 서늘한 바람이 도는 저녁에 한 장씩 천천히 읽어 나가기 좋은 한 권입니다.
3천 년 전 임금들의 언어로 오늘의 제 자리를 되짚게 하는 책, 완벽함이 아니라 고칠 용기를 리더의 조건으로 놓은 <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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